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백제 최후의 왕도, 부여 일주

자생투어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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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은 소읍으로 줄었어도, 차고 넘치는 전설

부여에 가면 낡고 지친 듯 퇴락한 풍경에 마음이 아프다. 시도 아니고 읍으로 남은 부여의 읍내 인구는 1만9천. 부여군 전체를 통틀어도 6만이고 10만의 공주, 25만의 경주, 무려 53만의 김해(금관가야 수도)에 비해 너무나 적다. 도시가 작으니 그렇지 않아도 많지 않은 유적은 내외에 흩어져 있고 명소 아니면 관리도 허술하다. 아무리 패배한 역사라지만 사비성이 함락된 지 1460년이 지났는데(서기 660년) 여전히 기를 펴지 못하고 조락해 있는 분위기는 ‘황성옛터’의 애상을 더해준다 

부여 동쪽 외곽 방어성이던 나성. 능산리 일대에 1.5km 정도 복원되어 당시의 위용을 말해준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한때 중국 본토와 일본 열도까지 진출했던 대제국 백제… 하지만 지금 남은 유산과 유적이 빈약해 당시의 영화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빈 공간이 많은 만큼 상상력과 여운이 깃들 여지는 더 크다. 그래서 부여에 가면 심신이 한층 자유로워진다.

왕성과 호위산성이 있던 부소산 아래 구드래나루터 조각공원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지금은 유람선만이 오가는 작은 선착장이지만 백제 때는 무역선이 오가는 국제항이었을 것이다. ‘구드래’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큰 나라’를 뜻했다는 설에 공감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구드래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지금도 많이 쓰이는 일본어 표현 ‘구다라나이’(구다라가 아님)는 ‘형편없다. 볼품없다’의 의미다. 구다라, 즉 백제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뜻이니 고대부터 지금까지 백제를 선진 문물을 전해주는 큰 나라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대 일본의 관계는 동맹국 이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수없이 많다.

구드래나루터 옆에 조성된 구드래조각공원. 숲과 조각품이 어우러진 격조 있는 공간이다 

사비성 시대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유적. 정면으로 백마강 건너 부산이 오똑 넘겨다 보인다  

옛 부여박물관 건물은 문화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긴 숲으로 이뤄진 백마강변의 얕은 구릉지는 곳곳에 조각품이 배치되어 자연스런 야외 예술공간이 되었다. 시내 방면으로 조금만 나가면 부소산 완만한 기슭에 펼쳐진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일대를 관북리유적이라고 하며 입지와 규모, 내용으로 보아 왕궁터로 추정된다. 방어태세의 임시수도였던 공주 공산성에서는 소규모의 왕궁을 산성 안에 뒀다면, 여기서는 산성 바로 아래에 왕궁을 두고 평지에 펼쳐진 일반 백성 주거지와 소통을 쉽게 한 것 같다. 그만큼 국방과 왕권이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관북리유적 바로 남쪽, 부여읍내에서 가장 중요한 로터리에는 부여로 천도해 백제 부흥기를 연 성왕(재위 523~554)의 동상이 서 있다. 성왕은 윗대인 동성왕~무령왕 대에 이루지 못한 사비성 천도를 끝내 단행하고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다. 성왕 동상 뒤편에 있는 구아리유적은 왕실 사찰인 천왕사(天王寺) 터로 추정되며 흙에 덮인 우물터만 남아 있다.

부여 중심가 로터리에는 백제 천도를 단행한 성왕 동상이 있다. 남쪽 맞은편 로터리에는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다  

성왕 동상 뒤편에 있는 구아리유적. 천왕사지로 추정되며 우물터에 펜스가 둘러져 있다. 뒤쪽 산줄기는 부소산 

부여읍내의 대표적인 백제 유적인 정림사지 북쪽 담장을 끼고 가다 급한 언덕바지를 오르면 의열사(義烈祠)가 나온다. 백제의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 충신 이존오를 기리기 위해 1575년 부여현감 홍가신이 세웠다. 뒤에 선조 때의 지사 정택뢰, 인조 때의 문신 황일호까지 6위를 모시고 있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듯 진입로는 허술하고 사당의 문도 굳게 닫혀 있지만 부여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조망은 좋다.

