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바람개비 줄지은 임도 천국
풍력발전기가 도열한 만월산 주능선. 맨뒤 발전기 후방의 봉우리가 정상이다. 왼쪽 멀리 구름을 살짝 인 설악산 대청봉이 보인다
만월산(滿月山)이라…. 왜 만월일까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주문진 근처 바닷가에서 문득 깨달았다. 산세가 보름달처럼 둥글구나. 일설에는 동해안에 달이 뜨면 정상이 붉게 비친다고 해서 만월이라지만 주변에 더 높은 산이 지천이니 이 유래는 어색하다.
동해안 가까이 솟은 이 만월산에 주목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지도를 살펴보다 해발 628m로 높지 않은데 산세가 넓게 퍼져 있고, 무엇보다 임도가 굉장히 많이 나 있어 언젠가 라이딩을 해보고 싶었다. 만월산 일대에는 임도가 너무 많아 단위면적당 길이를 따진다면 전국 최고 수준일 것이다.
게다가 올해(24년) 초에는 주능선에 풍력발전소까지 들어서서 11기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도열해 물씬한 서정성과 최신 문명의 조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많은 지자체가 풍력발전소를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식적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금단의 매혹도 숨기고 있다. 저 능선에 오르면 과연 어떤 풍경이 기다릴까.
대양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드는 북분리해수욕장
출발지로 양양 북분리해수욕장으로 잡은 것은, 우선 해발 0m 해안에서 출발하고 싶었고 동해안자전거길이 지나가 여정을 다채롭게 꾸밀 수 있으며 임도 진입도 쉽기 때문이다.
시즌이 갓 지난 백사장은 무인지경이고 거친 파도만이 하얗게 밀려들고 있다. 육당 최남선이1908년 발표한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로 시작한다. 육당은 분명 동해의 저 파도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바다(海)가 화자(話者)로 나서서 망해가는 나라지만 미래가 창창한 소년들의 야망을 북돋우고 있다. 지금 파도를 굳이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이 시와 같을 것이다. 처~얼썩 하고 모래밭에 몰아치다 고꾸라진 파도는 쏴아~ 하며 뒤로 물러나고 곧이어 뒤따라온 파도와 부딪히며 ‘척~’ 파열음을 낸다. 육당은 망연히 저 파도를 바라보며 대자연의 힘에 압도당하면서도 시적 운율을 찾아냈을 것이다.
끝없이 철썩이는 바다를 뒤로 하고 7번 국도 아래 굴다리를 지나 내륙으로 향한다.
북분리의 지능선을 따라 만월산 가는 길의 이정표. 여기서 정자리로 잠시 하산했다 다시 올라야 한다. '양양군사유임도'라고 되어 있는데 공적 단체인 양양군이 '사유'라고 표현한 것이 어색하다
작은 마을들이 산재한 북분리에서 곧장 산길이 시작된다. 초반부터 경사가 아찔하지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접지력은 받쳐준다. 차량이 다닌 흔적은 있으나 지금은 무인지경이다. 한참을 달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내리막으로 들어서면 길은 정자리 외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붙는다. 일대는 임도가 지천이고 갈림길이 많아 길찾기에 매우 주의해야 하는데 아차 잘못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아직 고도는 높지 않아서 해발 200~250m 선을 오르내린다. 네 번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군부대 가는 길이 분기하며, 주변 길이 잘 정비되고 통행 흔적이 보이는 것은 군부대 때문이다. 양양이든 주문진이든 가까운 읍내까지 자동차로도 30분 이상 가야 하니 군인들이 느끼는 격리감은 상당할 것이다.
군부대 갈림길을 지나 100여m 가면 흙길 업힐과 시멘트길 다운힐이 다시 나뉘는데 흙길로 가야 한다. 흙길이지만 통행이 드물고 관리를 하지 않는 듯 노면이 거칠고 잡초도 무성하다. 조금 올라가면 차단기가 길을 막고 앞에는 차량 한 대가 서 있다. 등산 올 일은 없을 테고 아마도 약초꾼일 것이다.
벌목한 목재가 이리 쌓여 있는 것은 그만큼 삼림이 울창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산악기상관측장비는 강원도 산지에서 가끔 만난다 만월산 북사면으로 접어들면 잡초가 우거진 구간이 잠시 나온다
“아니, 이런 곳을 자전거로 왔어요!?”
