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과 수평선의 대접점, 호남평야가 더 넓어지다
계화산(245m) 정상에서 본 새만금 대파노라마. 왼쪽 멀리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가 보이고, 오른쪽 두 사장교가 이어지는 도로는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며 새만금 중간을 관통하는 남북도로다. 오른쪽 멀리 군산시내가 아스라하다
여행자이자 때로는 방랑자로 살며 특히 산(山)에 주목한 것은 풍경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지표면의 요철’인 산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이 온통 평탄하다면 변화가 없으니 풍경은 어디나 똑같아서 의미가 사라진다. 하지만 지구상에 제멋대로 돌출해 있는 산은 하나도 같은 게 없으니 산이 배경이 되면 몇km만 옮겨가도 풍경이 변하고 지역이 바뀐다. 다행히 이 땅은 국토의 70%가 산지일 정도로 산이 너무나 많다. 어디를 가든, 어디를 보든 시선의 끝에, 풍경의 배경에 산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는 보기 드문 대평원을 좋아하고, 가장 넓은 호남평야는 언제나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감탄을 부른다.
광역 호남평야는 남북 100km, 동서 40km 정도여서 1000km가 넘는 평원이 지천인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들판에서 우리는 옅은 박무에도 홀연히 사라지는 먼 산줄기와 가물대는 지평선에 감격한다.
호남평야의 핵심은 김제와 부안 일원으로, 간척지인 광활면과 계화면에서 완주까지 동서 100리가 넘는 광야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 광야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더 확장되고 있으니, 바로 새만금 때문이다.만경강 하구를 건너는 만경대교는 역(逆) 아치꼴 교각이 특이하다. 세계최초의 ‘비대칭 리버스 아치교’라고 하며 ‘2023 올해의 토목구조물’ 대상을 받기도 했다. 군산에서 부안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맨 뒤편 산지는 변산반도 의상봉(509m) 일원이다
남북대로 옆으로 펼쳐진 광대한 갈대밭. 만경강 하구의 모래톱으로 추후 간척될 것이다. 오른쪽 멀리 고군산군도의 신시도가 보인다. 바로 아래는 별도로 조성된 자전거도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세계최장의 새만금방조제는 장장 33.9km나 되며 호남평야의 양대 젓줄인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바다를 내만으로 만들어버렸다. 장장 19년이 걸린 방조제 공사는 2006년 끝났고 지금은 내만의 간척과 도로 등 기초 인프라 건설이 진행 중이다.
육지 쪽을 중심으로 대규모 간척이 진행되면서 엄청난 땅이 새로 생겨나고 있으니, 최종적으로는 4만100ha(약 1억2천130만평, 여의도 140배)의 국토확장이 이뤄진다. 부지 운영과 투자 등 추진과정에서 잡음이 없지 않으나 느리지만 차근차근 진행 중인 것은 사실이다. 새 국토가 착착 확장되면서 갈 때마다 새로운 길과 땅이 생겨 있는 곳, 바로 새만금이다.
새만금에 개설되는 대로변에는 자전거도로가 조성된 곳이 많은데 아직은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 많아 중간중간 길이 끊어져 연결 투어는 어렵다. 새만금을 중심으로 군산-부안 하서 간 남북도로, 신시도-김제 심포항 사이 동서도로가 생겨 거대한 십자가를 이루고, 이들 도로에 자전거도로가 부분적으로 생겼으나 중간에 놓인 교량에서 길이 끊어져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다. 장기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추진한 것인지, 그냥 빈 부지를 자전거도로로 활용한 것인지 당장은 아쉽지만 조금은 더 지켜봐야겠다.
도로변에는 자전거도로가 많이 조성되었으나 교량을 만나면 길이 끊어져 되돌아가야 한다. 상황을 볼 때 연결 계획은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자전거로 일주가 가능한 새만금의 남쪽, 부안 방면의 새 도로와 간척지를 거쳐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섬이어서 지금도 ‘계화도’ 지명이 살아 있는 광야 속의 산(계화산, 245m)을 오를 것이다. 먼 바다 섬이었던 계화도는 이제 광야의 중심이 되어 최고의 전망대가 되었다.
