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년을 이어온, 장중·치밀한 유교 제례
공자를 필두로 중국과 우리나라 유교 성현 136위의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 앞에 도열한 헌관과 집사
“둥~ 둥~ 둥~”
강릉향교 내정(內庭)을 쩡쩡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석전대제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소리의 저주파는 마치 맹수의 포효처럼 전신을 꿰뚫고 마음의 저변까지 훑어 초집중으로 내몬다. 소가죽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라 그럴까, 응징하듯 복수하듯 공포와 긴장이 전염된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죽음의 공포를 잊도록 북이 울렸고, 형장에서는 인명을 재촉하는 한편 구경꾼들에게는 ‘너도 잘못하면 저리 된다‘는 전율을 각인시켰다.
건물에 둘러싸인 정원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나는 성삼문이 떠올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조카 단종을 내쫓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정변을 기획한 그는 결국 발각되어 형장에 서게 된다. 그때 남긴 절명시는 눈앞에 닥친 죽음 저 너머를 바라보는 담담함과 여유에 감탄한다. 그 첫구절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북소리다.
북소리는 인명을 재촉하고(擊鼓催人命)
돌아보니 해는 지려하네(回首日欲斜)
황천길에는 주막이 없다는데(黃泉無一店)
오늘밤은 어디서 잘거나(今夜宿誰家)
전국최대의 누각형 강당인 명륜당. 정면 11칸, 길이가 36m에 달해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북소리와 더불어 긴장된 마음으로 최초의 석전대재를 보고 있다.
그에 앞서 정면이 11칸 36m에 달해 전국최대의 누각형 강당인 명륜당에서는 지역 유지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간략한 의례가 진행되었다. 강당이 매우 넓고 폭염의 날씨인데도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향교 관계자 외에도 이 특별한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북소리와 함께 명륜당에 있던 제례 관계자들은 줄을 지어 공자를 비롯해 총 136위의 성현을 모신 대성전(大成殿) 앞마당으로 올라갔다.
옛날 신하처럼 홀(笏)을 쥐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과 몸가짐으로 느릿느릿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관계자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지만 일부 중년층도 보인다. 직접 제례를 진행하는 사람(헌관과 집사)만 56명에 이른다. 명륜당 앞마당에서 대기중인 문묘제례악 인원도 36명이나 되고 관람객을 포함하면 250명 정도가 모였다.
이들이 무려 711년이나 이 복잡하고 긴 제례를 봄가을 두 번씩 이어가는 이유와 동기는 뭘까.
강릉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 무(廡), 전랑 등 주요건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전대제를 현장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젊은 시절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2천 년 간 지배해온 유학(儒學)을 깊이 알고 싶어 대학원에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극심한 형이상학이면서 이념적 도그마가 되어버린 성리학이 적어도 16세기 이후에는 시대정신과 너무나 멀어져버린 한계를 절감했다. 그러나 계몽되지 않은 과거, 15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틀이 필요했고 더 오랜 과거에는 더 절실한 사상이자 생활 속 금과옥조였음도 공감했다. 아울러 근대 이후 경제, 문화적으로 서구를 따라잡는 급성장을 이룬 동아시아 제국의 저변에서 유학 이념이 공통으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기원전 6세기 인류는 이제 막 문명의 토대를 닦고 질서를 찾아가던 시기였고, 지역별로는 문명의 수준 차이가 현격했다. 기이하게도 비슷한 시기, 서구는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문명이 피어나 탈레스, 피타고라스 등 자연철학자들이 사조를 이끌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나타나 정신문화의 차원을 높이고 지평을 넓혔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가 윤리의 기초질서를 정리하고 나섰다.
명륜당 뜰에서는 문묘제례악을 준비 중이다. 악사와 무원을 포함해 36명이나 되며 특이한 국악기가 모두 등장한다
군웅이 할거하며 영역과 권력 확대를 위해 전쟁을 일삼던 당시, 무력은 미덕이고 군기 아래 살생은 영웅적인 행위였다. 힘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대혼란기에 인간과 국가 간 평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평생을 주유천하하며 군왕들을 설득하고 제자를 키워낸 이가 공자(BC 551~479)다.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예(禮)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자제력도 자제 시스템도 없이 무한 이기심이 판치던 당시 공자는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예를 회복한다(復禮)고 한 것을 보면 원래 예가 있었다는 뜻인데, 공자가 말하는 예의 기원은 기원전 11세기 주(周) 나라 창업을 돕고 문물의 기틀을 닦은 주공(周公)이다.
