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안녕하시길”
사방 조망이 탁 트인 옥녀봉(205m) 정상에 우뚝 선 그리팅맨과 함께 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행
연천 최북단 옥녀봉에는 북녘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리팅맨’이 서 있다.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높이 10.8m의 이 거상은 입지와 형태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호국의 달을 앞두고 군남댐을 거쳐 옥녀봉에 오른 일행은 같이 허리를 숙이는 대신 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군남댐은 길이 658m, 높이 26m의 소규모로 총저수량은 7160만톤이다. 황강댐 저수량의 20% 밖에 되지 않아 대량방류 시 감당이 어려울 수 있다
“같이 인사하는 건 (북 정권에 숙이는 것 같아) 좀 그런데….”
“그러면 손을 흔들죠.”
키 10.8m의 그리팅맨이 북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옆에서 일행은 한 줄로 도열했다. 그리팅맨처럼 북을 향해 인사를 하자고 제안하자,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이홍희 편집위원이 완곡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충남과 울산 지방경찰청장을 지낸 조용연 편집위원이 손 흔들기를 제안해 다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단순한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언젠가 해방의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잘 지내세요!”라는 염원을 담아서.
발아래로는 임진강이 남북의 산야를 자유롭게 흐른다. 임진강은 연천에서 파주까지 접경을 지나고 서울에서 가까워 남쪽의 강으로 알지만 전장 254km 중 남쪽 구간은 1/3밖에 되지 않는다. 발원지는 원산 서쪽의 마식령(768m)까지 북상한다. 저 아래로 보이는 물은 방금 DMZ를 넘어왔으니 대부분은 북녘 산야를 훑은 북녘의 물인 셈이다. 그래서 물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질문과 소망을 함께 투사한다.
군남댐에서 초반에 급경사 업힐을 올라서면 곧 능선 위로 올라선다. 산비탈은 밭으로 개간되어 숲이 드문드문 하고 맞은편으로 그리팅맨이 서 있는 정상이 보인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호국영령이 떠오르고, 북방으로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픈 마음이 든다. 그래서 접경지역인 연천, 그것도 임진강 최북단으로 향한다. 여기에는 군남댐(군남홍수조절댐)이 북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거르고 있다. 군남댐은 양구 평화의 댐과 역할이 비슷하다. 군남댐에서 57km 상류인 황해도 토산군 황강리에 저수량이 3억5천 톤에 달하는 황강댐이 있기 때문이다. 황강댐의 무단방류로 인해 연천지방에서는 캠핑객이 목숨을 잃고 갑작스런 물난리를 겪은 일이 있었다. 황강댐은 발전과 용수를 위한 다목적댐이라지만 언제든 수공(水攻)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군남댐은 이를 대비해서 축조했다. 북한강 상류에 있는 북측 임남댐과 평화의 댐 관계와 똑 같다.
오늘 여정은 군남댐을 출발해 바로 옆에 있는 옥녀봉(205m)을 올라 정상에 있는 그리팅맨과 더불어 북녘에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답사에는 유인촌 전 장관과 본지 편집위원단이 함께 했다.
군남댐과 임진강을 보며 잠시 다운힐
“아이구, 이거 길이 너무 험한데!”
“이런, 계단까지 있네요!”
다들 거친 호흡으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다 계단이 앞을 막자 맥이 풀린다. 미리 이른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해서 더 힘들게 느껴진다.
군남댐에서 옥녀봉을 오르는 길은 평화누리길 12코스와 겹치는데 원래 걷기 코스이니 계단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도 전구간이 임도라고 생각했다가 예상 밖으로 계단에 급경사 돌길이 나오자 기자도 대략 난감이다.
호흡은 가쁘고 다리는 아프고 진도는 지지부진. 단순히 길이 나빠서가 아니다. 한 구비 돌아서면 펼쳐지는 특별한 경관에 휴식과 사진 촬영으로 가다서다를 무한 반복한다. 산악이 많은 전방에서 겨우 205m 높이로 이렇게 사방 조망이 탁 트이다니 대단히 특별한 입지다. 선조들이 이런 곳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부에는 6~7세기 신라가 쌓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임진강 일원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차지자하기 위해 애쓴 각축장이었다.
옥녀봉 기슭은 곳곳이 밭으로 개간되어 전망이 트이고, 알프스 기슭의 구릉지 초원 같아 이국풍마저 느껴진다. 이제 군남댐은 저 아래로 멀어지고 임진강은 크게 휘어지며 산줄기 저편을 돌아 북으로 꼬리를 감춘다.