넓은 터에 5층 석탑만 남은 정림사지는 백제의, 부여의 슬픔과 공허를 상징한다. 더군다나 비석 몸돌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내용을 담은 공적비인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비문)이 새겨져 있으니 굴욕의 기념비이기도 하다.

찾는 이 없는 의열사. 백제의 삼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 충신 이존오를 기리기 위해 1575년 부여현감 홍가신이 세웠다. 뒤에 선조 때의 지사 정택뢰, 인조 때의 문신 황일호까지 6위를 모시고 있다

5층 석탑만 덩그러니 남은 정림사지 

정림사지 앞길을 따라 남하하면 얼기설기 무질서하지만 단아하고 품위 있게 가꿔진 연밭지대가 나온다. 무왕의 설화를 딴 서동공원이다. 공원 가운데는 둥근 연못인 궁남지가 있다. 무왕이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지금은 지름 150m 정도지만 원래는 3배 더 컸다고 한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는 근래에 세워진 포룡정(抱龍亭)이 있는데, 서동의 어머니가 용을 안고 그를 낳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규칙 없이 흐트러진 흙길은 차분한 산책로로 좋다.

궁남지 동쪽에 나지막한 화지산(48m) 중턱은 한창 발굴중이다. 이궁(離宮)이던 망해정(望海亭) 터로 추정되며 궁남지를 포함해 일대 전체가 왕실과 귀족의 유흥 공간이었을 것이다. 발굴현장 위에는 주변을 조감할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해 놓아 궁남지까지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사비성은 부소산성을 낀 관북리에 왕궁을 두고, 남쪽 화지산에는 여유로운 휴식 공간의 2원체제를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화지산에서 누렸던 여유와 유흥은 바로 옆에 세워진 ‘백제오천결사대충혼탑’으로 산산이 깨지는 느낌이다. 최후를 절감하고 가족까지 죽인 후 출전한 계백 이하 결사대의 심사는 얼마나 처절했을까.

자연스런 연밭과 산책로로 꾸며진 서동공원

백제시대 인공연못 공원 궁남지. 가운데 인공섬의 포룡정을 잇는 교량은 공사중이다   

화지산유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발굴지와 궁남지. 화지산유적은 백제 때의 이궁인 망해정 터로 추정된다

화지산 남쪽에 있는 ‘백제오천결사대충혼탑’. 죽음을 예감한 처절한 출전상과 유흥공간인 화지산은 좀 부조화다 

왕포천과 염창천 둑길을 따라 남하하면 왕포리 들판의 광대한 비닐하우스 지대를 지난다. 멜론, 수박, 포도 등 고부가가치 작물을 재배해서인지 주변 마을에는 풍요가 어려 있다. 남안의 둑길은 아스팔트 포장에 자전거도로로 지정해놓아 라이딩이 안락하다.

둑길이 끝나는 곳에서 산줄기가 금강과 만나는데 바로 이곳이 사비성 외곽을 방어하던 나성(羅城)의 남단이다. 북쪽으로는 청산성을 거쳐 부소산성까지 이어지는 길이 6.6km의 방어성이다. 능산리 백제왕릉원 근처에는 일부 구간을 복원해 놓았지만 나머지는 방치된 상태다. 이곳 남단은 금강에 접해 특히 중요한 부분으로 성벽이 완연하게 남아 있지만 수목에 뒤덮여 알아보기도 어렵다. 성벽은 축성에 엄청난 공역과 비용이 들어가고, 전투가 치러진 중요한 역사 유적인데 대부분 이렇게 방치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복원하지 않더라도 수풀만 제거하면 원형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고 보존도 쉬울 것이다. 서울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보듯 백제는 토성을 대단히 높고 견고하게 축성해서 이곳에 남은 성벽도 1500년 세월을 지나서도 높이 5~7m에 가파른 경사면의 위용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원래는 성벽 아래 언덕까지 포함해 총높이가 13m에 달했다.