출발지는 새만금방조제 남단 부근에 조성된 새만금환경생태단지로 잡는다.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산책로를 갖추고 있고 군산과 부안 어디서든 접근이 편하다. 생태단지를 나와 예전에는 갯벌이고 바다였을 광대한 평원을 달린다. 여기서 길은 직선뿐이고, 교차점은 언제나 직각이다. 흔히 경지정리가 된 평야를 바둑판에 비유하듯, 주요 교차점은 바둑판 화점(花點)처럼 간척과 개발의 추진 거점이 된다.
마침 날씨가 청명해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길 저편으로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삐죽거린다. 이 무한 수평의 2차원 평면에서 육안으로 느껴지는 10~20km는 신기루처럼 아득하다.
내륙에서는 극히 드문, 5.5km 직선로는 직각으로 꺾여 북동향한다. 삭풍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는 이곳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애매하다. 사실 길이 나고 땅이 생겼건만 새만금 내부 간척지는 아직 주소가 없다. 부안 땅에 붙었어도 부안이 아니고, 군산에 가까워도 군산이 아니다. 개발이 끝나야 주소가 부여될 모양이다. 이런 애매함, 무결정성, 원초적 시점의 열린 가능성은 새만금의 또 다른 매혹이다.
새만금방조제 남단 근처에 조성된 새만금환경생태단지 입구. 갓 완공되어 휑한 분위기지만 여정의 기점으로 좋다
새만금환경생태단지에서 광야를 가르는 장대한 직선로. 꼬박 5.5km나 이어지며 좌우의 간척지는 아직 개발 전이다
50년 전만 해도 대해 속의 섬이던 계화도는 이제 평야 중간에 우뚝한 계화산으로 남았다
이 장대한 길에 그림자만 동행할 뿐
방조제에 갇힌 호수가 되었건만 너무나 넓으니 바다급 파도가 친다 간간이 나오는 쉼터는 경치가 기가 막히지만 찾는 이가 없으니 사용감 없이 낡아간다
크루즈 선박을 테마로 만든 월드크루즈가든 쉼터 겸 전망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가듯, 마스트의 녹이 심하다
계화산 가는 길. 좁은 둑길인데 난간이 있어 안정감과 미감을 더해준다
군산과 부안을 잇는 새만금 남북도로에는 아름다운 사장교인 만경대교(723m)와 동진대교(1,258m)가 놓였다.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각각 건너는 교량으로 만경대교는 역(逆) 아치꼴 교각이 특이하다. 세계최초의 ‘비대칭 리버스 아치교’라고 하며 ‘2023 올해의 토목구조물’ 대상을 받기도 했다.
동진대교 아래를 통과해 훌쩍 가까워진 계화산으로 향한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바다 깊숙한 섬이었던 이 땅은 광야의 한가운데 산으로 남았으니 이 땅의 섬은 언제 육지화될지 몰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해수면에서 솟은 245m는 상당히 높아서 김제와 부안 일대 평야 어디서나 등대처럼 우뚝하다. 계화마을 뒤편으로 임도를 따라 오르다 등산로로 진입하면 해발 100m까지는 라이딩이 가능하다. 그 이상은 경사가 심하고 계단이 많아 도보로 다녀와야 한다. 편도 18분 정도, 휴식 포함해 왕복 40분이면 되는 거리여서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
계화산 중턱에서 바라본 호남평야. 지평선 끝에 우뚝 솟은 모악산(794m)은 이 광야를 품에 안듯이 솟아 '어머니 산'으로 숭앙받는다
계화산 전체가 최고의 전망대이건만 산길에서는 숲이 가려 조망이 별로 없다. 간간이 나무 틈 사이로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는 더욱 감동적이다. 정상은 200평 남짓 평지를 이루고 봉화대와 작은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을 벌목하고 번듯한 전망대로 가꾸면 국내 유일의 일망무제 광야를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소가 될 텐데 참으로 아깝다. 작은 전망대에서는 그나마 새만금 방면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바다이기도 호수이기도 한 야누스 수면 위로 종횡무진 뻗어나는 길은 거대한 화폭에 도안한 듯 장대하다. 수평선은 지평선과 겹치고, 기나긴 방조제는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또 다른 구획을 그으니 자연을 화폭으로 마음껏 그려대는 문명의 붓놀림에 감탄할 뿐이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그나마 변산반도의 기괴한 봉우리들이 산세를 과시하며, “여기 나 같은 산도 있소!”하고 하소연하건만 잦아드는 외마디 외침에 그친다.
