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구시포의 아련한 파도소리
호남평야의 최남단… 바다와 들판, 노령산맥을 끼고 있는 고창은 자연과 문화가 다채로운 고장이다. 전세계 고인돌의 40%가 모여 있는 한반도에서도 가장 큰 고인돌유적이 있어 ‘한반도 최초 수도’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낮지만 깊고 빼어난 선운산에는 천년고찰 선운사가 고즈넉하고, 읍내에는 고창읍성이 600년의 시간을 넘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바다로 나서면 기나긴 구시포해변과 망망대해로 지는 낙조가 풍경의 깊이를 더해준다 (2020년 8월)
글/사진 : 조기중(전 삼성전자 상무)
고창 부안면 수동리 마을입구에 있는 국내최대의 팽나무. 수령 400여년에 줄기둘레 8.6m, 가지가 뻗어난 지름은 20m나 되는 거목이다. 옛날에는 바로 아래까지 바다가 들어와 배를 묶어두었다고 한다
요즘은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내 기억으로 이렇게 긴 장마는 처음인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빗소리도 좋고 비 내리는 풍경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에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차에 자전거를 싣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운전할 때 앞창에 빗방울이 맺히면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깨끗하게 닦아내는 모습이 좋다. 빗줄기가 강해져 천장에 후두둑 부딪히는 빗소리를 듣는 것도 참 좋다.
화창한 날씨도 좋지만 빗속에서 이러한 것을 느끼는 여행도 또 다른 맛이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멋진 풍경을 보거나 맛난 음식을 먹는 경험도 좋지만 집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가면서 이제 어떤 경험이 펼쳐질까 기대하는 과정도 좋다.
국내최대의 400살 팽나무
오늘은 전북 고창으로 향한다. 고창은 아주 유명한 곳이다. 선운사, 고인돌, 풍천장어… 그런데 사실 내가 이곳을 찾게 된 계기는 정말 소박하다. 천연기념물 팽나무를 보기위해서다. 얼마 전에 한국의 나무를 소개한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고창 수동리 팽나무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 속 팽나무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뭐랄까, 신비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이었다. 직접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더니 길에 차가 거의 없었다. 수동리 팽나무까지는 딱 3시간이 걸렸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큰 팽나무가 보였다.
수동리 팽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추정된다. 400여 년 전이면 대략 임진왜란 무렵이다. 임진왜란, 동학란, 조선의 망국, 일제 강점기, 6·25전쟁까지 이 나무는 그 역사를 묵묵히 다 보았을 것이다. 이 팽나무는 정말 크다. 높이가 11.6m, 줄기 둘레는 8.6m나 되어 한국에서 가장 굵은 팽나무다. 가지를 기준으로 한 나무의 지름은 20m로 나무 아래에 서면 마치 작은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나무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면서 높이에 비해 옆으로 넓게 퍼져 커다란 우산을 펼쳐놓은 듯하다. 마을의 당산나무이며, 마을 앞 간척지가 매립되기 전 팽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여기에 배를 묶어 두기도 했단다. 다른 곳의 보호수와는 달리 나무 아래까지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나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인 듯 뿌리 쪽은 많이 상해있고 가지들도 지지대로 받혀져 있다. 그러나 이파리는 상한 곳이 하나도 없이 무성하고 젊은 나무들보다 더 새파랗고 건강하다. 팽나무는 9월경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데 맛이 달콤해 식용도 가능하고 새들이나 짐승들이 잘 먹는다. 이렇게 큰 팽나무가 한그루 있으면 동네 새들은 먹이 걱정이 없을 정도다.
나는 큰 나무와 만나면 줄기를 한번 안아본다. 그러면 나무가 마음을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등산길에 한아름이 넘는 나무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안아보았다. 안은 것은 난데 오히려 나무가 나를 안아주면서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이때 까닭도 없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었는데… 오늘도 큰 나무를 안아본다. 요즘은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눈물이 나지는 않지만 대신에 따뜻하고 건강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마침 경운기를 탄 노부부가 지나가다 나를 보셨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그분들은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도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오래된 팽나무와 비슷한, 마음이 평화로운 분들이다.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고창읍성
다음 목적지는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읍내 남쪽 해발 120m 정도 되는 낮은 산줄기를 에워싸고 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단종시기(1450년경)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했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5,858㎡이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읍성이라고 하면 그냥 평지에 쌓은 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창읍성은 꽤 높은 야산의 산줄기를 활용해서 지은 평산성(平山城) 형태다. 실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공격하려면 공격측에서 꽤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을 것 같다.
