충청권논산평야 일주

자생투어
20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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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어린 서정, 그리고 전흔 

 

강경 옥녀봉에서 바라본 금강. 오른쪽이 상류인 부여 방면이고 아래로 보이는 하얀 길은 금강자전거길이다  

이 강마을로 갈 때마다 나는 설렌다. 아무런 연고도, 추억도 없건만 이 강변 마을은 내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다. 마치 상상속의 풍경화가 그대로 재현된 것 같고,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은, 그 곳은 강경이다.

논산을 출발해 논산천을 따라 서향하면 저 멀리 강경읍내가 보인다. 해발 43m이니 산이랄 것도 없지만 이 광야에서는 높직한 언덕이 된 옥녀봉이 강경의 상징처럼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논산평야 일주를 계획하면서 좋아하는 강경을 출발지로 삼지 않고 논산으로 잡은 것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며 접근하는 설렘을 맛보기 위해서다.

논산평야는 서쪽은 금강, 동쪽은 대둔산(879m) 그리고 북쪽은 계룡산(845m)이 에워싸고 있다. 논산천변에서 바라본 계룡산 

서정이 감도는 논산천 둑길. 강경 가는 길목이다 

논산평야는 금강과 계룡산~대둔산 사이에 펼쳐진, 지름 20km 정도의 들판이다. 광역 호남평야의 북단에 해당하며 논산은 평야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온통 들판인데 ‘산을 논한다’는 논산(論山)이라니? 풍수지리 비보 개념으로 들판지역에는 산(山)을, 산악지대에는 오히려 평탄할 평(平)을 지명에 넣는 관행 때문일까. 논산, 서산, 군산, 익산이 그렇고 양평, 가평, 평창도 이름과 지형이 반대된다.

지난번에 연무대를 중심으로 평야의 동쪽을 돌았다면, 이번에는 서편을 일주한다. 평야 서북편은 부여군에도 다수 포함되어 코스는 논산과 부여 경계를 오갈 것이다.

논산에서 강경 가는 도중 광야를 장대한 직선으로 가르는 두 줄기 인공물은 논산천안고속도로와 KTX 호남선이다. 산이 많은 이 땅에서는 강줄기도, 길도 직선을 이루기 힘든데 여기 광야를 만나 KTX와 자동차는 조향이 필요 없는 직선을 질주한다. 광대한 공간 속에서 시속 100km 고속도로는 느림보 같고, 시속 300km 고속열차도 느릿느릿 움직인다.

둑 아래로 나 있는 논산천 자전거도로. 억새밭이 일렁이며 두바퀴를 반겨준다논산평야를 관통하는 장대한 직선은 KTX 호남선이다  

강경읍은 마을 전체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적 세트장 같다. 한때 서해안의 어선이 드나들어 포구의 사연과 풍광을 간직한 것도 더욱 그럴 것이다. 금강하구언이 생기면서 배는 드나들지 않으나 여전히 젓갈은 전국 최대의 산지다. 기이한 것은 작은 읍내인데 논산경찰서,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대전지방검찰청 논산지청 같은 논산의 주요 행정기관이 강경읍에 있는 점이다. 이는 강경이 1931년 강경읍으로 승격했고 논산은 1938년에야 읍이 되어 당시로서는 강경이 더 컸기 때문인데, 논산시내에서 8km로 가까워 굳이 이전하지 않는 모양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강경이었지만 지금은 작은 읍으로 남았으니 시간은 정체되고 전통과 유산은 그 자리에서 곰삭아 세월을 보듬고 있다.

옥녀봉 아래에는 얼마 전만 해도 없던 ‘강경산소금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강경 출신 박범신 작가의 <소금>을 모티브로 만든 복합 문화관으로 옥녀봉 기슭에는 소설의 무대가 된 소금집이 복원되어 있다. 정상에는 봉화대가 새로 들어섰고 금강을 내려다보는 느티나무는 몇 살을 더 먹었겠지만 수령은 그대로 230년이다(1997년 지정 기준).

