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역 포위작전’과 영천 ‘섬멸전’으로 막아내다
6·25전쟁 중 호남지방을 대(大) 우회하여 마산 서 측방에 진출한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을 가장 기습적인 기동으로 손꼽는다. 여기에 북한군의 기습적인 기동이 또 하나 있다. 북한군의 8월 공세 때, 북한군 제12사단이 길안(청송 서쪽 14km)을 출발한지 5일 만에 직선거리로 50km 남쪽에 위치한 ‘기계’(포항 북서쪽 15km)를 점령한 기동이다. 북한군 제12사단의 이 기동으로 말미암아 낙동강방어선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로써 새로운 방어선 ‘Y선’을 연하여 일진일퇴의 본격적인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전개됐다.
8월 공세를 통해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밀려났던 북한군 제2군단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영천 정면에 주력을 집중하고 ‘9월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천을 뚫지 못한 채 북한군은 또 퇴각해야만 했다. 50년 12월 ‘별오리 회의’에서 김일성은 “영천을 점령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지만, 영천을 상실하면서 패배했다”라고 자평(自評)한 바 있다. 그만큼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던 곳이 바로 영천전투다 (별오리 회의 : 자강도 만포시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2020년 12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워커라인’의 최동단(最東端)이었던 ‘형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포항기지로부터 전폭적인 항공기・함포・군수지원을 받고, 학도의용군・주민과 함께 북한군에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리하여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고 반격작전을 통해 적을 물리쳤다. 강산이 7번 바뀌는 동안,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 포스코를 필두로 유관 공장들이 뒤를 이어 굴지의 철강공업단지가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이 된 것이다. 70년 전에 흘린 피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동해안지구 작전
1950년 8월 5일을 기해 낙동강방어선 전(全) 전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가 일제히 시작되면서 북한군과 국군·유엔군 간에 일진일퇴의 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이 담당한 낙동강방어선 ‘X선’(왜관-낙동리-청송-영덕) 북방에서 8월 공세를 개시하면서, 제12사단은 길안에서 기계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제766유격부대를 태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향로봉을 거쳐 기계 북쪽으로 침투시켰다. 그리고 제5사단은 국군 제3사단이 배치된 영덕·장사동을 향해 공격해왔다.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하던 국군은 8월 12일을 기해 새로운 방어선 ‘Y선’ 상의 포항·안강·기계 일대에서 ‘동해안지구 작전’을 전개했다.
안강 · 기계지구 전투
북한군의 ‘8월 공세’가 개시되면서,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청송 서쪽 ‘길안’ 일대를 담당한 수도사단의 방어선이 와해되어 사단은 ‘의성’ 일대로 철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약 50km 구간에 간격이 발생했다. 안동과 길안을 돌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 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청송-죽장-포항’을 연결하는 31번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그 길목 일대에 기계와 안강이 있다.
이 축선은 매우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육군본부와 미8군에서는 북한군 대부대의 기동은 어려울 것으로 보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12사단은 이런 ‘허(虛)’를 찌르고 포항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는 청송-기계 접근로를 깊숙이 기동한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9일 ‘기계’를 점령했다(직선으로 50km이지만, 도로로는 80km나 되는 거리다).
이로써, 유엔군의 항공기 발진기지인 ‘영일비행장’과 양호한 ‘항만’이 있는 전략 도시 포항이 북한군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대의 예하부대가 포항시내와 포항에 인접한 ‘흥해’(포항 북쪽 8km)까지 진출하면서 낙동강방어선에 심대한 위기상황이 도래했다.
기계까지 진출한 북한군이 안강을 거쳐 경주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낙동강방어선(Y선)’이 동·서로 분리됨은 물론, 대구·영천과 포항의 후방이 차단될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북한군의 최종 목적지 부산의 안위까지 우려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계까지 파죽지세로 진출하던 북한군 제12사단의 진격 속도가 한 순간 둔화됐다. 유엔군 해·공군의 무자비한 후방공격의 결과로 북한군 후속부대의 진출이 지연되면서 보급 추진이 막혔기 때문이다.
안강·기계 일대의 위기를 절감한 육군본부는 8월 10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이후, 포항지구사로 약칭)를 급히 편성하여 기계지역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용한 병력이 부족했다. 궁여지책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대들까지도 투입하여 안강 일대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의성으로 철수했던 수도사단을 의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장거리 기동시켜 안강 일대로 재배치시키는 초(超) 강수를 두었다. 안강·기계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는 ‘역 포위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역 포위작전을 위한 부대배치를 조정 완료한 8월 18일, 포항지구사와 수도사단은 예하 부대들로 기계지역 돌파구 남단인 안강을 차단한 가운데, 수도사단 예하의 2개 연대를 기계 서북쪽으로 투입하여 총 공격함으로써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고 기계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섬멸적 타격을 입은 북한군 제12사단이 비학산(포항 북서쪽 18km) 일대로 철수·퇴각함으로써 동해안 지구의 위기가 일단 수습되고, 8월 하순까지 소강상태가 되었다.