차단기를 지나 잡초가 무성한 길을 얼마쯤 올라가다 돌아나오는 약초꾼을 만났더니 깜짝 놀란다. 이런 곳에서 자전거를 조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그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계속 감탄사만 연발한다.
잡초는 갈수록 심해지지만 한여름을 지나 살짝 마른데다 줄기에 힘이 없어 헤치고 나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다만 풀숲에서는 변속기에 잡초가 끼지 않도록 돌파 중에는 변속을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옷에 씨앗과 벌레가 달라붙지 않게 주행라인 선정에 주의해야 한다. 경험상 이런 잡초 지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산자락을 돌아나가는 임도는 방향에 따라 일조량과 토질, 습도가 달라져 잡초가 자라기 좋은 곳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능선을 돌아 서사면으로 들어서자 잡초가 사라졌다.
아, 대청봉이다! 오른쪽으로 화채봉을 거쳐 맨 뒤에는 북설악의 상봉~신선봉 능선까지 드러났다
이제부터 길은 한없이 구불거리며 만월산 북릉을 넘어간다. 만월산 일원은 삼림이 울창해 숲 관리를 위해 임도를 많이 개설한 것 같다. 그런데… 저곳은! 한참 멀리 있을 줄 알았던 설악산 대청봉이 낮은 능선 너머로 훌쩍 다가섰다. 옆으로 화채봉도 오똑하고 맨뒤에는 북설악의 상봉~신선봉이 선명하다. 시점의 고도가 해발 300m 정도여서 대청봉의 웅자가 한결 강조된다. 만월산 주릉에 오르면 또 어떤 조망이 기다릴지 기대감도 커진다.
이윽고 만월산 주릉을 넘어 동사면으로 접어들었다. 나무 사이로 잠깐씩 동해가 보인다. 광막한 코발트블루 저편에는 수평선이 드리워져 지구와 내 시선이 접선한다. 시선과 지구 곡률의 접선 연장이 곧 수평선이니 내 시점에서는 평평한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보이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지구가 무한평면이 아니라는 것은 수평선 뒤에 반쯤 가라앉은 구름만 잘 살펴도 알 수 있지만 구체 위에 사물이 직립해 있는 것은 중력을 감안해도 여전히 신기하다.
동해안 저 멀리 아스라한 속초. 가까이 보이는 첨탑은 양양공항 관제탑이고 그 오른쪽으로 활주로가 길게 펼쳐져 있다
동해고속도로 뒤편으로 갑자기 '젊은이들의 성지'로 떠오른 인구항이 가깝다
끝도 없을 것만 같던 숲길이 끝나고 마침내 널찍한 시멘트 도로와 만났다. 만월산 동쪽 상월전리 방면에서 양양풍력발전소로 오르는 길이다. 양양풍력발전소는 올봄부터 가동되고 있건만 관광용 추가 개발이나 홍보가 되지 않아 알려져 있지 않다. 주민들의 반대로 장시간 가동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경관 훼손과 전자파 피해를 문제 삼는 주민들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이왕 완성되었으니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풍력발전기는 만월산 정상 남쪽 주능선을 따라 11기가 200~30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주능선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2기, 남쪽으로 9기가 있으며, 경관이 좋은 남쪽으로 먼저 향한다. 기둥높이 60m, 날개 지름 40m 총높이 100m에 달하는 거대 바람개비가 윙윙 거리며 돌아간다. 이 바람개비 하나가 4.2메가와트(MW)의 전력을 생산하며 이는 약 3천 가구에 전력을 댈 수 있는 용량이다. 전체 발전량은 46.2MW이니 3만5천 가구에 전기를 댈 수 있다. 양양과 속초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전력이다. 풍력발전이 생각보다 효율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동해안을 낀 백두대간은 바람이 많아 풍력발전에 특히 효과적이어서 대관령을 위시해 많은 풍력발전소가 들어서고 있다.