계화산 정상에는 봉화대와 작은 전망대가 있고 서쪽 조망만 잘 트인다
계화산에서 바라본 남쪽 조망. 광대한 청호저수지 뒤로 부안과 정읍 방면 평야가 아득하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산은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된 고부관아 옆 두승산(444m)
계화산 남쪽으로는 변산반도의 산들이 광야의 끝을 이룬다. 가운데 오른쪽 구조물이 선 봉우리가 변산반도 최고봉인 의상봉(509m)
계화산 하산로. 산과 평야가 한 화각에 들어간 장면은 호남평야에서 귀하다
계화마을에서 바라본 대평원과 가물거리는 지평선
계화산을 내려와 계화면의 광야를 가로지른다. 일찍이 1960년대에 동진강 하구 남북을 간척하면서 북쪽에는 광활면(김제), 남에는 계화면(부안)의 대평야가 생겨났다. 바둑판 형태로 구획된 대지는 하늘에서 보면 디지털 사진의 화소를 확대한 듯 하고, 한 구역은 정확히 가로 100m, 세로 50m이다. 그 사이로 장장 7km나 뻗어난 가장 긴 직선로를 달린다. 전봇대가 끝없이 도열한 들판 중에 홀로 서니, 어디가 누구 땅인지 어떻게 구분하는지가 궁금해진다.
계화면의 중심지, 계화면소재지 역시 널찍널찍한 바둑판식 구획으로 마을이 조성되어 미국 서부 마을을 연상시킨다. 기이한 것은 중학교는 있는데 초등학교는 계화도에 있는 점이다. 면소재지는 간척 후 새로 생겼고, 계화도 마을이 적지 않은데다 원래 있던 학교여서 그대로 유지하게 된 모양이다. 어쨌건 면소재지 아이들이 낙도(?)의 학교로 통학하는 모양새는 기이하다.
계화간척지에서 가장 긴 직선로. 장장 7km나 이어지며 도열한 전봇대는 끝 간 데가 없다
직선로에서 뒤돌아본 계화산
먹음직한 마시멜로(?)가 가득하고, 풍요와 여유가 감도는 들판길이 널찍하고 마을이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는 계화면소재지
면소재지를 벗어나 청호저수지 방면으로 가다 보면 들판 가운데 조그만 언덕이 있다. 호남평야에서는 해발 30m만 되어도 산 이름이 붙는데, 이 언덕은 해발 11m인데 ‘조봉산(鳥峯山)’이라고 한다(높이가 4.3m로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이는 언덕 아래의 삼각점 높이로, 정상 높이는 아니다). 원래 바다 중의 작은 섬으로 갈매기가 많이 날아들어 조봉이 된 듯하며, 간척으로 인해 육지 속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정상에는 전망대를 겸한 계화정이 있고 아래쪽에는 1963년 물막이공사를 시작으로 1978년 간척을 완료해 2700ha(약 800만평)의 농지를 만든 것을 기념하는 ‘계화도농업통합개발사업 준공기념탑’이 우뚝하다. 작은 바위섬에서 평야 중간의 언덕이 되었으니 계화면 간척지에서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조봉산은 산명이 붙은 곳 중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아닐까 싶다. 울진의 굴미봉(2.9m)을 가장 낮은 산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 높이 역시 언덕에 자리한 삼각점 기준이고, 바로 옆에 돌출한 바위는 높이가 10m 정도 되어서 해발 기준이면 조봉산과 비슷할 것이다. 육안으로 보는 입체감이나 임팩트는 단연 조봉산이 압도적인 저산(低山)이다.
