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미니벨로 빅투어(16) / 경기 수원

자생투어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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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功過)는 혼재한다, ‘인기 왕’ 정조의 자취


수원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의 산물이다. 정조의 개혁은 왕권강화가 주목적이었고 수원화성과 상비군인 장용영 설치는 이를 위한 승부수였다. 서구적 개념의 근대화 개념은 희박했으나 둔전제를 위해 축조한 저수지, 특히 서호는 이후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굶주림을 퇴치한 농업혁명의 산실이 되었으니 정조의 유산은 헛되지 않았다 (2021년 4월)

글/사진 : 조기중(전 삼성전자 상무)


정조 때 처음 축조되었고, 최근에는 녹색혁명의 산실이 된 서호(축만제) 호반에서

수원은 조선 22대왕인 정조(正祖)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시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죽음을 비롯해 수많은 위기와 고초를 이겨내고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가 절치부심하며 최우선시 한 것은 바로 왕권강화였다. 이를 위해 실행한 것이 바로 수원성 건설과 규장각 설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력의 유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권, 즉 군사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다. 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양에서 떨어진 수원에 화성을 짓고 강력한 상비병력인 장용영을 설치한다. 외영까지 포함해 1만 명이 넘는 장용영 병사들을 유지하기 위해 둔전제를 실시하고 논에 물을 공급하려고 만든 것이 서호를 비롯한 여러 곳의 저수지였다. 개혁군주 정조는 분명 한 시대에 획을 그었고 모두에게 강한 영향을 준 훌륭한 임금이다. 생애도 아주 스펙터클해서 소설과 영화의 주제로 삼기에 아주 좋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판단은 많은 부분에서 방향이 어긋나고 과장된 게 사실이다.

'아이돌'이 된 조선 왕
사실 정조의 관심은 근대화를 통한 혁신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려는 개혁이 핵심이었다. 혁신과 개혁은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르다. 개혁이 점진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이라면 혁신은 말 그대로 신발을 갈아 신는 것!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조선은 태동부터가 절대적으로 왕권이 강했던 나라는 아니었다. 항상 왕과 신료들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지속되었고, 왕들의 최대관심은 왕권강화였다. 반정으로 물러난 왕이 몇 명이나 되었으니 왕들의 트라우마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붕당정치를 조장해온 것이다.
정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왕 중의 한명이었다.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ㅡ환국정치를 거쳐 영·정조대의 탕평정치 이후 망국으로 가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세도정치를 연 장본인이 바로 정조였다. 후사를 김조순에게 부탁하며 세도정치가 열린 것이다.
이전에 일반인들은 정조에 대해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러다 1993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이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비슷한 류의 소설과 드라마, 영화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오가는 사이비한 상상력에 기반해 가히 ‘정조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폭발했다. 대중들은 정조가 일찍 죽지 않고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조기에 근대화를 해서 일찍 선진국에 들어섰을 거라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정조에 대한 과도한 신격화다.

정조의 진짜 목표
정조의 관심은 근대화가 아니고 왕권강화를 통한 집권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근대화의 핵심은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인데 정조에게 있어서 백성이라는 존재는 애민의 대상이었지 주인으로 섬기는 존재는 아니었다. 한국은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아니고 일본의 식민지라는 부끄러운 상황을 통해 강제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일반 대중들은 여기서 오는 콤플렉스와 아쉬움을 정조라는 강력했던 임금에게 그대로 투사했을 뿐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에 관우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다. 사실 그는 무수히 많은 중국 장수들 중 한명일 뿐인데 시대가 흐르면서 충성과 의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며 ‘관왕(關王)’으로 불리어지다가 나중에는 ‘관황(關皇)’이라는 추존 황제가 되고 마침내 관성대제(關聖大帝)라는 귀·신·인의 삼계를 관장하는 최고신의 자리까지 차지한 현상과 얼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것에 대한 확신일 뿐이라는 격언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고 사귈 때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보고 만나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주체적인 내 판단이 아니고 주위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믿는 것이라면 그것은 문제다. 그냥 남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아무 비판 없이 얹혀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정조의 현명함과 애민정신 그리고 탁월한 업적을 무시하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과 사상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단지,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낸 아이돌로서의 정조가 아니고 제대로 평가된 정조를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정조의 업적이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수원화성과 장용영이다.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건설한 것으로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정조의 명을 받아 정약용이 설계했고 18년(179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만에 완공했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의 성과를 살필 수 있으며, 국내 성곽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벽은 조선의 일반적인 읍성(마을을 둘러싼 성곽)과 같은 모양이지만 여러 성루들의 모습은 조선식은 아니고 마치 중국의 성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걸었다. 높낮이가 별로 없어 산책하듯이 걷기가 아주 편했다. 이곳에 와서 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며 뿌듯해 했을 정조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정조는 왕위를 아들인 순조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권력을 그대로 가진 상왕으로서 상왕정치를 하려고 했다. 진짜 생각이 많고 정열적인 임금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수원행궁
이제 수원행궁으로 향한다. 먼저 행궁 뒤쪽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로 올라갔다. 서장대까지는 일직선으로 나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이 가파르다보니 중간중간 벤치가 놓인 널찍한 쉼터가 있다. 오르다 힘이 들면 잠시 쉬면서 땀을 식히고 가라는 배려 같다.
팔달산은 해발 128m로 아담한 높이지만 수원의 주산(主山)답게 정상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달산의 예전 이름은 남탑산이었는데 산의 그림을 본 조선 태조가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다”라고 하면서 지금의 팔달산으로 바뀌었다. 수원성 남문인 팔달문과 팔달구, 팔달동도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정상에는 멋진 2층 누각의 서장대가 우뚝 서있다. 서장대는 주변 동태를 감시하고 화성 내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다. 수원화성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와 함께 장안문 동쪽에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리는 동장대가 있다.
서장대 뒤편에는 사방으로 쇠뇌를 쏠 수 있는 방어시설인 서노대가 설치되어 있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 적힌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며, 그는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조가 쓴 현판을 보고 있노라니 획수 하나하나에서 강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1층에는 정조가 수원화성과 장용영 군사의 모습을 보고 위용에 만족하여 지은 시를 새긴 ‘어제화성장대시문’ 현판이 복원되어 있다. 의미는 “나라를 지켜 보호함이 중한지라 경영엔 노력을 허비하지 않는다. 성첩들은 규모가 장대하고 삼군의 의기는 대단히 호쾌하도다…”라는 내용이다.
서장대를 내려와 화성행궁(華城行宮)을 들러보았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 평소에는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곳이다.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원래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행궁 중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시설이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파괴되었다. 1980년대부터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 2003년 10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서장대에서 본 동쪽방면 수원시내. 바로 아래에 수원행궁과 시가지를 가르는 성벽이 보인다 


