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들판, 지평선은 아득히
시선의 끝에서 산이 사라지는 순간, 지평선은 호흡도 심박도 멈춘 풀플랫 라인으로 드러난다. 산악 천지의 이 땅에서 극히 드문 이런 장관은 오직 호남평야에서만 볼 수 있다. 문득 광야와 직선, 무한 수평에 대한 갈증이 차고 넘친다면 호남선을 탈 일이다. 추수가 끝난 광야에는 볏짚을 담은 ‘마시멜로’만이 뒹굴고, 거칠 것 없는 들바람은 전진을 막거나 혹은 부추기며 난무하는 직선들 속에서 동그라미 두 개를 도들새김 한다
만경강 자전거길에 있는 정자 쉼터에서(만경읍 소토리)
호남평야의 중심은 아무래도 김제 벽골제일 것이다. 삼한시대부터 이 광야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제방을 쌓아 거대한 저수지를 축조한 것은 선조들이 이 평야에서도 핵심지대를 골랐다는 뜻 아닐까.
호남평야의 최대영역은 논산에서 고창까지 남북 100km, 동서 40km 정도다. 중간중간 낮은 야산과 구릉지가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 해발 50m 이하에 그친다. 그래서 이 광야에서는 해발 20m만 되어도 어엿한 산 이름이 붙는다.
호남평야를 적시는 주요 젖줄은 만경강과 동진강이다. 두 강은 이 광야를 관통하며 수많은 지류와 더불어 풍요의 원천이 된다.
동진강 지류인 원평천에 근접한 벽골제를 출발해 김제 외곽을 돌아 다시 만경강을 타고 내려와 광활면의 간척평야를 일주할 것이다. 거리는 약 70km. 그래봤자 이 광야의 일부만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벽골제 제방과 한글비석 비각. 450m의 제방이 남아 있고 저수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벽골제의 쌍룡 조형물. 한 마리의 길이가 30m에 달하는 거대 규모다. 뒤쪽에 국립청소년농생명센터의 전망타워가 우뚝하다(축제 때만 개방)
벽골제 옆 원평천 하중도에 있는 신털미산. 제방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해발 16m인데도 어엿한 산 이름이 붙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박물관뿐이던 벽골제는 이제 너무 크고 화려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벽골제(碧骨堤)는 이름 그대로 제방을 말하며, 원평천 중류에 제방을 쌓아 광대한 저수지를 확보해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북쪽의 화초산(30m)과 남쪽의 명금산(56m) 줄기를 연결해 폭 3km 이상의 호수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김제 부량면 동쪽은 대부분 저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골제 바로 옆의 신털미산(16m)은 제방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대동여지도에도 저수지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 저수지 형태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진강 제1지류인 원평천. 벽골제는 이 원평천을 가로 막은 둑이었다. 오른쪽 철탑 뒤로 모악산(794m)이 우뚝하다. 호남평야 어디서나 가장 높이 올려다보이는 모악산이 신성시 된 이유를 알 만하다. '어머니산' 모악은 전주는 물론 호남평야의 진산인 셈이다
아리랑문학마을에 재현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이다
평야 주변, 약간의 산지만 있어도 둑을 쌓아 조성한 대형 저수지가 있어 들판에 물을 댄다. 벽골제의 현대판은 여전히 유용하다
벽골제에서 원평천을 따라 하류로 가다가 쌍궁교를 건너 마을 몇 개를 지나면 아리랑문학마을이다.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마을을 재현해놓았는데 거창한 규모의 하얼빈역까지 있어 놀랐다. 주변에는 언덕과 숲이 있어 평야로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봐야 해발 20m 정도다.
고속도로 같은 23번 국도와 나란히 북상하다 신평천 둑길을 타고 동진한다. 김제시내를 북쪽으로 우회하는 구간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통과해 김제지평선공단 옆으로 해서 백산저수지로 이어진다. 여기 김제 백산면은 동학혁명의 거점이던 부안 백산면과는 다른 곳이다.
