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권강릉 절터와 고택

자생투어
20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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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혹은 아주 오래된 집의 애상

석탑만 남은 절터, 600살 은행나무 성성한 옛집 

 

600살 은행나무와 350살 배롱나무가 함께 있는 위촌리 함대식가옥. 배롱나무 뒤편은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집보다 나이든 나무들은 잠시 스쳐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켜만 본다 


인간의 시간 기준 중 가장 절대적인 것은 생존기간이다. 동양의 60갑자가 전형적인데 지금은 ‘인생 100년’이란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얘기다. 100살을 넘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실제 평균수명도 82.7세(남 79.9세, 여 85.6세)에 그친다. 평균수명이라고 할 때 ‘평균’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100세와 60세의 평균은 80세이듯 60세는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시간이다. 평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수치일 뿐이다.

한 사람의 생존 시간 안에 경험하거나 볼 수 있는 것은 제한된다. 이 시간을 훌쩍 초월하는 유산 앞에 설 때 우리는 무력감과 동시에 경외감을 느끼고 삶의 바닥 아래에 숨은 어떤 비밀을 살짝 엿보게 된다. 오늘은 그런 현장을 찾아 나선다.

도로주소 방식에 따라 길 이정표가 서 있다. 하지만 따로 표지판이 없으면 정작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을 알아보기 어렵고 지도에도 잘 표기되지 않는다. 도로주소에서 누락된 마을이름 복원은 시급한 과제다  

백두대간과 나란한 방향으로 중산간지대를 지나는 동해고속도로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능선을 거쳐야 하기에 까마득한 고가도로가 매우 많다  

멍청한 날짐승만 있나. 허수아비가 허술하구나

영구히 존속할 것만 같았던 곳이 사라진다…. 한때는 사람들로 붐비고 화려한 건물과 진중한 의식이 거행되던 장소가 폐허로 변하면 보는 이의 애상은 가중된다. 한 왕국의 중심이던 궁궐이 특히 그렇다. 왕조가 패망하고 폐허가 된 궁궐은 권력과 인생의 무상을 가장 극적으로 말해주는 현장이다. 예로부터 잡초에 묻힌 궁터 앞에서 읊은 회고시와 노래가 많이 남아 하나의 장르를 이룰 정도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원천석)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길재) /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구나’(두보) /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이애리수 노래)

 

한때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천재와 영웅호걸, 경국지색, 산해진미가 모여들던 곳의 격변은 내 인생의 곡절로도 전화되어 한층 깊이 공감된다.

이미 알고 있고 누구나 알지만 무상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이런 현장을 눈앞에서 만날 때마다 탄식과 절망을 금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다 가고 나도 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조선중기의 풍류객 백호 임제의 묘가 있는 나주 다시면을 지날 때 나는 당대 최고의 기녀이자 미인이었던 황진이 묘에 제사지내며 그가 읊은 시조가 떠올랐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발음이 되어 튀어나온 나의 댓구는 다분히 자조가 어렸다, ‘허어, 그런 선생은 또 왜 거기 누워 있소?’

임제 역시 황진이 사후 고작 20년 뒤에 별세했다. 나는 그보다 400여년 후이나, 지금부터 수십 년 뒤 또 누군가는 ‘백호를 비웃던 당신은 또 왜 없는 거요’하며 조소할 것이다.

강원도 산간마을은  50m 이상 띄엄띄엄 떨어진 산촌(散村)을 이룬다. 불규칙한 지형 때문에 흩어져 있는 경작지에 맞춰 집을 지어서인데 산뜻한 전원주택도 마찬가지다 

궁터는 세속적 욕망의 절대적으로 집약되었던 곳의 격변이니 허무감과 인생무상이 사무친다면, 절터는 좀 다르다. 세속과 근원적 욕망을 본질적으로 거세한 이 특별한 공간은 본디부터 허무(空)를 전제하기에 비었으되 공허하지 않고 몰락한 잔해도 애처롭지 않다.