산비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경사는 상당히 급한 편이다
비탈밭 중간에 홀로 서 있는 고목은 저절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자연 쉼터다. 벌목한 산자락은 은근 목가적이다
“얼마 안 된다더니 왜 이렇게 멀어요!”(유 전 장관)
“시골길 10리와 똑같지요, 뭐. 금방이라더니 산굽이 돌면 또 한참이고….”(조용연 위원)
“전기자전거를 안 가져온 게 후회막급이네요.”(차백성 위원)
일행의 푸념이 나오기 시작한다. 군남댐 아래 식당에서 정상까지는 4km 남짓이고 옥녀봉은 겨우 205m인데 이렇게 힘들고 지지부진 할 수가 없다. 출발지가 해발 40m는 되어서 실제 비고는 160m에 불과하다.
“이렇게 느린 진행은 처음입니다. 3.5km 오는데 2시간이 걸렸네요.”
모두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급할 것도 없다. 이렇게 천천히, 작정하고 늑장을 부리며 이것저것 다 보고 다 쉬어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눈다. 해가 지기 전까지만 출발지로 되돌아가면 된다. 물론 아직 해는 중천 저 높이 있다.
군사격장 경고문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면 마침내 저 앞으로 그리팅맨이 훌쩍 다가선다. 그리탱맨이 서 있는 정상까지 길이 나 있다.
인사하는 그리팅맨에게 경례로 답하는 차백성 위원
옥녀봉 북서사면을 내려서는 비탈길. 붉은 흙은 정열적 강렬함과 변경의 소외감을 더해준다
연푸른 빛에 높이 10.8m의 그리팅맨은 양구전쟁기념관에서 본 적이 있다. 양구는 주변에 다른 조형물이 많고 키도 6m 정도여서 그리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여기, 주변에 거칠 것이 없는 옥녀봉 정상에서는 홀로 우뚝 선 모습은 단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설명을 보니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양구 출신의 유영호 조각가의 작품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인사법을 표현해 평화와 화합, 겸손을 의미한다. “인사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작가의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팅맨은 2012년 지구 정반대편의 우루과이에 1호가 세워졌고 이후 양구와 서귀포에 이어 2016년에 옥녀봉에도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코앞의 DMZ를 넘어 북녘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리팅맨은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지만 일견 북한 정권에 대한 저자세로 비칠 수도 있어 일행은 탄압받는 주민들을 생각하며 손을 흔들었다.
다리는 물에 떠내려간 지 오래, 이 개울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정상에서 한동안 쉬다보니 어느새 출발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쉬운 길이라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이게 큰 착각일 줄이야.
옥녀봉에서 북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북쪽 연천로하스파크에서 옥녀봉까지는 자동차로 관광객이 다닐 정도이니 노면이 좋고 시멘트 포장 구간도 있다. 원래는 로하스파크로 곧장 내려가 도로를 따라 태풍전망대 방면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도중의 갈림길에서 ‘중면사무소’ 이정표를 보고 임도를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연강나룻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산을 다 내려와 임진강변의 황야로 내려서서 중면사무소 이정표를 따라 계속 가는데 갑자기 개울이 길을 막는 게 아닌가. 지도에도 분명 길이 연결되어 있지만 허망하게 물만 흐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개울 건너편에 길이 나있고 개울가에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원래 있던 작은 다리가 홍수에 유실된 듯하다. 흙탕까지 있는 급사면을 내려와서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이거 난감하게 됐다. 개울물이 깊고 흐름도 빨라 건너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곶리 ‘콜로라도강’ 도하작전. 물이 불어나면 건너기 어렵다
“저기는 건널 만하겠네. 가봅시다!”
상륙작전을 주로 하는 해병대답게 이홍희 편집위원이 상류 방면으로 조금 올라가 여울 구간을 자전거에 탄 채로 건넜다. 일행은 환성을 지르며 라이딩으로, 혹은 끌바로 개울을 건넜다. ‘뽈락’ 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위원은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물속에 들어가 ‘도하작전’을 거들었다.
“자전거생활 아니면 언제 이런 도하를 해보겠습니까.”
세계를 자전거로 주유한 자전거여행가 차백성 위원도 유쾌하게 거든다. 다들 힘들고 불편한데도 즐거운 이유를 차 위원이 간단히 정리했다.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고생이기 때문이지요.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런 황당한 짓을 하겠어요.”
‘도하’를 마치니 이번에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콜로라도강을 건너고 이제는 몽골초원까지 달리는군요!”
