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권강릉 향호 ~ 양양 매호

자생투어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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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육지 사이, 강릉과 양양 사이

고즈넉한 양양 매호 호반 산책로 

동해안에는 18곳의 천연 호수가 있다. 모두 내만이 모래더미(砂州)에 갇혀 생겨난 석호(潟湖)로, 담수와 해수가 뒤섞인 기수(沂水)가 특징이다. 특별한 생태 환경으로 인해 플랑크톤을 비롯해 서식 생물이 다채롭고 백사장과 구릉지를 아우르는 경관도 특별하다. 국내의 호수는 대부분 댐을 쌓아 생겨난 인공호수여서 어딘가 자연스러움이 떨어진다면, 동해안의 석호는 천연 그대로의 모습이고 수심이 얕아 습지 분위기가 물씬한 것도 특징이다.

 석호는 강릉 경포호와 속초 영랑호, 청초호가 가장 크고 대표적이지만 작은 호수들도 고성~강릉 간에 다수 분포한다. 이번에는 강릉 북단의 어항인 주문진 인근 향호(香湖)에서 양양에 자리한 매호(梅湖)까지 두 석호를 이어서 가본다. 두 호수는 동해안자전거도로와 접해 있어 찾기 편하지만 사전 지식이 없으면 그냥 통과하기 쉽다.

주문진해변에서 출발한다. 겹주름의 파도가 끊임 없이 밀려들어 대자연의 무한 에너지에 경외감을 갖게 한다

출발지는 남쪽의 주문진해수욕장으로 잡는다. 넓은 주차장 주변에는 솔밭이 울창하고 백사장은 여러 개의 해수욕장으로 구분될 정도로 장대하다. 남쪽 소돌해변에서 남애1리해변까지 장장 5.3km의 단일 백사장이다.

해안으로 나서면 동해안자전거길 표식이 반겨준다. 정밀이지 동해안자전거길은 축복이다. 대 해를 마주보며, 내내 파도소리를 들으며 달릴 수 있는 길은 현실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환상의 여로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길도 하루 100km씩 달린다면 어느 순간 식상할 수 있다. 동해안의 진면목을 만나려면 하루 50km가 족하지 않을까 싶다.

주문진해변에서 남애1리해변까지 장장 5.3km의 백사장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지경리해변의 국토종주길 인증센터. 구식 스탬프에 잉크는 남아 있지만 부스는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낡았다. 이렇게 국토종주길도 연륜을 쌓아간다 

이즈음은 몇km마다 해수욕장이 있고 예쁜 펜션과 카페가 즐비하다. 서핑의 유행으로 서핑스쿨이나 관련 가게도 많다. 파도를 타는 위험한 행위는 한때의 산악라이딩처럼 극한의 자유의지와 현실도피적 스릴로 젊은이들을 매료시킨다.

향호는 주문진해변에서 조금 올라간 향호해변에서 7번 국도 아래로 진입한다. 진입로 물길이 호수와 바다를 잇는 수로인데 지금은 백사장으로 막혀 있다. 호수면과 해수면의 수위 차이는 50cm 미만이어서 비로 수위가 높아지거나 큰 파도가 치면 물길이 트일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호수다. 향호(香湖)라는 이름은 고려 때 계곡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향나무를 묻은 매향(埋香) 풍습에서 유래했다.

향호 호반 산책로. 데크로와 농로가 같이 나 있다  

향호는 지름 660m, 둘레 2.5km 정도로 한 눈에 쏙 들어오면서도 꽤 규모감이 느껴지는 크기다. 호중도(湖中島)가 전혀 없어 말끔하고 호변에만 수초가 자란다. 일주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고 마침 아침 시간이라 주민 어르신들이 나와 함께 청소 겸 운동 중이다.

“자전거 참 특이하고 예쁘네. 남들이 안 타는 이런 걸 타야 멋있지.”

잠시 쉬노라니 어르신 한 분이 말을 거는데 연세답지 않게 센스가 있으시다. 자전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드렸더니 “나도 저런 걸 살 걸”하고 살짝 아쉬운 표정이다.

호수의 북쪽 구간은 좁은 데크로가 나 있어 라이딩이 불편하고 교행도 어렵지만 청소하는 분들 외에는 아무도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천천히 돌았건만 2.5km 한 바퀴가 금방이다. 그늘과 벤치가 드문 것이 조금 아쉽다.