9월 공세 : 8월 공세 때 많은 피해를 입고 비학산으로 패주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은 제766유격대를 흡수·재편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북한군이 9월 2일 새벽을 기해 ‘9월 공세’를 개시함에 따라, 기계 남쪽을 방어하던 국군부대들이 안강 이남으로 밀리면서 곧바로 경주가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경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경주 방향의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들을 사수한 국군 연대들의 혈투로 저지되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고립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주 방향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복호산(안강 동남쪽 3km. 형산강 돌출부)’ 일대를 끝가지 사수했다. 또한, 국군 제17연대도 형산강 인접의 감제고지인 ‘곤제봉(칠보산. 293m. 안강 남쪽 5km)’을 7차례에 걸친 쟁탈전을 치르며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경주 방향으로의 적의 돌파를 저지하고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곤제봉과 복호산에서 있었던 전투는 실로 ‘경주공방전’의 열쇠였던 것이다.
이후, 9월 13일을 기해 수도사단은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안강 이북으로 격퇴하며 대반격에 동참했다.
「묘지번호 1659, 육군소위 김○○의 묘」
국립 서울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김소위의 묘’라는 이색적인 묘가 있다. 이 묘의 주인공 ‘김소위’는 동해안지구에서 있었던 북한군의 9월 공세의 전초전 격인 ‘도음산 전투(8월 27일. 포항 북서쪽 8km)’에서 전사했다.
당시 이 지역은 국군 제3사단(26연대) 책임지역(황규만 소위 관할)이었는데, 수도사단 소속 ‘김○○ 소위’가 작전을 지원하러 왔다. 그러나 도착한 그날, 수색정찰에 나섰던 김소위는 북한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황규만 소위는 전선 상황이 급박하여 김소위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도음산 자락의 소나무 밑에 가매장한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더 지난 1964년, 황규만 소위(당시 대령)는 기억을 더듬어 전투현장을 찾아나서 마침내 김소위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황소위는 김소위를 국립묘지에 안장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상부의 승인을 받아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황소위는 그 후 1976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도 김소위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1990년 김소위의 신원은 물론 생존해 있는 가족들도 찾아낼 수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전쟁의 아픔과 두 사람의 전우애를 계승할 수 있는 역사적 산물로 남기기 위해 현재까지도 ‘이름 없는 묘’로 남겨놓고 있다. 비석 앞의 상석에는 ‘고 육군중위 김수영’이라고 또렷하게 새겨 놓았다.
황규만 장군은 2020년 6월 21일 사망하여 영원한 전우 ‘김수영 소위’ 곁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서울현충원 54구역. 묘번 1649 · 1659).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묘비 뒷면에 신문 기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1964년 6월 16일자 조선일보 3면).
포항지구 전투
8월 공세가 시작되면서, 북한군은 제5사단을 동해안으로 진출시켜 최종 목적지인 부산 진출에 긴요한 발판인 포항을 점령하게 했다. 포항에는 항만·철도·육로·공로 모두를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가 있었다. 또한, 북한군 공격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전투기 발진기지인 ‘영일비행장’이 있어 최우선적으로 공략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공세를 개시한 북한군 제5사단이 영덕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강구(영덕 남쪽 6km)를 거쳐 장사(8월 10일. 포항 북쪽 30km)까지 진출했다. 이제 포항이 북한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길이 11km, 폭 1~2km)에서 북한군 제5사단에 고립된 상황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때(8월 10일), 기계를 점령한 북한군 제12사단 예하의 일부 부대가 포항 북쪽의 ‘흥해’(8km)와 포항 시가지까지 진출하면서 포항이 피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포항에는 국군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 보급·지원부대 등이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고, 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8월 1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시내로 공세를 펼치는 과정에서 포항을 방어하던 학도의용군과 경찰대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정오경 포항이 점령되었다. 학도의용군의 용전분투 덕분에 포항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부대들과 행정관서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과 피난민들은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다행스런 것은, 북한군은 포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학도의용군의 저항과 적극적인 함포·항공지원 사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포항외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학도의용군(학도병)은 6·25전쟁 때 학생 신분으로 자진 참전한 의용병이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발족한 ‘비상학도대’가 그 기원이며, 6·25전쟁 중 약 30만여 명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 중 7,000여 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학도의용군이 참전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포항전투’다. 8월 11일 새벽부터 시작된 11시간 반 동안의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들이 분전함으로써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을 상당시간 지연시켰다. 이 전투에는 총 71명이 참가하여 48명이 전사하고 실종·포로가 10명,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사자 총 48명 중에서 14명만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포항여중 일대에 가매장되었다가 1968년이 되어서야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해외동포 청년들, 대표적으로 ‘재일학도의용군’도 6·25전쟁 때 조국 수호에 동참했다. 69명의 청년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을 필두로 642명의 청년들이 각지의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14~17세의 소년지원병(29,603명이 참전해, 2,573명 전사)들도 동참했고,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여성들도(간호장교, 여자의용군, 여자 학도의용군) 자원입대하여 전·후방 지원 임무는 물론 실제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6·25전쟁 중 남녀노소 없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낙동강방어선을 지키고 총반격을 가해 북진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남진으로 ‘영일비행장’이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미8군은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는 등 비행장 방어를 위해 가용한 조치를 다했다. 그러나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영일비행장에 전개하여 작전 중이던 제40전투비행대대와 지원부대들을 8월 13일 일본으로 철수시킴에 따라 국군·미군 지상군부대에 대한 항공지원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편, 8월 10일 이후 장사 일대에서 고립되어 북한군과 공방전을 계속하던 국군 제3사단은 북한군이 흥해까지 진출함에 따라 육로를 통한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국군 제3사단은 17일 아침 LST 4척으로 ‘독석리(포항북방 20km)’로부터 해상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병력 9,000명, 경찰 1,200명, 공무원 및 피난민 1,000여명).
