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보은 삼년산성~말티재

자생투어
2023-10-21
조회수 237

삼년산성 들렀다 말티재 넘어 150리길

 

삼년산성의 정문격인 서문 입구에서. 뒤쪽 성벽은 높이 15~20m, 폭 8~10m에 달하는 국내최고 최대의 거벽이다 


660년 음력 9월, 보은 삼년산성에서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그해 7월 당나라는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정복하고 백제 땅에는 직접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를 설치, 노장인 왕문도(王文度)를 초대 도독으로 보냈다. 왕문도는 당 고종의 칙서와 하사품을 가지고 삼년산성에서 동맹국인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을 만나던 도중 갑자기 급사하고 만다. 기록에는 급사, 혹은 병사로 되어 있고 당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으나 칙서를 전달하던 도중에 쓰러져 죽었다니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은 백제를 멸한 후 백제 땅을 신라에게 준다고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것이 왕문도 급사와 관련 있지 않을까. 김춘추는 전국력을 기울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는 처지가 되어 분노하고 있었는데 왕문도가 당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삼년산성으로 온 것이다. 필자는 졸저 <산성삼국기>에서 이 장면을 병약한 왕문도가 삼년산성의 웅자와 신라 정예군이 내뿜는 살기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묘사했다.

서문 안쪽 바위에는 통일신라시대 명필인 김생의 글씨로 전하는 蛾眉池(아미지) 각석이 보인다. 성내 수자원인 저수지를 아미지로 미칭한 것 같다

안쪽에서 본 아미지(앞쪽 억새가 핀 저수지)와 성벽. 성 안쪽은 내탁공법으로 성벽 접근이 쉽도록 높이를 3m 내외로 낮췄다. 성벽의 밝은 색 부분은 그래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 근처의 성벽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성 안쪽인데도 높이가 6~7m나 된다

북문 아래에 있는 보은사

지금 다시 삼년산성에 와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당군을 이끌던 소정방이 667년 상주 당교(唐橋)에서 김유신에게 독살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현지 주민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 사서에도 소정방의 최후가 애매하게 기록되어 이를 뒷받침한다. 소정방과 마찬가지로 왕문도 역시 독살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 땅의 직접통치를 위해 파견된 왕문도에 대한 적개심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문도는 당나라에 있을 때부터 소정방과 사이가 나빠, 소정방 역시 왕문도의 죽음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삼년산성은 고구려가 지배하던 한강하류 유역을 쟁취할 때도 거점이 되었고, 백제와 신라가 한강하류를 두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 554년 관산성 전투 때도 신라의 전진기지였다. 관산성 전투 때 신라는 백제 성왕까지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둔 자신감의 관성을 업고 삼국통일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앞서 보은은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해나갈 때 영역을 다투는 요지였다가 5세기 중엽 신라의 땅이 되었다.동문 옆의 원래 성벽. 왼쪽 아래 나무가 높이 10m 정도이며, 석축 아래 삭토구간을 포함하면 총높이가 30m에 육박한다

보은읍내에서는 삼년산성이 바로 올려다 보인다. 기점으로 잡은 보은공설운동장을 출발해 동쪽으로 작은 들판을 지나면 바로 삼년산성 아래다. 성내 북문 아래에 자리한 보은사까지 길이 나 있어 자전거로 진입할 수 있다. 산성은 남쪽 320m봉을 중심으로 능선과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식으로 보은읍내가 해발 150m나 되어 평지와의 고도차는 100m 전후밖에 되지 않는다.

서문에 들어서는 순간, 성벽의 위용에 압도된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성곽을 본 사람들은 우리의 성벽이 너무 낮고 허술하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잔존 성벽 높이가 4~5m 밖에 되지 않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삼국시대에 발전한 산성은 절벽을 이룬 능선이나 급사면을 최대한 활용해 최소한의 축성으로 방어력을 높이는 방식을 썼다. 실제 석축성벽은 4~5m라고 해도 그 아래쪽 지형을 성벽처럼 급사면으로 삭토해 높이 10~20m의 성벽 효과를 낸 것이다.

동문에서 바라본 말티재(뒤쪽 산줄기에서 가장 오목한 부분) 