축만제로 바뀐 서호
수원화성과 행궁을 뒤로하고 서호로 간다. 서호는 정조 때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수원성을 쌓을 때 내탕금(內帑金) 3만 냥을 들여 함께 축조했다. 당시 수원성의 동서남북에는 네 개의 호수를 만들었는데 북쪽에 있는 호수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다. 남쪽에는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축조했다. 그리고 동쪽 호수는 수원시 지동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조차 없다. 서호(西湖)는 수원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통칭이고, 2020년 원래 명칭인 축만제로 환원되었다. 축만제(祝萬提)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의미로 호숫가에 그 표석이 아직도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여 농사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왔고, 이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치되어 그 맥을 이어왔다. 현재는 서호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호수의 둘레는 약 2km로 제방에 난 길은 훌륭한 산책로다. 마침 호숫가에는 하얀색과 연분홍색 벚꽃이 어울려 한창이다. 벚나무 중에는 가지가 늘어져 물 바로위에까지 꽃이 닿아있는 수양벚나무도 있다. 벚꽃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파란물결은 그림이라면 그대로 따가고 싶을 만큼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벚꽃이 활짝 핀 호반길을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축만제 언덕에는 조선(정확히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었다는 아담한 규모의 항미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낙조는 수원팔경의 하나라고 할 정도로 아릅답다고 한다.
제방 중간에는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노송들이 멋진 모습으로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제방 오른쪽에는 농업진흥청에서 운영하는 작물연구소의 농사시험장이 있는데 작물재배를 위한 땅고르기가 한창이다. 호수 가운데에는 자그마한 인공섬이 하나 있는데 흰색의 나무마다 가마우지가 가득 앉아 있다. 흰색 나무는 무슨 나무일까 확인해보니 아카시아였다. 여기에 가마우지의 배설물이 쌓여서 하얗게 보이는 것이란다. 가마우지는 참새처럼 흔한 새도 아닌데 이렇게 집단서식하고 있는 광경은 희귀하다. 사람의 접근이 불가능해 안심할 수 있는 섬이고 서호에 맛난 물고기들이 많아 가마우지 사이에 소문이 나서 이렇게 모여든 모양이다.
서호를 끼고 있는 여기산은 백로와 왜가리의 집단서식지로 유명하다. 뉴스나 다큐멘터리에도 자주 나온다고 한다. 서호는 정조임금이 왕권강화를 위한 둔전의 목적으로 지었지만 그로부터 200여년이 흐른 후 우리나라를 반만년의 기근에서 해방시킨 농업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기적의 신품종 ‘통일벼’의 탄생이 그것이다.

