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이한 왕위쟁탈전 피해자?
- 홍수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남자
신라의 진골귀족인 김주원의 무덤. 왕위쟁탈전에 패해 강릉으로 물러났고 명주군왕으로 봉해졌다. 무덤의 격식이 조선 왕릉과 흡사해 후대에 증개축이 이뤘졌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권력을 한 사람이 장악하는 전제왕조 시절, 왕위쟁탈전은 본인은 물론 가문의 생존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그런데 신라시대, 아주 평화롭고 모양도 기이한 왕위쟁탈전이 일어난다.
서기 785년 제37대 선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관례대로 화백회의를 열어 태종무열왕의 6세손이자 재상이던 김주원을 옹립하기로 하고 즉위 준비를 했으나 때마침 홍수가 났다. 김주원의 집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집에서 왕궁(월성)으로 가려면 북천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홍수로 물이 불어난 북천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김주원의 라이벌이자 차석 재상이던 김경신이 궁중을 장악하고 즉위하니 바로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사기막리에서 명주군왕릉이 있는 보광리로 넘어가는 임도
일단 왕이 되면 경쟁자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씨를 말리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 원성왕은 김주원을 그대로 두었고 김주원은 더 이상의 권력투쟁을 포기하고 외가가 있던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갔다. 2년 뒤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를 포함해 삼척, 울진 등을 식읍(통치권역)으로 내려 화해를 꾀했다. 김주원은 명주군왕으로 살다 죽었고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내물왕계(원성왕)와 태종무열왕계(김주원) 간의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홍수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남자, 김주원은 이렇게 강릉 ‘명주군 왕릉’에 잠들어 있다. 무덤은 대관령 북동쪽 깊은 골짜기에 있어 일부러 외진 곳을 고른 것처럼 느껴진다.
임도는 트레킹 코스인 강릉바우길 4구간과 겹쳐 바우길 이정표를 참고하면 편하다. 오른쪽에서 올라왔으며, 왼쪽으로 갔다가 맞은 편으로 돌아오게 된다
조망이 트인 벌목지에서. 동해와 수평선이 아른거리고 사천진해변의 건물들이 보인다. 중간의 고가도로는 동해고속도로
나는 이 기구한 인물을 좀 더 극적으로 만나고 싶어 강릉 북쪽 사천체육공원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이 길은 강릉의 트레킹 코스인 ‘바우길’ 제4구간 사천둑방길과 상당 부분 겹쳐 바우길 표지판을 참고하면 편하다.
사천천 둑길을 따라 상류로 향하면 장중한 백두대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까마득히 높은 동해고속도로 사천교 아래를 통과하면 백두대간 아래 마지막 마을인 사기막리다. 사기막교차로에서 좌회전, 750m 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초소가 있는 임도 입구가 나온다. 이제 입산하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무명의 산지인데 최고봉은 해발 510m로 그리 높지 않으나 숲이 매우 울창하다.바우길 안내판이 반갑긴 하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지...
임도에는 이정표와 쉼터가 잘 되어 있다
임도 초입부터 곧장 가파른 업힐이 시작된다. 1.4km 가면 바우길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며, 한쪽으로 갔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 나오게 된다. 왼쪽으로 진입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업힐을 줄이고 다운힐을 늘릴 수 있다.
숲이 짙어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지만 1.8km 가면 환한 벌목지가 나오면서 조망도 시원하게 트인다. 어느새 많이 올라왔는지 해안선은 아득히 멀다.
벌목지를 지나 다시 숲길을 1km 가량 지나면 명주군 왕릉 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잠시 급경사를 내려가면 돌연 평지가 나타나면서 왕릉에 도착한다. 무덤 입구에 신도비와 재실인 능향전이 있고 석물도 많아 자못 왕릉의 격식이다. 무덤은 둔중한 언덕 위에 높직이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설을 신봉한 조선왕릉의 입지와 흡사하다.
'명주군왕릉' 신도비 뒤로 높직한 언덕에 상하 두 기의 봉분이 자리한다
봉분 위에서 바라본 모습. 봉분은 대관령을 바라보고 있다
신도비와 묘비의 내용은 김주원의 애매한 처지를 말해준다.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는 ‘시조명주군왕릉’ 또는 ‘명주군왕릉’으로 되어 있으나 봉분 바로 옆에 있는 묘비는 ‘명주군왕지묘’ ‘명주군왕 김주원지묘’라고 적혀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만 능(陵)이라 하고 신하와 백성의 무덤은 묘(墓)라고 했는데 김주원의 무덤에는 능과 묘가 뒤섞여 있다. 원성왕이 김주원을 회유하기 위해 명주의 왕으로 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는 봉건시대가 아닌 중앙집권적 왕정이었기에 왕은 호칭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능과 묘가 혼재하는 비문은 홍수 때문에 왕위를 놓친 김주원의 기구한 운명을 보여준다.
봉분은 상하 두 기가 있는데 비문이 앞쪽에 있는 것으로 봐서 김주원의 무덤이 아닌가 싶다. 봉분을 감싼 사각의 둘레돌은 근래에 조성한 것 같다.
뒤편 산에서 접근해서 그렇지 무덤의 위치는 아주 깊은 산속이다. 해발 320m나 되며 강릉시내에서는 직선으로 8km, 길 따라 11km나 떨어진 오지다. 지금도 깊은 산골인데 신라 당시에는 실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이 역시 어쩌면 ‘진짜 왕’이 되지 못한 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왕릉’을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들어선다. 길은 해발 460m까지 올라갔다가 사기막리까지 기나긴 다운힐이 시작된다.
원시적 생명력이 느껴지는 숲길 다운힐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명주군왕릉 가는 길 25km
가장 기이한 왕위쟁탈전 피해자?
