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 나른한, 설렘과 안도의 풍경
왕진나루 근처 샛강을 지나는 강변길. 금강 서편은 언제나 적막하다. 가운데 멀리 앵봉산(311m)이 보인다
‘나른하다’는 원래 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풍경의 수식어로도 간혹 쓰인다. ‘나른한 풍경’이란 곧 그것을 보면 내 몸과 마음도 나른해진다는 뜻이겠다.
추위가 풀리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도 풀어지는 봄날, 이런 나른함은 자주 찾아온다.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지만, 사시사철 그런 나른함을 주는 풍경이 있다. 바로 공주~부여 간 금강 70리다. 이 강변에서 나른함을 느끼는 것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산야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백제 최후의 두 왕도를 연결하는 역사의 물줄기이고 언제나 적요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으나 두 왕도를 오가던 고대인들의 발자취와 사연, 희로애락이 저 느리고 잔잔한 물줄기에 녹아 면면히 흘러내리는 것이다.
강줄기는 폭 200m 남짓으로 넓지 않고 바닥의 충적토가 보일 정도로 얕으며, 한발 물러난 산들은 그 옛날에도 호랑이는커녕 늑대도 살기 어려울 것 같이 낮고 푸근하다. 두 고도는 28km나 떨어져 있지만 고도차는 10m도 되지 않아 강물은 흐르듯 말 듯 느리기가 하염없다. 강변의 작은 골짜기에는 어김없이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서 1500년을 한결 같이 영욕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기점으로 잡은 부여 백마강변의 자온대. 수북정 아래의 암벽으로 옛날 백제왕이 행차하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자리를 데워주었다고 한다. 빨간 아치교는 부여대교
상류인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것이 그나마 약간의 내리막이고 하류로 간다는 심리적 안도감도 더해준다. 강 동쪽에는 금강자전거길이 잘 나 있고 고개 하나 없는 빤한 길이어서 여행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 길도 좋지만 앞서 말한 ‘나른함’은 금강 서안에서 한층 농염하다. 부여에서 공주로 ‘거슬러’ 가는 역행의 이채로움도 호기심을 배가한다. 그곳에는 ‘미지(未知)’가 더 많으니. 편서풍이 불면 오히려 순풍이라 라이딩이 편할 수도 있다.
백제교 서편, 수북정을 기점으로 잡는다. 정자 아래 규암리는 오래된 나루터 마을의 애상과 전설이 서럽도록 진하게 남아 있다. 한때는 극장과 백화점까지 있었다는 뒷골목은 하염없이 조락하고 있건만.
떠내려온 산이라는 부산(浮山, 107m)은 부소산성을 마주하고 홀로 동그랗다. 부산 아래에서 국토종주길과 헤어져 들판길을 따라 북으로 향한다. 평야를 가득 매운 비닐하우스는 일은 고달파도 일정한 부농의 증표다.
금강을 떠나 내륙으로 향하는 것은 백제 최후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작은 산성을 들렀다 가기 위해서다. 오래 전 서천공주고속도로를 지나다 선명하게 남은 성벽을 발견하고 일부러 찾아가본 적이 있는데, 아무런 관리도, 찾는 이도 없이 퇴락하고 있는 고성이 처연했다. 다만 노인 한 분이 성 안에 집을 짓고 기거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그 노인이 아직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낙화암 맞은편 부산 아래를 지나는 금강자전거길. 이제 곧 금강자전거길을 버리고 들길을 따라 은산 방면으로 향한다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1터널 위를 지나는 산성고개. 방금 올라온 남쪽으로 본 모습이다
증산성 아래는 밤나무밭이다. 과수원 사이 가파른 흙길이 유일한 진입로다
그나마 남은 남벽. 원래는 높이 7m 정도의 2단 석벽이었으나 대부분 허물어졌다. 둘레는 630m
산성의 이름은 증산성(甑山城)이다. 떡을 찌는 시루를 닮은 봉우리를 흔히 증봉 혹은 시루봉이라고 부르는데 산 모양이 시루와 비슷해서 주민들은 ‘시루메산성’이라고도 칭한다. 은산면소재지와 인접한 데서 이 산성의 특별한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은산면은 무형문화재 제9호인 은산별신제의 무대다. 은산별신제와 증산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는 조금 있다 살펴보자.
