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주권순천 일주

자생투어
2023-12-06
조회수 187

임진왜란 최후 결전장, 산성과 왜성의 대격돌


조명연합군 지휘부가 웅거했던 검단산성에서 바라본 왜성(예교성, 자전거 핸드바 위의 구릉지)과 여천 공단. 왼쪽의 돌무지는 발굴조사 때 발견된 기와조각들이다  


순천 하면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 그대로 몽환적인 갈대밭이 떠오른다. 요즘은 순천만국가정원이 유명해서, 순천 여행을 간다고 하면 갈대밭과 국가정원을 보러 간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그건 자동차로 갈 때 얘기이고, 이동과정 자체가 여행이자 답사가 되는 자전거로 갈 때는 이런 명소를 생략하고 이면에 숨은 순천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번 순천행의 테마는 성곽이다. 순천에는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군이 웅거한 검단산성과 왜군이 주둔한 왜성이 함께 있다. 두 성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최후의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 귀로에는 순천만의 바다와 갈대밭도 잠시 즐길 것이다.

시내에서 순천만습지 방면으로 해룡천 둑에는 자전거길이 잘 나 있다  

출발지는 국가정원 동쪽 주차장으로 잡았다. 무료 주차장이 대단히 넓고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며 순천만 방면으로 가기도 좋은 위치다.

해룡천 둑길을 따라 잠시 남하하다 홍내교에서 동쪽으로 들판을 통과하면 월전마을이 나온다. 원래는 간선도로인 여순로를 따라 월전교차로까지 가서 좌회전하려고 했으나 차량이 많고 횡단보도마저 없어 월전마을로 되돌아와 농수산물도매시장~성산교차로 방면으로 해서 북새통을 벗어났다. 송산에서 대법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검단산성 아래 성산리다. 어느 곳이던 산성 아래 마을은 대개 성산리(城山里)다.

검단산성이 자리한 피봉산(138m)은 여수반도 초입에 있어 반도 좌우의 순천만과 여수만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다. 바로 이곳이 임진왜란 최후의 공방전인 예교성(曳橋城) 전투의 조명연합군 지휘소였다. 마주한 순천왜성, 즉 예교성은 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왜교성(倭橋城)이라고도 한다.

검단산성 정상부에 있는 12각형 건물지. 아마도 이 건물에서 권율 장군과 유정 제독이 왜성을 노려보며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검단산성 북쪽으로는 순천시내가 훤하다    

산성까지 길이 나 있긴 하나 경사가 심하고 비포장 돌길이라 라이딩이 만만치 않다. 정상부를 에워싼 성벽을 돌아 성내로 들어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에 감탄사가 터진다. 138m의 낮은 산임에도 사방 조망이 너무나 좋아서 산성의 입지로는 최적이다. 과연 선조들의 산성 입지 선정과 축조 방식은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입지는 탁월하나 토석혼축 성벽은 둘레 430m 성내면적 1만㎡(약 3천평)의 소규모다. 조명연합군 지휘부가 이곳에 자리했고 병졸들은 산 중턱과 아래쪽 평지에 주둔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순천만 방면과 순천 시내가, 동쪽으로는 광대한 율촌공단과 광양항까지 여수만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으로는 백운산(1224m) 줄기까지 일목요연하니 일대의 바다와 산악 전체를 감제할 수 있다.

