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산준봉 사이 50리 협곡

길은 반듯한데 아무도 없고 자개골 협곡은 끝 없이 이어진다
아무도 없다. 환한 대낮이고 길은 넓지만 사람도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다. 마을은 아예 없고 어쩌다 있는 독채는 인기척이 없다. 지독한 사행(蛇行)으로 구비치는 협곡이라 앞에 보이는 길의 시야는 고작 200m나 될까. 계속 갇힌 공간을 이동하니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생경하고, 눈은 긴장감에 번뜩이며, 몸은 만약을 대비해 근력을 비축한다.
저 산자락 어디선가 호랑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모를 일이다. 호랑이는 아니라도 다른 맹수일 수도 있고, 그 호랑이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
오대천 변에 낙차 119m로 떨어지는 백석폭포가 출발점이다. 뒤쪽 산줄기는 상원산(1422m)과 맥이 닿아 있는 백석봉(1238m) 능선이다. 폭포수 뒤쪽에 계곡이 아니라 능선이 있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하다(실은 계곡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폭포다)
북평면에서 골지천을 따라 도는 42번 국도. 왼쪽 뒤는 육갑산(1285m). 산은 높고 가파른데 물은 푸르러 지형적 입체감이 박력있다
정선아리랑의 무대로 유명한 아우라지. 왼쪽 송천과 정면의 골지천이 만나는 합수점에 있다
구절리에서 아우라지까지 레일바이크가 진달래 절벽 아래를 달린다
“호랑이는 무슨… 오래전 헛소리요.”
골짜기 초입에 서 있던 산불지기 노인에게 슬쩍 물어보니 무슨 실없는 소리냐는 반응이다. 일단은 다행이다. 혹시라도 “지금도 가끔 그런 소문이 있다”고 했다면 혼자서 저 기나긴 골짜기에 들어서기가 영 내키지 않을 것이다. 투어를 다니면서 경험 상 가장 두려운 것은, 풀린 맹견과 멧돼지다. 그런데 호랑이라면 차원이 다른 공포다.
국내 산야에 호랑이와 곰 같은 맹수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렇다면 으슥한 산야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호환이 하도 심해서 전문 사냥꾼까지 운영했고, 10여년 전 제천의 산간지역에서는 호식총을 직접 본 적도 있다. 미국, 러시아, 캐나다, 중국, 인도처럼 땅이 광대하면 맹수에게 일정 지역을 내주고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땅이 좁은 우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맹수가 없어서 그나마 전국 어디든 등산을 다닐 수 있지 않는가.
자개골 초입. 이 수량은 15km 상류에서도 별 차이가 없다
일단은 마음을 놓았지만 예상한대로 골짜기는 아예 무인지경, 완벽한 정적이다. 계곡 물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정적의 일부로 봐야 한다. 장장 20km에 달하는 이 자개골은 서쪽 장벽을 이루는 두타산(1391m)~상원산(1422m) 능선과 용평리조트를 안고 있는 동쪽 발왕산(1459m) 사이에 참으로 길게, 그것도 거의 V자 형태의 협곡으로 패여 있다. 라이딩 코스는 오대천 변의 백석폭포를 출발해 두타산~상원산을 크게 돌아오게 된다. 지금 나는 계곡의 남쪽 입구인 송천과 봉산천 합수점을 막 들어서는 중이다.
초입은 해발 410m, 골짜기 최상류의 모래재가 920m이니 고도차는 510m 정도다. 하지만 계곡 막판의 봉산리에서 모래재까지 급경사가 있을 뿐이어서 초입에서 15km는 아주 완만한 업힐이다. 초입과 봉산리의 계곡 수량(水量)이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주변 삼림이 울창하고 지계곡이 많다. 자개골은 문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자시(子時)에 스스로 벌어졌다 닫힌다고 해서 ‘자개(自開)’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지만, 막힐 듯 끝없이 열려 있는 계곡을 표현한 말 같기도 하다. 자개골은 송천과 만나고, 합수점에서 7km 하류에는 ‘정선아리랑’의 배경이 된 아우라지가 있어서 처연한 역사성도 곁들이고 있다.
길 옆에 산사태 지역이 몇 곳 있어 언제 길이 끊어질지 위태롭다. 돌과 자갈이 항상 흘러내리고 있어 방호벽 곳곳이 망가져 있다
초입에는 잠시 시멘트 포장이다가 이윽고 거친 비포장이 시작되고, 어쩌다 완경사지에는 작은 경작지와 반 ‘자연인’ 생활일 것 같은 독채가 외롭다. 낮에도 이리 고적한데 한밤의 어둠과 적막을 어찌 견디며 지낼까. 자개골 자체가 세상 지형과 등지고 있으니, 이 골짜기에 깃든 사람들은 이중의 탈속을 기도하고 있다.
산비탈 경사가 극심해 사태가 조금씩 진행 중인 곳에는 철제 장벽을 가설해 놓았는데 이미 떨어져 내린 돌에 곳곳이 망가져 있다. 내가 지나는 순간에도 작은 돌과 흙이 흘러내리고 있어 조만간 대규모 사태가 나지 않을까 싶다. 급속으로 지나치니 “땅! 땅!” 하면서 돌이 장벽을 치는 소리가 협곡을 음울하게 울린다. 사태가 나면 상류는 길이 막히지만 모래재 길이 있으니 고립은 아니다.
봉산리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다. 옛날에는 어떤 난리도 미치지 않는, 기막힌 은둔처였을 것이다