이 지역에서는 예부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었다고 한다. 성문 안내판에 성밟기에 대해 적혀있는데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고. 언제 또 오겠냐 싶어 성벽을 따라 한 바퀴 걸어보았다. 둘레가 1.7km 정도면 그리 길지 않은 편인데 평지가 아니라 높낮이가 있고 폭이 좁은 성곽 위여서 걷는 게 수월하지만은 않다. 곳곳에 추락주의 안내판과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아이콘까지 그려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긴장되어 더 힘이 든다. 세 바퀴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 전설의 의미는 아마 두 바퀴까지 돌면 건강해지는데 욕심을 부려 세 바퀴를 돌면 ‘삶을 초월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읍성에는 입장료가 있다. 3천원을 받는데 이만큼 고창상품권을 줘서 사실은 무료인 셈이다. 나중에 이것으로 맛난 복분자 주스를 먹었다. 읍성 주위에는 판소리연구가 신재효 선생 고택, 판소리박물관, 전통시장, 특산물판매장, 한옥마을, 체험관 등 여러 관광시설이 모여 있다.


경이로운 고인돌 유적
세 번째로 향한 곳은 고인돌 유적지. 고인돌박물관 앞에 주차를 하고 자전거를 꺼냈다. 유적지는 아주 넓어서 이렇게 더운 날 걸어서 다니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역시 이럴 때는 자전거가 최고다.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아주 큰 고인돌이 전시되어 있다. 크기가 엄청나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지석묘라고도 하며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 왕국’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많은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3만여 기, 북한에서 1만~1만5천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중 고창을 비롯한 호남지방에만 2만기가 있으니 ‘한반도 최초 수도 고창’이라는 고창군의 홍보문구는 일리가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고인돌이 몇 개 정도 있겠지 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산기슭을 따라 크고 작은 고인돌이 수백개가 분포한다.
당시는 전세계적으로 스톤헨지, 피라미드 등 거석문화의 시대였다고 한다. 큰 돌에는 큰 힘과 기운이 있어 사후에도 그 힘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큰 돌로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 사회지도층이었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고인돌을 만들려면 그 노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무게가 수십톤에서 수백톤까지 된다는데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옮겼다고 한다. 어떻게 옮겼을지 불가사의하다.
지금은 누가 죽으면 무덤에 묻든지 화장을 하지만 그때는 변변한 장비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옮겨야 했으니 정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고 두려움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역으로 그게 중요한 의식이었다면, 오히려 축조과정에 드는 노역을 고생이 아니라 사명감과 보람으로 수행했을지도 모르겠다.
폭염경보까지 내린 날이라 산자락에 펼쳐진 고인돌 무리를 돌아보자니 땀이 많이 나고 힘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선사시대의 광경을 재현해 놓은 선사유물관에 들렀다. 선사시대인들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 사슴을 사냥해서 오는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는데 표정이 참 재미있다. 아주 의기양양하다.
자전거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박물관입구로 나왔더니 카페가 있길래 얼음을 넣은 시원한 복분자주스를 마셨다. 땀을 흘리고 난 후에 마시는 복분자주스는 정말 일품이었다.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하니 그러면 꼭 심원바람공원에 가보라고 한다. 해안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는데 달려보면 진짜 좋다고 했다. 지도를 보니 선운사 다음에 가면 코스가 딱 맞을 것 같았다.

선운사 가는 길목
고창 하면 선운사가 유명하다. 고속도로 IC 이름이 선운사IC일 정도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시기인 577년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소실과 중건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년사찰이다.