화지산 옆 왕포천에 걸린 작은 다리에는 '서동선화 오작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는 영원히 전승될 극적 로맨스다  

예쁜 표지판. 이정표를 겸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왕포리 비닐하우스지대를 지나는 염창천 둑길. 부여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다 

염창천과 금강 합수점에 있는 부여 나성 최남단 지점. 수풀이 울창하게 뒤덮였지만 성벽 형태는 완연하다

부여 동쪽 외곽을 길게 막고 있는 나성. 총길이는 6.6km이다

산줄기를 거쳐 다시 들판으로 내려서는 나성. 마치 용이 꿈틀대는 듯 장관이다  

금강변에서 시작된 나성은 산줄기를 타고 이어져, 자전거는 도로를 따라 나란히 북상한다. 필서봉(118m) 옆 뜸뱅이고개를 넘으면 부여왕릉원과 능산리사지가 마주보이고, 산에서 내려온 나성이 다시 위용을 드러낸다. 왕포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1.5km 정도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산쪽으로 구불대며 이어지는 모습은 장대한 용이 꿈틀대듯 장관이다.

나성 바로 외곽에 있는 능산리사지는 놀라운 완성도와 예술미, 상징성을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굴된 곳이다. 1993년 백제왕릉원 주차장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나당연합군 공격 당시 약탈을 피해 다급하게 묻고 피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산리사지 동쪽에는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고분 10여기가 모여 있는 능산리고분군(부여왕릉원)이다. 왕릉 주변은 잔디밭으로 잘 관리되어 있고 숲도 있어서 아늑한 공원 분위기다.

사비성 시대 왕실 무덤군으로 추정되는 부여왕릉원. 잔디가 잘 가꿔져 편안한 공원 같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사지(오른쪽) 옆으로 구비치는 나성. 성토지를 포함한 전체 성벽 높이는 최고 13m에 달한다 

 

석목리 들판에 남아 있는 나성의 흔적

최북단의 청산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성  

계속 나성을 따라 북상한다. 석목리 마을을 벗어나면 들판이 펼쳐지고, 곳곳에 나성의 흔적이 둔덕으로 남아 있다. 평야지대여서 별도로 성을 쌓았을 텐데 경작지로 바뀌면서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나성 북단에는 청산성이 있다. 부소산성 외곽 방어의 거점으로 둘레 300m 정도의 작은 규모지만 사방으로 급사면의 언덕을 활용해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구축했다. 성 내부에는 다수의 건물터가 발견되어 상시 주둔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산성도 경사면의 수풀을 좀 더 제거하면 한층 제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토석 혼축의 3단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산성을 구축한 청산성 

청산성 정상에 남은 건물터는 상시 수비군이 주둔했음을 말해준다. 왼쪽 뒤로 부소산이 보인다 

청산성에서 금강변으로 나가 금강자전거길을 타고 상류로 향한다. 조금만 더 가면 전국 16개 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 중 하나인 백제보가 나온다. 사비성 외곽 방어성이 있던 주장산(123m) 북록에서 금강을 막고 있는 백제보는 계백장군의 말안장을 형상화한 건축미도 특별하지만 무인지경의 풍경 속에 홀로 도드라져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12층 높이의 전망대는 그 자체로 멀리서도 보이는 지상의 등대다.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오아시스이고 관광객에게는 이채로운 볼거리다.

국토종주길은 금강 남안을 따라가 백제보를 여러번 지났어도 건넌 적은 없다. 이번에 처음으로 백제보를 건너 북안으로 넘어간다. 멀리서는 귀엽게 보였던 안장 조형물은 가까이서 보니 크기가 대단하다. 보 길이는 311m이지만 옆에 있는 공도교는 680m의 장대교량이다. 북안의 둔치에도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있고 생태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만발한 억새와 미루나무가 말할 수 없이 고혹적이다.

청산성에서 금강변으로 나와 금강자전거길을 타고 백제보를 향해 상류로 간다. 왼쪽으로 천정대 암벽이 보인다

한적한 들판에 갑자기 나타나 반갑고도 놀라운 백제보

계백장군의 말안장을 형상화했다는 백제보 구조물. 바로 옆 공도교에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잘 나 있다  

백제보 공도교에서 내려다본 천정대 방면. 둔치 억새밭이 활짝 피어나 몽환경을 이룬다   

백제보 둔치의 억새와 미루나무가 몹시도 서정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천연기념물인 미호종개(미꾸라지과의 민물고기)가 서식하는 지천을 잠시 따라가다가 금암리로 접어들면 부여의 절경이자 명소인 천정대가 가깝다. 호암리에서 천정대에 이르는 산길이 가파르고 험하지만 500m 정도여서 가볼 만하다.