지금 찾아가는 절터는 특기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명산대천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산이 높거나 경관이 빼어난 것도 아니며 입지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이름조차 없는 300~400m 봉우리가 흘러내린 어느 작은 골짜기 높직한 곳에 터 잡고 있으며, 지도와 안내판에는 절터보다는 ‘관음리 오층석탑’으로 표기된다.

강원도 산간마을은 집들이 한데 모여 있는 밀집형이 아니라 50m 이상씩 띄엄띄엄 떨어진 산촌(散村)을 이룬다. 불규칙한 지형 때문에 흩어져 있는 경작지에 맞춰 집을 지어서다. 백두대간과 강릉 사이 낮은 산지와 골짜기는 이런 산촌지대다. 말끔하게 새로 지은 전원주택도 마찬가지로 각자 흩어져 있어 밀집촌에 거부반응이라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에서 동떨어진 작은 골짜기에 남면하고 있는 안국사지. 고려시대 양식의 오층석탑과 석불대좌, 초석만이 남아 있지만 다행히 절터는 보존되고 있다

절터는 이런 산촌을 지나 가장 높은 지대, 그래봐야 해발 180m의 남면한 산자락에 숨듯이 있다. 다행히 절터와 영역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상처 많은 오층석탑만이 우뚝하다. 원래는 건물 내에 있었을 석불좌대는 주인을 잃은 채 노출된 채이고 주변에는 건물 초석만이 점점이 박혀 있다. 목재는 사라지고 석재만 남은, 전형적인 절터의 모습이다.

오층석탑은 층고가 낮고 조각기법과 완성도가 신라 석탑보다 떨어지는 고려시대 양식이다. 불교미술은 신라 이후 오히려 퇴보하는데 이는 신라 불교가 귀족 중심인데 비해 고려 이후는 일반 백성에게도 널리 파급되어 하향평준화된 여건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절박함’을 꼽고 싶다. 삼국 간 길고 처절한 전쟁의 시기를 겪은 삼국시대에 불교는 전쟁의 승리와 가족의 생환을 갈망하며 기도에 매달리는 호국불교 역할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와 가족의 생명, 재산,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쟁의 시대에 그 절박함은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경주 남산에 남은 수많은 불상과 절터는 그 단적인 증거다.

오른쪽 살짝 트인 골짜기 아래로 구정면 방면 저지대가 보인다. 강릉 일원의 대찰이던 굴산사지를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에 ‘안국사(安國寺)’라는 글씨가 나와 안국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뜻이니 역시 호국불교 계통 이름이다. 절 주위 능선에는 옛 산성이 있었다지만 안내문에도 없고, 우거진 수풀에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산성은 대부분 삼국시대에 축성되었기에 절은 고려 이후 버려진 옛 성터를 터전으로 세워진 것 같다. 전투를 대비한 시설인 '산성'과 호국적인 '안국사' 이름도 잘 어울린다.     

창건 후 수백 년은 존속했을 테니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거주하고 또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석탑과 좌대만이 남아 세월과 햇살과 바람에 하염없이 흩어져 가고 찾는 이가 없다. 오히려 이 무심함과 버려진 듯한 분위기가 절터에는 걸맞다. 절터 자체가 근원적인 무(無)를 지향하고 또 그를 향해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있으니까.

안국사터(지도에는 ‘관음리 오층석탑’으로 표기)를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해고속도로 남대천대교(길이 1040m)를 따라 금산리 들판으로 내려선다. 교각 높이가 55m나 되는 장대한 고가대교인 남대천대교는 들판과 시야를 동시에 반분시킨다.

주춧돌만 남은 건물터 저쪽으로 석불이 앉았을 대좌만이 텅 빈 채 있다. '무상'을 감각으로 보여주는 절터 특유의 모습이다    

금산들을 내려다보는 마을 안쪽, 좌청룡우백호와 배산임수 형국을 완전히 갖춘 명당자리에 상임경당(上臨鏡堂)이 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열(金說, 1506~?)과 관련된 유적으로, 동쪽 1km 지점에 있는 임경당과 구분하기 위해 상임경당이라 부른다. 김열은 조광조 등을 내몬 기묘사화(1519)를 보고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매진했다. 그가 만년에 은거한 곳이 바로 자신의 아호를 딴 임경당이다.