바로 저기, 동쪽으로 2.7km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에 왜성이 보인다. 가장 높은 천수각 자리가 해발 60m이니 이곳보다 훨씬 낮아서 전모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연합군은 이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저 왜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성곽 간 거리는 2.7km이지만 산 아래에 군사들이 주둔했으니 실제 양 진영 간 거리는 1.5km 정도였다. 임진·정유 7년 전쟁 최후의 전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기와조각 등을 모은 돌무지 사이로 나지막한 왜성이 바라보인다. 직선거리는 2.7km   

전쟁 7년째인 1598년 7월,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왜군이지만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밀린데다 장기전에 지치고 보급도 여의치 않자 점점 후퇴해 부산을 중심으로 해안에 축성한 33개의 성에 틀어박혀 여차하면 철수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8월 18일에는 전쟁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 5대로(大老)는 조선에서의 철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순순히 돌려보낼 수 없었다. 조선과 명나라 병력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섬멸한다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으로 최후의 공격에 나선 것이다. 육군은 전라도 방면의 서로(西路),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中路),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東路) 세 갈래로 진격했고, 수군은 남해로 이동했다. 이제 전쟁의 향방을 가를 최후의 대접전이 벌어질 참이었다.

하지만 왜군의 반격은 거셌다. 동로군은 울산성을 공격했으나(2차 울산성전투) 함락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중로군의 사천성 공격도 패하고 말았다. 서로군은 명의 유정(劉綎) 제독이 이끌었고,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이 참여했다. 바로 이 서로군이 검단산성에 본진을 치고 왜성(예교성)을 공략한 것이다.

검단산성에서 충무사 가는 길목에 있는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 왼쪽 뒤 언덕이 왜성 터로, 정상부의 천수각터가 보인다  

예교성에는 왜군의 선봉장 중 한명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하고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수군을 포함해 5만1천의 대군이었고, 왜군은 1만4천 정도였다. 조명연합군이 왜성을 포위하자 왜군은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에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여러 번의 공격을 펼쳤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고시니 유키나가 역시 포위를 뚫고 나갈 방책이 없었다. 고니시는 포위전이 장기화되면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유정과 수군의 진린 제독에게 뇌물을 주고 기회를 엿보았다. 유정은 석연찮은 이유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다가 사천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철군을 결정하고 만다.

한편 이순신장군과 진린 제독이 이끄는 수군은 왜성 인근의 장도를 함락하고 왜군의 해로를 막고 있었는데, 고니시는 진린 제독의 묵인 하에 첩보선을 내보내 사천과 고성, 거제도에 있던 왜군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노량으로 몰려드는 왜군 원군을 막으며 치러진 것이 그해 11월의 노량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이순신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전투의 혼란을 틈 타 고니시 유키나가는 남해도 남쪽을 돌아 부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잇따라 왜군 전원이 철수하면서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 자세한 전투 상황은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현장을 답사하며 집필한 ‘메멘토벨로 시즌2 - 불멸의 전승, 이순신 23전 23승의 바다를 가다’ 최종편 참조)

하늘에서 본 순천왜성(정유재란역사공원). 정상부의 혼마루와 천수각터가 보인다. 뒤편의 구릉지 사이에 운하가 있었고 성내면적은 15만평에 달했다   

돌이켜보면 철병을 준비 중인 왜군의 거점 울산성, 사천성, 예교성 중 단 하나도 함락하지 못한 것이 대단히 아쉽다. 명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데 큰 원인이 있지만 고향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싸우는 명군 입장에서는 적대감이나 사기가 높을 수가 없었다. 왜군의 뇌물 공세도 역할을 했겠지만 막바지 전투이니 어떻게든 살아서 귀국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됐을 것이다.