모래재 아래 박지골 삼거리. 안내판 아래 삼각점이 있다
봉산리는 그나마 평지가 좀 있어서 경작지가 넓고 집도 여러 채다. 모래재 갈림길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다. 마침 길가에 있는 삼각점(측량을 위한 기준점)은 해발 686m를 알려준다. 고갯마루까지는 고도차 230m 정도여서 살짝 마음을 놓았는데, 어이쿠 15% 경사가 줄곧 이어지고 호랑이 목격담이 있는 두타산 중턱이라 긴장감이 더한다. 다행히 인적은 없어도 길이 널찍해 문명의 울타리 안에 있는 안심감이 든다. 호랑이든 멧돼지든 여차하면 방향을 돌려 고속으로 다운힐하면 되지 않을까 속으로 대비한다. 실제로 합천 오도산에서 다운할 할 때 따라오는 멧돼지를 따돌린 적이 있다.

모래재 업힐 도중 뒤돌아본 첩첩산중의 봉산리. 오른쪽은 고개 아래 마지막 경작지다 
두타산 북동릉을 넘는 모래재(920m) 정상. 내리막도 15% 급경사다

모래재에서 바라본 북쪽 조망. 오른쪽 임도를 따라가면 대관령면이나 용평리조트로 갈 수 있다
모래재에서 신기리까지는 거칠 것 없는 내리막이다. 왼쪽으로 두타산 정상부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고 고도가 낮아질수록 경작지와 가옥이 많아진다. 그래도 호랑이에 쫓기듯 쾌속으로 달려 오대천 직전의 신기리에 도착해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두터운 원시림을 외투 삼은 두타산이 사람의 접근을 막듯 산모롱이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신기리에서 뒤돌아본 두타산. 저 깊은 숲속에 과연 맹수가 살고 있을까
기생 청심의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청심대. 오대천 옆 절벽 위에 선바위가 외롭다 
왕복 2차로지만 광폭으로 직선화된 59번 국도는 갓길이 넉넉해 라이딩 하기에 무리가 없다. 오른쪽 멀리 가리왕산이 보인다
이제 출발지인 백석폭포까지는 오대천과 함께 달리는 59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평창올림픽에 맞춰 직선화와 확장 공사가 이뤄져 갓길이 넉넉하다. 대신 자동차들이 과속으로 질주하고 터널 몇 개를 통과해야 한다. 신기리에서는 옛길을 따라 강릉부사의 애기였던 청심(淸心)의 가여운 전설이 어린 청심대를 거쳐 마령1,2 터널을 우회한다.
남하할수록 산은 높아지고 이윽고 일대의 최고봉인 가리왕산(1562m)이 웅자를 드러낸다.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지나 한 구비 돌아서면 절벽 위에서 돌연 119m를 떨어져 내리는 백석폭포의 비말이 하얗다.
tip
백석폭포 옆에 주차장과 화장실, 식당이 있다. 북평면에서 아우라지를 거쳐 자개골 입구까지는 갓길이 좁은 도로를 이용해야 하므로 백미러를 달고 후미등을 켜고 다닐 것을 추천한다.
정선 자개골 일주 66km