포항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군단 예비인 ‘민(기식)부대’를 포항지역으로 투입했으며, ‘민 부대’는 8월 18일을 기해 포항을 공격·탈환하고 포항 시내의 잔적을 소탕했다. 이후, 구룡포로 해상 철수했던 국군 제3사단이 ‘민 부대’로부터 포항지역을 인수한 다음 북한군을 추격해 흥해 일대까지 북상시켰다.
9월 공세 : 8월 공세 때 포항 점령에 실패하고 흥해 지역으로 패주했던 북한군 제5사단은 ‘9월 공세’가 개시되자 인접 부대들과 보조를 같이하여 전면공세를 취해 왔다. 이때 안강 일대를 담당한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세에 밀려 경주 방향으로 물러서자, 국군 제3사단도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만 했다.
한편, 국군 제3사단에 배속되었던 제8사단 제10연대가 9월 5일 책임지역을 제대로 인계하지 않은 채 영천으로 복귀함에 따라 형산강 방어선에 큰 간격이 생기고 말았다. 북한군 제12사단이 그 간격을 파고들어 후방 깊숙이 침투해옴에 따라 경주가 위태롭게 됐다. 8월 9일에 ‘운제산(482m. 포항 남쪽 10km)’까지 진출한 북한군이 후방을 교란함에 따라 영일비행장이 크게 위협받게 됐다. 미8군은 영일비행장에 대한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데이비드슨 특수임무부대’를 긴급 투입했다. 특수임무부대는 9월 12일을 기해 운제산을 공격·탈환하고 북한군을 소탕했으며, 이후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9월 13일을 기해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최초 방어선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영천지구 전투
북한군은 8월 공세가 실패하자, 가용한 모든 전력을 전선에 투입하여 부산 점령을 위해 다시 한 번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것이 ‘9월 공세’다.
북한 2군단은 제15사단을 다부동 전선에서 차출해 8월 20일 영천 북방의 입암(죽장)으로 전개한 후 전차와 야포를 배속시켜 영천을 목표로 최후공세를 준비하게 했다. 9월 2일 18시를 기해 북한군 제8사단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신녕’을 목표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영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영천은 어떤 곳이며, 북한군은 왜 영천을 택했을까...?
영천은 대구·포항·경주 라인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천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형성된 도로망과 함께 3개의 철도 노선이 통과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북한군이 영천 일대를 돌파하면 국군이 담당한 전선이 동·서로 양분되고, 낙동강방어선 내의 유일한 동서 교통로가 차단된다. 이로 인해 포항의 병참기지로부터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지원이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의 차후 진출 방향에 따라 낙동강 교두보 작전 전체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대구방향으로 진출하면 왜관·다부동 지역의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기계·포항 축선으로 진출한 5사단·12사단과 합세할 경우 북한군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 ‘부산’이 큰 위협에 처할 수 있다. 그만큼 영천이 중요하고, 영천전투가 가지는 무게가 큰 것이다.
북한군이 제15사단을 8월 20일을 기해 다부동에서 영천으로 전환한 것은 ‘9월 공세’ 때 다부동보다는 영천 돌파에 더욱 치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군에 비해 전투력이 약한 국군 정면을 택해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돌파한 이후 대구 또는 경주(부산) 방향으로 융통성 있는 기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해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력이 약한 국군 방어지역을 택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천’을 선택했을 것이다.