기원전 11세기면 공자보다 500년이나 앞서고 인류는 이제 막 석기시대를 벗어나 문명기로 들어서던 때이니, 대단히 혼란스럽고 미개지역이 많았을 때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주공은 7년간 섭정을 하면서 정치 사회제도 전반의 토대를 구축했고 이는 시공간을 타고 퍼져나가 중국 고대문화의 전범이 되었다. 공자가 주공을 극찬하고 존경하면서 후대의 유학자들도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주공 관련 기록이 극히 적어 고대의 전설적인 위인으로 간주되었고, 유학을 창시한 최고의 성인은 공자가 된다.
대성전 제상에는 소머리가 통째로 올려져 있다. 왼쪽에는 돼지머리가 서로 마주 본다
석전대전은 공자를 제향하는 행사로 중앙의 성균관을 필두로 전국 향교에서 봄가을 두 번 제례를 올린다. 날짜는 공자가 처음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예기(禮記)>에 따라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丁자가 들어가는 첫 번째 날)로 정해져 있다(음력으로는 날짜에도 60갑자를 적용한다). <예기>에는 ‘丁日을 택하는 것은 정장성취(丁壯成就)의 뜻을 취함이니, 공부하는 사람의 예업(藝業)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丁은 ‘왕성한 기운’을 뜻하며 올해 음력 8월 상정일은 양력으로 9월 10일이었다.
강릉향교는 서울 성균관을 제외하고 전국에 남은 234곳의 향교 중 가장 큰 규모와 전통을 자랑한다. 언젠가 강릉향교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마침 추기 석전대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아침 현장을 찾았다.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한 유교 법식이라 유림들 위주로 조용히 치러지는 줄 알았는데 향교 앞 명륜고 운동장이 자동차로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깜짝 놀랐다. 향교와 유림 조직이 이렇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전통 질서가 잘 남아있고 또 보존에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북소리와 함께 석전대제가 시작되면 명륜당에 대기중이던 헌관(검은 예복)과 집사들(연청색 예복)이 대성전으로 오른다
북소리와 함께 제사를 올리는 헌관(獻官)과 집사 등 56명이 향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성전(大成殿) 앞에 도열했다. 대성전은 사찰에 비견하면 대웅전 같은 곳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 안자, 자사자, 맹자 등 오성(五聖)을 중심으로 공문십철(공자의 10대 제자), 송조육현(송나라의 여섯 현인), 우리나라의 18현인 등 총 136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신위 아래에는 대규모 제사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돼지머리와 소머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돼지머리는 제례에서 흔히 보지만 소머리는 처음 본다. 그밖에는 생선과 쇠고기, 곡식, 야채 등이 정해진 위치에 맞춰 진설된다.
제례 내내 수많은 절을 해야 하니 연로한 헌관과 집사들에게는 체력적으로도 매우 힘든 과정이다
“유(維)~ 단군기원사천삼백오십칠년 세차갑진팔월경오삭~”
적당한 음률을 넣은 축문이 낭독된다. 우리식 한문은 중국어의 성조(聲調, 글자마다 있는 특유의 고저장단)가 없지만 마치 조용히 노래하듯 길게 여운을 넣어 낭랑하게 읽어내리는 축문은 마치 고대의 성조처럼 느껴진다.
“배(拜, 절)~ 흥(興, 일어남)~ 궤(跪, 꿇어앉음)~”
축문 낭독에 이어 제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문 투의 구호에 따라 진행된다. 제례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은 시장이 맡고, 그다음 아헌관은 향교의 책임자인 전교(典校)가, 종헌관(終獻官)은 서울 성균관의 전인(典仁)이 맡았다. 그밖에도 세세하게 분류된 역할을 맡은 집사가 40여명이니 의식은 대단히 정교하고 치밀한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석전대제가 711년이나 이어져 왔다는 것이 놀랍고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경이롭다. 중국에서도 맥이 끊어진 문묘제례악이 이렇게 존속된 것은 전적으로 유학 절대주의가 지배한 조선 500년 덕분일 것이다.
