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홍성 최치원 유적 ~ 장곡산성

자생투어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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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이 왜 이곳에?

 

서낭당고개를 넘은 홍성 월계리 서낭댕이골의 아름다운 다랑논


세상의 인물이든 장소든, 사물이든 대부분은 무명과 평범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고 우주도 그러하다. 특별함은 평범 속의 작은 일탈이고 이변일 뿐이며 그 판단 기준은 사람들의 집단의지이지 고립된 개인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그럼에도 늘상 조용하고 조명받지 않는 장소와 인물은 역설적으로 관심과 흥미, 혹은 작은 연민을 부른다.

충남 내륙 홍성~청양 일원은 지리적으로, 지형적으로 참 무던하다. 산은 높지 않고 들이 넓지도 않으며 대단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주무대에 등장한 적이 없으며, 다만 백제 사비성이 함락된 후 예산 봉수산 ~ 홍성 오서산 라인이 부흥군의 활동 거점이 되어 산성이 다수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 낮은 산간지대에 뜻밖에도 신라말의 풍운아이자 문장가 최치원(857~?)의 유적이 있다.

너무 평범해서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비산비야를 돌며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의 흔적과 백제 부흥군의 피눈물이 어린 산성들을 찾아본다.

광시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북상하면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임존성이 터잡은 봉수산이 마주선다. 왼쪽 정상부 일대에 성벽이 살짝 보인다. 둘레 4km의 거성이다   

예산군의 남단은 한우테마촌으로 유명한 광시면이다. 작은 면소재지 거리가 온통 한우 마트와 식당으로 가득한 특이한 곳이다. 전국에 이런 곳이 여럿 있지만 마을이 가장 작고 집중화된 곳이 광시일 것이다.

마을 외곽의 광시한우테마공원을 기점으로 잡는다. 예산 땅에서 출발하지만 이번 여정에서 예산의 비중은 10% 정도에 그친다. 디테일이 좀 부족한 한우 조형물에서 광시저수지 뒤로 작은 고개를 넘어 은사리로 간다. 저편으로 백제부흥군의 거점이던 임존성이 자리한 봉수산(484m)이 둔중하다. 500m가 되지 않는 높이지만 주변이 저지대여서 압도적인 키로 솟아 있다. 산정부에 자리한 임존성은 둘레가 4km나 되는 거성으로, 백제가 전략적으로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난공불락의 산성 덕분에 백제 부흥군은 3년을 버틸 수 있었다.

봉수산과 이웃해 있고 자못 헌칠한 초롱산(340m) 북쪽으로 음미고개를 넘는다. 140m의 낮은 고개지만 꽤나 깊은 산골 분위기다. 고개 너머는 홍성 땅이다.

음미고개(140m) 넘는 길. 길가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산중에는 인기척이 없다  

음미고개에서 뒤돌아본 산야. 멀리는 청양군 일원이다  

조붓한 길, 한가로운 들판은 더없이 정겹고, 농익은 벼는 풍요를 예고한다(금당리)

처음 가는 길이다. 특별한 경관도, 명소도 없는 이 땅의 뒤안길은 대개 이렇다. 골짜기 끝까지 경작지가 들어서 있고 야트막한 산자락마다 마을이 기대 있다. ‘농자천하지대본’ 시대가 끝난 지금 이런 농촌에는 생기가 없다. 들에는 뛰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고, 빈 집은 지천이며 간혹 허리 굽은 노인, 그것도 대부분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다닐 뿐이다. 그래도 웬만한 마을까지는 반듯한 아스팔트 도로가 나고 좁은 농로까지 시멘트로 포장되어 길은 사통팔달이다. 고개를 내려간 금당리에 초등학교가 생존(?)한 것은 일대에 귀농한 젊은층이 꽤 있다는 뜻이겠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거창한 29번 국도 아래를 통과해 학계마을을 지난다. 전통이 깊은 듯, 마을 유래 설명과 안내도, 주민 성명을 적은 안내판이 커다랗다. 세대주 이름과 주소까지 이렇게 안내판에 밝힌 것은 전국을 돌면서 처음이다. 개인정보를 이렇게 노출하고 세대주가 바뀌어 새 이름으로 바꾼 흔적에서 이 마을만의 남다른 자부심을 엿본다. 마을이라고 해도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강원 내륙처럼 각자 흩어진 산촌(散村)이라 더욱 각별하다.

마을입구마다 있는 쉼터. 주변에는 마을회관과 기념비가 있기 마련이다.  효학리 효동마을나지막한 호왕고개를 넘으면 서해안 최고봉 오서산(791m)이 웅자를 드러낸다. 구름을 이고 있어 대단한 고산의 풍모다

샛노란 가을 빛깔이 문당리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다. 결실 직전, 노랗게 익은 벼는 이 땅의 들을 가장 풍요롭고 아름답게 장식한다. 삽교천 지척까지 내려간 길은 다시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서낭당고개(150m)를 오른다. 서낭당고개는 봉수산~오서산 간 산줄기를 넘으며, 금북정맥의 갈래여서 등산객들이 지나간 리본이 다수 달려 있다.