주차장에서 선운사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시내 건너편에 천연기념물 367호 ‘송악’이 절벽에 자라고 있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의 덩쿨식물이다. 담쟁이덩쿨과 비슷하고 영어 이름도 ‘Japaness ivy’다. 일본, 대만에는 아주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편이다. 기후상 고창이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다. 덩굴식물인데도 줄기 둘레가 80cm, 높이는 15m나 되며 수령이 수백년에 달하는 거목이다.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멀리서 봐도 신비롭다. 고창에는 처음 방문했던 팽나무도 있고 선운사에는 수백년된 동백나무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송악도 있으니 희귀한 고목·거목들을 잘 보호해 좋은 볼거리를 주는 고창 분들의 노고가 고맙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본당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숲과 시냇물이 흘러 경치가 좋다. 가는 내내 바람소리와 시냇물 소리 그리고 오래된 나무에 울리는 매미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가 너무 좋다. 가슴이 시원해지며 걱정거리가 다 없어지는 것 같다. 이래서 숲이 좋은가 보다. 시냇가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의 뿌리가 물가까지 구불구불 뻗어나간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다. 물에 비친 극락교는 너무 아름다워 그대로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 풍경을 어떻게 라도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 올라가는 길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선운산 시냇물이 탁한 까닭
선운산의 시냇물은 특이하게도 맑고 투명하지가 않고 탁하다. 처음에는 오염이 되었나 싶었는데 안내판에 그 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곳 숲속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아 도토리나 나무껍질에 포함되어 있는 타닌이 오랫동안 개울바닥에 쌓이면서 그렇게 보이게 된 것이지 물은 아주 맑다고 한다. 이 안내문이 없었더라면 시냇물은 틀림없이 오염되었을 거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염시킨 사람을 추측해서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사람 간에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편한 대로 가져다 붙이고는 설명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한다. 그러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생각을 혼신의 노력을 다해 열심히 설명하고 알려줘도 다른 사람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해줄까 말까다. 선운사 시냇가에서 작지만 또 하나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운사 경내에 들어서니 여러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더운 날에도 참배객이 많다. 불상 앞에서 열심히 절을 하며 무엇인가를 빈다. 그들은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무병장수일까, 가족의 합격·승진일까, 극락왕생일까? 아니면 집착에서 해방되고 분별을 없애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려는 것일까? 그분들의 소원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
내려가는 길에 숲길을 다시 보니 나무의 상당수가 단풍나무다. 지금은 푸른 잎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이제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 새로운 즐거움을 줄 것이다. 상수리나무는 단풍이 노란색이고, 단풍은 빨간색이다. 이 두 가지 색이 잘 어울려야 단풍이 아름답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때 다시 오면 정말 일품인 가을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기다려진다.
파도와 바람의 협주, 서해안바람공원
선운사에서 나와 카페 아주머니가 이야기해준 심원바람공원으로 갔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서해안바람공원이지만 심원면에 있어서 주민들은 그렇게 통칭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닷가에 나무데크를 설치해놓아 데크를 따라 산책을 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데크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방풍림으로 심어져 있는 키 큰 소나무 그늘을 따라 걸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더운 날인데도 소나무 그늘에 부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데크에 만들어 놓은 달랑게, 범게 모형이 예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해변까지 내려가 보았다. 물이 닿지 않은 모래사장은 너무나 하얗다. 모래사장에는 달랑게들의 구멍이 아주 많다. 수백개는 되는 것 같다. 이 바다가 그만큼 살아 있는 바다라는 증거다.
해변에 서서 조용한 파도소리를 자세히 들어 보았다. 서해안의 파도는 동해안의 거친 파도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동해안의 파도가 남성적이면 서해안의 파도는 여성적이라고나 할까. 아주 부드럽고 자상한 느낌이다.
자전거를 펼치고 해안도로를 달린다. 은은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짙은 바다냄새를 맡으며 자전거를 타는 맛이 정말 좋다. 내 앞쪽에 두 명의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저 앞에서 쉬고 있길래 다가가서 보니 둘 다 외국인이다. 자전거에 텐트며 짐을 잔뜩 싣고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세계일주를 하며 한국의 해안을 일주하는 것일까. 말을 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물어봐서 알게 되는 것보다 그냥 혼자 상상하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아서다. 그 사람들의 자전거여행은 나와는 또 다른 맛의 자전거여행이다.