대성전에서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명륜당 정원에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시작되었다. 영상으로는 본 적 있지만 직접 듣기는 처음이다. 종을 매단 편종, 돌판을 매단 편경, 절구통 모양의 축 등 기이한 국악기 소리를 처음 듣는다. 첫인상은 장중함이다. 제례에 걸맞게 리듬은 한없이 느리고 울림은 깊다. 무질서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으로 봐서 악곡도 정해져 있다. 함부로 움직이거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정해진 규정에 따라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대성전 제례와 함께 문묘제례악 연주와 일무(佾舞)가 시작된다. 일무는 공간을 감안해 6명이 세 줄을 이뤘다
연주에 맞춰 맨 앞줄에 선 무원(舞員)들이 느리지만 우아한 동작의 일무(佾舞)를 추기 시작한다. 절친한 벗 중에 이 ‘일(佾)’ 자를 이름에 쓰는 이가 있는데, 내가 “佾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고대의 춤으로 흔한 글자가 아니어서 이름에 쓴 것은 처음 본다“고 하자 그걸 알아보는 나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 춤은 공자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인 주나라 때 처음 생겼다고 한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지만 장엄한 음악에 맞춰 느리게 움직이는 춤사위에는 3천년 역사가 배어 있다. 일(佾)은 제례 대상에 따라 차별을 둔 무원의 수를 뜻하기도 하며 기본은 8명이다. 필일무(八佾舞)는 8*8=64명, 사일무(四佾舞)는 8*4=32명이 된다. 이번 석전대제는 장소 문제 때문인지 6명씩 세 줄을 이뤄 18명의 무원이 도열했다.
춤은 기쁘고 좋을 때 추는 것인데, 엄숙한 제례에서 춤을 춰야 한다면 이런 동작이 최적이라는 느낌이다. 위대한 성인을 모시는 제례가 성대히 열리는 것 또한 축제이기도 하니 그 감흥을 음악과 몸으로 표현한 것이 문묘제례악 아닐까 싶다.
문묘제례악은 고려 예종11년(1116년) 송나라에서 도입되어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다듬어져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이 명나라가 ‘오랑캐’ 만주족의 청나라에 망한 이후 제2중화를 자처한 조선에서 면면히 보전된 것이다.
일무의 동작은 단순하고 느리지만 장중하고 우아하다. 즐겁지도 슬퍼지도 않은, 담담한 평정심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
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치밀하고 복잡한 제의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가족 제사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제례의 첫 번째 의미는 엄격한 신분질서의 재확인이다. 이는 제례뿐 아니라 모든 의례의 본질이다. 엄격한 위계질서든, 역할 분담이든 의례 참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자각해야 하고 또 인식당한다. 석전대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공고하고 확연해서, 제례의 대상도 공자를 필두로 철저히 위계에 따라 배치되고 제향된다. 사소한 실수나 자세의 흐트러짐도 질책받을 수 있기에 몸가짐과 움직임은 저절로 공손해지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하나 세밀하고 엄중하게 정해져 있는 행위를 답습함으로써 참가자는 저절로 제의대상을 숭앙하게 되고 그들의 이념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게 된다.
‘배타성’도 제례의 바탕에 흐르는 본질의 하나다. 누구나 와서 ‘구경’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참여할 수는 없으며, 구경꾼이라면 장시간에 걸친 노력과 화합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유림)만의 아득한 ‘울타리’를 실감하게 된다.
두께가 다른 돌판을 매단 편경은 생각보다 낭랑한 소리를 냈다. 특이한 국악기의 소리를 듣는 것도 각별한 경험이다
공자는 내게 특별한 존재다. 외가가 바로 공자의 직계인 곡부(曲阜) 공씨(孔氏)이니 내 혈연의 반은 공자의 후예인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중국 여행 중에 일부러 공자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곡부를 찾아 공자의 묘(孔林)를 참배한 적이 있다.
2400년 전에 죽은 그를 이토록 찬양하고 성대한 제례로 모시는 곳은 한국뿐이다. 성균관을 비롯해 234곳의 향교와 36곳의 서원이 공자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으니 그의 위세와 이념은 여전히 이 땅에서 막강하다.