국군 제8사단은 9월 공세 첫날인 9월 2일에는 보현산과 입암(죽장) 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으나, 이후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린 나머지 9월 4일을 기해 ‘기룡산’ 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하여 대치했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의 우 인접부대인 수도사단(기계지역)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에 밀려 안강 일대로 철수하면서, 두 부대 사이에 약 14km의 간격이 생겼다. 9월 5일 01시, 북한군 제15사단이 이 간격을 이용하여 큰 저항 없이 전선 후방 깊숙이 침투했다. 이로써 9월 6일 03시를 기해 영천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영천 축선의 대위기가 아닐 수 없다.
동부전선의 안강 축선이 돌파된 상황에서 영천 축선마저 돌파됨에 따라 국군 제1군단 책임지역 내에 2개의 돌파구가 형성되고 말았다. 육군본부는, 인접한 2개의 돌파구가 합쳐져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될 경우 저지 불능의 상황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영천 돌파구를 담당한 육군 제8사단을 국군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소속을 변경하고 전투지경선을 조정했다. 1군단의 지휘 부담을 감소시키는 조치였다.
영천을 담당하는 국군 제8사단을 지휘하게 된 2군단(유재흥 소장)은 영천 서쪽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팔공산)과 제6사단(신녕)으로부터 1개 연대씩을 차출하여 영천 축선의 전투력을 증강했다. 영천 축선이 갖는 중요성과 낙동강 방어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조치다. 그리고 동해안의 위기 해결을 위해 국군 제3사단으로 지원 나갔던 제8사단 10연대까지 원복 조치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무너지기 직전의 영천 전선을 사수할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9월 6일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 동남쪽 경주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군(제8사단 및 배속부대 포함)은 영천 금호강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상태에서 가용한 모든 부대를 투입하여 영천 탈환에 돌입했다. 국군은 3일 간의 혈전·공방전 끝에 9월 8일을 기해 영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간 포항지구에 투입됐던 예하 부대인 10연대까지 원대복귀 시키는 등 전투력을 보강하여 상실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영천을 탈환한 다음 날(9월 9일), 경주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영천 돌파구의 서북방 저지선을 고수하는 가운데 ‘총 7개 연대’를 투입하는 ‘영천 섬멸전’을 감행했다. 이로써 국군은 영천 일대의 적들을 완전 소탕하고, 여세를 몰아 추격전을 전개하여 9월 12일에는 최초 방어선인 기륭산 일대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영천 전투 결과, 북한군 제15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국군 제2군단과 인접한 1군단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해안지구와 영천에 대한 북한군의 ‘8월·9월 공세’를 저지·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이로써, 낙동강방어선을 와해시켜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섬멸하려던 기도와 부산으로의 신속한 남진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던 기도를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동해안지구 작전과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방어선으로부터의 부대 이탈을 막은 것은 물론, 오히려 후방의 예비대까지 낙동강지역으로 투입을 강요함으로써 세기의 도박으로 불린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후, 낙동강방어선을 발판으로 9월 16일 09시를 기해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경부축선을 따라 신속한 진격을 실시하여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연결함으로써 경부축선 서남쪽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이어서 38선을 넘는 북진을 가능하게 했다.
포항・안강・기계・영전투 현장과 그 주변을 찾는 여행
낙동강방어선 작전 중 동부지역에 대한 답사 여행은 ‘포항권’과 ‘영천권’으로 분리된다. 우선 포항권에 대한 답사는 ‘해파랑 자전거길’과 연계하면 수많은 해수욕장과 검푸른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릴 수 있어 매 순간이 즐겁다. 북으로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 연결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일출 명소인 ‘호미곶’(장기곶) 일대에 숨어있는 비포장도로 명코스(공개산-우물재산 일대)도 달려보기를 추천한다.
낙동강방어선의 동쪽 끝단인 형산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경주에 닿는다. 경주로 가는 길목에 안강의 너른 들판과 형산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유네스코에 의해 역사마을로 지정된 ‘양동마을’이 있다. 찬찬히 둘러보기를 권하고 싶은 곳이다.
경주에 가면 다른 곳은 몰라도 토함산과 남산을 빼면 경주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다. 토함산에서 토함산 자연휴양림을 거쳐서 동해안까지 다운힐하면 동해의 신(神) ‘문무대왕’을 만날 수 있고 ‘해파랑 자전거길’과도 연결된다.
영천지역 답사는 영천을 관통하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하면 좋다. 영천전투를 기리는 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 체험관은 영천 시내에 있고, 추모관은 안강·포항 방향의 국립영천호국원과 함께 있다. 금호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영천댐과 보현산천문대에 닿고, 하류로 가면 경산과 대구를 거쳐서 낙동강 자전거길과도 연결된다. 보현산천문대(고도 1,126m)는 업힐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지만, 보현산 정상에서 끝없이 펼쳐진 산줄기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영천댐에서 더 북쪽에 위치한 ‘죽장’을 지나면 내연산(영덕 남쪽 16km) 서편 자락에 있는 상옥리와 하옥리를 만난다. 숲속 계곡을 따라 흐르는 대서천과 오십천을 따라 북상하면, 영덕과 푸른 동해안에 위치한 ‘강구’에 닿을 수 있다. 거기서 ‘해파랑 자전거길’도 만날 수 있다.