'솔향 강릉' 테마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해안에는 솔밭이 지천이어서 여기 향호까지 솔 향기가 감도는 듯. 향호의 향기도 매향이 아니라 솔향이 더 어울린다   

향호와 바다가 만나는 기수지역. 작은 모래톱이 두 가지 다를 물을 겨우 경계짓고 있다. 수위차는 50cm 이하여서 큰 비나 파도에 쉽게 넘친다

향호에서 다시 해안으로 나서면 곧 양양군으로 접어들고 지경리해변을 따라 동해안자전거길이 아득히 뻗어난다. 먼 바다는 비교적 잔잔한데도 해안으로 밀려드는 파도의 기세가 대단하다. 철썩 대는 파도 소리가 내내 귓전을 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은 하늘로 비상한다. 평소에는 가장 안정적이고 무한 수평을 지향하는 물이지만 이렇게 가끔 격렬한 움직임과 굉음을 동반하며 야누스의 면모를 보여준다. 바다에는 파도가, 산에서는 폭포가 그렇다. 평소 얌전하고 조용하던 사람의 흥분이 놀랍듯 파도와 폭포는 물의 격변이다. 적막한 산에서 폭포수는 온 산중을 울리며 초현실적은 선경을 빚어낸다면, 파도 역시 조용한 해변에서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으로 대자연의 비밀 한쪽을 슬며시 드러낸다. 이 땅에서 동해는 그런 모습이 가장 극명한 곳이다. 해안선은 일목요연하고 바다에는 섬 하나 없으며 수평선은 태초의 직선으로 아스라하다.

축복이자 기적 같은 동해안자전거길.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경관과 시설이다남해1리해변의 쉼터 겸 조형물. 이렇게 예쁘고 참신한 조형물은 풍경에 예술적 미감을 더해준다  

구릉지에 기대 동그맣게 모여든 남애항은 참 예쁘다. 누가 선정했는지 모르나 강원도의 삼대 미항이라고 한다. 동해시 추암 일출과 함께 일출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는데 기실 동해안 어디서나 일출은 드라마틱하다.

바다 깊숙이 팔을 뻗은 방파제 끝까지 갔다가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오른다. 투명한 발아래 갯바위는 파도와 격렬한 투쟁 중이다. 음양오행은 ‘토극수(土克水)’라고 흙과 물이 상극이라고 하는데 바위를 흙의 일종으로 본다면 동해안에서는 특히 맞는 말이다. 옛 사람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장구한 세월을 보면 물이 결국은 바위를 깎아내고 부스러뜨리지만 길어야 100년인 인생에서 바위는 물론 백사장도 파도의 공격에 꿈쩍 않고 영원히 이겨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남애항을 지나면 동해안에서 드물게 북향을 한 남애3리 해수욕장이 은근하다. 서핑과 야자수를 내세운 조형물이 돌연 남국의 아열대로 공간이동 한 것만 같다. 이런 분위기에 취해서일까, 아직 15도 정도로 선선한데 한 남자는 수영복 차림으로 햇살을 즐기고 있다.

남애항 방파제 끝에는 버섯모양 등대가 특이하다. 뒤쪽으로 주문진~남애1리 간의 장대한 백사장이 보인다  

남애항은 영화 '고래사냥'의 촬영 무대였다. 젊은 한 시절 목 터지게 부른 주제가는 낭만과 자유 혹은 반항의 외침이었다 

남애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쪽 풍경. 자연과 인공미가 잘 어우러진 진풍경이다 

서핑과 남국의 아열대 분위기를 살린 남애3리해변천연잔디 운동장과 바다를 마당 삼은 남애초등학교. 그림 같은 환경이지만 학생은 얼마나 될까

매호는 남애3리 해수욕장에서 지척이다. 어떤 지도에는 ‘포매호’라고 되어 있으나 양양군의 공식 명칭은 매호다. 주변 산줄기가 매화 가지처럼 뻗어나고 매화도 많이 피어서 매호(梅湖)가 되었다고 한다. 지름 670m, 둘레 2.6km로 향호와 비슷한 크기인데 섬이 여럿 있어서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일주 산책로는 잘 정리되어 있고 중간중간 데크로와 징검다리가 포함되어 있다. 호반의 얕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돌연 점프를 하며 허연 배를 뒤집고 왜가리와 백로는 우아한 날갯짓으로 수면을 미끄러진다. 호수 상류에는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가 있고 그 뒤로는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첩첩으로 까마득하다.

호수 맞은편 광진해변은 언제부턴가 ‘멍’ 해변으로 통한다. 이름 없고 한적한 곳이라 ‘멍 때리기’ 좋은 곳이란 뜻이겠는데 사실 동해안 어디서든 바다를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멍해지니 멍 해변 아닌 곳이 있을까.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 그대로 역순이다. 여전히 파도는 거세게 밀어닥치고 나는 멍 하니 페달링만 할 뿐이다.

잔잔하고 외진 느낌의 매호. 멀리 구름을 인 산은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다라이딩은 물론 걷는 속도마저 빠른 데크 산책로. 바로 아래로 습지 생태를 볼 수 있다

호수 상류의 논에는 벌써 물이 가득하고 풍경은 나른하다. 옛 시에 봄 풍경의 상징으로 '사방의 못에는 봄 물이 가득하네(春水滿四澤)' 하고 읊은 그대로다

예쁘게 만든 탐조대. 이제 철새는 떠나고 소수의 텃새만 남았다  호수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많아 곳곳에 징검다리가 있다. 투박하지만 교량보다 서정적이다매호와 바다의 접점 역시 가는 모래톱이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다. 언제든 민물이 바다로 넘치거나 바닷물이 호수로 넘어올 기세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향호 ~ 양양 매호 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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