이 번다한 제례를 711년 간 끊이지 않고 답습하는 자체도 대단하지만, 제례를 준비하고 후원하는 유도회(儒道會)가 잘 조직되어 있고 회원수도 상당한 것이 더 놀랍다.
석전대제를 시작한지 1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대성전에서는 여전히 구호가 흘러나오고 헌관들은 술잔을 바치고 절하기에 바쁘다. 원래 일무(佾舞)는 남성이 추었을 텐데 명륜당 앞 무원은 모두 젊은 여성이다. 체구만 작을 뿐 품이 큰 예복을 입어 젠더 특성은 드러나지 않지만 춤사위가 유연하고 우아해서 맵시가 넘친다.
돌아서는 길에 마주친 600살 명륜당 기둥은 지금도 당당해서 앞으로 수백 년은 더 견딜 듯하고 석전대제도 계속될 것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711년을 이어온, 장중·치밀한 유교 제례
공자를 필두로 중국과 우리나라 유교 성현 136위의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 앞에 도열한 헌관과 집사
“둥~ 둥~ 둥~”
강릉향교 내정(內庭)을 쩡쩡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석전대제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소리의 저주파는 마치 맹수의 포효처럼 전신을 꿰뚫고 마음의 저변까지 훑어 초집중으로 내몬다. 소가죽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라 그럴까, 응징하듯 복수하듯 공포와 긴장이 전염된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고 죽음의 공포를 잊도록 북이 울렸고, 형장에서는 인명을 재촉하는 한편 구경꾼들에게는 ‘너도 잘못하면 저리 된다‘는 전율을 각인시켰다.
건물에 둘러싸인 정원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나는 성삼문이 떠올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조카 단종을 내쫓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정변을 기획한 그는 결국 발각되어 형장에 서게 된다. 그때 남긴 절명시는 눈앞에 닥친 죽음 저 너머를 바라보는 담담함과 여유에 감탄한다. 그 첫구절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북소리다.
북소리는 인명을 재촉하고(擊鼓催人命)
돌아보니 해는 지려하네(回首日欲斜)
황천길에는 주막이 없다는데(黃泉無一店)
오늘밤은 어디서 잘거나(今夜宿誰家)
전국최대의 누각형 강당인 명륜당. 정면 11칸, 길이가 36m에 달해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북소리와 더불어 긴장된 마음으로 최초의 석전대재를 보고 있다.
그에 앞서 정면이 11칸 36m에 달해 전국최대의 누각형 강당인 명륜당에서는 지역 유지가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간략한 의례가 진행되었다. 강당이 매우 넓고 폭염의 날씨인데도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향교 관계자 외에도 이 특별한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북소리와 함께 명륜당에 있던 제례 관계자들은 줄을 지어 공자를 비롯해 총 136위의 성현을 모신 대성전(大成殿) 앞마당으로 올라갔다.
옛날 신하처럼 홀(笏)을 쥐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과 몸가짐으로 느릿느릿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관계자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지만 일부 중년층도 보인다. 직접 제례를 진행하는 사람(헌관과 집사)만 56명에 이른다. 명륜당 앞마당에서 대기중인 문묘제례악 인원도 36명이나 되고 관람객을 포함하면 250명 정도가 모였다.
이들이 무려 711년이나 이 복잡하고 긴 제례를 봄가을 두 번씩 이어가는 이유와 동기는 뭘까.
강릉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 무(廡), 전랑 등 주요건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전대제를 현장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젊은 시절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2천 년 간 지배해온 유학(儒學)을 깊이 알고 싶어 대학원에서 잠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극심한 형이상학이면서 이념적 도그마가 되어버린 성리학이 적어도 16세기 이후에는 시대정신과 너무나 멀어져버린 한계를 절감했다. 그러나 계몽되지 않은 과거, 15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틀이 필요했고 더 오랜 과거에는 더 절실한 사상이자 생활 속 금과옥조였음도 공감했다. 아울러 근대 이후 경제, 문화적으로 서구를 따라잡는 급성장을 이룬 동아시아 제국의 저변에서 유학 이념이 공통으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기원전 6세기 인류는 이제 막 문명의 토대를 닦고 질서를 찾아가던 시기였고, 지역별로는 문명의 수준 차이가 현격했다. 기이하게도 비슷한 시기, 서구는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문명이 피어나 탈레스, 피타고라스 등 자연철학자들이 사조를 이끌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나타나 정신문화의 차원을 높이고 지평을 넓혔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가 윤리의 기초질서를 정리하고 나섰다.