마침 지평선공단에 편의점이 있어 따뜻한 커피와 함께 잠시 쉬어간다. 이후 코스에서 편의점은 아예 없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청기와 지붕의 마을회관이 무한 정겹다(김제 동지산리)
들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시멜로' 모양의 하얀 원통들은 볏짚을 포장한 것이다. 이제 볏짚가리는 더이상 볼 수 없다
만경강변에 조성된 청하면동지산리 파크골프장. 공간의 여유가 마음과 시간의 여유로 승화된다. 멀리 익산 시가지가 아련하다
수운 창고가 있던 신창마을에는 1933년 개통된 새창이다리가 남아 있다. 한때는 '만경대교'로 불리던 다리로 지금은 보행교로만 사용된다
지평선공단에서 수록리 수로를 따라 북상하면 구릉지는 점점 잦아들고 들판은 넓어지다가 이윽고 만경강을 만나게 된다. 강변에는 자전거길까지 나 있어 반갑다. 북으로는 멀리 군산 오성산(228m)과 망해산(230m)~함라산(240m)이 꽤 높고 큰 산악지대로 다가온다. 만경(萬頃)이나 되는 넓은 벌판이라는 뜻의 만경강이나 만경읍에 들어설 때는 언제나 작은 설렘과 풍요의 여운이 느껴진다. ‘만경’은 ‘넓다’는 수사로 쓰였지만 1경(頃)은 3천평(약 1헥타르)으로 예전에 농가 1가구당 평균 경작지 면적이니 1만 농가의 경작지에 해당한다. 수사가 아니라 만경읍과 만경강 하구 일대의 들판만 해도 1만경(3000만평=약 100㎢)은 너끈히 된다. 만경들도 넓지만 만경강 둔치 갈대밭도 굉장하다.
전국적인 붐인 파크골프장이 만경강변에도 거대하게 자리 잡았고 평일인데도 만원이다(청하면 동지산리). 작은 강변마을인 신창에는 오래 된 새창이다리, 호남고속도로 만경강교, 711번 지방도 만경대교, 29번 국도 청하대교까지 4개의 다리가 만경강을 건넌다. 작은 마을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교통의 요지라는 뜻이겠다.
만경강 하류 자전거길. 무인지경이지만 갈대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몽환경으로 반겨준다
해 질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어지는 만경낙조전망대. 만경8경의 제1경이란다. 해가 지는 서쪽은 바다가 아니라 새만금방조제 내만이다
작은 언덕 위에 조성된 만경낙조전망대. 떠나는 길에 뒤돌아보니 들판 중에 언덕도, 정자도, 나무도 모두 홀로여서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자전거길이 끝나는 화포리에는 부드러운 언덕 모양의 만경낙조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아주 외진 곳이라 매우 조용하고 주변 풍광이 장쾌하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일몰을 보고 싶지만 갈길 먼 나그네는 잠시 서성이다 발길을 돌린다.
이제부터는 마치 광야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산들을 징검다리처럼 찾아가는 길이다. 산이라고 해도 높이는 30~50m 정도이니 웃지 마시길. 하지만 호남평야에 서는 순간 이들 낮은 언덕도 당연한 산으로 느껴진다.
첫 번째 목표는 몽산(41m). 그냥 ‘꿈 몽’이 들어간 이름만으로 묘한 동경심이 인다. 원래는 소가 누워 꿈꾸는 형상이라 해서 우몽산(牛夢山)이다가 몽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변 지척의 들판에서 41m면 낮은 높이가 아니다. 이런 들판에서 야산은 생사의 의지처가 되어, 살아서는 집을 짓고 죽어서는 산자락에 묻힌다. 들판에 띄엄띄엄 있는 산들은 곧 마을이자 묘지이기도 하다.
만경강 하구 둔치에 조성된 광대한 잔디밭. 판매용으로 가꾼 듯하다. 아득히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지나는 고군산군도가 보인다
전원풍경을 망치고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은, 방치된 폐가는 시골지역의 큰 난제다
평야 가운데 징검다리처럼 있는 산(?)들을 차례로 찾아 가는 길. 첫번째 목표는 몽산(41m)이다. 꿈 몽 자가 괜히 마음을 끈다. 마을 이름은 '몽포'이니 간척 전에는 동진강 하구를 낀 포구였을 것이다 수로를 따라가다 보니 비포장 흙길도 나온다
간척 전에는 동진강 하구를 접한 포구였을 남포산(25m)
몽산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성덕산(27m)이 다음 목표다. 높이가 너무 낮으나 주변에 숲이 우거진 구릉지가 분포해서 꽤 넓은 산지로 느껴진다. 도중에 대규모 도로공사장을 지나는데 새만금전주고속도로(24년 개통)다. 아무리 넓은 평야라지만 넓은 도로가 너무 많이 생겨 농지가 줄고 있고, 차량 소음도 지평선을 맴돈다. 그래도 주민들에게는 필요하고 유용한 길일 것이다.