거산준봉 사이 50리 협곡
길은 반듯한데 아무도 없고 자개골 협곡은 끝 없이 이어진다
아무도 없다. 환한 대낮이고 길은 넓지만 사람도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다. 마을은 아예 없고 어쩌다 있는 독채는 인기척이 없다. 지독한 사행(蛇行)으로 구비치는 협곡이라 앞에 보이는 길의 시야는 고작 200m나 될까. 계속 갇힌 공간을 이동하니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생경하고, 눈은 긴장감에 번뜩이며, 몸은 만약을 대비해 근력을 비축한다.
저 산자락 어디선가 호랑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모를 일이다. 호랑이는 아니라도 다른 맹수일 수도 있고, 그 호랑이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으니.
오대천 변에 낙차 119m로 떨어지는 백석폭포가 출발점이다. 뒤쪽 산줄기는 상원산(1422m)과 맥이 닿아 있는 백석봉(1238m) 능선이다. 폭포수 뒤쪽에 계곡이 아니라 능선이 있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하다(실은 계곡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폭포다)
“호랑이는 무슨… 오래전 헛소리요.”
골짜기 초입에 서 있던 산불지기 노인에게 슬쩍 물어보니 무슨 실없는 소리냐는 반응이다. 일단은 다행이다. 혹시라도 “지금도 가끔 그런 소문이 있다”고 했다면 혼자서 저 기나긴 골짜기에 들어서기가 영 내키지 않을 것이다. 투어를 다니면서 경험 상 가장 두려운 것은, 풀린 맹견과 멧돼지다. 그런데 호랑이라면 차원이 다른 공포다.
국내 산야에 호랑이와 곰 같은 맹수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렇다면 으슥한 산야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호환이 하도 심해서 전문 사냥꾼까지 운영했고, 10여년 전 제천의 산간지역에서는 호식총을 직접 본 적도 있다. 미국, 러시아, 캐나다, 중국, 인도처럼 땅이 광대하면 맹수에게 일정 지역을 내주고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땅이 좁은 우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맹수가 없어서 그나마 전국 어디든 등산을 다닐 수 있지 않는가.
자개골 초입. 이 수량은 15km 상류에서도 별 차이가 없다
일단은 마음을 놓았지만 예상한대로 골짜기는 아예 무인지경, 완벽한 정적이다. 계곡 물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정적의 일부로 봐야 한다. 장장 20km에 달하는 이 자개골은 서쪽 장벽을 이루는 두타산(1391m)~상원산(1422m) 능선과 용평리조트를 안고 있는 동쪽 발왕산(1459m) 사이에 참으로 길게, 그것도 거의 V자 형태의 협곡으로 패여 있다. 라이딩 코스는 오대천 변의 백석폭포를 출발해 두타산~상원산을 크게 돌아오게 된다. 지금 나는 계곡의 남쪽 입구인 송천과 봉산천 합수점을 막 들어서는 중이다.
초입은 해발 410m, 골짜기 최상류의 모래재가 920m이니 고도차는 510m 정도다. 하지만 계곡 막판의 봉산리에서 모래재까지 급경사가 있을 뿐이어서 초입에서 15km는 아주 완만한 업힐이다. 초입과 봉산리의 계곡 수량(水量)이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주변 삼림이 울창하고 지계곡이 많다. 자개골은 문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자시(子時)에 스스로 벌어졌다 닫힌다고 해서 ‘자개(自開)’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지만, 막힐 듯 끝없이 열려 있는 계곡을 표현한 말 같기도 하다. 자개골은 송천과 만나고, 합수점에서 7km 하류에는 ‘정선아리랑’의 배경이 된 아우라지가 있어서 처연한 역사성도 곁들이고 있다.
길 옆에 산사태 지역이 몇 곳 있어 언제 길이 끊어질지 위태롭다. 돌과 자갈이 항상 흘러내리고 있어 방호벽 곳곳이 망가져 있다
초입에는 잠시 시멘트 포장이다가 이윽고 거친 비포장이 시작되고, 어쩌다 완경사지에는 작은 경작지와 반 ‘자연인’ 생활일 것 같은 독채가 외롭다. 낮에도 이리 고적한데 한밤의 어둠과 적막을 어찌 견디며 지낼까. 자개골 자체가 세상 지형과 등지고 있으니, 이 골짜기에 깃든 사람들은 이중의 탈속을 기도하고 있다.
산비탈 경사가 극심해 사태가 조금씩 진행 중인 곳에는 철제 장벽을 가설해 놓았는데 이미 떨어져 내린 돌에 곳곳이 망가져 있다. 내가 지나는 순간에도 작은 돌과 흙이 흘러내리고 있어 조만간 대규모 사태가 나지 않을까 싶다. 급속으로 지나치니 “땅! 땅!” 하면서 돌이 장벽을 치는 소리가 협곡을 음울하게 울린다. 사태가 나면 상류는 길이 막히지만 모래재 길이 있으니 고립은 아니다.
봉산리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다. 옛날에는 어떤 난리도 미치지 않는, 기막힌 은둔처였을 것이다