명륜당 뜰에서는 문묘제례악을 준비 중이다. 악사와 무원을 포함해 36명이나 되며 특이한 국악기가 모두 등장한다
군웅이 할거하며 영역과 권력 확대를 위해 전쟁을 일삼던 당시, 무력은 미덕이고 군기 아래 살생은 영웅적인 행위였다. 힘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대혼란기에 인간과 국가 간 평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평생을 주유천하하며 군왕들을 설득하고 제자를 키워낸 이가 공자(BC 551~479)다.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예(禮)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자제력도 자제 시스템도 없이 무한 이기심이 판치던 당시 공자는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예를 회복한다(復禮)고 한 것을 보면 원래 예가 있었다는 뜻인데, 공자가 말하는 예의 기원은 기원전 11세기 주(周) 나라 창업을 돕고 문물의 기틀을 닦은 주공(周公)이다.
기원전 11세기면 공자보다 500년이나 앞서고 인류는 이제 막 석기시대를 벗어나 문명기로 들어서던 때이니, 대단히 혼란스럽고 미개지역이 많았을 때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주공은 7년간 섭정을 하면서 정치 사회제도 전반의 토대를 구축했고 이는 시공간을 타고 퍼져나가 중국 고대문화의 전범이 되었다. 공자가 주공을 극찬하고 존경하면서 후대의 유학자들도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다. 하지만 주공 관련 기록이 극히 적어 고대의 전설적인 위인으로 간주되었고, 유학을 창시한 최고의 성인은 공자가 된다.
대성전 제상에는 소머리가 통째로 올려져 있다. 왼쪽에는 돼지머리가 서로 마주 본다
석전대전은 공자를 제향하는 행사로 중앙의 성균관을 필두로 전국 향교에서 봄가을 두 번 제례를 올린다. 날짜는 공자가 처음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예기(禮記)>에 따라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丁자가 들어가는 첫 번째 날)로 정해져 있다(음력으로는 날짜에도 60갑자를 적용한다). <예기>에는 ‘丁日을 택하는 것은 정장성취(丁壯成就)의 뜻을 취함이니, 공부하는 사람의 예업(藝業)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丁은 ‘왕성한 기운’을 뜻하며 올해 음력 8월 상정일은 양력으로 9월 10일이었다.
강릉향교는 서울 성균관을 제외하고 전국에 남은 234곳의 향교 중 가장 큰 규모와 전통을 자랑한다. 언젠가 강릉향교를 구경하려고 했는데 마침 추기 석전대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아침 현장을 찾았다.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한 유교 법식이라 유림들 위주로 조용히 치러지는 줄 알았는데 향교 앞 명륜고 운동장이 자동차로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깜짝 놀랐다. 향교와 유림 조직이 이렇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전통 질서가 잘 남아있고 또 보존에도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북소리와 함께 석전대제가 시작되면 명륜당에 대기중이던 헌관(검은 예복)과 집사들(연청색 예복)이 대성전으로 오른다
북소리와 함께 제사를 올리는 헌관(獻官)과 집사 등 56명이 향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성전(大成殿) 앞에 도열했다. 대성전은 사찰에 비견하면 대웅전 같은 곳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 안자, 자사자, 맹자 등 오성(五聖)을 중심으로 공문십철(공자의 10대 제자), 송조육현(송나라의 여섯 현인), 우리나라의 18현인 등 총 136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신위 아래에는 대규모 제사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돼지머리와 소머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돼지머리는 제례에서 흔히 보지만 소머리는 처음 본다. 그밖에는 생선과 쇠고기, 곡식, 야채 등이 정해진 위치에 맞춰 진설된다.
제례 내내 수많은 절을 해야 하니 연로한 헌관과 집사들에게는 체력적으로도 매우 힘든 과정이다
“유(維)~ 단군기원사천삼백오십칠년 세차갑진팔월경오삭~”
적당한 음률을 넣은 축문이 낭독된다. 우리식 한문은 중국어의 성조(聲調, 글자마다 있는 특유의 고저장단)가 없지만 마치 조용히 노래하듯 길게 여운을 넣어 낭랑하게 읽어내리는 축문은 마치 고대의 성조처럼 느껴진다.