유 전 장관은 새 자전거가 더러워지고 신발도 엉망이 됐지만 신이 난 표정이다.
‘콜로라도강’을 건너면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개울을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면 임진강변에 상당히 큰 규모의 적석총(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이 있다. 작은 언덕을 이룬 고분 옆으로 고목 두 그루가 서 있어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임진강 북안이라 인근의 당포성, 호로고루성, 은대리성처럼 고구려 계통인지 알았으나 조사 결과 백제계통으로 확인되었다. 인근의 고구려 성들은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 축성된 데 비해 이 적석총은 백제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허물어지기 쉬운 강변 모래땅에 애써 강자갈을 쌓아올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무덤방이 두 칸인 것으로 보아 부부나 가족이 묻혔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깊은 오지인데 당시는 더 심했을 것이다. 다만 당시는 이 일대가 임진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의 거점이었을 수는 있다. 이 일대의 임진강 수운을 관장하던 수장급 무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곶리 돌무지무덤. 삼국시대 초기 수장급 백제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강변 언덕에 고목과 함께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여기서 임진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태풍전망대가 있다. 태풍전망대는 자동차만 출입이 가능해 전망대 초입의 연강갤러리와 임진강평화습지원까지만 가보려 했으나 민통선 검문소에서 코로나와 돼지열병 때문에 출입을 막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의 중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있는 북한군 고사기관총 낙탄지(落彈地)만 보고 가기로 한다. 여기서 DMZ 너머 북측까지는 5~6km이니 최대사거리가 8km에 달하는 북한의 14.5㎜ 고사기관총 유탄이 충분히 날아올 수 있다. 북은 대북전단지를 향해 쐈다지만 DMZ 너머까지 총탄이 날아온 것은 강력한 도발이다. 시멘트 바닥에 남은 탄착흔은 투명 덮개로 보호하고 있지만 잡초와 흙에 묻혀 손으로 쓸어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다. 어쨌든 사람이 오가는 이곳에 갑자기 탄환이 떨어졌으니 최전방의 긴박한 일상을 실감하게 하는 현장이다.
중면사무소 마당에 있는 북한의 고사기관총 낙탄지. 14.5㎜ 탄환이라 흔적이 크지는 않다
중면사무소를 돌아 나와 옥녀봉 북쪽 도로변에 있는 로하스파크에서 쉬어간다. 로하스파크는 ‘연천미라클타운’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한옥카페와 캠핑장, 수영장을 갖춘 리조트로 널찍한 장독대가 볼 만하다.
어느새 오후 5시가 가깝고 해가 뉘엿한데 앞으로 25km를 더 가야 한다고 하자 다들 조금 지친 표정이다. 계획대로 갈 것인지, 코스를 줄일 것인지 잠시 고민이 됐다. 차탄천과 연천읍내를 거쳐 군남댐으로 돌아가면 총 36km 정도가 되는데, 미라클타운을 내려가 군남댐으로 곧장 복귀하면 거리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정도면 오늘 충분하지 않아요? 옥녀봉을 넘고 콜로라도강을 건너 몽골초원까지 달렸잖아요?”
유 전 장관의 과장법에 공감하는 웃음이 터졌다. 주행거리는 짧지만 풍부한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봤으니 충만한 하루였다. 자전거여행의 깊이는 결코 거리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행은 만장일치로 단축코스를 택해 군남댐으로 복귀했다.
다리가 끊어진 그 개울은 딱히 이름이 없었다. 일행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도하 소동’을 기념해 그 개울에 ‘콜로라도강’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연천미라클타운의 장독대. 투박한 옹기도 모이면 장관이 된다
tip
군남댐에서 상류쪽으로 길 따라 들어가면 연천군맑은물관리사업소가 나온다. 사업소 정문 오른쪽으로 난 길이 옥녀봉 방면이다. 초입의 철문은 열쇠가 채워지지 않아서 열고 들어간 다음 다시 닫아놓으면 된다. 그 전에 주능선으로 바로 오르는 코스도 있으나 이 길의 경관이 더 좋다. 군남댐 아래 야구장 옆에 있는 임진강 언덕너머매운탕(031-833-0447)에서 식사 후 거점으로 삼으면 편하다(장시간 주차 가능. 메기·잡어탕/빠가탕 각 소 4만원).