고개를 넘으면 남쪽 천주교회묘지 방면으로 다랑논이 참으로 아름답다. 격리감이나 위압감이 전혀 없는 아늑한 골짜기를 계속 내려가면 이윽고 작은 개울이 나오고, 개울가 언덕 위에 ‘최치원선생유적지’가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지면에서 푹 꺼진 개울인데 ‘장곡월계(長谷月溪)’와 ‘용연(龍淵)’이라는 과장된 이름이 붙었다. 개울가 석벽에 최치원이 새겼다는 글귀가 다수 분포한다. 예전에는 개울 중간에 징검다리가 있어 각석을 볼 수 있었지만 홍수에 훼손된 이후 손을 보지 않아 징검다리는 대부분 망실되었고 각석은 잡초가 뒤덮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적지 안내도를 보면 최치원의 은거지와 강당지는 물론 추정 묘까지 표시되어 있다. 최치원이 이곳에 은거하다 죽었다는 것인데, 과연 사실일까.

문당리 가실골의 정겨운 다랑논과 외길서낭당고개(150m)는 봉수산~오서산 간 산줄기를 넘으며, 금북정맥의 갈래여서 등산객들이 지나간 리본이 다수 달려 있다

야산 중간에서 만난 최치원 유적지. 장곡면 월계리에 있다  

홍성군은 이 일대를 최치원유적지대로 크게 가꿀 계획을 세우고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2015년 발굴조사를 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유적지 인근 절골에 전하는 최치원 묘는 조선후기에 조성되었고, 그 아래의 극락사지도 조선중기 이상으로 소급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최치원은 정읍과 서산 지방의 태수를 지낸 적이 있어 전북과 충남 일대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다수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17년 간 유학하며 중국 각지를 유람했고 귀국해서도 명승지를 찾아다닌 그가 이처럼 평범하고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말년을 보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공식적으로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908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과거에서 장원급제할 정도로 수재였던 그는 불우한 시대를 타고 나 결국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유학한 당나라도 이미 쇠락해 황소의 난을 비롯해 난이 끊이지 않는 대혼란시대였다. 황소(黃巢)의 난 때 토벌군에 종사한 최치원은 ‘토황소격문(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당에서도 문명을 떨쳤지만 끝내 당에 정착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고국 신라 역시 말기증세를 겪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호족이 발호하고 산적이 들끓어 당나라로 가는 사신 여행조차 어려웠다. 최치원은 지방사정을 살피기 위해 외지의 지방관을 자청했고, 정치개혁을 위한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그를 견제한 중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 이미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망국의 현실이었다.

최치원 유적지 안내도. 가운데 개울을 따라 각석이 분포하고, 왼쪽 위에는 추정 최치원묘까지 있다

'취석(醉石)' 글씨가 새겨진 바위. 최치원의 호 '고운' 글씨가 확인되지만 호를 자칭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징검다리는 끊어지고 수풀에 묻혀 음습한 느낌의 협곡. 오른쪽 석벽에 글씨가 다수 새겨져 있다 ‘쌍계(雙溪)’ 글씨가 새겨진 바위. 개울이 두 갈래여서 붙인 이름 같다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장곡월계' 상류 부분. 평지에 깊이 파인 개울인데 딱히 특별한 경관은 아니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을 떠나면서 했다는 "남들이 100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하겠다"는 각오(인백기천)가 제단에 새겨져 있다 

최치원은 아마도, 이곳 장곡월계를 지나친 적은 있을 것이다. 당시는 참으로 맑고 소박한 풍경이었을테니 잠시 머물며 음풍농월을 즐겼을 것이다. 그것이 전설화되어 말년의 은거지가 되고 무덤까지 있다는 설로 비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이런 평범한 산야에서 최치원을 만난 것은 뜻밖이다. 부산 해운대는 그의 다른 호인 ‘海雲’에서 따온 지명으로 동백섬에서 해운 각석이 발견된 것이 지명의 유래다. 여기 장곡월계에도 ‘쌍계(雙溪)’ ‘취석(醉石)’ 등 그가 직접 새긴 것인지, 그를 흠모한 후대의 작품인지 각석이 많다.

공원입구 제단에는 당나라로 떠날 때 최치원이 각오를 다지며 남긴 ‘인백기천(人百己千, 남들이 100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하겠다)’이 새겨져 있다. 타고난 수재이면서 이토록 노력했으니 세상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당나라에서도 장원급제를 해냈을 것이다.