100대 해안경관, 구시포해변
해안길을 계속 따라 구시포항으로 갔다. 구시포는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포구로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 모양이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긴 방파제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낚시를 하고 있다.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와 흰 등대가 있는데 색이 잘 어울린다. 풍경이 너무 멋있다. 방조제에 앉아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넓은 바다는 언제 보아도 좋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심호흡을 하면 바다의 기운이 그대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구시포항 바로 옆에는 구시포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100대 해안경관의 하나다. 구시포 외에도 명사십리, 동호해수욕장 등 좋은 해수욕장이 연이어 있다.
구시포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아주 길고 넓다. 서해안의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갯벌이 거의 없어 물도 맑은 편이다. 바닷물에 들어가면 발에 밟히는 모래의 촉감이 최고다. 그리고 이곳은 낙조가 일품이다. 서쪽으로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기분은 최고다. 마음이 잔잔해지며 원래 가슴속에 막혔던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이 후련해진다. 방풍림이 잘 조성되어 있어 작은 텐트 하나만 있으면 며칠이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다시 와봐야겠다. 이래서 여행은 같은 곳을 와도 올 때마다 새로운 맛인가 보다.
고창의 여운
오늘 가장 산과 바다를 함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 고창을 찾았다. 팽나무에서 시작된 고창여행. 읍성도 보았고 고인돌도 처음 보았다. 사실 그 유명한 선운사도 처음이다. 원시림 같은 숲속을 거닌 경험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돌아오는 길에도 물소리, 바람소리, 매미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람이 없는 하얀 백사장을 걷고 바다소리를 들으며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린 것도 최고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찾고, 어진 사람은 산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고창에 가면 좋은 바다가 있어 지혜로운 사람도 되고 멋진 산이 있어 어진 사람도 된다. 행복하려면 물질에 투자하지 말고 경험에 투자하라고 한다. 경험 중에 최고는 여행이다. 오늘도 행복을 하나 누려보았다.
선운산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구시포의 아련한 파도소리
호남평야의 최남단… 바다와 들판, 노령산맥을 끼고 있는 고창은 자연과 문화가 다채로운 고장이다. 전세계 고인돌의 40%가 모여 있는 한반도에서도 가장 큰 고인돌유적이 있어 ‘한반도 최초 수도’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낮지만 깊고 빼어난 선운산에는 천년고찰 선운사가 고즈넉하고, 읍내에는 고창읍성이 600년의 시간을 넘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바다로 나서면 기나긴 구시포해변과 망망대해로 지는 낙조가 풍경의 깊이를 더해준다 (2020년 8월)
요즘은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내 기억으로 이렇게 긴 장마는 처음인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빗소리도 좋고 비 내리는 풍경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에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차에 자전거를 싣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운전할 때 앞창에 빗방울이 맺히면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깨끗하게 닦아내는 모습이 좋다. 빗줄기가 강해져 천장에 후두둑 부딪히는 빗소리를 듣는 것도 참 좋다.
화창한 날씨도 좋지만 빗속에서 이러한 것을 느끼는 여행도 또 다른 맛이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멋진 풍경을 보거나 맛난 음식을 먹는 경험도 좋지만 집에서 출발해 목적지까지 가면서 이제 어떤 경험이 펼쳐질까 기대하는 과정도 좋다.
국내최대의 400살 팽나무
오늘은 전북 고창으로 향한다. 고창은 아주 유명한 곳이다. 선운사, 고인돌, 풍천장어… 그런데 사실 내가 이곳을 찾게 된 계기는 정말 소박하다. 천연기념물 팽나무를 보기위해서다. 얼마 전에 한국의 나무를 소개한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 고창 수동리 팽나무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 속 팽나무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뭐랄까, 신비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이었다. 직접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더니 길에 차가 거의 없었다. 수동리 팽나무까지는 딱 3시간이 걸렸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큰 팽나무가 보였다.