은산면소재지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가면 좁은 농로를 따라 고속도로가 지나는 부여1터널 위 고개를 넘어간다. 낮고 짧은 고개지만 산성 가는 길목이라고 해서 주민들은 ‘산성고개’라고 부른다. 고개를 넘으면 고속도로 왼편으로 잿빛 석성이 산정을 띠처럼 두르고 있는 증산성이 보인다.
산기슭은 온통 밤나무 밭이고 비포장 진입로는 노면이 거칠고 경사도 심하다.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산성을 아예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산정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630m의 소규모다. 산이라야 해발 160m의 야산 정도지만 북으로는 청양 들을 바라보고 지천이 천연해자처럼 흘러 북방 견제에 특히 유리한 입지다.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 방어성의 하나로 고구려의 침공을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허물어진 성벽이 자연 너덜처럼 보인다. 왼쪽 아래는 서천공주고속도로이고, 사진 가운데 능선을 넘어가는 산성고갯길이 실낱처럼 보인다
처음 들렀을 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산성 아래에 안내판이 생긴 것 말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진입로 상태는 더 나빠져서 물길이 패이고 돌까지 뒹굴어 라이딩이 위태롭다.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채이고, 남문으로 진입해 보니 예전에 도사가 살았다는 빈 집은 흉하게 퇴락해 있고, 노인이 살던 집은 그대로다. 저쪽 밭에서 일하는 노인이 보인다. 아직 살아계시구나 하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인다.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수풀에 묻혀가는 성돌을 잠시 밟다가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햇빛에 그을리긴 했지만 주름이 거의 없는 팽팽한 피부에 나이를 종잡을 수 없다. 그때도 노인이라고 느꼈으니 지금은 훨씬 연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6, 7년 전에 들린 적이 있다고 했지만 스쳐간 나를 기억할 리 없었고, 이곳에 들어온 지 20년 되었다니 당시에 만났던 그 노인이 맞을 것이다. 70대 후반이라면 요즘 기준에서는 크게 연로한 것도 아니다. 성벽이나 진입로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자, 노인은 “다른 급한 곳이 많은데 여기에 쓸 돈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아주 객관적인 입장의 대답을 했다.
테뫼식 산성의 가장 큰 취약점은 물이다. 골짜기가 없거나 너무 짧아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지키는 농성전에서 치명적인 단점이다. 노인은 산 아래에서 물을 끌어다 쓴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와 모터펌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노인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원래 산 아래 신성리가 고향인데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 않고 장군이 불러서 산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자 자식들도 잘 되고 우환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증산성을 지키는 노인. 20년 째 혼자서 밭을 일구며 지낸다
“내가 장군을 가끔 만나요. 당나라 군사에게 비참하게 죽은 장군이 자네가 아무리 원통하다 해도 나보다 원통하겠냐고 하더군요.”
“장군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만났다고 하신 건 꿈이나 영감으로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는 뜻이지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복신 장군이요. 내가 경을 읽거나 공수(무당에게 신이 내림)를 받으면 눈앞에 모습이 보여요.”
복신이면 의자왕의 조카로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귀실복신(?~663)을 말한다.
“복신 장군이 아주 원통하게 죽었거든. 백제군 수천 명을 이끌고 당나라군과 싸우다 이곳까지 밀려났는데 결국 붙잡혀서 피를 토하며 맞아 죽었어요. 저기 고개 너머 들판이 전쟁터였고 장군은 지금의 은산초등학교 쯤에서 죽었다고 해요. 장군이 죽고 수백년이 지난 후 저 들판만 지나면 사람들이 피를 토하는 병에 걸리는 거요. 그게 장군의 원혼 때문이지. 그러다 한 대사가 지나다가 장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잘 지내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더니 그 역병이 사라졌지.”
이 얘기는 은산별신제의 유래이기도 하다. 전설에는 백제의 장군으로 나와서 백제 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과 승려 출신의 도침 두 사람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노인은 복신 장군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복신과 도침은 서로 불화한 끝에 복신이 도침을 죽였고, 복신의 전횡에 위협을 느낀 풍왕(의자왕의 막내아들로 일찍이 왜국에 가 있다가 복신과 도침의 요청으로 귀국해 왕으로 즉위함)은 다시 복신을 죽임으로써 부흥군은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복신은 부흥군의 최후거점이던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당나라군에게 맞아 죽었다니 아마도 다른 장군의 얘기가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노인은 분명히 복신 장군이라고 단언했고, 정사에 기록된 우금산성이나 주류성 얘기는 몰랐다. 증산성은 부여에서 북서쪽으로 5km 거리이니 필시 이곳에서 전투가 있긴 했겠지만 복신이 참전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돌아서는 길에 뒤돌아본 성벽에는 통한이 맺히듯 나무뿌리가 얽혀있고 반쯤 도인이 된 노인이 거니는 성내에는 신비감이 어려 있다.
