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주권영암 활성산(498m)

자생투어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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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고원에 가득한, 바람과 태양과 월출산

활성산 정상(오른쪽 철탑 부분) 일대 고위평탄면에 들어선 풍력발전기와 태양광 발전소. 총 5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월출산(809m) 앞에 설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더 높고 웅장한 골계미의 설악산이 있건만 월출산은 보다 치밀하고 엄청난 밀집도를 자랑하는 암봉과 기암괴석이 시각적 감동을 극대화한다. 설악산이나 금강산은 너무 높고 거대해서 산 아래에 서도 산의 일부만 볼 수 있는데 비해, 월출산은 한 시야에 전경이 담기니 한마디로 현실에 구현된 완벽한 진경산수화다. 등산으로 올라도 좋지만 마치 산수화를 감상하듯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경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월출산 바로 옆에 솟은 활성산은 지독한 골산인 월출산과 정반대로 정상부에 고위평탄면까지 있는, 물러터진 육산이다.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활성산성이 남아 있고, 대규모 풍력발전소도 들어섰다.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목가적인 초원지대였다. 북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진 백룡산(418m)은 나주평야를 향해 넓은 품을 펼치고 있고 아늑한 숲길이 잘 나 있다.

이제 월출산을 한바탕 감상한 다음 백룡산을 돌아 활성산을 오른다.

천왕사 입구에서 바라본 월출산. 그냥 입이 딱 벌어지는 감탄뿐 

“우와~”

수없이 왔어도 여전히 감탄이 나오고 꺾어진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월출산의 압도적인 골계미와 웅자는 809m 높이가 믿기지 않는다. 때마침 산 아래 들판에는 유채꽃 축제(4월 14~16)가 한창이다. 무려 100만평에 달하는, 전국최대 규모의 유채밭이 개신리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동안 가장 넓은 것으로 알려졌던 창녕 남지 유채밭이 30만평 정도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노란 유채밭 위로 치솟은 암봉은 더욱 강렬하게 하늘과 심상을 찌른다.

유채밭을 가로질러 구릉지와 조붓한 시골마을을 지나면 들판 가운데 장암정(場巖亭)이 은근하다. 주민들의 상호부조를 위한 장암 대동계가 1668년 처음 건립했고, 지금 건물은 1760년 세워졌다. 단층이지만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올려 규모감이 있다. 안쪽에는 방을 두고 삼면을 틔워 개방감이 시원하고, 월출산이 잘 보인다. 대개 정자는 유력 문중에서 건립하는 사적(私的) 공간인데 마을 공동체인 대동계 소유인 것이 특이하다. 장암정은 조선 중기 이후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대동계의 역할과 역량을 잘 보여준다. 대동계의 금전출납부인 대동계 문서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월출산 아래 들판 약 100만평에 조성된 유채꽃밭. 꽃이 만개하는 4월 중순 축제가 열린다  

주민들의 자치기구인 대동계에서 선립한 장암정. 오른쪽 지붕 뒤로 월출산 천황봉이 고고하다 

장암정에서 백룡산 가는 길은 낮은 구릉지를 구불거리고 때로는 직선으로 뻗어나는 예쁜 전원풍경이다. 정면으로는 백룡산이 펑퍼짐하고 오른쪽으로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활성산이 내내 함께 한다.

백룡산 아래 영보정(永保亭)은 조선초기의 문신 최덕지(1384~1455)와 사위 신후경이 처음 건립한 정자로, 현재의 건물은 1630년경에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규모에 높직한 단 위에 자리하고 앞에는 작은 연못이, 주위에는 고목이 우거져 분위기가 그윽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항상 열려 있어 쉬어가기 좋다.

운암리에서 백룡산 자락으로 올라붙으면 곧 환상적인 녹차밭(덕진차밭)이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지에 펼쳐진 1만3천평의 녹차밭은 기경이다. 골과 길을 따라 오와 열을 맞춘 키 작은 녹차밭은 이국풍마저 물씬하다. 녹차밭 정상부에 올라서면 월출산이 들판 저편으로 우뚝하고 점점이 낮은 구릉이 일렁이는 평원이 질펀하다.

장암정에서 영보정 가는 길. 직선로 끝에 백룡산이 둔중하게 퍼져 있다 

고목과 연못을 끼고 단 위에 자리잡아 그윽한 향취가 있는 영보정백룡산 기슭에 펼쳐진 덕진차밭. 경사면을 부드럽게 뒤덮은 차밭은 마치 빌로드 촉감 같다. 월출산과 나주평야를 바라보는 입지도 멋지다

백룡산 임도는 무엇보다 마음이 편하다. 평야지대에서는 상당히 높은 200m 등고선을 오르락거리고 숲도 짙은데 불안감이 일체 없다. 멧돼지와 마주치더라도 고함 한 번에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드는 것은, 바로 아래로 보이는 들판과 마을 덕분이다. 곁에 없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내심 기댈 수 있는 의지처…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다. 타인은 때로 지옥이지만 대체로 안심감의 근거이기도 하다. 아무리 산속에 홀로 사는 ‘자연인’이라도 산 아래 마을이 없다면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백룡산 임도는 일주 16km로, 산나물을 캐거나 산책을 나온 보행자, 차량이 가끔 있다. 이 역시 마을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동사면으로 접어들면 백색 풍력발전기가 도열한 활성산이 훤하고, 계천산(406m)에서 국사봉(615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첩첩하다. 백룡산은 서쪽은 평야, 동쪽은 산악지대로 구별되는 접점에 서있다.