다음에 갈 남포산(25m)은 들판 중에 홀로 떨어져서 알아보기 쉽다. 포구 포(浦) 자가 들어간 지명도 괜스레 그리움을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부포(釜浦)로 되어있고, 만경읍 기준으로 남쪽 바닷가여서 남포(南浦)가 된 듯하다.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 한가운데다. 702번 지방도를 끼고 있어 남포산을 둘러싼 마을은 꽤 크고 활기가 있다.
남포산에서 명량산 가는 길목에 있는 정자 쉼터. 들판 한가운데 있어 밝고 명랑한 분위기다(김제 대창리)
일대에서 가장 높고 긴 산줄기를 이룬 명량산(52m). 채석 흔적인 듯 암벽이 드러나 있다. 왼편으로 메타세쿼이어 가로수길 살짝 보인다 명량산 남단에 있는 공도교와 해창배수갑문. 물을 가두는 보 역할과 함께 해수의 역류를 막는 역할을 한다
명량산에서 죽산 가는 원평천 둔치 길
명량산(52m)은 상대적으로 높기도 하지만 길쭉해서 단연 눈에 띈다. 한자로는 울 명(鳴) 자가 들어간 명량(鳴良)인데, 원래는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계화산(245m)과 붙어 있던 형제산이었다가 풍랑에 떠내려 와 울다 지친 동생 산이라고 한다. 서편은 채석 흔적이 있을 정도로 급준한 바위 절벽이어서 그 옛날 동진강 하구였을 때는 조석에 따라 큰 물소리가 난 것이 아닐까 싶다.
명량산에서 이 일대의 중심지 죽산리를 품고 있는 죽산(28m)은 원평천 따라 2km 남짓이다. 둔치길은 갈대가 무성하게 피어올라 바람 따라 일률적으로 군무를 추는 모습이 따사롭다. 죽산리에는 요즘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초등학교를 비롯해 고등학교까지 있을 만큼 마을이 크고 번화하다. 일제 때 주변 땅을 싹쓸이했던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소도 죽산 아래에 있었고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일제 시절 죽산 일대를 간척해 대지주가 되었던 일본인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
이제 동진강을 따라 간다. 백산을 향해
죽산 다음은 동학혁명의 기치가 오른 곳 중의 하나인 부안 백산(49m)이다. 죽산에서 5.5km나 떨어져 있어 가물가물하다.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23번 국도를 따라 동진강을 건너 잠시 고부천을 따라가다 동진강 본류 강둑길을 타면 백산에 이른다. 고부천은 동학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고부관아 바로 그 고부(古阜)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다. 이렇게 넓은 평야에서 풍요와 여유가 아니라 오히려 수탈과 핍박이 횡행했다니 아이러니다. 역시 인간은 결핍보다는 풍요를 견디지 못한다.
하얀 바위로 이뤄져서 백산(白山)이라고 하며 서쪽에는 폐채석장처럼 수직암벽이 드러나 있다. 삼국시대 백제부흥군의 기지였던 백산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해 변산반도의 주류성에 웅거하면서 부흥군을 이끌었는데, 이곳 백산성을 통해 김제시내 성산까지 거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부여풍이 일본에서 온 원군을 맞은 곳도 백산이라고 한다. 663년 백제-왜 군과 신라-당 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백강(白江)의 위치에 대해 설이 많은데 백산을 끼고 있는 동진강 하구가 그럴듯해 보인다.
백산에서 벽골제까지 7km는 완공한 지 근 70년이 되는 군포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간다. 29번 국도가 확장되어 옛날 도로는 한산한 편이고 갓길도 넓다. 평지이긴 하지만 70km를 달려온 피로가 적지 않고 볼거리도 많아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래도 호남평야의 핵심을 돌면서 시야는 넓어지고 흉금도 트였는지 귀가길의 악몽 같은 정체도 넉넉히 품을 도량이 되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을 막고 있는 하장갑문교. 워낙 낡아서 개축공사 중이다
저 편으로 들판 중에 거대 고분처럼 동그마한 백산이 보인다
백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동진강과 호남평야. 미세먼지 때문에 지평선도 뭉개졌다
삼국시대 말기, 백산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다. 평탄한 정상부는 옛날 산성의 흔적을 말해준다. 중심에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서 있다
이 들판에서 길은 휘어질 이유가 없다. 전신주와 더불어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도로
호남평야 핵심지대 일주 72km
가도 가도 들판, 지평선은 아득히
시선의 끝에서 산이 사라지는 순간, 지평선은 호흡도 심박도 멈춘 풀플랫 라인으로 드러난다. 산악 천지의 이 땅에서 극히 드문 이런 장관은 오직 호남평야에서만 볼 수 있다. 문득 광야와 직선, 무한 수평에 대한 갈증이 차고 넘친다면 호남선을 탈 일이다. 추수가 끝난 광야에는 볏짚을 담은 ‘마시멜로’만이 뒹굴고, 거칠 것 없는 들바람은 전진을 막거나 혹은 부추기며 난무하는 직선들 속에서 동그라미 두 개를 도들새김 한다
만경강 자전거길에 있는 정자 쉼터에서(만경읍 소토리)
호남평야의 중심은 아무래도 김제 벽골제일 것이다. 삼한시대부터 이 광야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제방을 쌓아 거대한 저수지를 축조한 것은 선조들이 이 평야에서도 핵심지대를 골랐다는 뜻 아닐까.