성벽 저편으로 노인이 홀로 사는 집이 보인다
증산성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오면 지천이 흐르고 들판이 상당히 넓다. 강을 건너면 청양 땅이고 평야는 장평면과 청남면에 걸쳐 있다. 일부러 평야 중심을 가르는 농로를 따른다. 소실점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한 직선로가 뻗어나고 길가에는 수박 비닐하우스가 지천이다.
농로는 금강 변에서 끝이 나고 둑 위로 올라서면 계백장군 말안장이 허공에 도열한 백제보가 장중하다. 자전거길이 잘 나 있는 둑길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모래톱과 샛강이 있는 왕진나루터다. 백제왕이 행차했다고 해서 왕진인데(한자는 汪津으로 쓴다), 낡고 기우뚱한 안내판만이 옛일을 말해준다. 1989년까지만 해도 나룻배가 운행했다고 하며, 사람들로 왁자했을 나루터 식당은 빈 의자만 덩그러니 문을 닫았다. 한때는 붐볐을 나루터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오지다. 1km 상류의 왕진교에 속도와 편리함을 빼앗긴 나루터는 30년 만에 인간 발자국이 사라진 강변 모래밭으로 환원되었다.
왕진교 옆 들판 중 외톨이산(독산, 똥뫼)인 내산(41m)은 온통 무덤으로 뒤덮였다. 들판 중의 언덕은, 낮은 곳은 주거지 높은 곳은 사거지(死居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해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과 나주의 여러 고분군에서 하나의 언덕과 분구에 여러 기의 묘를 조성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증산성을 내려와 지천을 따라 장평들을 달린다. 오른쪽 둑 때문에 지천은 보이지 않는다. 둑 위에 길이 없는 드문 경우다
뒤돌아본 청남 들판의 직선로. 수박 재배 비닐하우스가 많고, 멀리 망월산(356m)이 달처럼 둥그스럼하다
계백장군 말 안장이 물 위에 걸려 있는 듯, 이 쪽에서 보는 백제보가 반갑다
백제왕도 건넜다는 왕진나루터에는 빈 식당만이 남아 있다
천내리 강변 언덕에는 작은 정자가 서서 길손을 쉬어가라 부른다. 정자의 입지는 멋지나 고졸미가 없어서 여러 번 지나치기만 했다가 이번에는 올라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비석을 보니, 지금의 정자는 2001년 세워졌으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호서(충청) 지방의 명승으로 유명했던 ‘5강8정(湖西 五江八亭)’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조선초기의 문신 전구주(田九疇, 1491~1553)가 낙향해서 처음 세웠다. 산과 평야, 강과 땅이 접하는 경계에 섰으니 이 작은 정자 하나가 천지자연을 온통 정원으로 삼고 있다.
부여-공주 간은 강줄기 서편에 솟은 300m급 산을 여럿 지나게 되는데, 처음 장평 들판 뒤에 솟은 망월산(356m)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앵봉산(311m)을 스쳐간다. 산 주름이 깊으면 골짜기도 많아서 강에 막힌 골골마다 마을과 경작지가 가만히 안겨 있다.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워 천년 세월에도 아무런 격변이나 사연도 없었던 것처럼. 강변길은 번듯한 2차로 지방도인데 차는 다니지 않고 봄바람과 햇살만이 스쳐갈 뿐. 동안의 자전거길보다 서안의 이 길이 더 느껍고 좋은 것은 이 적막과 공허 때문이다. 소리도 공간도 비었으니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채울 수 있으니.