수동리 팽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으로 추정된다. 400여 년 전이면 대략 임진왜란 무렵이다. 임진왜란, 동학란, 조선의 망국, 일제 강점기, 6·25전쟁까지 이 나무는 그 역사를 묵묵히 다 보았을 것이다. 이 팽나무는 정말 크다. 높이가 11.6m, 줄기 둘레는 8.6m나 되어 한국에서 가장 굵은 팽나무다. 가지를 기준으로 한 나무의 지름은 20m로 나무 아래에 서면 마치 작은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나무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면서 높이에 비해 옆으로 넓게 퍼져 커다란 우산을 펼쳐놓은 듯하다. 마을의 당산나무이며, 마을 앞 간척지가 매립되기 전 팽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여기에 배를 묶어 두기도 했단다. 다른 곳의 보호수와는 달리 나무 아래까지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나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인 듯 뿌리 쪽은 많이 상해있고 가지들도 지지대로 받혀져 있다. 그러나 이파리는 상한 곳이 하나도 없이 무성하고 젊은 나무들보다 더 새파랗고 건강하다. 팽나무는 9월경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데 맛이 달콤해 식용도 가능하고 새들이나 짐승들이 잘 먹는다. 이렇게 큰 팽나무가 한그루 있으면 동네 새들은 먹이 걱정이 없을 정도다.
나는 큰 나무와 만나면 줄기를 한번 안아본다. 그러면 나무가 마음을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등산길에 한아름이 넘는 나무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안아보았다. 안은 것은 난데 오히려 나무가 나를 안아주면서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이때 까닭도 없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었는데… 오늘도 큰 나무를 안아본다. 요즘은 스트레스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눈물이 나지는 않지만 대신에 따뜻하고 건강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마침 경운기를 탄 노부부가 지나가다 나를 보셨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그분들은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도 서둘러 인사를 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오래된 팽나무와 비슷한, 마음이 평화로운 분들이다.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고창읍성
다음 목적지는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읍내 남쪽 해발 120m 정도 되는 낮은 산줄기를 에워싸고 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단종시기(1450년경)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했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5,858㎡이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읍성이라고 하면 그냥 평지에 쌓은 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창읍성은 꽤 높은 야산의 산줄기를 활용해서 지은 평산성(平山城) 형태다. 실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공격하려면 공격측에서 꽤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을 것 같다.
이 지역에서는 예부터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전해오는데,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다음 성 입구에 그 돌을 쌓아둔다. 이렇게 쌓인 돌은 유사시에 좋은 무기가 되었다고 한다. 성문 안내판에 성밟기에 대해 적혀있는데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고. 언제 또 오겠냐 싶어 성벽을 따라 한 바퀴 걸어보았다. 둘레가 1.7km 정도면 그리 길지 않은 편인데 평지가 아니라 높낮이가 있고 폭이 좁은 성곽 위여서 걷는 게 수월하지만은 않다. 곳곳에 추락주의 안내판과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아이콘까지 그려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긴장되어 더 힘이 든다. 세 바퀴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 전설의 의미는 아마 두 바퀴까지 돌면 건강해지는데 욕심을 부려 세 바퀴를 돌면 ‘삶을 초월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읍성에는 입장료가 있다. 3천원을 받는데 이만큼 고창상품권을 줘서 사실은 무료인 셈이다. 나중에 이것으로 맛난 복분자 주스를 먹었다. 읍성 주위에는 판소리연구가 신재효 선생 고택, 판소리박물관, 전통시장, 특산물판매장, 한옥마을, 체험관 등 여러 관광시설이 모여 있다.
경이로운 고인돌 유적
세 번째로 향한 곳은 고인돌 유적지. 고인돌박물관 앞에 주차를 하고 자전거를 꺼냈다. 유적지는 아주 넓어서 이렇게 더운 날 걸어서 다니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역시 이럴 때는 자전거가 최고다.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아주 큰 고인돌이 전시되어 있다. 크기가 엄청나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지석묘라고도 하며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 왕국’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많은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3만여 기, 북한에서 1만~1만5천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중 고창을 비롯한 호남지방에만 2만기가 있으니 ‘한반도 최초 수도 고창’이라는 고창군의 홍보문구는 일리가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고인돌이 몇 개 정도 있겠지 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산기슭을 따라 크고 작은 고인돌이 수백개가 분포한다.