강경의 상징과도 같은 옥녀봉(43m)과 정상의 느티나무 고목. 아래 물길은 금강과 합류하기 직전의 논산천이다  옥녀봉 중턱에 조성된 강경산소금문학관. 고달픈 삶에 찌든 민초의 표정이 리얼하다  

옥녀봉 아래에서 금강은 크게 물돌이를 하는데 북에서 흘러온 물길이 마주치는 곳이라 옥녀봉에는 절벽이 형성되었고 건너편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생겨났다. 부여 낙화암과 흡사한 풍광으로 강과 들이 더 넓어 공간의 스케일은 한층 더 웅혼하고 개방적이다. 북쪽으로 구비치는 물길 저 어디쯤에 부여가 있고, 서쪽 아득히 멀어지는 물길 끝에는 군산 앞바다가 나올 것이다.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고지는 노을이 아름답지만 여기서 묵지 않는 한 난감한 구경이다. 정처는 없건만 갈 길은 먼 나그네는 금강 따라 부여 방면으로 북상한다.

길도 세월 따라 늙는 건지, 어느새 금강 자전거길도 차선과 안내판이 꽤나 퇴색했다. 둔치 산책로는 더욱 낡고 망가져 대대적인 공사 중이다. 그래도 오가는 자전거가 더러 있고, 젊은이 무리는 반갑게 인사까지 건네주니 길에는 생동감이 살아 있다.

금강 자전거길을 벗어나 현내천을 따라 북상한다. 저편으로 가까워지는 낮은 산줄기는 백제시대 부여의 남쪽을 지키는 방어선이었고, 산정에는 석성산성이 있다.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불린 듯하며, ‘석성면’ 지명은 지금도 유효하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된 후에는 부흥군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이제 저 산성을 오를 것이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북동쪽 조망. 멀리 계룡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논산천 저편에 논산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옥녀봉 남쪽 조망. 너른 둔치 저편에 하얀 배 모양의 강경젓갈전시관과 돌산전망대가 있고, 그 일대가 한때 서해 고깃배가 드나들던 강경포구였다. 도도한 금강 위로는 황산대교가 지나고 그 뒤로는 호남평야가 광활하다

강경 출신의 작가 박범신의 <소금>에 등장하는 소금집을 옥녀봉 중턱에 복원해 놓았다. 조망이 탁월하다 

옥녀봉 자락에는 1896년 한국침례교회 최초의 예배지가 있다. 미국인 파울링 선교사 등이 머무른 곳이기도 하다

석성산성은 현내리 탑동마을 안쪽에서 진입한다. 마을 중간의 작은 공원에는 ‘석성산성수호 백제무명용사 충혼비’가 서 있다. 병사는 사라지고 성벽은 허물어졌건만 주민들은 1300년의 원혼을 잊지 않고 있다.

해가 뉘엿한 시간, 홀로 드는 숲길 그것도 오랜 전적지라 마음이 무겁다.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도 무명이었고 산성 역시 지금도 무명이다. 관련 연구자가 아니라면 이곳을 찾을 일이 없을테니 휴일 오후에도 산은 텅 비었다.

이건 정말 잘못되었다. 산성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엄청난 유산을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는가. 건축에 엄청난 공역과 기법이 들어간 유산인데 수풀에 묻힌 그대로 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성벽을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졌어도 성돌이나 성벽의 흔적은 완연하기에 벽을 덮고 있는 수풀이라도 걷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도시 근교인 오산 독산성은 성벽 주변을 완전히 벌채해 성벽과 터를 노출시켜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이 복원을 제외한,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보존방안이다. 일본과 유럽이 성곽 보존에 기울이는 관심과 투자를 조금이라도 참고했으면 좋겠다.