국내에서 가장 낮은(?) 산을 다투는 조봉산. 해발 11m로 오른쪽에는 계화도간척지 완공을 기념하는 ‘계화도농업통합개발사업 준공기념탑’이 우뚝하다
변산반도와 계화산 사이에는 석불산(290m)이 가파른데 그 아래에 청호저수지가 안겨 있다. 간척 공사 때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만든 인공호수로 면적 5㎢(약 151만평), 둘레 8km의 대규모다. 호수와 석불산 사이를 가르는 길을 넘어가면 다시 광야가 확 펼쳐지고, 출발지인 새만금 환경생태단지가 평야 초입에 지척이다.
산속을 오래 누비면 거친 스릴감에 심신이 반응하며 호연지기가 차오른다면, 광야에서 장시간 보내니 만사가 평화롭고 어떤 상황도 관조할 수 있을 것처럼 관용적이 된다. 시공간이 확대되는 과장감이 일상사를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들판에서 석불산으로 접어드는 둑길. 거센 삭풍에 억새가 깊이 누웠다
호남평야에서는 모든 것이 광대하다. 둘레 8km의 청호저수지를 지나며
tip
계화산은 길이 잘 나 있고 도보로 왕복 40분이면 충분하기에 꼭 올라보기를 추천한다. 계화면소재지에 식당 여러곳과 편의점이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부안 새만금 일주 44km
지평선과 수평선의 대접점, 호남평야가 더 넓어지다
계화산(245m) 정상에서 본 새만금 대파노라마. 왼쪽 멀리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가 보이고, 오른쪽 두 사장교가 이어지는 도로는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며 새만금 중간을 관통하는 남북도로다. 오른쪽 멀리 군산시내가 아스라하다
여행자이자 때로는 방랑자로 살며 특히 산(山)에 주목한 것은 풍경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지표면의 요철’인 산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세상이 온통 평탄하다면 변화가 없으니 풍경은 어디나 똑같아서 의미가 사라진다. 하지만 지구상에 제멋대로 돌출해 있는 산은 하나도 같은 게 없으니 산이 배경이 되면 몇km만 옮겨가도 풍경이 변하고 지역이 바뀐다. 다행히 이 땅은 국토의 70%가 산지일 정도로 산이 너무나 많다. 어디를 가든, 어디를 보든 시선의 끝에, 풍경의 배경에 산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서는 보기 드문 대평원을 좋아하고, 가장 넓은 호남평야는 언제나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감탄을 부른다.
광역 호남평야는 남북 100km, 동서 40km 정도여서 1000km가 넘는 평원이 지천인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들판에서 우리는 옅은 박무에도 홀연히 사라지는 먼 산줄기와 가물대는 지평선에 감격한다.
호남평야의 핵심은 김제와 부안 일원으로, 간척지인 광활면과 계화면에서 완주까지 동서 100리가 넘는 광야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 광야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더 확장되고 있으니, 바로 새만금 때문이다.만경강 하구를 건너는 만경대교는 역(逆) 아치꼴 교각이 특이하다. 세계최초의 ‘비대칭 리버스 아치교’라고 하며 ‘2023 올해의 토목구조물’ 대상을 받기도 했다. 군산에서 부안 방면으로 바라본 모습으로, 맨 뒤편 산지는 변산반도 의상봉(509m) 일원이다
남북대로 옆으로 펼쳐진 광대한 갈대밭. 만경강 하구의 모래톱으로 추후 간척될 것이다. 오른쪽 멀리 고군산군도의 신시도가 보인다. 바로 아래는 별도로 조성된 자전거도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세계최장의 새만금방조제는 장장 33.9km나 되며 호남평야의 양대 젓줄인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바다를 내만으로 만들어버렸다. 장장 19년이 걸린 방조제 공사는 2006년 끝났고 지금은 내만의 간척과 도로 등 기초 인프라 건설이 진행 중이다.