앵봉산 자락을 지나면 100m 정도로 낮지만 많은 갈래의 능선이 강으로 뻗어 내리는 신흥리가 나온다. 골마다 들어선 마을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때로는 단 한 집, 때로는 몇 가구가 모여 있는 미니 마을들의 연속…. 기어이 이 따사로운 봄날에도 밖에 나온 단 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이런 골짜기 마을 중에 국내최초로 구기자를 재배한 임장골이 있다. 구기자는 예로부터 인삼, 하수오와 함께 3대 명약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서는 청양 출신 한의사인 박관용 씨가 1927년 야생에서 발견하고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시초다. 지금도 청양군이 전국 구기자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자전거도로가 시원하게 나 있는 청양 동강리 둑길
산과 들, 강이 접하는 매혹의 강 언덕에 자리한 일사정. 지금 건물은 2001년에 다시 지은 것이나, 원래 일사정은 호서 ‘5강8정(湖西 五江八亭)’ 중 하나였다
구기자를 처음 재배한 청양 신흥리 임장골. 능선에 세대별로 도열한 묘지가 인상적이다
왼쪽으로 트인 골짜기가 나오고 그 뒤로 미궐산(369m)이 자못 웅장하다. 이제 사마산(308m) 기슭으로 접어들면 공주 땅이 시작되고 이름처럼 대밭이 흔한 죽당리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아니 그냥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추억과 상상이 뒤죽박죽이 된 ‘그 집 앞’을 곧 지나기에.
오래 전 강 건너 강변길을 지나면서 처음 발견한 이 빨간 집은 작은 마을에서도 홀로 떨어진 외딴집이다. 그 집을 망연히 보면서 노래 몇 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이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머리 소녀야…’
가장 먼저 ‘긴 머리 소녀’가 머릿속을 맴돌고 입속에 감돈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소년이 되어 엄마와 누나를 찾고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아무 이유 없이 그 집에는 어린 시절 동경했던 긴 머리 소녀가 살고 있고, 강변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 강변길을 지날 때마다 저 멀리 빨간 집을 바라보며 근거도 없는 추억에 젖곤 했다.
오늘 떠오른 노래는 ‘그 집 앞’이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니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작은 마을의 반은 빈 집이고, 그 집도 인기척이 없건만 지붕은 여전히 빨갛다. 뒤에는 무성한 대밭, 앞에는 갈밭이 바람 따라 다른 화음으로 애조를 더한다.
죽당리 둔치는 온통 억새와 갈대 밭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주었던 빨간 집. 아무 연고도 없지만 강 건너에서 바라볼 때 빨간 외딴 집은 한편 아름답고 한편 슬펐다
이제 공주가 멀지 않다. 국수봉(102m) 낮은 산이 감히 절벽으로 길을 막아 내륙의 나뭇골고개로 잠시 돌아 나오면 강변 흙길이 반갑다. 옆에는 새 도로가 공사중이니 이런 적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구천을 지나 평목리로 넘어가면 공주보가 저 앞으로 보인다. 이 방향에서 보는 공주보는 처음이라 반가움과 생경함이 교차한다. 웅진시대 백제 부흥을 이끈 무령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번잡한 시내로 가지 않고 그대로 직진, 곰나루 전설이 어린 연미산(238m) 아래를 돌아 공산성 대안으로 접어든다. 성곽은 1500년을 건재하고 실루엣 진 공산정이 허공에 외롭다.
국수봉(102m) 낮은 산이 감히 절벽으로 길을 막아 내륙의 나뭇골고개로 잠시 우회한다. 벌목 목재더미가 자못 산간 분위기다
장자못 옆으로 난 흙길. 이제 공주시내가 멀지 않다. 뒤편 연두색 다리는 논산천안고속도로 웅진대교 무령왕릉에서 다수 출토된 봉황을 조형화한 공주보
곰나루 전설이 어린 연미산 입구에는 떠나가는 나무꾼을 애타게 부르는 곰 상이 있다
산뜻한 공주시내 둔치 길
강 저편으로 공산성이 오후 햇살에 실루엣을 드리운다
tip
이번 투어는 편도인데, 부여 쪽에 차를 두고 출발해서 공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여로 돌아왔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아래쪽 짐칸에 자전거를 그대로 실을 수 있어 이런 편도여행에 좋다. 공주-부여 간 시외버스는 하루 5회 있으며 요금은 5,100원이다(50분 소요). 부여읍내와 공주시내를 제외하면 식당이나 편의점이 없으므로 행동식에 유의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부여-공주 금강 서안길 52km
사철 나른한, 설렘과 안도의 풍경
왕진나루 근처 샛강을 지나는 강변길. 금강 서편은 언제나 적막하다. 가운데 멀리 앵봉산(311m)이 보인다
‘나른하다’는 원래 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풍경의 수식어로도 간혹 쓰인다. ‘나른한 풍경’이란 곧 그것을 보면 내 몸과 마음도 나른해진다는 뜻이겠다.