참고자료
<6·25전쟁사>(제5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6·25전쟁사 부도>, 육군대학, 2007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육군군사연구소, 2013
<우리가 겪은 6·25전쟁>(Ⅱ), 대한민국육군협회, 2012
<한국전쟁사 부도>, 황금알, 2005
기계 ‘역 포위작전’과 영천 ‘섬멸전’으로 막아내다
6·25전쟁 중 호남지방을 대(大) 우회하여 마산 서 측방에 진출한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을 가장 기습적인 기동으로 손꼽는다. 여기에 북한군의 기습적인 기동이 또 하나 있다. 북한군의 8월 공세 때, 북한군 제12사단이 길안(청송 서쪽 14km)을 출발한지 5일 만에 직선거리로 50km 남쪽에 위치한 ‘기계’(포항 북서쪽 15km)를 점령한 기동이다. 북한군 제12사단의 이 기동으로 말미암아 낙동강방어선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로써 새로운 방어선 ‘Y선’을 연하여 일진일퇴의 본격적인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전개됐다.
8월 공세를 통해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밀려났던 북한군 제2군단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영천 정면에 주력을 집중하고 ‘9월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천을 뚫지 못한 채 북한군은 또 퇴각해야만 했다. 50년 12월 ‘별오리 회의’에서 김일성은 “영천을 점령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지만, 영천을 상실하면서 패배했다”라고 자평(自評)한 바 있다. 그만큼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던 곳이 바로 영천전투다 (별오리 회의 : 자강도 만포시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2020년 12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워커라인’의 최동단(最東端)이었던 ‘형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포항기지로부터 전폭적인 항공기・함포・군수지원을 받고, 학도의용군・주민과 함께 북한군에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리하여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고 반격작전을 통해 적을 물리쳤다. 강산이 7번 바뀌는 동안,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 포스코를 필두로 유관 공장들이 뒤를 이어 굴지의 철강공업단지가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이 된 것이다. 70년 전에 흘린 피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안강 · 기계지구 전투
북한군의 ‘8월 공세’가 개시되면서,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청송 서쪽 ‘길안’ 일대를 담당한 수도사단의 방어선이 와해되어 사단은 ‘의성’ 일대로 철수해야 했다. 이로 인해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약 50km 구간에 간격이 발생했다. 안동과 길안을 돌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 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청송-죽장-포항’을 연결하는 31번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그 길목 일대에 기계와 안강이 있다.
이 축선은 매우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육군본부와 미8군에서는 북한군 대부대의 기동은 어려울 것으로 보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군 제12사단은 이런 ‘허(虛)’를 찌르고 포항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는 청송-기계 접근로를 깊숙이 기동한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9일 ‘기계’를 점령했다(직선으로 50km이지만, 도로로는 80km나 되는 거리다).
이로써, 유엔군의 항공기 발진기지인 ‘영일비행장’과 양호한 ‘항만’이 있는 전략 도시 포항이 북한군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대의 예하부대가 포항시내와 포항에 인접한 ‘흥해’(포항 북쪽 8km)까지 진출하면서 낙동강방어선에 심대한 위기상황이 도래했다.
기계까지 진출한 북한군이 안강을 거쳐 경주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낙동강방어선(Y선)’이 동·서로 분리됨은 물론, 대구·영천과 포항의 후방이 차단될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북한군의 최종 목적지 부산의 안위까지 우려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기계까지 파죽지세로 진출하던 북한군 제12사단의 진격 속도가 한 순간 둔화됐다. 유엔군 해·공군의 무자비한 후방공격의 결과로 북한군 후속부대의 진출이 지연되면서 보급 추진이 막혔기 때문이다.
안강·기계 일대의 위기를 절감한 육군본부는 8월 10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이후, 포항지구사로 약칭)를 급히 편성하여 기계지역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용한 병력이 부족했다. 궁여지책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대들까지도 투입하여 안강 일대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의성으로 철수했던 수도사단을 의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장거리 기동시켜 안강 일대로 재배치시키는 초(超) 강수를 두었다. 안강·기계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는 ‘역 포위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역 포위작전을 위한 부대배치를 조정 완료한 8월 18일, 포항지구사와 수도사단은 예하 부대들로 기계지역 돌파구 남단인 안강을 차단한 가운데, 수도사단 예하의 2개 연대를 기계 서북쪽으로 투입하여 총 공격함으로써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고 기계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섬멸적 타격을 입은 북한군 제12사단이 비학산(포항 북서쪽 18km) 일대로 철수·퇴각함으로써 동해안 지구의 위기가 일단 수습되고, 8월 하순까지 소강상태가 되었다.