육지 쪽을 중심으로 대규모 간척이 진행되면서 엄청난 땅이 새로 생겨나고 있으니, 최종적으로는 4만100ha(약 1억2천130만평, 여의도 140배)의 국토확장이 이뤄진다. 부지 운영과 투자 등 추진과정에서 잡음이 없지 않으나 느리지만 차근차근 진행 중인 것은 사실이다. 새 국토가 착착 확장되면서 갈 때마다 새로운 길과 땅이 생겨 있는 곳, 바로 새만금이다.
새만금에 개설되는 대로변에는 자전거도로가 조성된 곳이 많은데 아직은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 많아 중간중간 길이 끊어져 연결 투어는 어렵다. 새만금을 중심으로 군산-부안 하서 간 남북도로, 신시도-김제 심포항 사이 동서도로가 생겨 거대한 십자가를 이루고, 이들 도로에 자전거도로가 부분적으로 생겼으나 중간에 놓인 교량에서 길이 끊어져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다. 장기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추진한 것인지, 그냥 빈 부지를 자전거도로로 활용한 것인지 당장은 아쉽지만 조금은 더 지켜봐야겠다.
도로변에는 자전거도로가 많이 조성되었으나 교량을 만나면 길이 끊어져 되돌아가야 한다. 상황을 볼 때 연결 계획은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자전거로 일주가 가능한 새만금의 남쪽, 부안 방면의 새 도로와 간척지를 거쳐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섬이어서 지금도 ‘계화도’ 지명이 살아 있는 광야 속의 산(계화산, 245m)을 오를 것이다. 먼 바다 섬이었던 계화도는 이제 광야의 중심이 되어 최고의 전망대가 되었다.
출발지는 새만금방조제 남단 부근에 조성된 새만금환경생태단지로 잡는다.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산책로를 갖추고 있고 군산과 부안 어디서든 접근이 편하다. 생태단지를 나와 예전에는 갯벌이고 바다였을 광대한 평원을 달린다. 여기서 길은 직선뿐이고, 교차점은 언제나 직각이다. 흔히 경지정리가 된 평야를 바둑판에 비유하듯, 주요 교차점은 바둑판 화점(花點)처럼 간척과 개발의 추진 거점이 된다.
마침 날씨가 청명해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길 저편으로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삐죽거린다. 이 무한 수평의 2차원 평면에서 육안으로 느껴지는 10~20km는 신기루처럼 아득하다.
내륙에서는 극히 드문, 5.5km 직선로는 직각으로 꺾여 북동향한다. 삭풍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는 이곳이 바다인지, 호수인지 애매하다. 사실 길이 나고 땅이 생겼건만 새만금 내부 간척지는 아직 주소가 없다. 부안 땅에 붙었어도 부안이 아니고, 군산에 가까워도 군산이 아니다. 개발이 끝나야 주소가 부여될 모양이다. 이런 애매함, 무결정성, 원초적 시점의 열린 가능성은 새만금의 또 다른 매혹이다.