당시는 전세계적으로 스톤헨지, 피라미드 등 거석문화의 시대였다고 한다. 큰 돌에는 큰 힘과 기운이 있어 사후에도 그 힘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큰 돌로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 사회지도층이었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고인돌을 만들려면 그 노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무게가 수십톤에서 수백톤까지 된다는데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옮겼다고 한다. 어떻게 옮겼을지 불가사의하다.
지금은 누가 죽으면 무덤에 묻든지 화장을 하지만 그때는 변변한 장비도 없이 그 무거운 돌을 옮겨야 했으니 정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고 두려움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역으로 그게 중요한 의식이었다면, 오히려 축조과정에 드는 노역을 고생이 아니라 사명감과 보람으로 수행했을지도 모르겠다.
폭염경보까지 내린 날이라 산자락에 펼쳐진 고인돌 무리를 돌아보자니 땀이 많이 나고 힘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선사시대의 광경을 재현해 놓은 선사유물관에 들렀다. 선사시대인들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 사슴을 사냥해서 오는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는데 표정이 참 재미있다. 아주 의기양양하다.
자전거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박물관입구로 나왔더니 카페가 있길래 얼음을 넣은 시원한 복분자주스를 마셨다. 땀을 흘리고 난 후에 마시는 복분자주스는 정말 일품이었다.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전거여행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하니 그러면 꼭 심원바람공원에 가보라고 한다. 해안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는데 달려보면 진짜 좋다고 했다. 지도를 보니 선운사 다음에 가면 코스가 딱 맞을 것 같았다.
선운사 가는 길목
고창 하면 선운사가 유명하다. 고속도로 IC 이름이 선운사IC일 정도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시기인 577년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소실과 중건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천년사찰이다.
주차장에서 선운사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시내 건너편에 천연기념물 367호 ‘송악’이 절벽에 자라고 있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의 덩쿨식물이다. 담쟁이덩쿨과 비슷하고 영어 이름도 ‘Japaness ivy’다. 일본, 대만에는 아주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편이다. 기후상 고창이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다. 덩굴식물인데도 줄기 둘레가 80cm, 높이는 15m나 되며 수령이 수백년에 달하는 거목이다.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멀리서 봐도 신비롭다. 고창에는 처음 방문했던 팽나무도 있고 선운사에는 수백년된 동백나무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송악도 있으니 희귀한 고목·거목들을 잘 보호해 좋은 볼거리를 주는 고창 분들의 노고가 고맙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본당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숲과 시냇물이 흘러 경치가 좋다. 가는 내내 바람소리와 시냇물 소리 그리고 오래된 나무에 울리는 매미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가 너무 좋다. 가슴이 시원해지며 걱정거리가 다 없어지는 것 같다. 이래서 숲이 좋은가 보다. 시냇가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의 뿌리가 물가까지 구불구불 뻗어나간 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다. 물에 비친 극락교는 너무 아름다워 그대로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 풍경을 어떻게 라도 기억에 남겨두고 싶어 올라가는 길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선운산 시냇물이 탁한 까닭
선운산의 시냇물은 특이하게도 맑고 투명하지가 않고 탁하다. 처음에는 오염이 되었나 싶었는데 안내판에 그 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곳 숲속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아 도토리나 나무껍질에 포함되어 있는 타닌이 오랫동안 개울바닥에 쌓이면서 그렇게 보이게 된 것이지 물은 아주 맑다고 한다. 이 안내문이 없었더라면 시냇물은 틀림없이 오염되었을 거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염시킨 사람을 추측해서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사람 간에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을 편한 대로 가져다 붙이고는 설명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한다. 그러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생각을 혼신의 노력을 다해 열심히 설명하고 알려줘도 다른 사람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해줄까 말까다. 선운사 시냇가에서 작지만 또 하나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운사 경내에 들어서니 여러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더운 날에도 참배객이 많다. 불상 앞에서 열심히 절을 하며 무엇인가를 빈다. 그들은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무병장수일까, 가족의 합격·승진일까, 극락왕생일까? 아니면 집착에서 해방되고 분별을 없애 깨달음을 얻고 해탈하려는 것일까? 그분들의 소원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
내려가는 길에 숲길을 다시 보니 나무의 상당수가 단풍나무다. 지금은 푸른 잎으로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이제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 새로운 즐거움을 줄 것이다. 상수리나무는 단풍이 노란색이고, 단풍은 빨간색이다. 이 두 가지 색이 잘 어울려야 단풍이 아름답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때 다시 오면 정말 일품인 가을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기다려진다.