- 홍수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남자
신라의 진골귀족인 김주원의 무덤. 왕위쟁탈전에 패해 강릉으로 물러났고 명주군왕으로 봉해졌다. 무덤의 격식이 조선 왕릉과 흡사해 후대에 증개축이 이뤘졌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권력을 한 사람이 장악하는 전제왕조 시절, 왕위쟁탈전은 본인은 물론 가문의 생존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그런데 신라시대, 아주 평화롭고 모양도 기이한 왕위쟁탈전이 일어난다.
서기 785년 제37대 선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관례대로 화백회의를 열어 태종무열왕의 6세손이자 재상이던 김주원을 옹립하기로 하고 즉위 준비를 했으나 때마침 홍수가 났다. 김주원의 집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집에서 왕궁(월성)으로 가려면 북천을 건너야 했다. 하지만 홍수로 물이 불어난 북천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김주원의 라이벌이자 차석 재상이던 김경신이 궁중을 장악하고 즉위하니 바로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사기막리에서 명주군왕릉이 있는 보광리로 넘어가는 임도
일단 왕이 되면 경쟁자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씨를 말리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 원성왕은 김주원을 그대로 두었고 김주원은 더 이상의 권력투쟁을 포기하고 외가가 있던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갔다. 2년 뒤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를 포함해 삼척, 울진 등을 식읍(통치권역)으로 내려 화해를 꾀했다. 김주원은 명주군왕으로 살다 죽었고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내물왕계(원성왕)와 태종무열왕계(김주원) 간의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홍수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남자, 김주원은 이렇게 강릉 ‘명주군 왕릉’에 잠들어 있다. 무덤은 대관령 북동쪽 깊은 골짜기에 있어 일부러 외진 곳을 고른 것처럼 느껴진다.
임도는 트레킹 코스인 강릉바우길 4구간과 겹쳐 바우길 이정표를 참고하면 편하다. 오른쪽에서 올라왔으며, 왼쪽으로 갔다가 맞은 편으로 돌아오게 된다
조망이 트인 벌목지에서. 동해와 수평선이 아른거리고 사천진해변의 건물들이 보인다. 중간의 고가도로는 동해고속도로
나는 이 기구한 인물을 좀 더 극적으로 만나고 싶어 강릉 북쪽 사천체육공원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이 길은 강릉의 트레킹 코스인 ‘바우길’ 제4구간 사천둑방길과 상당 부분 겹쳐 바우길 표지판을 참고하면 편하다.
사천천 둑길을 따라 상류로 향하면 장중한 백두대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까마득히 높은 동해고속도로 사천교 아래를 통과하면 백두대간 아래 마지막 마을인 사기막리다. 사기막교차로에서 좌회전, 750m 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초소가 있는 임도 입구가 나온다. 이제 입산하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무명의 산지인데 최고봉은 해발 510m로 그리 높지 않으나 숲이 매우 울창하다.바우길 안내판이 반갑긴 하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지...
임도에는 이정표와 쉼터가 잘 되어 있다
임도 초입부터 곧장 가파른 업힐이 시작된다. 1.4km 가면 바우길 안내판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며, 한쪽으로 갔다가 다른 쪽으로 돌아 나오게 된다. 왼쪽으로 진입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업힐을 줄이고 다운힐을 늘릴 수 있다.
숲이 짙어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지만 1.8km 가면 환한 벌목지가 나오면서 조망도 시원하게 트인다. 어느새 많이 올라왔는지 해안선은 아득히 멀다.
벌목지를 지나 다시 숲길을 1km 가량 지나면 명주군 왕릉 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잠시 급경사를 내려가면 돌연 평지가 나타나면서 왕릉에 도착한다. 무덤 입구에 신도비와 재실인 능향전이 있고 석물도 많아 자못 왕릉의 격식이다. 무덤은 둔중한 언덕 위에 높직이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설을 신봉한 조선왕릉의 입지와 흡사하다.
'명주군왕릉' 신도비 뒤로 높직한 언덕에 상하 두 기의 봉분이 자리한다
봉분 위에서 바라본 모습. 봉분은 대관령을 바라보고 있다
신도비와 묘비의 내용은 김주원의 애매한 처지를 말해준다.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는 ‘시조명주군왕릉’ 또는 ‘명주군왕릉’으로 되어 있으나 봉분 바로 옆에 있는 묘비는 ‘명주군왕지묘’ ‘명주군왕 김주원지묘’라고 적혀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만 능(陵)이라 하고 신하와 백성의 무덤은 묘(墓)라고 했는데 김주원의 무덤에는 능과 묘가 뒤섞여 있다. 원성왕이 김주원을 회유하기 위해 명주의 왕으로 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는 봉건시대가 아닌 중앙집권적 왕정이었기에 왕은 호칭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능과 묘가 혼재하는 비문은 홍수 때문에 왕위를 놓친 김주원의 기구한 운명을 보여준다.
봉분은 상하 두 기가 있는데 비문이 앞쪽에 있는 것으로 봐서 김주원의 무덤이 아닌가 싶다. 봉분을 감싼 사각의 둘레돌은 근래에 조성한 것 같다.
뒤편 산에서 접근해서 그렇지 무덤의 위치는 아주 깊은 산속이다. 해발 320m나 되며 강릉시내에서는 직선으로 8km, 길 따라 11km나 떨어진 오지다. 지금도 깊은 산골인데 신라 당시에는 실로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이 역시 어쩌면 ‘진짜 왕’이 되지 못한 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왕릉’을 뒤로하고 다시 산으로 들어선다. 길은 해발 460m까지 올라갔다가 사기막리까지 기나긴 다운힐이 시작된다.
원시적 생명력이 느껴지는 숲길 다운힐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명주군왕릉 가는 길 25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