만월산 주능선에 자리한 양양풍력발전소.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11기의 발전기가 서 있다
풍력발전기는 인공물인데 자연 속에서 위화감이 거의 없다. 무려 2만2900V의 초고압 전력을 생산하는 이 거대하고 하얀 기계는 ‘풍차’와 닮은 이유 하나로 친근하고 목가적인, 서정풍경의 상징이 됐다. 가까이서 보면 너무 거대해서 위압감이 들지만 조금만 떨어지면 정겨운 표정으로 돌변한다. 발전기 사이를 연결하는 길도 동화적인 세계로 인도하듯 매혹적이다.
발전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각각 다르다. 바로 옆 서쪽으로는 응복산(1360m)이 웅장하다. 정상 오른쪽으로 빗금을 그리며 뻗어난 임도는 미천골에서 넘어와 법수치리로 내려가는 국내 굴지의 장대 다운힐 코스다. 해발 980m에서 법수치리까지, 고도차 800m 길이는 무려 20km에 달하는 국내최장의 임도 다운힐이다. 산 너머 미천골은 계곡미가 빼어나고, 주능선 이쪽 다운힐은 장대하면서도 원시적인 이 길을 널리 알리고 싶어 20여 년 전 산악자전거 어드벤처 대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참가자 중 한 분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불행한 사고가 났고, 행사 책임자로서 나는 큰 충격과 함께 자책감에 미천골은 물론 양양도 다시 찾지 않았다. 그 길이, 그 산이 저 앞에 다시 보이는구나.
북쪽 미천골을 거쳐 법수치리로 내려가는 '미천골 임도'가 저 편으로 보인다. 다운힐만 20km에 달하는 엄청난 코스다. 정면의 봉우리는 응복산 북릉의 1157m봉
맨왼쪽 연곡에서 경포대~안목해변까지 강릉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11기의 풍력발전기 중 남쪽으로 9번째 발전기가 위치가 특히 좋아서 전망이 발군이다. 고도는 11번째가 해발 610m로 가장 높고 9번째는 590m 정도다. 9번째 발전기 바로 옆으로 벌목지가 있어 조망을 가리지 않아 어성전계곡이 발밑으로 보인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응복산~오대산 두로봉에 이르는 근육질 산악미가 박력 있게 맥동 친다. 지금은 멀리서 바라보지만 저 능선, 저 계곡을 다 가보려면 한 번의 인생으로는 턱 없이 부족할 것이다. 1세대 방랑자 김시습과 방랑의 대명사인 김삿갓 두 사람도 평생을 돌아다녔으나 그들이 밟은 영역은 한반도의 일부에 그쳤다. 현대적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교통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우리는 누군가가 미리 설정해둔 루트를 따라 ‘길’ 위에서만 주마간산 할 수 있을 뿐이다. 발바닥이 차지하는 ‘점’이든, 발걸음이 연결하는 ‘선’이든 지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은 것을 기준으로 하는 ‘시야’를 포함해도 점과 선이 조금 굵어지는 정도다. 우리는 그렇게 얼기설기 엉성하게 다니고 보다가 사라져간다.
오대산 두로봉(1423m, 왼쪽)에서 응복산(1360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웅장하다
동쪽 아래 달래저수지에서 바라본 양양풍력발전소와 만월산(맨오른쪽 둔중한 봉우리)
발전소 능선길에서 강릉과 속초가 동시에 보이는 것도 각별하다. 흔히들 강릉과 속초는 가까운 거리로 알기 쉬운데 직선으로 55km나 떨어져 있으며, 이는 서울-평택 정도에 해당하고 자동차로 1시간이 걸리는 꽤 먼 거리다. 두 도시는 닮은 점이 많아서 똑 같이 동해를 끼고 있고, 속초는 설악산이 있어 강릉은 대관령 덕분에 더욱 입체적이고 다채롭다. 동해 북부에만 있는 희귀한 석호(潟湖)와 해안평야를 낀 것도 특별하다.
이제 해안선까지 13km에 이르는 다운힐이 기다린다. 도중에 작은 고개 2개를 넘어야 하지만 전반적인 다운힐 속에 잠깐의 헐떡임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고개 업힐 중에 배터리가 끝장나고 말았다. 그래도 마음은 느긋하다. 고갯마루까지 잠깐만 끌면 해안까지 내리막이 기다리니까. 해변에 도착하니 “처~얼썩 쏴~” 울부짖는 파도가 여전하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양양 만월산 36km
거대 바람개비 줄지은 임도 천국
풍력발전기가 도열한 만월산 주능선. 맨뒤 발전기 후방의 봉우리가 정상이다. 왼쪽 멀리 구름을 살짝 인 설악산 대청봉이 보인다
만월산(滿月山)이라…. 왜 만월일까 이름의 유래가 궁금했는데 주문진 근처 바닷가에서 문득 깨달았다. 산세가 보름달처럼 둥글구나. 일설에는 동해안에 달이 뜨면 정상이 붉게 비친다고 해서 만월이라지만 주변에 더 높은 산이 지천이니 이 유래는 어색하다.