새만금방조제 남단 근처에 조성된 새만금환경생태단지 입구. 갓 완공되어 휑한 분위기지만 여정의 기점으로 좋다
새만금환경생태단지에서 광야를 가르는 장대한 직선로. 꼬박 5.5km나 이어지며 좌우의 간척지는 아직 개발 전이다
50년 전만 해도 대해 속의 섬이던 계화도는 이제 평야 중간에 우뚝한 계화산으로 남았다
이 장대한 길에 그림자만 동행할 뿐
방조제에 갇힌 호수가 되었건만 너무나 넓으니 바다급 파도가 친다 간간이 나오는 쉼터는 경치가 기가 막히지만 찾는 이가 없으니 사용감 없이 낡아간다
크루즈 선박을 테마로 만든 월드크루즈가든 쉼터 겸 전망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가듯, 마스트의 녹이 심하다
계화산 가는 길. 좁은 둑길인데 난간이 있어 안정감과 미감을 더해준다
군산과 부안을 잇는 새만금 남북도로에는 아름다운 사장교인 만경대교(723m)와 동진대교(1,258m)가 놓였다.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각각 건너는 교량으로 만경대교는 역(逆) 아치꼴 교각이 특이하다. 세계최초의 ‘비대칭 리버스 아치교’라고 하며 ‘2023 올해의 토목구조물’ 대상을 받기도 했다.
동진대교 아래를 통과해 훌쩍 가까워진 계화산으로 향한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바다 깊숙한 섬이었던 이 땅은 광야의 한가운데 산으로 남았으니 이 땅의 섬은 언제 육지화될지 몰라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해수면에서 솟은 245m는 상당히 높아서 김제와 부안 일대 평야 어디서나 등대처럼 우뚝하다. 계화마을 뒤편으로 임도를 따라 오르다 등산로로 진입하면 해발 100m까지는 라이딩이 가능하다. 그 이상은 경사가 심하고 계단이 많아 도보로 다녀와야 한다. 편도 18분 정도, 휴식 포함해 왕복 40분이면 되는 거리여서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
계화산 중턱에서 바라본 호남평야. 지평선 끝에 우뚝 솟은 모악산(794m)은 이 광야를 품에 안듯이 솟아 '어머니 산'으로 숭앙받는다
계화산 전체가 최고의 전망대이건만 산길에서는 숲이 가려 조망이 별로 없다. 간간이 나무 틈 사이로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는 더욱 감동적이다. 정상은 200평 남짓 평지를 이루고 봉화대와 작은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을 벌목하고 번듯한 전망대로 가꾸면 국내 유일의 일망무제 광야를 볼 수 있는, 최고의 명소가 될 텐데 참으로 아깝다. 작은 전망대에서는 그나마 새만금 방면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바다이기도 호수이기도 한 야누스 수면 위로 종횡무진 뻗어나는 길은 거대한 화폭에 도안한 듯 장대하다. 수평선은 지평선과 겹치고, 기나긴 방조제는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또 다른 구획을 그으니 자연을 화폭으로 마음껏 그려대는 문명의 붓놀림에 감탄할 뿐이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그나마 변산반도의 기괴한 봉우리들이 산세를 과시하며, “여기 나 같은 산도 있소!”하고 하소연하건만 잦아드는 외마디 외침에 그친다.
계화산 정상에는 봉화대와 작은 전망대가 있고 서쪽 조망만 잘 트인다
계화산에서 바라본 남쪽 조망. 광대한 청호저수지 뒤로 부안과 정읍 방면 평야가 아득하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산은 동학농민운동의 불씨가 된 고부관아 옆 두승산(444m)
계화산 남쪽으로는 변산반도의 산들이 광야의 끝을 이룬다. 가운데 오른쪽 구조물이 선 봉우리가 변산반도 최고봉인 의상봉(509m)
계화산 하산로. 산과 평야가 한 화각에 들어간 장면은 호남평야에서 귀하다
계화마을에서 바라본 대평원과 가물거리는 지평선
계화산을 내려와 계화면의 광야를 가로지른다. 일찍이 1960년대에 동진강 하구 남북을 간척하면서 북쪽에는 광활면(김제), 남에는 계화면(부안)의 대평야가 생겨났다. 바둑판 형태로 구획된 대지는 하늘에서 보면 디지털 사진의 화소를 확대한 듯 하고, 한 구역은 정확히 가로 100m, 세로 50m이다. 그 사이로 장장 7km나 뻗어난 가장 긴 직선로를 달린다. 전봇대가 끝없이 도열한 들판 중에 홀로 서니, 어디가 누구 땅인지 어떻게 구분하는지가 궁금해진다.