9월 공세 : 8월 공세 때 많은 피해를 입고 비학산으로 패주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은 제766유격대를 흡수·재편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북한군이 9월 2일 새벽을 기해 ‘9월 공세’를 개시함에 따라, 기계 남쪽을 방어하던 국군부대들이 안강 이남으로 밀리면서 곧바로 경주가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경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경주 방향의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들을 사수한 국군 연대들의 혈투로 저지되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고립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주 방향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복호산(안강 동남쪽 3km. 형산강 돌출부)’ 일대를 끝가지 사수했다. 또한, 국군 제17연대도 형산강 인접의 감제고지인 ‘곤제봉(칠보산. 293m. 안강 남쪽 5km)’을 7차례에 걸친 쟁탈전을 치르며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경주 방향으로의 적의 돌파를 저지하고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곤제봉과 복호산에서 있었던 전투는 실로 ‘경주공방전’의 열쇠였던 것이다.
이후, 9월 13일을 기해 수도사단은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을 안강 이북으로 격퇴하며 대반격에 동참했다.
「묘지번호 1659, 육군소위 김○○의 묘」
국립 서울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김소위의 묘’라는 이색적인 묘가 있다. 이 묘의 주인공 ‘김소위’는 동해안지구에서 있었던 북한군의 9월 공세의 전초전 격인 ‘도음산 전투(8월 27일. 포항 북서쪽 8km)’에서 전사했다.
당시 이 지역은 국군 제3사단(26연대) 책임지역(황규만 소위 관할)이었는데, 수도사단 소속 ‘김○○ 소위’가 작전을 지원하러 왔다. 그러나 도착한 그날, 수색정찰에 나섰던 김소위는 북한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황규만 소위는 전선 상황이 급박하여 김소위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도음산 자락의 소나무 밑에 가매장한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더 지난 1964년, 황규만 소위(당시 대령)는 기억을 더듬어 전투현장을 찾아나서 마침내 김소위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황소위는 김소위를 국립묘지에 안장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마침내 상부의 승인을 받아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황소위는 그 후 1976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도 김소위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1990년 김소위의 신원은 물론 생존해 있는 가족들도 찾아낼 수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전쟁의 아픔과 두 사람의 전우애를 계승할 수 있는 역사적 산물로 남기기 위해 현재까지도 ‘이름 없는 묘’로 남겨놓고 있다. 비석 앞의 상석에는 ‘고 육군중위 김수영’이라고 또렷하게 새겨 놓았다.
황규만 장군은 2020년 6월 21일 사망하여 영원한 전우 ‘김수영 소위’ 곁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서울현충원 54구역. 묘번 1649 · 1659).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묘비 뒷면에 신문 기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1964년 6월 16일자 조선일보 3면).
포항지구 전투
8월 공세가 시작되면서, 북한군은 제5사단을 동해안으로 진출시켜 최종 목적지인 부산 진출에 긴요한 발판인 포항을 점령하게 했다. 포항에는 항만·철도·육로·공로 모두를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가 있었다. 또한, 북한군 공격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전투기 발진기지인 ‘영일비행장’이 있어 최우선적으로 공략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공세를 개시한 북한군 제5사단이 영덕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강구(영덕 남쪽 6km)를 거쳐 장사(8월 10일. 포항 북쪽 30km)까지 진출했다. 이제 포항이 북한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길이 11km, 폭 1~2km)에서 북한군 제5사단에 고립된 상황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때(8월 10일), 기계를 점령한 북한군 제12사단 예하의 일부 부대가 포항 북쪽의 ‘흥해’(8km)와 포항 시가지까지 진출하면서 포항이 피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포항에는 국군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 보급·지원부대 등이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고, 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8월 1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시내로 공세를 펼치는 과정에서 포항을 방어하던 학도의용군과 경찰대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정오경 포항이 점령되었다. 학도의용군의 용전분투 덕분에 포항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부대들과 행정관서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과 피난민들은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다행스런 것은, 북한군은 포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학도의용군의 저항과 적극적인 함포·항공지원 사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포항외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학도의용군(학도병)은 6·25전쟁 때 학생 신분으로 자진 참전한 의용병이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발족한 ‘비상학도대’가 그 기원이며, 6·25전쟁 중 약 30만여 명이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 중 7,000여 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학도의용군이 참전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포항전투’다. 8월 11일 새벽부터 시작된 11시간 반 동안의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들이 분전함으로써 북한군의 포항시내 진출을 상당시간 지연시켰다. 이 전투에는 총 71명이 참가하여 48명이 전사하고 실종·포로가 10명,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사자 총 48명 중에서 14명만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포항여중 일대에 가매장되었다가 1968년이 되어서야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해외동포 청년들, 대표적으로 ‘재일학도의용군’도 6·25전쟁 때 조국 수호에 동참했다. 69명의 청년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을 필두로 642명의 청년들이 각지의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14~17세의 소년지원병(29,603명이 참전해, 2,573명 전사)들도 동참했고, 위기에 처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여성들도(간호장교, 여자의용군, 여자 학도의용군) 자원입대하여 전·후방 지원 임무는 물론 실제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6·25전쟁 중 남녀노소 없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래서 낙동강방어선을 지키고 총반격을 가해 북진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남진으로 ‘영일비행장’이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미8군은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는 등 비행장 방어를 위해 가용한 조치를 다했다. 그러나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영일비행장에 전개하여 작전 중이던 제40전투비행대대와 지원부대들을 8월 13일 일본으로 철수시킴에 따라 국군·미군 지상군부대에 대한 항공지원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편, 8월 10일 이후 장사 일대에서 고립되어 북한군과 공방전을 계속하던 국군 제3사단은 북한군이 흥해까지 진출함에 따라 육로를 통한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국군 제3사단은 17일 아침 LST 4척으로 ‘독석리(포항북방 20km)’로부터 해상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병력 9,000명, 경찰 1,200명, 공무원 및 피난민 1,000여명).