동해안 가까이 솟은 이 만월산에 주목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지도를 살펴보다 해발 628m로 높지 않은데 산세가 넓게 퍼져 있고, 무엇보다 임도가 굉장히 많이 나 있어 언젠가 라이딩을 해보고 싶었다. 만월산 일대에는 임도가 너무 많아 단위면적당 길이를 따진다면 전국 최고 수준일 것이다.
게다가 올해(24년) 초에는 주능선에 풍력발전소까지 들어서서 11기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도열해 물씬한 서정성과 최신 문명의 조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많은 지자체가 풍력발전소를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식적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금단의 매혹도 숨기고 있다. 저 능선에 오르면 과연 어떤 풍경이 기다릴까.
대양의 파도가 끝없이 밀려드는 북분리해수욕장
출발지로 양양 북분리해수욕장으로 잡은 것은, 우선 해발 0m 해안에서 출발하고 싶었고 동해안자전거길이 지나가 여정을 다채롭게 꾸밀 수 있으며 임도 진입도 쉽기 때문이다.
시즌이 갓 지난 백사장은 무인지경이고 거친 파도만이 하얗게 밀려들고 있다. 육당 최남선이1908년 발표한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로 시작한다. 육당은 분명 동해의 저 파도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바다(海)가 화자(話者)로 나서서 망해가는 나라지만 미래가 창창한 소년들의 야망을 북돋우고 있다. 지금 파도를 굳이 의성어로 표현하자면 이 시와 같을 것이다. 처~얼썩 하고 모래밭에 몰아치다 고꾸라진 파도는 쏴아~ 하며 뒤로 물러나고 곧이어 뒤따라온 파도와 부딪히며 ‘척~’ 파열음을 낸다. 육당은 망연히 저 파도를 바라보며 대자연의 힘에 압도당하면서도 시적 운율을 찾아냈을 것이다.
끝없이 철썩이는 바다를 뒤로 하고 7번 국도 아래 굴다리를 지나 내륙으로 향한다.
북분리의 지능선을 따라 만월산 가는 길의 이정표. 여기서 정자리로 잠시 하산했다 다시 올라야 한다. '양양군사유임도'라고 되어 있는데 공적 단체인 양양군이 '사유'라고 표현한 것이 어색하다
작은 마을들이 산재한 북분리에서 곧장 산길이 시작된다. 초반부터 경사가 아찔하지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접지력은 받쳐준다. 차량이 다닌 흔적은 있으나 지금은 무인지경이다. 한참을 달려 두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내리막으로 들어서면 길은 정자리 외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붙는다. 일대는 임도가 지천이고 갈림길이 많아 길찾기에 매우 주의해야 하는데 아차 잘못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된다.
아직 고도는 높지 않아서 해발 200~250m 선을 오르내린다. 네 번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군부대 가는 길이 분기하며, 주변 길이 잘 정비되고 통행 흔적이 보이는 것은 군부대 때문이다. 양양이든 주문진이든 가까운 읍내까지 자동차로도 30분 이상 가야 하니 군인들이 느끼는 격리감은 상당할 것이다.
군부대 갈림길을 지나 100여m 가면 흙길 업힐과 시멘트길 다운힐이 다시 나뉘는데 흙길로 가야 한다. 흙길이지만 통행이 드물고 관리를 하지 않는 듯 노면이 거칠고 잡초도 무성하다. 조금 올라가면 차단기가 길을 막고 앞에는 차량 한 대가 서 있다. 등산 올 일은 없을 테고 아마도 약초꾼일 것이다.
벌목한 목재가 이리 쌓여 있는 것은 그만큼 삼림이 울창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산악기상관측장비는 강원도 산지에서 가끔 만난다 만월산 북사면으로 접어들면 잡초가 우거진 구간이 잠시 나온다
“아니, 이런 곳을 자전거로 왔어요!?”