이윽고 산길을 벗어나 819번 지방도를 따라 여운재까지 올랐다가 활성산으로 접어든다. 아스팔트 포장이지만 노면이 거칠고 갈수록 경사가 심해져 라이딩이 만만치 않다. 그나마 길이 넓은 것은 거대한 풍력발전기 자재 운반을 위해 확장한 덕이다.

대관령 못지 않은 명물인데 관광지로는 개발되지 않아서 휴일인데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백룡산 허리 해발 200m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는 편안한 일주 임도 

백룡산 임도 동사면 양지바른 언덕에서 한 쌍의 묘가 풍력발전기를 머리에 인 활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살짝 넘어서자 생각지 못한 장관이 펼쳐진다. 한때 목장이 있던 산자락 전체에 광대한 태양광 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풍력발전기야 산 아래서도 보이지만 태양광 발전소는 정말 놀라운 규모다. 전국을 다니며 많이 보았어도 이런 규모는 처음이다. 일대에 깔린 태양광 패널은 어림잡아 50만평은 될 것 같다. 사면에는 태양광 패널이, 능선에는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은 공학기술이 만개한 미래적인 느낌보다는 여전히 목가적이다. 인적 드문 고위평탄면에 자리한 입지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 목장일 때 와본 적이 있어서 급변한 풍경에 한편 놀라고 한편 감탄이다.

활성산 업힐. 넓은 아스팔트 길이지만 경사가 상당하다정상 직전, 성벽이 완연하게 남아 있는 활성산성. 둘레 1.5km로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활성산 정상의 통신탑은 여전한데 가까이 가 보니 더 이상 쓰지 않는 듯 울타리와 건물 모두 녹슬어 간다.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고 산불감시탑만 서 있다. 정상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활선산성의 성벽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나 이 역시 아무런 표식이나 보호조치 없이 방치되어 있다. 조금만 복원하고 관리해도 문화재이자 관광적 가치가 대단한 유적인데 아쉽다.

활성산성은 서울 풍납토성 같은 판축식(나뭇잎을 섞은 흙을 다져 눌러 단층으로 쌓음) 토성으로 둘레가 1500m나 되는 꽤 큰 규모다. 잔존 성벽 높이는 3~5m이며 성곽 특징으로 보아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활성산 좌우는 나주에서 강진과 장흥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여서 이를 통제하는 목적으로 추정된다. 서쪽으로는 영암읍내와 나주평야가 질펀하고 월출산이 가까이 마주 보인다.

활성산 정상에는 아무런 표식 없이 산불감시탑만 서 있다. 월출산이 정면으로 마주보이고 왼쪽 황무지는 활성산성 영역이다  

풍력발전기와 태양광 패널이 혼재하는 동쪽 기슭. 정면의 산은 국사봉(615m) 

정상 바로 옆 통신탑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듯, 건물이 버려져 있다. 산뜻한 전망대로 활용하면 좋을텐데 

이국풍 장관을 떠나기 아쉬워 돌아보고 또 보고 

정상 동쪽에 군성산(462m)이라는 별도의 이름이 붙은 봉우리는 풍력발전기가 들어서면서 반쪽짜리 절개지만 남았다. “웅웅~” 대며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 앞에서도 위압감이 들지 않는 것은 오로지 돈키호테 선생 덕분이다. 자전거로 풍력발전기 아래를 달리면 돈키호테가 로시난테를 타고 돌진한 라만차 언덕의 풍차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제 내려갈 시간, 남쪽으로 기나긴 다운힐이 시작된다. 활성산성을 지나 남쪽 주능선을 넘는 둔덕재(330m)까지는 급경사 내리막이다. 둔덕재에서는 남쪽으로 길고 완만하게 늘어진 구릉골을 따라가는데 예전에는 경작지와 민가가 있었던 듯 평탄지와 습지가 꾸준히 이어진다. 이제 이런 외진 곳에서 농사지을 사람도, 필요도 없겠지….

둔덕재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구릉골 상류에서 뒤돌아본 정상(왼쪽 철탑 부분) 

구릉골을 내려서면 월곡마을과 월곡저수지가 반겨준다. 산중호수의 운치가 감돈다   

다운힐이 끝나면 몇 가구 되지 않는 월곡마을이 반갑다. 작은 산간마을이라 사람도,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해발 200m이니 평야지대에서는 상당히 깊은 산중이다. 모양이 멋대로인 천수답 사이를 돌아나가면 월곡저수지가 계곡을 점하고 있다. 인공이든 뭐든 산중호수는 묘하게 신비롭다.

월곡저수지를 돌아 835번 지방도에서 우회전, 조금만 가면 돈밧재(215m) 정상이다. 이름에서 유추하듯 그 옛날, 산적들이 통행세를 받았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나 있지만 옛날에는 험준한 고개였을 것이다. 영암과 강진 병영을 연결하며, 병영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돈밧재를 신나게 내려가면 출발지인 월출산 천왕사 입구가 금방이다. 봄에는 사람도 나비가 되고 싶을까. 산 위는 적막강산인데 유채밭은 인산인해다.

 

tip

출발지인 천왕사 입구에 넓은 무료 주차장과 식당이 있으며, 귀로에 지나는 청풍원휴게소에도 식당이 있다. 활성산 정상부 풍력발전단지에서는 출입금지 구간을 지켜야 하고, 남쪽 구릉골로 다운힐 할 때는 둔덕재 철문 옆으로 통과해야 한다.

영암 활성산 4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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