연천 옥녀봉(205m) 일주 18km
“부디 안녕하시길”
사방 조망이 탁 트인 옥녀봉(205m) 정상에 우뚝 선 그리팅맨과 함께 북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일행
연천 최북단 옥녀봉에는 북녘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는 ‘그리팅맨’이 서 있다.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높이 10.8m의 이 거상은 입지와 형태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호국의 달을 앞두고 군남댐을 거쳐 옥녀봉에 오른 일행은 같이 허리를 숙이는 대신 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군남댐은 길이 658m, 높이 26m의 소규모로 총저수량은 7160만톤이다. 황강댐 저수량의 20% 밖에 되지 않아 대량방류 시 감당이 어려울 수 있다
“같이 인사하는 건 (북 정권에 숙이는 것 같아) 좀 그런데….”
“그러면 손을 흔들죠.”
키 10.8m의 그리팅맨이 북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옆에서 일행은 한 줄로 도열했다. 그리팅맨처럼 북을 향해 인사를 하자고 제안하자,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이홍희 편집위원이 완곡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충남과 울산 지방경찰청장을 지낸 조용연 편집위원이 손 흔들기를 제안해 다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단순한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언젠가 해방의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잘 지내세요!”라는 염원을 담아서.
발아래로는 임진강이 남북의 산야를 자유롭게 흐른다. 임진강은 연천에서 파주까지 접경을 지나고 서울에서 가까워 남쪽의 강으로 알지만 전장 254km 중 남쪽 구간은 1/3밖에 되지 않는다. 발원지는 원산 서쪽의 마식령(768m)까지 북상한다. 저 아래로 보이는 물은 방금 DMZ를 넘어왔으니 대부분은 북녘 산야를 훑은 북녘의 물인 셈이다. 그래서 물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질문과 소망을 함께 투사한다.
군남댐에서 초반에 급경사 업힐을 올라서면 곧 능선 위로 올라선다. 산비탈은 밭으로 개간되어 숲이 드문드문 하고 맞은편으로 그리팅맨이 서 있는 정상이 보인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호국영령이 떠오르고, 북방으로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픈 마음이 든다. 그래서 접경지역인 연천, 그것도 임진강 최북단으로 향한다. 여기에는 군남댐(군남홍수조절댐)이 북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거르고 있다. 군남댐은 양구 평화의 댐과 역할이 비슷하다. 군남댐에서 57km 상류인 황해도 토산군 황강리에 저수량이 3억5천 톤에 달하는 황강댐이 있기 때문이다. 황강댐의 무단방류로 인해 연천지방에서는 캠핑객이 목숨을 잃고 갑작스런 물난리를 겪은 일이 있었다. 황강댐은 발전과 용수를 위한 다목적댐이라지만 언제든 수공(水攻)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군남댐은 이를 대비해서 축조했다. 북한강 상류에 있는 북측 임남댐과 평화의 댐 관계와 똑 같다.
오늘 여정은 군남댐을 출발해 바로 옆에 있는 옥녀봉(205m)을 올라 정상에 있는 그리팅맨과 더불어 북녘에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답사에는 유인촌 전 장관과 본지 편집위원단이 함께 했다.
군남댐과 임진강을 보며 잠시 다운힐
“아이구, 이거 길이 너무 험한데!”
“이런, 계단까지 있네요!”
다들 거친 호흡으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다 계단이 앞을 막자 맥이 풀린다. 미리 이른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해서 더 힘들게 느껴진다.
군남댐에서 옥녀봉을 오르는 길은 평화누리길 12코스와 겹치는데 원래 걷기 코스이니 계단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도 전구간이 임도라고 생각했다가 예상 밖으로 계단에 급경사 돌길이 나오자 기자도 대략 난감이다.
호흡은 가쁘고 다리는 아프고 진도는 지지부진. 단순히 길이 나빠서가 아니다. 한 구비 돌아서면 펼쳐지는 특별한 경관에 휴식과 사진 촬영으로 가다서다를 무한 반복한다. 산악이 많은 전방에서 겨우 205m 높이로 이렇게 사방 조망이 탁 트이다니 대단히 특별한 입지다. 선조들이 이런 곳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부에는 6~7세기 신라가 쌓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임진강 일원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차지자하기 위해 애쓴 각축장이었다.
옥녀봉 기슭은 곳곳이 밭으로 개간되어 전망이 트이고, 알프스 기슭의 구릉지 초원 같아 이국풍마저 느껴진다. 이제 군남댐은 저 아래로 멀어지고 임진강은 크게 휘어지며 산줄기 저편을 돌아 북으로 꼬리를 감춘다.