차단기를 지나 잡초가 무성한 길을 얼마쯤 올라가다 돌아나오는 약초꾼을 만났더니 깜짝 놀란다. 이런 곳에서 자전거를 조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그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계속 감탄사만 연발한다.
잡초는 갈수록 심해지지만 한여름을 지나 살짝 마른데다 줄기에 힘이 없어 헤치고 나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다만 풀숲에서는 변속기에 잡초가 끼지 않도록 돌파 중에는 변속을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옷에 씨앗과 벌레가 달라붙지 않게 주행라인 선정에 주의해야 한다. 경험상 이런 잡초 지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산자락을 돌아나가는 임도는 방향에 따라 일조량과 토질, 습도가 달라져 잡초가 자라기 좋은 곳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능선을 돌아 서사면으로 들어서자 잡초가 사라졌다.
아, 대청봉이다! 오른쪽으로 화채봉을 거쳐 맨 뒤에는 북설악의 상봉~신선봉 능선까지 드러났다
이제부터 길은 한없이 구불거리며 만월산 북릉을 넘어간다. 만월산 일원은 삼림이 울창해 숲 관리를 위해 임도를 많이 개설한 것 같다. 그런데… 저곳은! 한참 멀리 있을 줄 알았던 설악산 대청봉이 낮은 능선 너머로 훌쩍 다가섰다. 옆으로 화채봉도 오똑하고 맨뒤에는 북설악의 상봉~신선봉이 선명하다. 시점의 고도가 해발 300m 정도여서 대청봉의 웅자가 한결 강조된다. 만월산 주릉에 오르면 또 어떤 조망이 기다릴지 기대감도 커진다.
이윽고 만월산 주릉을 넘어 동사면으로 접어들었다. 나무 사이로 잠깐씩 동해가 보인다. 광막한 코발트블루 저편에는 수평선이 드리워져 지구와 내 시선이 접선한다. 시선과 지구 곡률의 접선 연장이 곧 수평선이니 내 시점에서는 평평한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보이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지구가 무한평면이 아니라는 것은 수평선 뒤에 반쯤 가라앉은 구름만 잘 살펴도 알 수 있지만 구체 위에 사물이 직립해 있는 것은 중력을 감안해도 여전히 신기하다.
동해안 저 멀리 아스라한 속초. 가까이 보이는 첨탑은 양양공항 관제탑이고 그 오른쪽으로 활주로가 길게 펼쳐져 있다
동해고속도로 뒤편으로 갑자기 '젊은이들의 성지'로 떠오른 인구항이 가깝다
끝도 없을 것만 같던 숲길이 끝나고 마침내 널찍한 시멘트 도로와 만났다. 만월산 동쪽 상월전리 방면에서 양양풍력발전소로 오르는 길이다. 양양풍력발전소는 올봄부터 가동되고 있건만 관광용 추가 개발이나 홍보가 되지 않아 알려져 있지 않다. 주민들의 반대로 장시간 가동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경관 훼손과 전자파 피해를 문제 삼는 주민들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이왕 완성되었으니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풍력발전기는 만월산 정상 남쪽 주능선을 따라 11기가 200~30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주능선에 도착하면 북쪽으로 2기, 남쪽으로 9기가 있으며, 경관이 좋은 남쪽으로 먼저 향한다. 기둥높이 60m, 날개 지름 40m 총높이 100m에 달하는 거대 바람개비가 윙윙 거리며 돌아간다. 이 바람개비 하나가 4.2메가와트(MW)의 전력을 생산하며 이는 약 3천 가구에 전력을 댈 수 있는 용량이다. 전체 발전량은 46.2MW이니 3만5천 가구에 전기를 댈 수 있다. 양양과 속초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전력이다. 풍력발전이 생각보다 효율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동해안을 낀 백두대간은 바람이 많아 풍력발전에 특히 효과적이어서 대관령을 위시해 많은 풍력발전소가 들어서고 있다.