계화면의 중심지, 계화면소재지 역시 널찍널찍한 바둑판식 구획으로 마을이 조성되어 미국 서부 마을을 연상시킨다. 기이한 것은 중학교는 있는데 초등학교는 계화도에 있는 점이다. 면소재지는 간척 후 새로 생겼고, 계화도 마을이 적지 않은데다 원래 있던 학교여서 그대로 유지하게 된 모양이다. 어쨌건 면소재지 아이들이 낙도(?)의 학교로 통학하는 모양새는 기이하다.
계화간척지에서 가장 긴 직선로. 장장 7km나 이어지며 도열한 전봇대는 끝 간 데가 없다
직선로에서 뒤돌아본 계화산
먹음직한 마시멜로(?)가 가득하고, 풍요와 여유가 감도는 들판길이 널찍하고 마을이 바둑판처럼 구획되어 있는 계화면소재지
면소재지를 벗어나 청호저수지 방면으로 가다 보면 들판 가운데 조그만 언덕이 있다. 호남평야에서는 해발 30m만 되어도 산 이름이 붙는데, 이 언덕은 해발 11m인데 ‘조봉산(鳥峯山)’이라고 한다(높이가 4.3m로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이는 언덕 아래의 삼각점 높이로, 정상 높이는 아니다). 원래 바다 중의 작은 섬으로 갈매기가 많이 날아들어 조봉이 된 듯하며, 간척으로 인해 육지 속의 작은 언덕이 되었다.
정상에는 전망대를 겸한 계화정이 있고 아래쪽에는 1963년 물막이공사를 시작으로 1978년 간척을 완료해 2700ha(약 800만평)의 농지를 만든 것을 기념하는 ‘계화도농업통합개발사업 준공기념탑’이 우뚝하다. 작은 바위섬에서 평야 중간의 언덕이 되었으니 계화면 간척지에서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조봉산은 산명이 붙은 곳 중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아닐까 싶다. 울진의 굴미봉(2.9m)을 가장 낮은 산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 높이 역시 언덕에 자리한 삼각점 기준이고, 바로 옆에 돌출한 바위는 높이가 10m 정도 되어서 해발 기준이면 조봉산과 비슷할 것이다. 육안으로 보는 입체감이나 임팩트는 단연 조봉산이 압도적인 저산(低山)이다.
국내에서 가장 낮은(?) 산을 다투는 조봉산. 해발 11m로 오른쪽에는 계화도간척지 완공을 기념하는 ‘계화도농업통합개발사업 준공기념탑’이 우뚝하다
변산반도와 계화산 사이에는 석불산(290m)이 가파른데 그 아래에 청호저수지가 안겨 있다. 간척 공사 때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만든 인공호수로 면적 5㎢(약 151만평), 둘레 8km의 대규모다. 호수와 석불산 사이를 가르는 길을 넘어가면 다시 광야가 확 펼쳐지고, 출발지인 새만금 환경생태단지가 평야 초입에 지척이다.
산속을 오래 누비면 거친 스릴감에 심신이 반응하며 호연지기가 차오른다면, 광야에서 장시간 보내니 만사가 평화롭고 어떤 상황도 관조할 수 있을 것처럼 관용적이 된다. 시공간이 확대되는 과장감이 일상사를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일까.
들판에서 석불산으로 접어드는 둑길. 거센 삭풍에 억새가 깊이 누웠다
호남평야에서는 모든 것이 광대하다. 둘레 8km의 청호저수지를 지나며
tip
계화산은 길이 잘 나 있고 도보로 왕복 40분이면 충분하기에 꼭 올라보기를 추천한다. 계화면소재지에 식당 여러곳과 편의점이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부안 새만금 일주 44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