금강변에 우뚝한 해발 80m 정도의 산줄기 절벽에 있는 천정대(天政臺)는 임금바위와 신하바위를 통틀어 정사를 논하는 바위라는 뜻에서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하며, 산줄기 정상에는 2007년에 세운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의 재상을 뽑을 때 후보 3~4명의 이름을 봉해 두면 하늘이 점지한 사람에게 도장이 찍혔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왕과 귀족이 모여 정사를 논하고 주요 관직을 정한데서 유래한 전설 같다. 부여 일대에서 경치와 조망이 가장 빼어난 곳이라 놀이를 겸해 이곳으로 행차했을 것이다. 천정대에서는 북쪽으로 백제보와 주장산이, 남쪽으로는 부소산성이 훤히 보인다.

호암리에서 천정대 가는 길은 꽤 험하고 여름에는 수풀이 짙지만 500m 정도여서 돌파할 만하다

천정대 산줄기에 마련된 쉼터와 비석

아래쪽 바위가 천정대다. 저쪽으로 백제보와 주장산이 보인다  


천정대 육각정은 2007년에 세워진 것이다 

천정대 옆 옥천산(159m) 남쪽에는 실로 엄청난 규모의 백제문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백제유적을 현대적으로 넘치게 보완하고 있다고나 할까. 사비궁성과 능사, 생활 마을, 위례성까지 재현해 놓았다. 능사는 능산리고분군 서쪽에서 발견된 능사터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으로, 5층목탑이 단연 눈길을 끈다. 높이 38m로 현존 국내 최고의 목탑이다.

문화단지 인근에는 리조트와 아울렛,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등이 모여 있어 특별한 신도시를 이루고 있다. 유적이 적고 잊혀진 백제가 그나마 이곳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백제문화단지 진입로의 백제문. 거창한 규모다 

사비성 왕궁을 재현한 사비궁성의 정문인 정양문 

엄청난 규모로 조성된 백제문화단지 

단지 가장 안쪽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백제문화단지에서 롯데스카이힐 골프장 옆길로 남하하면 낙화암 맞은편 금강 둔치로 나오게 된다. ‘삼천궁녀’ 전설이 어린 낙화암은 부소산성으로 들어가 직접 올라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강 건너 이곳에서 봐야 절벽의 형태와 규모가 제대로 느껴진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보면 어딘가 애조(哀調)가 감도는 강변 풍경 그 한가운데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매혹적인 강변 풍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침 백마강 유람선이 낙화암 아래를 지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곡조가 내내 울려 퍼지는 뱃전에는 관광객이 가득 하다. 황포돛대를 달았으나 엔진으로 움직이는 유람선과 신파조의 요란한 음악이 애조를 탈색하지만 그래도 가슴을 적시는 진풍경이다. 때마침 해도 기울어가는 황혼녘이라 나그네 수심은 더 깊어지고 발길은 정처 없이 강변을 서성인다.

낙화암 아래를 지나는 유람선. 뱃전에는 '꿈꾸는 백마강' 곡조가 하염 없이 흐른다 

나무만큼 길어진 그림자는 낙화암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텅 빈 왕흥사지는 낙화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 공허한 애상을 더한다 

낙화암을 바라보는 강변에는 특별한 유적이 있다. 바로 사비시대 최대의 사찰이던 왕흥사터다. 오래전 처음 찾았을 때는 마을과 논밭 위에 겨우 안내판 하나만이 위치를 알려줬지만 지금은 발굴조사를 거쳐 부지 전체가 공터로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왕흥사는 “물가에 있으며 단청과 건물이 화려하고,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삼국사기>, “절이 산기슭에 있고 물에 임하였으며 꽃과 나무가 고와 사계절 아름다웠다”<삼국유사>고 한다. 1934년 ‘왕흥’이란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왕흥사지임이 확인되었다. 절터는 가로 세로 각 200m 정도의 대규모다. 2007년 목탑지 심초석에서 발견된 청동제 사리함 명문으로 577년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운 것이 확인되었다.