포항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군단 예비인 ‘민(기식)부대’를 포항지역으로 투입했으며, ‘민 부대’는 8월 18일을 기해 포항을 공격·탈환하고 포항 시내의 잔적을 소탕했다. 이후, 구룡포로 해상 철수했던 국군 제3사단이 ‘민 부대’로부터 포항지역을 인수한 다음 북한군을 추격해 흥해 일대까지 북상시켰다.
한편, 국군 제3사단에 배속되었던 제8사단 제10연대가 9월 5일 책임지역을 제대로 인계하지 않은 채 영천으로 복귀함에 따라 형산강 방어선에 큰 간격이 생기고 말았다. 북한군 제12사단이 그 간격을 파고들어 후방 깊숙이 침투해옴에 따라 경주가 위태롭게 됐다. 8월 9일에 ‘운제산(482m. 포항 남쪽 10km)’까지 진출한 북한군이 후방을 교란함에 따라 영일비행장이 크게 위협받게 됐다. 미8군은 영일비행장에 대한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데이비드슨 특수임무부대’를 긴급 투입했다. 특수임무부대는 9월 12일을 기해 운제산을 공격·탈환하고 북한군을 소탕했으며, 이후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9월 13일을 기해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최초 방어선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영천지구 전투
북한군은 8월 공세가 실패하자, 가용한 모든 전력을 전선에 투입하여 부산 점령을 위해 다시 한 번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것이 ‘9월 공세’다.
북한 2군단은 제15사단을 다부동 전선에서 차출해 8월 20일 영천 북방의 입암(죽장)으로 전개한 후 전차와 야포를 배속시켜 영천을 목표로 최후공세를 준비하게 했다. 9월 2일 18시를 기해 북한군 제8사단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신녕’을 목표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영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영천은 어떤 곳이며, 북한군은 왜 영천을 택했을까...?
영천은 대구·포항·경주 라인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천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로 형성된 도로망과 함께 3개의 철도 노선이 통과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북한군이 영천 일대를 돌파하면 국군이 담당한 전선이 동·서로 양분되고, 낙동강방어선 내의 유일한 동서 교통로가 차단된다. 이로 인해 포항의 병참기지로부터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지원이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의 차후 진출 방향에 따라 낙동강 교두보 작전 전체의 승패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대구방향으로 진출하면 왜관·다부동 지역의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기계·포항 축선으로 진출한 5사단·12사단과 합세할 경우 북한군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 ‘부산’이 큰 위협에 처할 수 있다. 그만큼 영천이 중요하고, 영천전투가 가지는 무게가 큰 것이다.
북한군이 제15사단을 8월 20일을 기해 다부동에서 영천으로 전환한 것은 ‘9월 공세’ 때 다부동보다는 영천 돌파에 더욱 치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미군에 비해 전투력이 약한 국군 정면을 택해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돌파한 이후 대구 또는 경주(부산) 방향으로 융통성 있는 기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해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력이 약한 국군 방어지역을 택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천’을 선택했을 것이다.
국군 제8사단은 9월 공세 첫날인 9월 2일에는 보현산과 입암(죽장) 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으나, 이후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린 나머지 9월 4일을 기해 ‘기룡산’ 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하여 대치했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의 우 인접부대인 수도사단(기계지역)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에 밀려 안강 일대로 철수하면서, 두 부대 사이에 약 14km의 간격이 생겼다. 9월 5일 01시, 북한군 제15사단이 이 간격을 이용하여 큰 저항 없이 전선 후방 깊숙이 침투했다. 이로써 9월 6일 03시를 기해 영천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영천 축선의 대위기가 아닐 수 없다.