산비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경사는 상당히 급한 편이다
비탈밭 중간에 홀로 서 있는 고목은 저절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자연 쉼터다. 벌목한 산자락은 은근 목가적이다
“얼마 안 된다더니 왜 이렇게 멀어요!”(유 전 장관)
“시골길 10리와 똑같지요, 뭐. 금방이라더니 산굽이 돌면 또 한참이고….”(조용연 위원)
“전기자전거를 안 가져온 게 후회막급이네요.”(차백성 위원)
일행의 푸념이 나오기 시작한다. 군남댐 아래 식당에서 정상까지는 4km 남짓이고 옥녀봉은 겨우 205m인데 이렇게 힘들고 지지부진 할 수가 없다. 출발지가 해발 40m는 되어서 실제 비고는 160m에 불과하다.
“이렇게 느린 진행은 처음입니다. 3.5km 오는데 2시간이 걸렸네요.”
모두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급할 것도 없다. 이렇게 천천히, 작정하고 늑장을 부리며 이것저것 다 보고 다 쉬어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나눈다. 해가 지기 전까지만 출발지로 되돌아가면 된다. 물론 아직 해는 중천 저 높이 있다.
군사격장 경고문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면 마침내 저 앞으로 그리팅맨이 훌쩍 다가선다. 그리탱맨이 서 있는 정상까지 길이 나 있다.
인사하는 그리팅맨에게 경례로 답하는 차백성 위원
옥녀봉 북서사면을 내려서는 비탈길. 붉은 흙은 정열적 강렬함과 변경의 소외감을 더해준다
연푸른 빛에 높이 10.8m의 그리팅맨은 양구전쟁기념관에서 본 적이 있다. 양구는 주변에 다른 조형물이 많고 키도 6m 정도여서 그리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여기, 주변에 거칠 것이 없는 옥녀봉 정상에서는 홀로 우뚝 선 모습은 단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설명을 보니 그리팅맨(Greeting man)은 양구 출신의 유영호 조각가의 작품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인사법을 표현해 평화와 화합, 겸손을 의미한다. “인사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작가의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리팅맨은 2012년 지구 정반대편의 우루과이에 1호가 세워졌고 이후 양구와 서귀포에 이어 2016년에 옥녀봉에도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코앞의 DMZ를 넘어 북녘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리팅맨은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지만 일견 북한 정권에 대한 저자세로 비칠 수도 있어 일행은 탄압받는 주민들을 생각하며 손을 흔들었다.
다리는 물에 떠내려간 지 오래, 이 개울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정상에서 한동안 쉬다보니 어느새 출발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쉬운 길이라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이게 큰 착각일 줄이야.
옥녀봉에서 북으로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북쪽 연천로하스파크에서 옥녀봉까지는 자동차로 관광객이 다닐 정도이니 노면이 좋고 시멘트 포장 구간도 있다. 원래는 로하스파크로 곧장 내려가 도로를 따라 태풍전망대 방면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도중의 갈림길에서 ‘중면사무소’ 이정표를 보고 임도를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연강나룻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산을 다 내려와 임진강변의 황야로 내려서서 중면사무소 이정표를 따라 계속 가는데 갑자기 개울이 길을 막는 게 아닌가. 지도에도 분명 길이 연결되어 있지만 허망하게 물만 흐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개울 건너편에 길이 나있고 개울가에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원래 있던 작은 다리가 홍수에 유실된 듯하다. 흙탕까지 있는 급사면을 내려와서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이거 난감하게 됐다. 개울물이 깊고 흐름도 빨라 건너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곶리 ‘콜로라도강’ 도하작전. 물이 불어나면 건너기 어렵다
“저기는 건널 만하겠네. 가봅시다!”
상륙작전을 주로 하는 해병대답게 이홍희 편집위원이 상류 방면으로 조금 올라가 여울 구간을 자전거에 탄 채로 건넜다. 일행은 환성을 지르며 라이딩으로, 혹은 끌바로 개울을 건넜다. ‘뽈락’ 김태진(전 코렉스스포츠 대표) 위원은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물속에 들어가 ‘도하작전’을 거들었다.
“자전거생활 아니면 언제 이런 도하를 해보겠습니까.”
세계를 자전거로 주유한 자전거여행가 차백성 위원도 유쾌하게 거든다. 다들 힘들고 불편한데도 즐거운 이유를 차 위원이 간단히 정리했다.
“자발적으로 사서 하는 고생이기 때문이지요.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누가 이런 황당한 짓을 하겠어요.”