모래재 아래 박지골 삼거리. 안내판 아래 삼각점이 있다
봉산리는 그나마 평지가 좀 있어서 경작지가 넓고 집도 여러 채다. 모래재 갈림길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다. 마침 길가에 있는 삼각점(측량을 위한 기준점)은 해발 686m를 알려준다. 고갯마루까지는 고도차 230m 정도여서 살짝 마음을 놓았는데, 어이쿠 15% 경사가 줄곧 이어지고 호랑이 목격담이 있는 두타산 중턱이라 긴장감이 더한다. 다행히 인적은 없어도 길이 널찍해 문명의 울타리 안에 있는 안심감이 든다. 호랑이든 멧돼지든 여차하면 방향을 돌려 고속으로 다운힐하면 되지 않을까 속으로 대비한다. 실제로 합천 오도산에서 다운할 할 때 따라오는 멧돼지를 따돌린 적이 있다.
모래재 업힐 도중 뒤돌아본 첩첩산중의 봉산리. 오른쪽은 고개 아래 마지막 경작지다
두타산 북동릉을 넘는 모래재(920m) 정상. 내리막도 15% 급경사다

모래재에서 바라본 북쪽 조망. 오른쪽 임도를 따라가면 대관령면이나 용평리조트로 갈 수 있다
모래재에서 신기리까지는 거칠 것 없는 내리막이다. 왼쪽으로 두타산 정상부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고 고도가 낮아질수록 경작지와 가옥이 많아진다. 그래도 호랑이에 쫓기듯 쾌속으로 달려 오대천 직전의 신기리에 도착해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두터운 원시림을 외투 삼은 두타산이 사람의 접근을 막듯 산모롱이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신기리에서 뒤돌아본 두타산. 저 깊은 숲속에 과연 맹수가 살고 있을까
왕복 2차로지만 광폭으로 직선화된 59번 국도는 갓길이 넉넉해 라이딩 하기에 무리가 없다. 오른쪽 멀리 가리왕산이 보인다
이제 출발지인 백석폭포까지는 오대천과 함께 달리는 59번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평창올림픽에 맞춰 직선화와 확장 공사가 이뤄져 갓길이 넉넉하다. 대신 자동차들이 과속으로 질주하고 터널 몇 개를 통과해야 한다. 신기리에서는 옛길을 따라 강릉부사의 애기였던 청심(淸心)의 가여운 전설이 어린 청심대를 거쳐 마령1,2 터널을 우회한다.
남하할수록 산은 높아지고 이윽고 일대의 최고봉인 가리왕산(1562m)이 웅자를 드러낸다.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지나 한 구비 돌아서면 절벽 위에서 돌연 119m를 떨어져 내리는 백석폭포의 비말이 하얗다.
tip
백석폭포 옆에 주차장과 화장실, 식당이 있다. 북평면에서 아우라지를 거쳐 자개골 입구까지는 갓길이 좁은 도로를 이용해야 하므로 백미러를 달고 후미등을 켜고 다닐 것을 추천한다.
정선 자개골 일주 6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