추위가 풀리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도 풀어지는 봄날, 이런 나른함은 자주 찾아온다.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지만, 사시사철 그런 나른함을 주는 풍경이 있다. 바로 공주~부여 간 금강 70리다. 이 강변에서 나른함을 느끼는 것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산야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백제 최후의 두 왕도를 연결하는 역사의 물줄기이고 언제나 적요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으나 두 왕도를 오가던 고대인들의 발자취와 사연, 희로애락이 저 느리고 잔잔한 물줄기에 녹아 면면히 흘러내리는 것이다.
강줄기는 폭 200m 남짓으로 넓지 않고 바닥의 충적토가 보일 정도로 얕으며, 한발 물러난 산들은 그 옛날에도 호랑이는커녕 늑대도 살기 어려울 것 같이 낮고 푸근하다. 두 고도는 28km나 떨어져 있지만 고도차는 10m도 되지 않아 강물은 흐르듯 말 듯 느리기가 하염없다. 강변의 작은 골짜기에는 어김없이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서 1500년을 한결 같이 영욕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기점으로 잡은 부여 백마강변의 자온대. 수북정 아래의 암벽으로 옛날 백제왕이 행차하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자리를 데워주었다고 한다. 빨간 아치교는 부여대교
상류인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것이 그나마 약간의 내리막이고 하류로 간다는 심리적 안도감도 더해준다. 강 동쪽에는 금강자전거길이 잘 나 있고 고개 하나 없는 빤한 길이어서 여행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이 길도 좋지만 앞서 말한 ‘나른함’은 금강 서안에서 한층 농염하다. 부여에서 공주로 ‘거슬러’ 가는 역행의 이채로움도 호기심을 배가한다. 그곳에는 ‘미지(未知)’가 더 많으니. 편서풍이 불면 오히려 순풍이라 라이딩이 편할 수도 있다.
백제교 서편, 수북정을 기점으로 잡는다. 정자 아래 규암리는 오래된 나루터 마을의 애상과 전설이 서럽도록 진하게 남아 있다. 한때는 극장과 백화점까지 있었다는 뒷골목은 하염없이 조락하고 있건만.
떠내려온 산이라는 부산(浮山, 107m)은 부소산성을 마주하고 홀로 동그랗다. 부산 아래에서 국토종주길과 헤어져 들판길을 따라 북으로 향한다. 평야를 가득 매운 비닐하우스는 일은 고달파도 일정한 부농의 증표다.
금강을 떠나 내륙으로 향하는 것은 백제 최후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작은 산성을 들렀다 가기 위해서다. 오래 전 서천공주고속도로를 지나다 선명하게 남은 성벽을 발견하고 일부러 찾아가본 적이 있는데, 아무런 관리도, 찾는 이도 없이 퇴락하고 있는 고성이 처연했다. 다만 노인 한 분이 성 안에 집을 짓고 기거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그 노인이 아직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낙화암 맞은편 부산 아래를 지나는 금강자전거길. 이제 곧 금강자전거길을 버리고 들길을 따라 은산 방면으로 향한다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1터널 위를 지나는 산성고개. 방금 올라온 남쪽으로 본 모습이다
증산성 아래는 밤나무밭이다. 과수원 사이 가파른 흙길이 유일한 진입로다
그나마 남은 남벽. 원래는 높이 7m 정도의 2단 석벽이었으나 대부분 허물어졌다. 둘레는 630m
산성의 이름은 증산성(甑山城)이다. 떡을 찌는 시루를 닮은 봉우리를 흔히 증봉 혹은 시루봉이라고 부르는데 산 모양이 시루와 비슷해서 주민들은 ‘시루메산성’이라고도 칭한다. 은산면소재지와 인접한 데서 이 산성의 특별한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은산면은 무형문화재 제9호인 은산별신제의 무대다. 은산별신제와 증산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는 조금 있다 살펴보자.