만월산 주능선에 자리한 양양풍력발전소. 남쪽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11기의 발전기가 서 있다
풍력발전기는 인공물인데 자연 속에서 위화감이 거의 없다. 무려 2만2900V의 초고압 전력을 생산하는 이 거대하고 하얀 기계는 ‘풍차’와 닮은 이유 하나로 친근하고 목가적인, 서정풍경의 상징이 됐다. 가까이서 보면 너무 거대해서 위압감이 들지만 조금만 떨어지면 정겨운 표정으로 돌변한다. 발전기 사이를 연결하는 길도 동화적인 세계로 인도하듯 매혹적이다.
발전기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각각 다르다. 바로 옆 서쪽으로는 응복산(1360m)이 웅장하다. 정상 오른쪽으로 빗금을 그리며 뻗어난 임도는 미천골에서 넘어와 법수치리로 내려가는 국내 굴지의 장대 다운힐 코스다. 해발 980m에서 법수치리까지, 고도차 800m 길이는 무려 20km에 달하는 국내최장의 임도 다운힐이다. 산 너머 미천골은 계곡미가 빼어나고, 주능선 이쪽 다운힐은 장대하면서도 원시적인 이 길을 널리 알리고 싶어 20여 년 전 산악자전거 어드벤처 대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참가자 중 한 분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불행한 사고가 났고, 행사 책임자로서 나는 큰 충격과 함께 자책감에 미천골은 물론 양양도 다시 찾지 않았다. 그 길이, 그 산이 저 앞에 다시 보이는구나.
북쪽 미천골을 거쳐 법수치리로 내려가는 '미천골 임도'가 저 편으로 보인다. 다운힐만 20km에 달하는 엄청난 코스다. 정면의 봉우리는 응복산 북릉의 1157m봉
맨왼쪽 연곡에서 경포대~안목해변까지 강릉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11기의 풍력발전기 중 남쪽으로 9번째 발전기가 위치가 특히 좋아서 전망이 발군이다. 고도는 11번째가 해발 610m로 가장 높고 9번째는 590m 정도다. 9번째 발전기 바로 옆으로 벌목지가 있어 조망을 가리지 않아 어성전계곡이 발밑으로 보인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응복산~오대산 두로봉에 이르는 근육질 산악미가 박력 있게 맥동 친다. 지금은 멀리서 바라보지만 저 능선, 저 계곡을 다 가보려면 한 번의 인생으로는 턱 없이 부족할 것이다. 1세대 방랑자 김시습과 방랑의 대명사인 김삿갓 두 사람도 평생을 돌아다녔으나 그들이 밟은 영역은 한반도의 일부에 그쳤다. 현대적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교통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우리는 누군가가 미리 설정해둔 루트를 따라 ‘길’ 위에서만 주마간산 할 수 있을 뿐이다. 발바닥이 차지하는 ‘점’이든, 발걸음이 연결하는 ‘선’이든 지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은 것을 기준으로 하는 ‘시야’를 포함해도 점과 선이 조금 굵어지는 정도다. 우리는 그렇게 얼기설기 엉성하게 다니고 보다가 사라져간다.
오대산 두로봉(1423m, 왼쪽)에서 응복산(1360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웅장하다
동쪽 아래 달래저수지에서 바라본 양양풍력발전소와 만월산(맨오른쪽 둔중한 봉우리)
발전소 능선길에서 강릉과 속초가 동시에 보이는 것도 각별하다. 흔히들 강릉과 속초는 가까운 거리로 알기 쉬운데 직선으로 55km나 떨어져 있으며, 이는 서울-평택 정도에 해당하고 자동차로 1시간이 걸리는 꽤 먼 거리다. 두 도시는 닮은 점이 많아서 똑 같이 동해를 끼고 있고, 속초는 설악산이 있어 강릉은 대관령 덕분에 더욱 입체적이고 다채롭다. 동해 북부에만 있는 희귀한 석호(潟湖)와 해안평야를 낀 것도 특별하다.
이제 해안선까지 13km에 이르는 다운힐이 기다린다. 도중에 작은 고개 2개를 넘어야 하지만 전반적인 다운힐 속에 잠깐의 헐떡임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고개 업힐 중에 배터리가 끝장나고 말았다. 그래도 마음은 느긋하다. 고갯마루까지 잠깐만 끌면 해안까지 내리막이 기다리니까. 해변에 도착하니 “처~얼썩 쏴~” 울부짖는 파도가 여전하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양양 만월산 3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