녹색혁명 ‘통일벼’의 무대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자마자 참담한 전쟁을 겪었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은 빠른 성장으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들어와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조선,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과 건설, 그리고 세계 1위인 전자기술의 공이 크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 데에는 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국가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치수, 즉 대대적인 댐 건설과 개간사업 등 수자원관리에 성공한 것과 주식인 벼의 신품종 개발을 통해 유사 이래 처음으로 식량자급에 성공한 점이다.
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만든 이곳 축만제에서 200여년 후에 식량자급에 숨은 공신이 탄생한 것이다. 바로 녹색혁명이라 할 수 있는 통일벼의 개발이다. 통일벼는 서울대농대의 허문회 박사가 일본쌀인 자포니카와 안남미라고 하는 길쭉한 쌀인 인디카종을 교잡시켜 만든 신품종이다. 원래 잡종은 후대유전이 안되므로 계속 재배할 수 있는 신품종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허문회 박사가 3종을 교차 잡종화하면서 1972년에 마침내 신종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다. 개발은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했지만 보급을 위한 재배는 이곳 시험재배장에서 했다.
이후 통일벼 관련 신품종이 지속적으로 개발·보급되면서 1965년 350만t이던 국내 쌀 생산량은 77년 600만t으로 크게 늘면서 주식의 완전자급에 성공한다. 드디어 배고픔에서 해방된 것이다. 심지어 단위당 쌀생산량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가 기술의 불모지에서 놀라운 산업발전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된 것은 반만년 동안 계속돼 온 굶주림의 고리를 끊어낸 녹색혁명, 즉 ‘통일벼 개발’이 큰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호입구에 있는 옛 농업진흥청 자리에 가면 이러한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녹색혁명 기념탑’이 있다. 팁에는 녹색혁명을 완수했음을 환호하는 농민의 모습이 있고 아래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이 씌어있다. 이 탑을 보며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신격화하거나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선전선동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역사속 인기인물인 정조의 발자취를 찾아나선 여행이 이렇게 통일벼의 개발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사도세자의 그림자  
이번 여행은 사전에 정조가 즉위식을 올린 서울 광화문 근처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있는 경희궁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해 정조가 잠들고 있는 건릉을 방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정전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린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정조는 서궐인 경희궁에서 즉위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임오화변이라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사도세자와 정조는 역사를 통해 항상 함께 다닌다. 수원성의 건설과 사도세자 능의 이장, 마침내 죽어서 아버지와 같은 이곳 융건릉에 잠들게 된다.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의 통칭으로, 융릉은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홍씨인 현경왕후를 합장한 무덤이다. 처음에는 배봉산 언덕에 자리했으나 정조 즉위 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존을 희망했지만 당대에 이뤄지지 못하고 고종 때 장종으로 추존되고 이후 장조로 바뀐다.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 이야기는 항상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이 당쟁으로 인한 희생이라는 설정은 지극히 극단적이고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차기 임금이라는 스트레스 속에 살며 광증이 생긴 사도세자와 성질 급하고 의심 많은 부왕 영조와의 갈등, 그리고 실제로 영조를 위협하는 행동을 하다 처벌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이 유력하다.
지금도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인터넷이나 언론이 발달하지 못한 수백년 전 구중궁궐에서 일어난 일의 실상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100%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람의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는데 하물며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얼마나 정확하겠는가? 단지 우리는 알려진 역사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배우고, 나아가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남이 만든 허황된 이야기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만의 노력과 사고로 깨달음과 결론을 얻어 거기서 내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융건릉의 진달래
건릉은 오늘의 주인공 정조와 효의왕후김씨의 무덤이다. 정조의 묘호는 처음에는 정종(正宗)이었다가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에 정조(正祖)로 바뀌었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 융건릉은 다른 왕릉이 그렇듯이 울창한 숲속에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숲속나무들에 초봄의 맑은 녹색 이파리가 막 맺히기 시작한다. 곳곳에는 진달래가 진분홍색 꽃을 가득 피우고 있다. 진달래는 아직 이파리가 나오지 않고 줄기끝에 꽃만 피어 있는 이때가 제일 아름답다. 진달래가 석양빛을 받아 마치 작은 꼬마전구들처럼 반짝인다. 능으로 가는 길에 새봄의 나무냄새가 무척이나 싱그럽다. 가슴 깊숙이 심호흡을 해본다.
요즈음이 숲속산책에는 딱 좋은 시기인 것 같다. 귀찮게 하는 벌레도 없고 봄바람도 적당히 시원하다. 길을 걷다 통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오늘 여행을 정리해본다. 며칠간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인터넷으로 강의도 들어봤다. 정조가 즉위한 경희궁에서 여행을 시작해 수원화성과 축만제, 정조가 잠들어 있는 이곳 건릉에서 며칠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성공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미래도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대로 무작정 가는 것이 아니다. 선구자들의 믿음과 행동, 거기에 감화된 사람들의 동참이 어우러지면서 조금씩 변하는 것이다. 200년 전 정조의 혁신과 애민정신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이 당시에는 나라의 완전한 혁신을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데 시작점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둔전제를 위해 만든 수원의 서호에서 마침내 유사 이래 처음 식량자급의 기적까지 연결된 것이다.
필자는 현업에 있을 때 사업부가 수원에 있어 업무차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오갈 정도로 아주 많이 다녔다. 그러나 그때는 강남 사무실과 수원사업장을 일직선으로만 오갔을 뿐이다. 당시 직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수원의 회사 말고는 몇 개의 식당밖에 몰랐을 정도다. 수원화성도, 서호도, 융건릉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 여유가 생겨 그동안 흘려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생각하고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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