호남평야의 최대영역은 논산에서 고창까지 남북 100km, 동서 40km 정도다. 중간중간 낮은 야산과 구릉지가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 해발 50m 이하에 그친다. 그래서 이 광야에서는 해발 20m만 되어도 어엿한 산 이름이 붙는다.
호남평야를 적시는 주요 젖줄은 만경강과 동진강이다. 두 강은 이 광야를 관통하며 수많은 지류와 더불어 풍요의 원천이 된다.
동진강 지류인 원평천에 근접한 벽골제를 출발해 김제 외곽을 돌아 다시 만경강을 타고 내려와 광활면의 간척평야를 일주할 것이다. 거리는 약 70km. 그래봤자 이 광야의 일부만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벽골제 제방과 한글비석 비각. 450m의 제방이 남아 있고 저수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벽골제의 쌍룡 조형물. 한 마리의 길이가 30m에 달하는 거대 규모다. 뒤쪽에 국립청소년농생명센터의 전망타워가 우뚝하다(축제 때만 개방)
벽골제 옆 원평천 하중도에 있는 신털미산. 제방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해발 16m인데도 어엿한 산 이름이 붙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박물관뿐이던 벽골제는 이제 너무 크고 화려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벽골제(碧骨堤)는 이름 그대로 제방을 말하며, 원평천 중류에 제방을 쌓아 광대한 저수지를 확보해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북쪽의 화초산(30m)과 남쪽의 명금산(56m) 줄기를 연결해 폭 3km 이상의 호수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김제 부량면 동쪽은 대부분 저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골제 바로 옆의 신털미산(16m)은 제방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대동여지도에도 저수지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 저수지 형태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진강 제1지류인 원평천. 벽골제는 이 원평천을 가로 막은 둑이었다. 오른쪽 철탑 뒤로 모악산(794m)이 우뚝하다. 호남평야 어디서나 가장 높이 올려다보이는 모악산이 신성시 된 이유를 알 만하다. '어머니산' 모악은 전주는 물론 호남평야의 진산인 셈이다
아리랑문학마을에 재현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이다
평야 주변, 약간의 산지만 있어도 둑을 쌓아 조성한 대형 저수지가 있어 들판에 물을 댄다. 벽골제의 현대판은 여전히 유용하다
벽골제에서 원평천을 따라 하류로 가다가 쌍궁교를 건너 마을 몇 개를 지나면 아리랑문학마을이다.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마을을 재현해놓았는데 거창한 규모의 하얼빈역까지 있어 놀랐다. 주변에는 언덕과 숲이 있어 평야로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봐야 해발 20m 정도다.
고속도로 같은 23번 국도와 나란히 북상하다 신평천 둑길을 타고 동진한다. 김제시내를 북쪽으로 우회하는 구간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통과해 김제지평선공단 옆으로 해서 백산저수지로 이어진다. 여기 김제 백산면은 동학혁명의 거점이던 부안 백산면과는 다른 곳이다.