그래도 일본으로 도망 간 고니시 유키나가의 생명은 겨우 2년 연장되었을 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쟁탈전에서 고니시는 히데요리 편(西軍)에 섰다가 양군의 승패를 가르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동군(東軍)에 패해 참수당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순천왜성 전투도. 왼쪽이 바다이고 가장 높은 곳에 천수각(망해루)이 서 있다. 성벽 바깥에도 이중의 목책을 쌓았고 조명연합군이 기병과 보병으로 공격하는 모습이다. 위쪽에는 전통적인 공성무기(공성탑)가 있지만 성벽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치열했으나 승리하지는 못한 전적인 검단산성을 내려와 동쪽으로 향한다. 산성과 왜성 사이 들판은 공단부지 개발이 한창이다. 공사장을 돌아 동쪽으로 넘어가면 신성마을이다. 옛날에는 해안이었지만 지금은 율촌공단을 마주한 내륙이 되었다. 왜성이 바로 앞에 보이고 가늘게 남겨진 수로 건너편으로는 현대제철 공장이 거대하다. 마을 동쪽 끝 언덕에 이순신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무사가 있어 참배를 겸해 잠시 올랐다. 예교성전투가 끝나고 약 100년 후 이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밤마다 왜군 원귀가 나타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자 원귀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아마도 당시까지 우뚝한 왜성이 주는 위압감과 잔인한 왜군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주민들이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장군을 내세워 심리적 안정을 찾은 것이 아닐까 싶다. 장군의 영정은 흔히 알려진 표준영정과 달리 부리부리한 눈매에 매서운 인상이다.

충무사에서 바라본 왜성. 이순신장군의 위엄은 사후에도 왜군을 압도하고 있다. 바다쪽에는 여수만을 가르는 이순신대교가 놓여 이순신장군은 지금도 왜성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있다    

익히 알려진 표준영정과는 분위기가 다른, 부리부리한 눈매의 이순신 장군 영정 

충무사에서 왜성은 지척이다. 왜성 아래 연못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길은 천수각(망해루)이 있던 정상부까지 이어져 있다. 왜성은 한반도의 산성과 달리 평지의 구릉을 활용해 다단으로 축성하고 성벽을 복잡하게 구성해 공격은 어렵게, 방어는 쉽게 하는 구조를 발전시켰다. 단층마다 평지를 둬서 군사들의 훈련이나 주둔지로 활용했는데, 맨 윗단부터 혼마루(本丸), 이치노마루(一の丸),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라고 부른다.

원래 일본 성의 원류는 백제식 산성이었다. 서기 660년 삼국통일전쟁 당시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 지도부는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는데,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대마도에서 오사카에 이르는 해로 일원에 산성을 쌓아 대비한 것이 일본 성의 시초다. 지금도 10여 군데가 남아 있으며, 백제인의 지도로 주민들을 동원해 쌓은 산성은 전형적인 백제 산성이다. 이런 산성이 중세 이후 특유의 일본성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일본 전국에 각자 소국을 이루고 있던 영주, 다이묘(大名)들은 15세기 중엽 막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무력으로 약한 다이묘의 영토를 병합하는, 약육강식과 하극상(下剋上)으로 점철된 처절한 전국시대를 겪게 된다. 100년이나 이어진 전국시대를 통해 다이묘들은 성곽의 방어능력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선교사들이 전해준 유럽의 성곽 구조도 참고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특유의 성이 탄생한다.

오카야마에 있는 일명 '도깨비성'(키노죠). 제철 기술을 전해 준 백제 왕자의 전설이 어려 있으며, 일본에서 유명한 전래동화 '모모타로' 설화의 배경이 되었다.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인이 일본으로 도피하며 추격을 대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백제식 산성으로 일본 성의 원형이 되었다(문루는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키노죠의 성벽. 산봉우리를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축성 방식과 구조 등 모든 면이 충청지방에 대거 남아 있는 백제 산성과 빼닮았다  


위에서 세번째 단층인 니노마루에서 바라본 성벽. 맨 위가 혼마루 최고지점에 자리한 천수각 터다. 천수각에 이르려면 이런 성벽을 몇 번이나 돌파해야 한다  

조명연합군이 더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병력으로도 왜성(예교성)을 함락하지 못한 이유는 현장에 서는 순간 이해가 된다. 당시 권율장군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한 진경문(1561~1642)이 남긴 <예교진병일록>을 보자.