은산면소재지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동북쪽으로 가면 좁은 농로를 따라 고속도로가 지나는 부여1터널 위 고개를 넘어간다. 낮고 짧은 고개지만 산성 가는 길목이라고 해서 주민들은 ‘산성고개’라고 부른다. 고개를 넘으면 고속도로 왼편으로 잿빛 석성이 산정을 띠처럼 두르고 있는 증산성이 보인다.
산기슭은 온통 밤나무 밭이고 비포장 진입로는 노면이 거칠고 경사도 심하다.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산성을 아예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산정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 630m의 소규모다. 산이라야 해발 160m의 야산 정도지만 북으로는 청양 들을 바라보고 지천이 천연해자처럼 흘러 북방 견제에 특히 유리한 입지다.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 방어성의 하나로 고구려의 침공을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허물어진 성벽이 자연 너덜처럼 보인다. 왼쪽 아래는 서천공주고속도로이고, 사진 가운데 능선을 넘어가는 산성고갯길이 실낱처럼 보인다
처음 들렀을 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산성 아래에 안내판이 생긴 것 말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진입로 상태는 더 나빠져서 물길이 패이고 돌까지 뒹굴어 라이딩이 위태롭다.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채이고, 남문으로 진입해 보니 예전에 도사가 살았다는 빈 집은 흉하게 퇴락해 있고, 노인이 살던 집은 그대로다. 저쪽 밭에서 일하는 노인이 보인다. 아직 살아계시구나 하는 안도감과 반가움이 인다.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수풀에 묻혀가는 성돌을 잠시 밟다가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햇빛에 그을리긴 했지만 주름이 거의 없는 팽팽한 피부에 나이를 종잡을 수 없다. 그때도 노인이라고 느꼈으니 지금은 훨씬 연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6, 7년 전에 들린 적이 있다고 했지만 스쳐간 나를 기억할 리 없었고, 이곳에 들어온 지 20년 되었다니 당시에 만났던 그 노인이 맞을 것이다. 70대 후반이라면 요즘 기준에서는 크게 연로한 것도 아니다. 성벽이나 진입로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자, 노인은 “다른 급한 곳이 많은데 여기에 쓸 돈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아주 객관적인 입장의 대답을 했다.
테뫼식 산성의 가장 큰 취약점은 물이다. 골짜기가 없거나 너무 짧아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지키는 농성전에서 치명적인 단점이다. 노인은 산 아래에서 물을 끌어다 쓴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와 모터펌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노인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원래 산 아래 신성리가 고향인데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 않고 장군이 불러서 산성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자 자식들도 잘 되고 우환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증산성을 지키는 노인. 20년 째 혼자서 밭을 일구며 지낸다
“내가 장군을 가끔 만나요. 당나라 군사에게 비참하게 죽은 장군이 자네가 아무리 원통하다 해도 나보다 원통하겠냐고 하더군요.”
“장군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만났다고 하신 건 꿈이나 영감으로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는 뜻이지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복신 장군이요. 내가 경을 읽거나 공수(무당에게 신이 내림)를 받으면 눈앞에 모습이 보여요.”
복신이면 의자왕의 조카로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귀실복신(?~663)을 말한다.
“복신 장군이 아주 원통하게 죽었거든. 백제군 수천 명을 이끌고 당나라군과 싸우다 이곳까지 밀려났는데 결국 붙잡혀서 피를 토하며 맞아 죽었어요. 저기 고개 너머 들판이 전쟁터였고 장군은 지금의 은산초등학교 쯤에서 죽었다고 해요. 장군이 죽고 수백년이 지난 후 저 들판만 지나면 사람들이 피를 토하는 병에 걸리는 거요. 그게 장군의 원혼 때문이지. 그러다 한 대사가 지나다가 장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잘 지내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더니 그 역병이 사라졌지.”
이 얘기는 은산별신제의 유래이기도 하다. 전설에는 백제의 장군으로 나와서 백제 부흥군을 이끈 귀실복신과 승려 출신의 도침 두 사람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노인은 복신 장군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복신과 도침은 서로 불화한 끝에 복신이 도침을 죽였고, 복신의 전횡에 위협을 느낀 풍왕(의자왕의 막내아들로 일찍이 왜국에 가 있다가 복신과 도침의 요청으로 귀국해 왕으로 즉위함)은 다시 복신을 죽임으로써 부흥군은 사실상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복신은 부흥군의 최후거점이던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당나라군에게 맞아 죽었다니 아마도 다른 장군의 얘기가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노인은 분명히 복신 장군이라고 단언했고, 정사에 기록된 우금산성이나 주류성 얘기는 몰랐다. 증산성은 부여에서 북서쪽으로 5km 거리이니 필시 이곳에서 전투가 있긴 했겠지만 복신이 참전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돌아서는 길에 뒤돌아본 성벽에는 통한이 맺히듯 나무뿌리가 얽혀있고 반쯤 도인이 된 노인이 거니는 성내에는 신비감이 어려 있다.