마침 지평선공단에 편의점이 있어 따뜻한 커피와 함께 잠시 쉬어간다. 이후 코스에서 편의점은 아예 없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청기와 지붕의 마을회관이 무한 정겹다(김제 동지산리)
들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시멜로' 모양의 하얀 원통들은 볏짚을 포장한 것이다. 이제 볏짚가리는 더이상 볼 수 없다
만경강변에 조성된 청하면동지산리 파크골프장. 공간의 여유가 마음과 시간의 여유로 승화된다. 멀리 익산 시가지가 아련하다
수운 창고가 있던 신창마을에는 1933년 개통된 새창이다리가 남아 있다. 한때는 '만경대교'로 불리던 다리로 지금은 보행교로만 사용된다
지평선공단에서 수록리 수로를 따라 북상하면 구릉지는 점점 잦아들고 들판은 넓어지다가 이윽고 만경강을 만나게 된다. 강변에는 자전거길까지 나 있어 반갑다. 북으로는 멀리 군산 오성산(228m)과 망해산(230m)~함라산(240m)이 꽤 높고 큰 산악지대로 다가온다. 만경(萬頃)이나 되는 넓은 벌판이라는 뜻의 만경강이나 만경읍에 들어설 때는 언제나 작은 설렘과 풍요의 여운이 느껴진다. ‘만경’은 ‘넓다’는 수사로 쓰였지만 1경(頃)은 3천평(약 1헥타르)으로 예전에 농가 1가구당 평균 경작지 면적이니 1만 농가의 경작지에 해당한다. 수사가 아니라 만경읍과 만경강 하구 일대의 들판만 해도 1만경(3000만평=약 100㎢)은 너끈히 된다. 만경들도 넓지만 만경강 둔치 갈대밭도 굉장하다.
전국적인 붐인 파크골프장이 만경강변에도 거대하게 자리 잡았고 평일인데도 만원이다(청하면 동지산리). 작은 강변마을인 신창에는 오래 된 새창이다리, 호남고속도로 만경강교, 711번 지방도 만경대교, 29번 국도 청하대교까지 4개의 다리가 만경강을 건넌다. 작은 마을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교통의 요지라는 뜻이겠다.
만경강 하류 자전거길. 무인지경이지만 갈대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몽환경으로 반겨준다
해 질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어지는 만경낙조전망대. 만경8경의 제1경이란다. 해가 지는 서쪽은 바다가 아니라 새만금방조제 내만이다
작은 언덕 위에 조성된 만경낙조전망대. 떠나는 길에 뒤돌아보니 들판 중에 언덕도, 정자도, 나무도 모두 홀로여서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자전거길이 끝나는 화포리에는 부드러운 언덕 모양의 만경낙조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아주 외진 곳이라 매우 조용하고 주변 풍광이 장쾌하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일몰을 보고 싶지만 갈길 먼 나그네는 잠시 서성이다 발길을 돌린다.
이제부터는 마치 광야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산들을 징검다리처럼 찾아가는 길이다. 산이라고 해도 높이는 30~50m 정도이니 웃지 마시길. 하지만 호남평야에 서는 순간 이들 낮은 언덕도 당연한 산으로 느껴진다.
첫 번째 목표는 몽산(41m). 그냥 ‘꿈 몽’이 들어간 이름만으로 묘한 동경심이 인다. 원래는 소가 누워 꿈꾸는 형상이라 해서 우몽산(牛夢山)이다가 몽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변 지척의 들판에서 41m면 낮은 높이가 아니다. 이런 들판에서 야산은 생사의 의지처가 되어, 살아서는 집을 짓고 죽어서는 산자락에 묻힌다. 들판에 띄엄띄엄 있는 산들은 곧 마을이자 묘지이기도 하다.
만경강 하구 둔치에 조성된 광대한 잔디밭. 판매용으로 가꾼 듯하다. 아득히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지나는 고군산군도가 보인다
전원풍경을 망치고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은, 방치된 폐가는 시골지역의 큰 난제다
평야 가운데 징검다리처럼 있는 산(?)들을 차례로 찾아 가는 길. 첫번째 목표는 몽산(41m)이다. 꿈 몽 자가 괜히 마음을 끈다. 마을 이름은 '몽포'이니 간척 전에는 동진강 하구를 낀 포구였을 것이다 수로를 따라가다 보니 비포장 흙길도 나온다
간척 전에는 동진강 하구를 접한 포구였을 남포산(25m)
몽산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성덕산(27m)이 다음 목표다. 높이가 너무 낮으나 주변에 숲이 우거진 구릉지가 분포해서 꽤 넓은 산지로 느껴진다. 도중에 대규모 도로공사장을 지나는데 새만금전주고속도로(24년 개통)다. 아무리 넓은 평야라지만 넓은 도로가 너무 많이 생겨 농지가 줄고 있고, 차량 소음도 지평선을 맴돈다. 그래도 주민들에게는 필요하고 유용한 길일 것이다.