‘소서행장이 위쪽에 넓은 마당을 만들어 놓고 흙을 쌓아 축성하였는데 수천의 군사를 수용하였으며 5층 망루를 지어 백토를 칠하고 기와를 씌웠으니 그 모양이 마치 솟구치는 새 날개와도 같았다. 옆으로는 토고(土庫)가 줄지어 있어서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였다. 외곽에는 견고한 성을 겹으로 쌓고 그 북쪽으로 육지와 이어진 곳에 해자를 넓게 파내고 동서로 바다에 접하게 하여 선박을 끌어 출입하였다. 그 바깥에 또 한줄기 외성을 쌓아 동서로 바다에 맞닿았고 그 가운데에 문루를 세우고 흙을 덮어서 사면을 그을렸다. 성 밖의 주변에는 목책을 2층으로 설치하고 그 북쪽 일면에는 목책을 한 겹 더 세웠다. 성위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포혈을 뚫어 마치 벌집과도 같았다. 내성에서 외성에 이르기까지 토옥(土屋)들로 즐비하게 구축된 보루가 무수하였다.’

왜군은 훨씬 많은 병력의 조명연합군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수성전에 나섰고, 조명연합군은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왜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 100년 간 전쟁을 해온 ‘전쟁 귀신’들이 쌓은 요새는 너무나 교묘하고 위협적인 난공불락이었다.왜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수각 터는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있다

천수각 터에서 바라본 검단산성(근경의 가운데 산). 고니시 유키나가는 여기서 검단산성을 바라보며 궤멸의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건국 후 200년 간 큰 전쟁 없이 평화를 구가하며 군사력 증강에 등한히 해 전국시대를 겪은 왜군의 무기와 전술, 경험과 큰 차이가 있었다. 성곽을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검단산성은 이때 왜성을 공략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백제 때 쌓은 산성을 보강해서 재활용한 것이다. 무려 1000년이 지났건만 축성법이나 공성전술에 큰 변화가 없었는데 비해 왜군은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발전했고, 조총으로 무장했으니 조명연합군의 고전은 예견되었다.

복원된 왜성을 오르면서 공격군 입장에서 얼마나 함락이 힘들었을지 절감한다. 성벽은 단층을 이루며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있고 진입로는 복잡한 미로처럼 꾸며져 하나의 성벽을 돌파했다고 해도 첩첩난관이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망해루라고 하는 5층의 천수각이 서 있었다. 본토의 성곽에 비해서도 규모와 구조에서 큰 차이가 없는 이런 거성을 전쟁의 와중에 3개월만에 쌓았다는 데서도 ‘전쟁귀신’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당시 명나라측 종군화가가 전투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보면 언덕에 자리한 본성 서쪽에 운하가 있었고 그 서편에는 병사가 주둔하는 별도의 성곽이 있어서 성내 총면적은 50만㎡(약 15만평)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전투 과정에서 왜군이 다수 사망해 왜귀의 출몰 전설이 남았을 것이다.

천수각 터에서 내려다본 혼마루(本丸). 천수각이 있는 최상층 평지로 1800평 정도 된다  

천수각 터에서 바라본 율촌공단. 원래는 모두 바다였다. 왼쪽 끝에 전투 당시 왜군이 장악했다가 조명연합군이 탈환한 장도가 작은 야산으로 남았다

왜성 서편의 해룡산단을 통과해 용전마을로 가려했는데 새로운 부지조성공사로 길이 막혔다. 역시 국내굴지의 여천공단을 끼고 있어 곳곳에서 개발 중이다. 하는 수 없이 인덕로~여순로를 따라 우회해 구상마을에서 용전마을로 넘어간다. 17번 국도인 엑스포대로 아래를 통과하자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면서 산간풍경이 펼쳐진다. 앵무산 줄기에 포근히 둘러싸인 용전마을이다. 거대공단과 도시 틈새에 이런 산간풍경이 숨어있을 줄이야. 마을 앞 용전저수지에는 강태공이 한가롭다.