논산평야의 마을과 길은 깨끗하고 잘 단장되어 있다. 빈 집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금강자전거길은 어느새 세월을 묻히고 있다금강자전거길을 이용하는 주민  

금강을 벗어나 석성산성을 향해 들길을 가른다. 왼쪽 멀리 낮은 산줄기 위에 석성산성이 있다  

석성산성은 작은 규모가 아니다. 성이 터 잡은 옥녀봉(184m)은 평야지대여서 돌출 망대로 탁월하고 부여로 이어지는 금강을 감시하는 천혜의 위치다. 2017년 발굴 결과, 3중의 석축성임이 밝혀졌는데, 백제 때 쌓은 외성은 둘레가 1,605m로 중대형급에 든다. 내부면적이 15만8,352㎡(약 4만8천평)이니 수 천의 군사가 주둔 가능했을 것이다. 북쪽 봉우리 주위에 쌓은 2차성은 둘레 751m로 통일신라 초기의 성벽이어서 백제 멸망 후에도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3차 성벽은 607m이며 통일신라 말기에서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만큼 석성산성의 입지가 전략적으로 매우 탁월하고 중요했다는 뜻이다.

석성산성 아래에 서 있는 백제무명용사 충혼탑. 1300년이 지났어도 주민들은 전쟁의 상흔을 잊지 않고 있다안내문의 석성산성 조감도. 파란색 1차 성벽이 둘레 백제 때 쌓은 둘레 1.6km의 외성이고 2, 3차 성벽은 통일신라 이후 추가로 축성되었다.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돌무지로 남았지만 수풀에 묻혀 알아보기 어렵다 

돌무지로 뒹구는 2차 성벽의 일부. 선조들이 피땀 흘려 쌓은 유산을 이렇게 방치할 수 있나. 수풀이라도 걷어내 형태를 드러내고 더 이상 허물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성 내에서는 토기편을 쉽게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시대 백자까지 분포해 산성이 다양한 시대에 걸쳐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성 안쪽에는 곳곳에 묘지가 들어섰고 성벽은 수풀에 덮였지만 자세히 보면 성곽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발굴을 위해 성벽 주변은 벌목을 했으나 다시 수풀이 뒤덮은 상태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찾지 않아서 방치하고 있다면 순서가 틀렸다. 오히려 성벽을 보존하고 전망대와 번듯한 산책로를 조성한다면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석성산성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전국에 분포한 1500곳의 산성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다.

옥녀봉 정상에는 ‘그날의 함성’이란 시비가 서 있고 터가 넓은데 장대 흔적이 발견되었다. 남북으로 흐르는 금강과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부여를 남쪽에서 지키던 가림성은 금강 저편으로 가까이 보인다. 가림성-석성산성-노성산성-황산성은 부여 남부를 지키는 방어선이었음을 바로 실감한다. 황산성 아래가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의 신라군에 대적한 바로 황산벌이다.

석성산성 정상 옥녀봉 장대터에서 바라본 금강과 부여읍내. 오른쪽에는 '그날의 함성'이란 백제 부흥군을 기리는 시비가 서 있다 석성산성에서 바라본 논산평야와 논산시내. 멀리 둔중한 고봉은 대둔산(879m)이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본 석성산성. 송전탑 뒤편 오목한 곳이 성내 영역이고 왼쪽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산성을 내려오니 짧은 가을 해가 훌쩍 기울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날이 어두워지면 마음도 발길도 바빠지기 마련이지만 들판에서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길은 빤하고 주변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우리가 어둠을 꺼려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적이나 맹수가 어디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미지에서 불안과 공포가 폭증하기 때문인데, 숲은 숨을 수 있는 나무나 바위가 많고 도망갈 때는 장애물이 되며, 밤이 되면 불안이 극대화된다. 이제부터는 내내 들길이라 어둠이 와도 마음은 느긋하다.