상임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날아갈 듯한 팔작 기와지붕의 별당으로 금산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놀랍게도 상임경당은 현재에 살아 있다. ‘過客(과객)’이란 격조 있는 이름을 내건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금단의 유물로 박제되지 않고 21세기를 현존한다. 이런 방식은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건물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매우 빨리 퇴색하고 낡아가기 마련인데 이렇게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니 수백 년 된 건물에도 생기가 넘치고 현대인은 전통과 세월의 기미를 경험한다.

상임경당은 '과객'이란 낭만적이고 기품있는 이름의 전통찻집 겸 카페로 운영된다. 고택을 현재에 살리는 좋은 아이디어다별채 건물인 임경당.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앞에 퇴청이 있고 대청 2칸과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정자에 가깝다 

상임경당 본채는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한 ㅁ자 구조다 

들판 저편 동쪽에 자리한 임경당은 산줄기와 들판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거의 서향이다. 고택 전체를 임경당이라 하지만 앞서 상임경당과 마찬가지로 실제 임경당은 별채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앞에 퇴청이 있고 대청 2칸과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정자에 가깝다.

임경당 옆에는 ㅁ자 모양의 본채가 있으며 창고 뒤에는 거대한 돌출 바위 몇 개를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강인한 기운과 발복의 소망을 의탁하고 있다. 의령에 있는 이병철(삼성그룹 설립자) 생가도 집 뒤에 큰 바위가 돌출해 있다.

조용한 전원풍경 속을 달리고 싶었건만 이번 코스는 고속도로가 계속 걸리적거린다. 임경당에서 강릉톨게이트 옆을 지나 북상하면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마지막으로 기복을 이루는 구릉성 저지대다. 시내가 가까워 골마다 전원주택이 산뜻하다.

낮은 산줄기가 천연 장벽을 이루고, 헌칠한 미루나무 두 그루가 운치 있는 임경당  

상임경당과 마찬가지로 임경당은 별채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앞에 퇴청이 있고 대청 2칸과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역시 정자에 가까운 구조다창고 뒤에는 돌출 바위 몇 개를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강인한 기운과 발복의 소망을 의탁하고 있다. 의령에 있는 이병철(삼성그룹 설립자) 생가도 집 뒤에 큰 바위가 돌출해 있다  

앞에는 연못이 있고 뒤에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선 고택은 대단한 위세와 유서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어딘가 주변이 어수선해 격조는 그다지 흐르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니 주인장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솟을대문 중간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아무래도 양해를 구해야할 것 같아 가까이 가서 인사를 건네자 몸이 좀 불편해 보이지만 친절하게 양해를 해준다. 집 안쪽도 둘러보고 600년 묵은 은행나무와 350살 배롱나무도 소개해 주는데, 부인이 ‘위촌다례원’이란 전통찻집도 운영하고 있단다.

가옥은 1910년 무렵 개축해 고졸한 맛은 떨어지지만 은행나무 덕분에 신비로운 품격이 느껴진다. 뒷문 밖으로 나가 가까이서 본 은행나무는 위용이 대단하다. 속이 빈 공간에는 어른 몇 명이 들어갈 만하고 높이는 25m에 이른다. 보호수 설명비에 흉고둘레가 220cm로 되어 있으나 이는 직경의 잘못 같고 실제 둘레는 6m를 넘을 것이다. 이 노거수는 지난 600년 간 이 집과 마을의 변천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20세대나 된다.

절터는 석조물만 남고 고택은 주인이 계속 바뀌며 겨우 존속하는데 고목은 600살이 외려 젊어 보인다. 아마도 앞으로 수백 년은 더 거뜬히 살며 24세기 미래마저 목도할 것이다. 인간사 희로애락쯤이야 꿈쩍도 않고 그냥 무심히 바라보면서…

집뒤의 600살 은행나무 노거수가 단연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함대식가옥. '위촌다례원'이란 전통찻집도 운영하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서 바라본 함대식가옥. 은행나무 가운데 공동에는 어른 여러 명이 들어갈 만하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절터와 고택 36km


강릉 절터와 고택.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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