용전저수지를 지나 남쪽으로 여수 경계의 왕바위재를 오른다. 도시와 공단이 지척이건만 괴기전설이 어렸을 것 같은 으슥한 고개다. 고갯마루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거암 몇 기가 모여 있고, 정상 너머에는 확인된 6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가장 큰 것은 덮개돌 길이가 8.65m나 되는 거구다. 여수지역에서는 고조선의 상징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옥이 많이 출토되어 고조선 유민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바위재 남쪽 들판 가운데도 21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는 것을 보면 기후가 온화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이곳이 고대인들이 낙점한 에덴동산이었나 보다.

적막한 산간 분위기의 용전저수지와 용전마을  

6기가 모여 있는 왕바위재 고인돌. 정면의 가장 큰 고인돌은 덮개돌 길이가 8.65m나 된다 

앵무산을 돌아 하사리로 넘어가면 다시 순천 땅이다. 질펀한 들판 농로를 가로지르면 바다에 이르고, 해안도로를 따라 낙조가 유명한 와온항을 지나간다. 드러난 갯벌에는 물을 잃은 고깃배가 미동도 않는데 저 멀리 고흥반도 팔영산 연봉은 손가락을 편 듯 반겨준다.

일몰전망대에 오르면 석양에 물든 풍경으로 유명한 사기섬이 쑥대머리마냥 작은 솔밭을 이고 있다. 옛날에는 주막이 있어 어부들이 귀선할 때 들러 한 잔 걸치고 왔다고 한다.

하사리 앞 들판을 가로지르면 바다에 이른다. 경지정리가 된 들판이 상당히 넓다 

와온항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도로. 순천만 특유의 갈대밭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갯벌에 올라선 고깃배 뒤로 마치 손가락 같은 고흥 팔영산이 보인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와온항 인근 일몰전망대 풍경. 근경의 사기섬 옆으로 해가 질 때 특히 아름답다 

일몰전망대에서는 ‘남도삼백리길’을 따라 느긋하게 북상한다. 바다와 접한 길이라 친수감이 각별하고 갯벌이 발아래 있으니 친근감이 든다. 이윽고 순천만의 상징풍경인 갈대밭이 지천으로 펼쳐지면서 순천만습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용산 입구에 이른다. 주능선에 있는 용산전망대는 해발 80m에 위치하고 계단길이라 자전거는 돌아 나와야 한다. 문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순천만습지공원에서 매표를 해야 입장할 수 있으니 보행객에게는 아주 애매한 처사다.

사람들로 붐비는 순천만습지를 담장 너머로 바라보며 해룡천과 동천을 따라 북상하면 시내가 점점 가까워진다. 길가에 내내 함께 하는 갈대밭은 하얗게 피어난 부드러운 몸짓으로 마치 엄마 손처럼 심신을 위무해준다.

일몰전망대에서 해안선을 따라가는 남도삼백리길로 북상한다  

우아한 몸짓, 부드러운 손짓으로 심신을 위무해주는 갈대밭관광객들로 만원인 순천만습지 갈대 탐방로. 코스에서는 진입할 수 없고 멀찍이 바라보며 해룡천 둑길을 타고 시내로 돌아간다


tip

순천 시내를 벗어나면 코스 주변에 식당이나 편의점이 거의 없다. 월전마을에서는 농산물도매시장으로 바로 건너가야 하며(직진신호 이용), 검단산성 업힐은 매우 거칠고 가팔라 라이딩이 어려울 경우 도보로 가도 10분이면 된다. 와온해변 인근 일몰전망대에서 용산전망대 입구까지는 트레킹코스(남도삼백리길)와 겹쳐 보행자에 유의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순천 일주 46km

0 0


서울 강서구 마곡중앙6로 21, 508호

고객센터 : 010-7667-6726(문자전용)

EMAIL : bicycle_life@naver.com

업무시간 : 10:00 ~ 16:00| 점심시간 : 12:30 ~ 13:30 

(토/일/공휴일 휴무)

사업자등록번호 : 851-41-00134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2017-서울강서-0690호

대표자 : 김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