삼년산성도 이런 방식을 따르지만 석축성벽 자체의 규모가 다르다. 남아있는 성벽만도 10m 이상 최대 22m에 달하며, 아래쪽 삭토벽을 포함하면 30m 전후의 거대한 벽을 이룬다. 성벽의 폭도 8~10m나 되어 대포가 없던 고대라면 성벽을 허물거나 넘을 방법이 없다. 우리 땅에도 이런 성곽이 있었던가 경악하면서 삼국 중 최약체였던 신라의 저력과 야망을 괄목상대한다. 둘레는 1,680m이고 동서남북 4개소의 문이 있었으며 다수의 건물터와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백제와의 전쟁 당시 김춘추가 백화산 금돌산성을 거쳐 전선에 가까운 이곳에 머물렀던 것도 삼년산성의 방어력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 남은 산성 1500군데 중에 가장 웅장한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년)에 완공되었으며, 축성에 3년이 걸렸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아미지 뒤쪽으로 보이는 구릉지 형태의 성 내부. 아미지 외에 저수지가 더 있고 많은 건물터도 확인되어 대군이 주둔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 동문에서는 속리산 방면으로 말티재가 정면으로 마주 보인다. 말티재는 상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고 말티재와의 사이를 흐르는 복달천 유역은 상주와 영동 방면 루트여서 이를 감제하기 좋은 위치다. 서쪽 보청천 일원은 옥천을 거쳐 대전~논산~부여로 이어지는 길목이니 삼년산성은 기막힌 전략적 요지다. 보은읍 주위에 펼쳐진 평야지대는 보급기지로 충분하고 평야 외곽은 산악으로 둘러싸여 방어도 유리하다. 한반도 남부만 보자면 정확히 중심부로,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그 중심 거점이 된 보은과 삼년산성의 역사적 역할이 지대하다 할 수 있다.

삼년산성을 여러 번 찾았지만 올 때마다 거대한 성벽에 감탄한다.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곽 같은 원형의 치성(雉城, 성벽 바깥으로 돌출해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는 시설)과 1500년 풍파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두텁고 높은 석축은 경이롭다. 일부 허물어진 성벽 아래로는 성돌이 마치 자연너덜처럼 광대하게 흩어져 옛날의 위용을 말해준다. 특히 동벽 일부는 삭토 급사면과 성벽을 포함해 30m를 넘는 아찔한 높이 구간도 있다. 지금도 이 정도 위용인데 당시에는 공격의 엄두도 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을 것이다.

성내에서 바라본 보은읍. 바로 지척의 거리이며 보은읍 일원의 평야는 대군을 뒷받침하는 보급기지로 충분했을 것이다

삼년산성을 돌아 나와 말티재(430m)를 오른다. 12구비 험난한 말티재는 속리산의 ‘속리(俗離)’ 감을 극대화시키는 관문이다. 지금은 37번 국도가 속리터널로 우회해 법주사로 곧장 이어져 말티재 고갯길은 작정한 관광객 외에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한산하다.

세조가 말을 갈아타서 말티재라고 한다는 유래비가 있으나 전국의 험난한 고개에는 더러 말(馬)이 지명에 들어간다. 말조차 힘겹게 올라간다거나 너무 험해 넘어진다는 뜻이 많다. 말티의 ‘티’는 고개 치(峙)의 와전일 것이다.

고갯마루에는 ‘백두대간속리산관문 자비성(慈悲城)’ 이름이 걸린, 생태통로를 겸한 관문이 들어섰다. 관문 서편 전망대에 오르면 말티재 12구비가 한눈에 들어오고 삼년산성도 마주 보인다. 말티재 일원은 짚라인과 모노레일, 식물원 등을 갖춘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법주사 갈림길인 505번 지방도에서 우회전, 삼가저수지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말티재를 넘어 별로 내려오지 않은 곳에 자리한 갈목리 일대는 해발 350m 정도의 고원이다. 갈목재 옛길 옆으로는 갈목터널이 뚫렸고 옛길은 철문으로 막혔다. 터널은 길이 690m로 길지 않고 내부가 밝은데다 갓길이 있어 통과하는데 큰 불편이 없다.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목의 말티재(430m). 생태통로를 겸한 관문이 들어섰다말티재를 오르는 12구비길. 맨뒤의 산줄기 위에 삼년산성이 보인다

말티재를 넘으면 나오는 갈목리. 해발 350m 정도의 고원지대다 

갈목터널을 지나 다운힐하면 조용한 산중호수인 삼가저수지가 싱그럽다. 호수 주변의 산세가 빼어나 심산호반의 정취가 물씬하다. 호수 북쪽에 난 삼가1교에서는 북쪽 계곡 저편으로 속리산 최고봉 천황봉(1057m)이 웅장하다. 30여 년 전 겨울, 상주 정각동에서 눈길을 헤치고 힘겹게 천황봉을 올랐던 기억이 아련하다.

만수계곡 삼거리에는 ‘충북알프스’ 안내판이 보인다. 보은군은 1999년 속리산에서 구병산에 이르는 44km의 산줄기를 충북알프스라고 명명해 홍보하고 있는데, 속리산은 국립공원으로 이미 명망이 높아 일반적으로는 구병산(876m)을 충북알프스로 안다. 익히 알려져 온 ‘한국알프스(북한 관모봉 일원)’ ‘영남알프스(울주 가지산 일원)’에 착안한 별명이다. 구병산(九屛山)은 이름처럼 아홉의 병풍을 펼친 듯 암릉과 암벽이 발달한 산이지만 북사면은 평범한 육산으로 보인다.