성벽 저편으로 노인이 홀로 사는 집이 보인다
증산성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나오면 지천이 흐르고 들판이 상당히 넓다. 강을 건너면 청양 땅이고 평야는 장평면과 청남면에 걸쳐 있다. 일부러 평야 중심을 가르는 농로를 따른다. 소실점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한 직선로가 뻗어나고 길가에는 수박 비닐하우스가 지천이다.
농로는 금강 변에서 끝이 나고 둑 위로 올라서면 계백장군 말안장이 허공에 도열한 백제보가 장중하다. 자전거길이 잘 나 있는 둑길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모래톱과 샛강이 있는 왕진나루터다. 백제왕이 행차했다고 해서 왕진인데(한자는 汪津으로 쓴다), 낡고 기우뚱한 안내판만이 옛일을 말해준다. 1989년까지만 해도 나룻배가 운행했다고 하며, 사람들로 왁자했을 나루터 식당은 빈 의자만 덩그러니 문을 닫았다. 한때는 붐볐을 나루터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오지다. 1km 상류의 왕진교에 속도와 편리함을 빼앗긴 나루터는 30년 만에 인간 발자국이 사라진 강변 모래밭으로 환원되었다.
왕진교 옆 들판 중 외톨이산(독산, 똥뫼)인 내산(41m)은 온통 무덤으로 뒤덮였다. 들판 중의 언덕은, 낮은 곳은 주거지 높은 곳은 사거지(死居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해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과 나주의 여러 고분군에서 하나의 언덕과 분구에 여러 기의 묘를 조성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증산성을 내려와 지천을 따라 장평들을 달린다. 오른쪽 둑 때문에 지천은 보이지 않는다. 둑 위에 길이 없는 드문 경우다
뒤돌아본 청남 들판의 직선로. 수박 재배 비닐하우스가 많고, 멀리 망월산(356m)이 달처럼 둥그스럼하다
계백장군 말 안장이 물 위에 걸려 있는 듯, 이 쪽에서 보는 백제보가 반갑다
백제왕도 건넜다는 왕진나루터에는 빈 식당만이 남아 있다
천내리 강변 언덕에는 작은 정자가 서서 길손을 쉬어가라 부른다. 정자의 입지는 멋지나 고졸미가 없어서 여러 번 지나치기만 했다가 이번에는 올라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비석을 보니, 지금의 정자는 2001년 세워졌으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호서(충청) 지방의 명승으로 유명했던 ‘5강8정(湖西 五江八亭)’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조선초기의 문신 전구주(田九疇, 1491~1553)가 낙향해서 처음 세웠다. 산과 평야, 강과 땅이 접하는 경계에 섰으니 이 작은 정자 하나가 천지자연을 온통 정원으로 삼고 있다.
부여-공주 간은 강줄기 서편에 솟은 300m급 산을 여럿 지나게 되는데, 처음 장평 들판 뒤에 솟은 망월산(356m)을 시작으로 이번에는 앵봉산(311m)을 스쳐간다. 산 주름이 깊으면 골짜기도 많아서 강에 막힌 골골마다 마을과 경작지가 가만히 안겨 있다.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워 천년 세월에도 아무런 격변이나 사연도 없었던 것처럼. 강변길은 번듯한 2차로 지방도인데 차는 다니지 않고 봄바람과 햇살만이 스쳐갈 뿐. 동안의 자전거길보다 서안의 이 길이 더 느껍고 좋은 것은 이 적막과 공허 때문이다. 소리도 공간도 비었으니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 채울 수 있으니.