‘도하’를 마치니 이번에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콜로라도강을 건너고 이제는 몽골초원까지 달리는군요!”
유 전 장관은 새 자전거가 더러워지고 신발도 엉망이 됐지만 신이 난 표정이다.
‘콜로라도강’을 건너면 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개울을 건너 들판을 가로지르면 임진강변에 상당히 큰 규모의 적석총(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이 있다. 작은 언덕을 이룬 고분 옆으로 고목 두 그루가 서 있어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임진강 북안이라 인근의 당포성, 호로고루성, 은대리성처럼 고구려 계통인지 알았으나 조사 결과 백제계통으로 확인되었다. 인근의 고구려 성들은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 축성된 데 비해 이 적석총은 백제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허물어지기 쉬운 강변 모래땅에 애써 강자갈을 쌓아올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무덤방이 두 칸인 것으로 보아 부부나 가족이 묻혔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깊은 오지인데 당시는 더 심했을 것이다. 다만 당시는 이 일대가 임진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의 거점이었을 수는 있다. 이 일대의 임진강 수운을 관장하던 수장급 무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곶리 돌무지무덤. 삼국시대 초기 수장급 백제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강변 언덕에 고목과 함께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여기서 임진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태풍전망대가 있다. 태풍전망대는 자동차만 출입이 가능해 전망대 초입의 연강갤러리와 임진강평화습지원까지만 가보려 했으나 민통선 검문소에서 코로나와 돼지열병 때문에 출입을 막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의 중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있는 북한군 고사기관총 낙탄지(落彈地)만 보고 가기로 한다. 여기서 DMZ 너머 북측까지는 5~6km이니 최대사거리가 8km에 달하는 북한의 14.5㎜ 고사기관총 유탄이 충분히 날아올 수 있다. 북은 대북전단지를 향해 쐈다지만 DMZ 너머까지 총탄이 날아온 것은 강력한 도발이다. 시멘트 바닥에 남은 탄착흔은 투명 덮개로 보호하고 있지만 잡초와 흙에 묻혀 손으로 쓸어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다. 어쨌든 사람이 오가는 이곳에 갑자기 탄환이 떨어졌으니 최전방의 긴박한 일상을 실감하게 하는 현장이다.
중면사무소 마당에 있는 북한의 고사기관총 낙탄지. 14.5㎜ 탄환이라 흔적이 크지는 않다
중면사무소를 돌아 나와 옥녀봉 북쪽 도로변에 있는 로하스파크에서 쉬어간다. 로하스파크는 ‘연천미라클타운’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한옥카페와 캠핑장, 수영장을 갖춘 리조트로 널찍한 장독대가 볼 만하다.
어느새 오후 5시가 가깝고 해가 뉘엿한데 앞으로 25km를 더 가야 한다고 하자 다들 조금 지친 표정이다. 계획대로 갈 것인지, 코스를 줄일 것인지 잠시 고민이 됐다. 차탄천과 연천읍내를 거쳐 군남댐으로 돌아가면 총 36km 정도가 되는데, 미라클타운을 내려가 군남댐으로 곧장 복귀하면 거리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정도면 오늘 충분하지 않아요? 옥녀봉을 넘고 콜로라도강을 건너 몽골초원까지 달렸잖아요?”
유 전 장관의 과장법에 공감하는 웃음이 터졌다. 주행거리는 짧지만 풍부한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봤으니 충만한 하루였다. 자전거여행의 깊이는 결코 거리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행은 만장일치로 단축코스를 택해 군남댐으로 복귀했다.
다리가 끊어진 그 개울은 딱히 이름이 없었다. 일행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도하 소동’을 기념해 그 개울에 ‘콜로라도강’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연천미라클타운의 장독대. 투박한 옹기도 모이면 장관이 된다
tip
군남댐에서 상류쪽으로 길 따라 들어가면 연천군맑은물관리사업소가 나온다. 사업소 정문 오른쪽으로 난 길이 옥녀봉 방면이다. 초입의 철문은 열쇠가 채워지지 않아서 열고 들어간 다음 다시 닫아놓으면 된다. 그 전에 주능선으로 바로 오르는 코스도 있으나 이 길의 경관이 더 좋다. 군남댐 아래 야구장 옆에 있는 임진강 언덕너머매운탕(031-833-0447)에서 식사 후 거점으로 삼으면 편하다(장시간 주차 가능. 메기·잡어탕/빠가탕 각 소 4만원).
연천 옥녀봉(205m) 일주 1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