심산유곡 분위기가 감도는 삼가저수지

삼가저수지 북쪽 삼가1교에서 바라본 속리산 최고봉 천황봉(1057m)

충북알프스는 속리산~구병산 줄기를 칭하지만 지금은 구병산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용된다

구병산(九屛山)은 이름처럼 아홉의 병풍을 펼친 듯 암릉과 암벽이 발달한 산이지만 북사면은 평범한 육산으로 보인다. 삼가2리에서 본 모습고개나 물줄기도 없는데 뜬금없이 경북 상주시 경계선이 나온다. 이후 임곡리까지는 상주 땅이다   

동관리 장고개(380m)는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능선이라 등산객이 붙여 놓은 리본들이 나부낀다. 구병산은 백두대간에서 살짝 비껴나 있고, 장고개 동쪽의 비조령~봉황산(741m) 줄기가 백두대간이다.

장고개에서 시작된 내리막은 구병산과 봉황산 사이 협곡을 따라 당진영덕고속도로가 지나는 화남면소재지까지 이어진다.

구병산 자락을 잠시 따라가다 남쪽 임곡리 방면으로 업힐을 시작한다. 폐쇄된 채석장에는 높이 100m의 절벽이 흉물로 남았다. 같은 암벽이라도 인공과 자연의 차이는 이렇게 크지만 아마도 수십년이 흐르면 이 역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천탁산(684m) 북쪽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갑자기 평탄한 지대가 나타나는데, 바로 임곡리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 해발 300m 일원에 펼쳐진 천혜의 고원지대로 마을과 경작지 규모가 상당하다. 특별하고 아름다운 산간마을이지만 종교단체와 주민들이 갈등을 빚는 듯 목청을 높인 현수막들이 어지럽다. 임곡리는 마을 가운데서 보은과 상주 경계가 나뉜다. 지역은 바뀌지만 지명은 상주 화남면 임곡리, 보은 마로면 임곡리로 같다. 하나의 마을이라 이름을 같이 쓰는 듯한데 아주 특이한 사례다. 

임곡리에서 산 아래 적암천까지 내려가는 길은 협곡을 따라가 임곡리의 단절감을 더해준다. 적암천 둑길을 따라 가다 마로면소재지에서 삼가천에 합류해 보은읍 방면으로 북상한다. 들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지만 산에는 단풍이 들지 않고 낮 기온이 높아 가을 분위기가 깊지는 않다.

속리산과 구병산 줄기를 넘는 장고개(380m). 등산객이 붙여놓은 리본이 많다. 왼쪽 뒤로 구병산이 살짝 보인다 

마을 중간에 보은-상주 경계선이 지나는 임곡리. 해발 300m 정도의 고원으로 뒤쪽으로 구병산의 기암괴석이 선명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보은 송현리 들판

삼가천 따라 보은읍 가는 길목에 있는 임한리 솔밭. 들판 가운데 형성된 솔밭이라 각별하고 운치 있다

삼가천 상류에는 기이한 하중도(河中島)를 중심으로 오래된 고택이 여럿 있다. 특히 우당고택(愚堂古宅)은 약 4200평 부지에 터 잡고 있어 규모가 압권이다. 왕궁이나 사찰을 제외하고 이렇게 넓은 고택은 처음 본다. 장대한 담장이 둘러싼 부지는 한 변이 120m에 달하는 사각형으로 남쪽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운동장 같은 공터가 펼쳐져 눈을 의심케 한다.

담장은 하나의 고택이 아니라 작은 마을을 에워싼 것만 같다. 1919~21년에 보성 선씨 신정훈이 당대의 대목들을 모아 지었다. 조선조 양반가의 기본 구조인 안채와 사랑채, 사당 공간으로 구성되며 각각 담장을 두르고 있어 별개의 집처럼 느껴진다. 특히 사랑채는 ㄷ자 형태로 총연장이 80m에 달하는 긴 행랑채를 둬 규모감을 극대화한다. 담장 외부의 숲은 고풍의 그윽한 정취를 더해준다.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기에 이런 한옥을 짓다니 놀라운 자부심이다.

우당고택을 끝으로 보은읍을 향해 가는 길목인 평각리 쇠골재에서 멀리 서산으로 해가 꼴깍 넘어간다. 읍내가 저 아래로 보이니 해가 져도 마음이 급하지 않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광대한 공터가 나오고 사랑채가 저만치 물러나 있다. 안채와 사당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다 

안채를 둘러싼 장대한 돌담. 고택 전체의 담장이 아니라 안채만을 두르고 있는 담이다

보은읍내를 지척에 둔 평각리 쇠골재에서 멀리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해가 걸린 곳은 노성산(572m) 자락  

tip

보은공설운동장에 무료 주차장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다. 읍내가 가까워 식당과 편의점도 멀지 않다. 코스 도중에는 마로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다. 삼년산성은 충분한 시간을 내서 도보로 성곽을 일주해보길 권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보은 삼년산성~말티재 56km  


0 0


서울 강서구 마곡중앙6로 21, 508호

고객센터 : 010-7667-6726(문자전용)

EMAIL : bicycle_life@naver.com

업무시간 : 10:00 ~ 16:00| 점심시간 : 12:30 ~ 13:30 

(토/일/공휴일 휴무)

사업자등록번호 : 851-41-00134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2017-서울강서-0690호

대표자 : 김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