다음에 갈 남포산(25m)은 들판 중에 홀로 떨어져서 알아보기 쉽다. 포구 포(浦) 자가 들어간 지명도 괜스레 그리움을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부포(釜浦)로 되어있고, 만경읍 기준으로 남쪽 바닷가여서 남포(南浦)가 된 듯하다. 지금은 간척으로 인해 육지 한가운데다. 702번 지방도를 끼고 있어 남포산을 둘러싼 마을은 꽤 크고 활기가 있다.
남포산에서 명량산 가는 길목에 있는 정자 쉼터. 들판 한가운데 있어 밝고 명랑한 분위기다(김제 대창리)
일대에서 가장 높고 긴 산줄기를 이룬 명량산(52m). 채석 흔적인 듯 암벽이 드러나 있다. 왼편으로 메타세쿼이어 가로수길 살짝 보인다 명량산 남단에 있는 공도교와 해창배수갑문. 물을 가두는 보 역할과 함께 해수의 역류를 막는 역할을 한다
명량산에서 죽산 가는 원평천 둔치 길
명량산(52m)은 상대적으로 높기도 하지만 길쭉해서 단연 눈에 띈다. 한자로는 울 명(鳴) 자가 들어간 명량(鳴良)인데, 원래는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계화산(245m)과 붙어 있던 형제산이었다가 풍랑에 떠내려 와 울다 지친 동생 산이라고 한다. 서편은 채석 흔적이 있을 정도로 급준한 바위 절벽이어서 그 옛날 동진강 하구였을 때는 조석에 따라 큰 물소리가 난 것이 아닐까 싶다.
명량산에서 이 일대의 중심지 죽산리를 품고 있는 죽산(28m)은 원평천 따라 2km 남짓이다. 둔치길은 갈대가 무성하게 피어올라 바람 따라 일률적으로 군무를 추는 모습이 따사롭다. 죽산리에는 요즘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초등학교를 비롯해 고등학교까지 있을 만큼 마을이 크고 번화하다. 일제 때 주변 땅을 싹쓸이했던 일본인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소도 죽산 아래에 있었고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일제 시절 죽산 일대를 간척해 대지주가 되었던 일본인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
이제 동진강을 따라 간다. 백산을 향해
죽산 다음은 동학혁명의 기치가 오른 곳 중의 하나인 부안 백산(49m)이다. 죽산에서 5.5km나 떨어져 있어 가물가물하다.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23번 국도를 따라 동진강을 건너 잠시 고부천을 따라가다 동진강 본류 강둑길을 타면 백산에 이른다. 고부천은 동학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고부관아 바로 그 고부(古阜)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다. 이렇게 넓은 평야에서 풍요와 여유가 아니라 오히려 수탈과 핍박이 횡행했다니 아이러니다. 역시 인간은 결핍보다는 풍요를 견디지 못한다.
하얀 바위로 이뤄져서 백산(白山)이라고 하며 서쪽에는 폐채석장처럼 수직암벽이 드러나 있다. 삼국시대 백제부흥군의 기지였던 백산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당시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해 변산반도의 주류성에 웅거하면서 부흥군을 이끌었는데, 이곳 백산성을 통해 김제시내 성산까지 거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부여풍이 일본에서 온 원군을 맞은 곳도 백산이라고 한다. 663년 백제-왜 군과 신라-당 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백강(白江)의 위치에 대해 설이 많은데 백산을 끼고 있는 동진강 하구가 그럴듯해 보인다.
백산에서 벽골제까지 7km는 완공한 지 근 70년이 되는 군포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간다. 29번 국도가 확장되어 옛날 도로는 한산한 편이고 갓길도 넓다. 평지이긴 하지만 70km를 달려온 피로가 적지 않고 볼거리도 많아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래도 호남평야의 핵심을 돌면서 시야는 넓어지고 흉금도 트였는지 귀가길의 악몽 같은 정체도 넉넉히 품을 도량이 되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을 막고 있는 하장갑문교. 워낙 낡아서 개축공사 중이다
저 편으로 들판 중에 거대 고분처럼 동그마한 백산이 보인다
백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동진강과 호남평야. 미세먼지 때문에 지평선도 뭉개졌다
삼국시대 말기, 백산은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다. 평탄한 정상부는 옛날 산성의 흔적을 말해준다. 중심에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서 있다
이 들판에서 길은 휘어질 이유가 없다. 전신주와 더불어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도로
호남평야 핵심지대 일주 7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