동부전선의 안강 축선이 돌파된 상황에서 영천 축선마저 돌파됨에 따라 국군 제1군단 책임지역 내에 2개의 돌파구가 형성되고 말았다. 육군본부는, 인접한 2개의 돌파구가 합쳐져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될 경우 저지 불능의 상황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영천 돌파구를 담당한 육군 제8사단을 국군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소속을 변경하고 전투지경선을 조정했다. 1군단의 지휘 부담을 감소시키는 조치였다.
영천을 담당하는 국군 제8사단을 지휘하게 된 2군단(유재흥 소장)은 영천 서쪽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팔공산)과 제6사단(신녕)으로부터 1개 연대씩을 차출하여 영천 축선의 전투력을 증강했다. 영천 축선이 갖는 중요성과 낙동강 방어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조치다. 그리고 동해안의 위기 해결을 위해 국군 제3사단으로 지원 나갔던 제8사단 10연대까지 원복 조치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무너지기 직전의 영천 전선을 사수할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9월 6일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 동남쪽 경주 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군(제8사단 및 배속부대 포함)은 영천 금호강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상태에서 가용한 모든 부대를 투입하여 영천 탈환에 돌입했다. 국군은 3일 간의 혈전·공방전 끝에 9월 8일을 기해 영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간 포항지구에 투입됐던 예하 부대인 10연대까지 원대복귀 시키는 등 전투력을 보강하여 상실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영천을 탈환한 다음 날(9월 9일), 경주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영천 돌파구의 서북방 저지선을 고수하는 가운데 ‘총 7개 연대’를 투입하는 ‘영천 섬멸전’을 감행했다. 이로써 국군은 영천 일대의 적들을 완전 소탕하고, 여세를 몰아 추격전을 전개하여 9월 12일에는 최초 방어선인 기륭산 일대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영천 전투 결과, 북한군 제15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국군 제2군단과 인접한 1군단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해안지구와 영천에 대한 북한군의 ‘8월·9월 공세’를 저지·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이로써, 낙동강방어선을 와해시켜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섬멸하려던 기도와 부산으로의 신속한 남진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던 기도를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동해안지구 작전과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방어선으로부터의 부대 이탈을 막은 것은 물론, 오히려 후방의 예비대까지 낙동강지역으로 투입을 강요함으로써 세기의 도박으로 불린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후, 낙동강방어선을 발판으로 9월 16일 09시를 기해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경부축선을 따라 신속한 진격을 실시하여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연결함으로써 경부축선 서남쪽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이어서 38선을 넘는 북진을 가능하게 했다.
포항・안강・기계・영전투 현장과 그 주변을 찾는 여행
낙동강방어선 작전 중 동부지역에 대한 답사 여행은 ‘포항권’과 ‘영천권’으로 분리된다. 우선 포항권에 대한 답사는 ‘해파랑 자전거길’과 연계하면 수많은 해수욕장과 검푸른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릴 수 있어 매 순간이 즐겁다. 북으로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 연결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일출 명소인 ‘호미곶’(장기곶) 일대에 숨어있는 비포장도로 명코스(공개산-우물재산 일대)도 달려보기를 추천한다.
낙동강방어선의 동쪽 끝단인 형산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경주에 닿는다. 경주로 가는 길목에 안강의 너른 들판과 형산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유네스코에 의해 역사마을로 지정된 ‘양동마을’이 있다. 찬찬히 둘러보기를 권하고 싶은 곳이다.
경주에 가면 다른 곳은 몰라도 토함산과 남산을 빼면 경주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다. 토함산에서 토함산 자연휴양림을 거쳐서 동해안까지 다운힐하면 동해의 신(神) ‘문무대왕’을 만날 수 있고 ‘해파랑 자전거길’과도 연결된다.
영천지역 답사는 영천을 관통하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하면 좋다. 영천전투를 기리는 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 체험관은 영천 시내에 있고, 추모관은 안강·포항 방향의 국립영천호국원과 함께 있다. 금호강을 따라 상류로 가면 영천댐과 보현산천문대에 닿고, 하류로 가면 경산과 대구를 거쳐서 낙동강 자전거길과도 연결된다. 보현산천문대(고도 1,126m)는 업힐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지만, 보현산 정상에서 끝없이 펼쳐진 산줄기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영천댐에서 더 북쪽에 위치한 ‘죽장’을 지나면 내연산(영덕 남쪽 16km) 서편 자락에 있는 상옥리와 하옥리를 만난다. 숲속 계곡을 따라 흐르는 대서천과 오십천을 따라 북상하면, 영덕과 푸른 동해안에 위치한 ‘강구’에 닿을 수 있다. 거기서 ‘해파랑 자전거길’도 만날 수 있다.
참고자료
<6·25전쟁사>(제5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 <6·25전쟁사 부도>, 육군대학, 2007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육군군사연구소, 2013
<우리가 겪은 6·25전쟁>(Ⅱ), 대한민국육군협회, 2012
<한국전쟁사 부도>, 황금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