들판은 곳곳에 구릉지가 있어서 바둑판같지는 않아 하천을 이용하는 것이 길 찾기에 편하다. 하천변에는 대부분 농로나 둑길이 있고 지대도 살짝 높아 주변을 살피기도 좋다.

들판에서는 어둠이 내려도 걱정이 없다. 사방이 탁 트여 다 보이고 시멘트 길은 밝다. 하지만 숲은 무엇이 숨어 있을 줄 몰라 본능적으로 긴장된다. 들길 저편에 작은 숲도 살짝 불안감을 자아낸다 

정각천을 따라가다 용평천 둑길을 타고 북상하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여 송국리선사유적이 낮은 언덕 위에 있다. 송국리유적은 1974년 처음 발견된 이후 25차례 발굴조사를 거쳐 수많은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한반도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인정받는다. 집터는 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양 끝에 기둥을 세운 원형주거지와, 바닥은 좁고 몸통은 불룩하며 입구가 짧게 벌어진 토기는 각각 송국리형 주거지와 토기로 명명될 정도로 상징적이다. 송국리형 주거지와 토기는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었음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송국리유적은 일본의 대표적인 청동기유적인 요시노가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원과 관리가 되지 않아 어정쩡한 상태다. 주거지는 3동만 복원되어 있고 나머지 유적은 터만 표시하고 있는 정도다. 비슷한 시기의 유적인 진주 대평리유적은 규모를 축소했을망정 울타리를 치고 번듯한 박물관을 갖춘 것과도 대조된다. 언덕 한쪽에 ‘바람의 언덕’ 표지판을 세웠는데, 사전지식 없이 찾아오는 사람은 그냥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만 여길 것 같다.

송국리유적의 집터는 움집 3동만 복원되어 있다안내문의 송국리유적 조감도. 중간의 얕은 구릉지 일원에 유적이 분포한다

마을을 에워싼 목책 유적은 바닥 표시만 남았다. 어느 정도 복원해서 원형을 살리면 한결 나을 것 같다

구릉지 끝단에 자리한 산직리지석묘 2기. 왼쪽 1호 고인돌은 덮개돌 반이 내려앉아 경사진 형태를 이루고, 오른쪽 2호 고인돌은 받침돌이 무너져 덮개돌과 함께 모두 바닥에 닿은 상태다. 무덤방이 발견되지 않아 송국리유적 사람들이 제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국리유적은 북쪽 산지에서 들판을 향해 길게 흘러내린 낮은 구릉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도래인이 주축이 되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과 같은 입지다. 구릉을 따라 들판을 향해 끝까지 내려가면 들판 직전의 언덕 위에 산직리지석묘가 있다.

2기의 고인돌 중 동쪽의 1호는 거대한 덮개돌 한쪽이 내려앉아 경사면을 이뤄 아주 특이한 모습이고 서쪽의 2호는 덮개돌과 받침돌이 모두 내려앉아 각기 바닥에 닿은 상태다. 조사결과 무덤방이 확인되지 않아 송국리유적 사람들이 제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 넓은 들판과 석성천을 바라보는 입지여서 농경과 수렵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던 2~3천 년 전, 선사인들이 이곳에 터 잡았다는 것은 식산이 풍부하고 적으로부터 방어도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입견이 없던 고대인의 ‘선택’은 당시로서는 집단지성의 결과이기에 최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농경지만 드넓지만 논산평야는 서울 정도의 거대도시도 수용할 만하다.

이미 해는 졌고 사방은 어둑한데 시멘트 포장된 농로가 하얗게 들판을 밝힌다. 저 멀리 논산시내의 휘황한 불빛이 등대처럼 아롱거린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tip

논산시내와 강경읍내를 벗어나면 식당과 가게가 없어 일정 계획을 잘 짜야 한다. 석성산성은 철탑이 있는 산성 입구에 자전거를 두고 정상까지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 편하다.

 

논산평야일주 5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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