앵봉산 자락을 지나면 100m 정도로 낮지만 많은 갈래의 능선이 강으로 뻗어 내리는 신흥리가 나온다. 골마다 들어선 마을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때로는 단 한 집, 때로는 몇 가구가 모여 있는 미니 마을들의 연속…. 기어이 이 따사로운 봄날에도 밖에 나온 단 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이런 골짜기 마을 중에 국내최초로 구기자를 재배한 임장골이 있다. 구기자는 예로부터 인삼, 하수오와 함께 3대 명약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서는 청양 출신 한의사인 박관용 씨가 1927년 야생에서 발견하고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시초다. 지금도 청양군이 전국 구기자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자전거도로가 시원하게 나 있는 청양 동강리 둑길
산과 들, 강이 접하는 매혹의 강 언덕에 자리한 일사정. 지금 건물은 2001년에 다시 지은 것이나, 원래 일사정은 호서 ‘5강8정(湖西 五江八亭)’ 중 하나였다
구기자를 처음 재배한 청양 신흥리 임장골. 능선에 세대별로 도열한 묘지가 인상적이다
왼쪽으로 트인 골짜기가 나오고 그 뒤로 미궐산(369m)이 자못 웅장하다. 이제 사마산(308m) 기슭으로 접어들면 공주 땅이 시작되고 이름처럼 대밭이 흔한 죽당리다. 여기서부터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아니 그냥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추억과 상상이 뒤죽박죽이 된 ‘그 집 앞’을 곧 지나기에.
오래 전 강 건너 강변길을 지나면서 처음 발견한 이 빨간 집은 작은 마을에서도 홀로 떨어진 외딴집이다. 그 집을 망연히 보면서 노래 몇 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이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머리 소녀야…’
가장 먼저 ‘긴 머리 소녀’가 머릿속을 맴돌고 입속에 감돈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소년이 되어 엄마와 누나를 찾고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아무 이유 없이 그 집에는 어린 시절 동경했던 긴 머리 소녀가 살고 있고, 강변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후 강변길을 지날 때마다 저 멀리 빨간 집을 바라보며 근거도 없는 추억에 젖곤 했다.
오늘 떠오른 노래는 ‘그 집 앞’이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니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작은 마을의 반은 빈 집이고, 그 집도 인기척이 없건만 지붕은 여전히 빨갛다. 뒤에는 무성한 대밭, 앞에는 갈밭이 바람 따라 다른 화음으로 애조를 더한다.
죽당리 둔치는 온통 억새와 갈대 밭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주었던 빨간 집. 아무 연고도 없지만 강 건너에서 바라볼 때 빨간 외딴 집은 한편 아름답고 한편 슬펐다
이제 공주가 멀지 않다. 국수봉(102m) 낮은 산이 감히 절벽으로 길을 막아 내륙의 나뭇골고개로 잠시 돌아 나오면 강변 흙길이 반갑다. 옆에는 새 도로가 공사중이니 이런 적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구천을 지나 평목리로 넘어가면 공주보가 저 앞으로 보인다. 이 방향에서 보는 공주보는 처음이라 반가움과 생경함이 교차한다. 웅진시대 백제 부흥을 이끈 무령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번잡한 시내로 가지 않고 그대로 직진, 곰나루 전설이 어린 연미산(238m) 아래를 돌아 공산성 대안으로 접어든다. 성곽은 1500년을 건재하고 실루엣 진 공산정이 허공에 외롭다.
국수봉(102m) 낮은 산이 감히 절벽으로 길을 막아 내륙의 나뭇골고개로 잠시 우회한다. 벌목 목재더미가 자못 산간 분위기다
장자못 옆으로 난 흙길. 이제 공주시내가 멀지 않다. 뒤편 연두색 다리는 논산천안고속도로 웅진대교 무령왕릉에서 다수 출토된 봉황을 조형화한 공주보
곰나루 전설이 어린 연미산 입구에는 떠나가는 나무꾼을 애타게 부르는 곰 상이 있다
산뜻한 공주시내 둔치 길
강 저편으로 공산성이 오후 햇살에 실루엣을 드리운다
tip
이번 투어는 편도인데, 부여 쪽에 차를 두고 출발해서 공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부여로 돌아왔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아래쪽 짐칸에 자전거를 그대로 실을 수 있어 이런 편도여행에 좋다. 공주-부여 간 시외버스는 하루 5회 있으며 요금은 5,100원이다(50분 소요). 부여읍내와 공주시내를 제외하면 식당이나 편의점이 없으므로 행동식에 유의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부여-공주 금강 서안길 5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