파도와 바람의 협주, 서해안바람공원
선운사에서 나와 카페 아주머니가 이야기해준 심원바람공원으로 갔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서해안바람공원이지만 심원면에 있어서 주민들은 그렇게 통칭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닷가에 나무데크를 설치해놓아 데크를 따라 산책을 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데크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방풍림으로 심어져 있는 키 큰 소나무 그늘을 따라 걸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더운 날인데도 소나무 그늘에 부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데크에 만들어 놓은 달랑게, 범게 모형이 예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해변까지 내려가 보았다. 물이 닿지 않은 모래사장은 너무나 하얗다. 모래사장에는 달랑게들의 구멍이 아주 많다. 수백개는 되는 것 같다. 이 바다가 그만큼 살아 있는 바다라는 증거다.
해변에 서서 조용한 파도소리를 자세히 들어 보았다. 서해안의 파도는 동해안의 거친 파도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동해안의 파도가 남성적이면 서해안의 파도는 여성적이라고나 할까. 아주 부드럽고 자상한 느낌이다.
자전거를 펼치고 해안도로를 달린다. 은은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짙은 바다냄새를 맡으며 자전거를 타는 맛이 정말 좋다. 내 앞쪽에 두 명의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저 앞에서 쉬고 있길래 다가가서 보니 둘 다 외국인이다. 자전거에 텐트며 짐을 잔뜩 싣고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세계일주를 하며 한국의 해안을 일주하는 것일까. 말을 걸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물어봐서 알게 되는 것보다 그냥 혼자 상상하는 게 더 즐거울 것 같아서다. 그 사람들의 자전거여행은 나와는 또 다른 맛의 자전거여행이다.
100대 해안경관, 구시포해변
해안길을 계속 따라 구시포항으로 갔다. 구시포는 1800년 무렵부터 소금을 생산하던 포구로 염전을 일구기 위해 설치한 수문 모양이 소의 구시통(구유의 방언)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긴 방파제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낚시를 하고 있다.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와 흰 등대가 있는데 색이 잘 어울린다. 풍경이 너무 멋있다. 방조제에 앉아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넓은 바다는 언제 보아도 좋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심호흡을 하면 바다의 기운이 그대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구시포항 바로 옆에는 구시포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100대 해안경관의 하나다. 구시포 외에도 명사십리, 동호해수욕장 등 좋은 해수욕장이 연이어 있다.
구시포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아주 길고 넓다. 서해안의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갯벌이 거의 없어 물도 맑은 편이다. 바닷물에 들어가면 발에 밟히는 모래의 촉감이 최고다. 그리고 이곳은 낙조가 일품이다. 서쪽으로 서서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기분은 최고다. 마음이 잔잔해지며 원래 가슴속에 막혔던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이 후련해진다. 방풍림이 잘 조성되어 있어 작은 텐트 하나만 있으면 며칠이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다시 와봐야겠다. 이래서 여행은 같은 곳을 와도 올 때마다 새로운 맛인가 보다.
고창의 여운
오늘 가장 산과 바다를 함께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곳, 고창을 찾았다. 팽나무에서 시작된 고창여행. 읍성도 보았고 고인돌도 처음 보았다. 사실 그 유명한 선운사도 처음이다. 원시림 같은 숲속을 거닌 경험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돌아오는 길에도 물소리, 바람소리, 매미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람이 없는 하얀 백사장을 걷고 바다소리를 들으며 해안도로를 자전거로 달린 것도 최고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찾고, 어진 사람은 산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고창에 가면 좋은 바다가 있어 지혜로운 사람도 되고 멋진 산이 있어 어진 사람도 된다. 행복하려면 물질에 투자하지 말고 경험에 투자하라고 한다. 경험 중에 최고는 여행이다. 오늘도 행복을 하나 누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