다시 좁은 들판과 골짜기를 몇 곳 지나 남하하면 장곡산성 아래 대현마을이다. 마을 뒤 256m 산 정상부에 산성이 있으며 마을에서 오르는 길은 경사도가 30%에 육박하는 아찔한 업힐이다. 산 이름이 따로 없어 ‘장곡산’으로 부르기로 한다. 길은 곧장 산성의 서문을 넘어 성내로 들어선다. 성벽 위는 벌초를 해놓았으나 성벽은 그대로 방치해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장곡산성은 둘레 1,352m로 상당한 크기이며, 10여개의 건물 터와 무덤 등이 발견되었다. 주변에는 학성산성, 태봉산성, 소구니산성과 함께 열을 짓고 있어 부여 북쪽의 외곽 방어선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름 없고 마을도 없는 다랑논 들판이 계속 등장한다. 산야의 멋진 조합과 따사로운 노랑빛에 마음이 안온해진다장곡산성 서문(앞쪽의 단절선)을 통해 성내로 들어왔다. 성벽 위를 벌초해 형태를 대략 알아볼 수 있다

왼쪽이 석축 성벽인데 수풀에 가렸다. 성벽 위는 잠시 라이딩이 가능하다

성내에서 발견된 길이 30m 건물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풍왕의 거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른쪽 제단은 전사한 부흥운동군을 기리는 '백제부흥운동순의열사제공지위' 제단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 일대는 성벽이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홍주목(홍성)은 본래 백제 주류성”이라고 적고 있어서 이곳이 백제 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주류성(周留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군이 머물기에는 작은 규모여서 현재 주류성으로 비정되는 부안 우금산성(둘레 4km)이 더 유력해 보인다. 서천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주류성 전설이 곳곳에 전하는 데서 ‘주류’가 임금이 머물렀다는 ‘주류(主留)’의 뜻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비성 함락 후 왜국에서 귀국한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 부여 풍(夫餘 豊)이 왕위를 잇고 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이 성 저 성을 옮겨 다닌 데서 유래한 지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성내에서 발견된 길이 30m의 거대한 건물지도 풍왕의 임시거처로 추정된다.

수풀 때문에 조망도 막히고 성곽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서쪽 성벽 위를 잠시 거닐다 수구(水口)를 겸한 동문을 돌아보고 발길을 돌렸다. 동문 일대는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석축이 망가지고 주변이 방치되어 있다.

장곡산을 남쪽으로 우회해 산허리 임도를 타고 북상하면 학성산성 입구의 사운고택(士雲古宅)이 가깝다. 양주조씨의 고택으로 19세기말 조중세(趙重世, 1847~1898)가 지어 그의 자(字)를 따서 사운고택이라 한다. 조중세가 문경현감을 지낼 때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본가의 양식을 실어와 나눠주었고, 1894년 홍주의병 봉기 때도 군량미를 보내 덕을 베풀었다. 아주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적당한 고졸미와 품격이 어우러진 고택에는 조중세의 인품처럼 건물에도 기품이 감돈다.

장곡산 허리를 돌아나가는 임도. 학성산성 가는 길이기도 하다학성산성 초입에 자리한, 기품 어린 사운고택  

학성산성 북문터

수풀과 잡목에 묻혀 허물어져 가는 학성산성 성벽

학성산성을 내려와 광시로 돌아가는 무한천 둑길

광시한우테마공원
장곡산성과 골짜기 하나를 두고 1.2km 떨어진 학성산성은 학성산(214m) 정상부에 포곡식으로 축성되었다. 둘레는 1.3km이고 입지와 규모 모두 장곡산성과 빼닮았다. 북쪽에서 진입로가 있으며 북문은 수구 옆이어서 계류가 모여들어 땅이 젖어 있다. 산성이 제역할을 하려면 식수 확보가 최우선이어서 이처럼 정상부와 골짜기를 함께 에워싸는 포곡식 축성을 주로 택한다. 그래야 골짜기 물을 모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성산성은 성벽을 일주할 수 있는 소로가 뚫려 있을 뿐 성곽과 내부는 온통 수풀로 뒤덮여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충남도는 이런 성곽을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 ‘백제부흥군길’을 조성했으나 정작 중요한 성곽의 보존에는 무심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학성산성 북쪽은 대규모 밤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주능선을 넘어 동쪽으로 하산하면 예당호로 흘러드는 무한천이 나온다. 천변 둑길을 따라 북상하면 청양 록평리 들판을 거쳐 광시한우촌으로 이어진다.

넓은 들과 한우까지 있어 광시마을에는 풍요가 감돌고 길과 집 모두 넉넉하다. 대규모 주차장이 몇 군데나 있고 무한천 둔치에는 산뜻한 산책로가 나 있어 도회풍마저 감돈다.

 

tip

광시한우촌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으나 코스 중에는 아예 없으므로 유의한다. 최치원유적지의 장곡월계는 갈수기에는 개울로 내려가 몇 개의 석각을 볼 수 있다. 장곡산성과 학성산성은 낙옆이 진 후에 길이 잘 보이고 조망도 트일 때 도보로 일주해 보길 권한다.

 

홍성 최치원유적 ~ 장곡산성 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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