위덕왕(재위 554~598)은 개인적으로 아주 불행한 인물이었다. 용맹이 출중했던 그는 직접 전쟁에 출전하곤 했는데, 신라가 공취한 한강하류를 되찾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관산성(옥천)을 공격한다. 그러다 진중에서 병이 걸려 있을 때 아버지 성왕이 위문 차 찾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에는 자식까지 먼저 보냈으니, 위덕왕은 왕흥사를 창건하고 자주 오가며 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다. 이제 절은 사라지고 공터만 남았지만 구드래나루터에서 배편으로 이곳을 오가던 위덕왕의 행차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강변길을 막은 부산을 돌아나가는 길. 국토종주길과 일부 겹친다   

가파른 부산 기슭에 두 고목을 수문장 삼은 부산서원

부산서원 입구의 동매는 이경여가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올 때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겨울에 꽃이 피어 동매(冬梅) 또는 한매(寒梅) 라고 한다 

강물에 떠내려 왔다고 해서 ‘뜬 산’인 부산(浮山, 107m)이 저 앞으로 동그랗다. 부산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가파른 언덕에 훌쩍 높이 있는 부산서원이 볼만하다. 1719년 성리학자 겸 문신인 김집과 이경여를 배향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977년 중건되었다. 서원 입구에 있는 동매(冬梅)는 이경여(1585~1657)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가져와 심은 것으로 겨울에 눈을 맞으며 피는 매화여서 동매 또는 한매(寒梅)라고 불린다.

금강을 면한 부산 절벽에 있는 대재각도 의미가 깊다. 부산서원에 배향된 이경여가 북벌의 필요성에 대해 효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여기에 대한 효종의 답서를 손자 이명이 1700년에 바위에 새기고 전각으로 보호했다. 효종이 내린 8자 답서는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마음이 지극히 아프구나,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이다. 청국이 너무 강성해져서 북벌 시기를 놓쳤다는 뜻이다. 전각 이름이 대재각(大哉閣)인 것은 <상서(尙書)>의 ‘대재왕언(大哉王言,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따왔다.

부산서원 앞 강변 이정표. 왼쪽으로 가면 대재각이다 

부산 기슭에 있는 대재각. 효종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효종이 내린 8자 답서는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마음이 지극히 아프구나,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이다. 청국이 너무 강성해져서 북벌 시기를 놓쳤다는 뜻이다  

백제교 서단, 자온대 위에 있는 수북정 

수북정과 자온대. 왼쪽 아래 自溫臺라고 새긴 빨간 글씨가 보인다

백제교를 건너기 전 수북정에 오른다. 정자 아래 큰 바위에는 자온대(自溫臺)라고 새겨져 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행차할 때 먼저 이 바위에서 예를 갖추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고 해서 자온대가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군사가 부소산성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규암(窺岩)이라고도 한다. 자온대 위에 날듯이 앉은 수북정(水北亭)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흥국(1557~1623)이 이곳에 살면서 지었고 이름은 그의 호에서 따왔다. 주위에 고목이 울창해 운치는 있으나 조망이 좀 가리는 것이 흠이다. 수북정 아래 구 백제교는 보행교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백제교를 건너 강변으로 나서면 이제 부산이 강 건너로 보인다. 황혼에 물들어가는 둔치는 황량하고 스산한 바람만 스친다.

출발지인 구드래조각공원 한켠에 있는 ‘불교전래사은비’를 마지막으로 만나본다. 백제 26대 성왕이 552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본불교단체가 1972년에 세운 기념비다. 백제와 고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할 때, 부여는 한일관계의 새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어느새 석양이 짙어지면서 백마강 유람선은 사라졌고, 어둠은 동쪽에서 서서히 밀려들고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황혼이 어리는 백마강 둔치. 이렇게 부여에는 '빈 곳'이 많다. 유적도 폐허, 이 아름다운 강변 산책로도 적막강산이다. 오른쪽 산줄기가 부소산 

구드래조각공원 한켠에 있는 '불교전래사은비'. 백제 26대 성왕이 552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본불교단체가 1972년에 세운 기념비다

백마강 일몰... 이제 떠날 시간이다  

 

tip

구드래조각공원 입구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부소산성, 정림사지, 국립부여박물관, 부여왕릉원 등 입장료를 내고 관람해야 하는 공간과 시간은 여기서는 일단 제외했다. 이를 다 포함한다면 하루 종일을 잡아야 한다. 천정대는 진입로가 험하지만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끌바’로 가도 큰 무리가 없다. 대재각과 수북정은 입구에 자전거를 두고 조금 걸어가면 된다.

 

부여 일주 4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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