“배(拜, 절)~ 흥(興, 일어남)~ 궤(跪, 꿇어앉음)~”
축문 낭독에 이어 제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문 투의 구호에 따라 진행된다. 제례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은 시장이 맡고, 그다음 아헌관은 향교의 책임자인 전교(典校)가, 종헌관(終獻官)은 서울 성균관의 전인(典仁)이 맡았다. 그밖에도 세세하게 분류된 역할을 맡은 집사가 40여명이니 의식은 대단히 정교하고 치밀한 순서로 이뤄진다. 이런 석전대제가 711년이나 이어져 왔다는 것이 놀랍고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경이롭다. 중국에서도 맥이 끊어진 문묘제례악이 이렇게 존속된 것은 전적으로 유학 절대주의가 지배한 조선 500년 덕분일 것이다.
대성전에서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명륜당 정원에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이 시작되었다. 영상으로는 본 적 있지만 직접 듣기는 처음이다. 종을 매단 편종, 돌판을 매단 편경, 절구통 모양의 축 등 기이한 국악기 소리를 처음 듣는다. 첫인상은 장중함이다. 제례에 걸맞게 리듬은 한없이 느리고 울림은 깊다. 무질서나 단순 반복이 아니라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으로 봐서 악곡도 정해져 있다. 함부로 움직이거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정해진 규정에 따라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대성전 제례와 함께 문묘제례악 연주와 일무(佾舞)가 시작된다. 일무는 공간을 감안해 6명이 세 줄을 이뤘다
연주에 맞춰 맨 앞줄에 선 무원(舞員)들이 느리지만 우아한 동작의 일무(佾舞)를 추기 시작한다. 절친한 벗 중에 이 ‘일(佾)’ 자를 이름에 쓰는 이가 있는데, 내가 “佾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고대의 춤으로 흔한 글자가 아니어서 이름에 쓴 것은 처음 본다“고 하자 그걸 알아보는 나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 춤은 공자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인 주나라 때 처음 생겼다고 한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지만 장엄한 음악에 맞춰 느리게 움직이는 춤사위에는 3천년 역사가 배어 있다. 일(佾)은 제례 대상에 따라 차별을 둔 무원의 수를 뜻하기도 하며 기본은 8명이다. 필일무(八佾舞)는 8*8=64명, 사일무(四佾舞)는 8*4=32명이 된다. 이번 석전대제는 장소 문제 때문인지 6명씩 세 줄을 이뤄 18명의 무원이 도열했다.
춤은 기쁘고 좋을 때 추는 것인데, 엄숙한 제례에서 춤을 춰야 한다면 이런 동작이 최적이라는 느낌이다. 위대한 성인을 모시는 제례가 성대히 열리는 것 또한 축제이기도 하니 그 감흥을 음악과 몸으로 표현한 것이 문묘제례악 아닐까 싶다.
문묘제례악은 고려 예종11년(1116년) 송나라에서 도입되어 조선을 거치면서 더욱 다듬어져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이 명나라가 ‘오랑캐’ 만주족의 청나라에 망한 이후 제2중화를 자처한 조선에서 면면히 보전된 것이다.
일무의 동작은 단순하고 느리지만 장중하고 우아하다. 즐겁지도 슬퍼지도 않은, 담담한 평정심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
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치밀하고 복잡한 제의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가족 제사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제례의 첫 번째 의미는 엄격한 신분질서의 재확인이다. 이는 제례뿐 아니라 모든 의례의 본질이다. 엄격한 위계질서든, 역할 분담이든 의례 참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자각해야 하고 또 인식당한다. 석전대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공고하고 확연해서, 제례의 대상도 공자를 필두로 철저히 위계에 따라 배치되고 제향된다. 사소한 실수나 자세의 흐트러짐도 질책받을 수 있기에 몸가짐과 움직임은 저절로 공손해지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하나 세밀하고 엄중하게 정해져 있는 행위를 답습함으로써 참가자는 저절로 제의대상을 숭앙하게 되고 그들의 이념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게 된다.
‘배타성’도 제례의 바탕에 흐르는 본질의 하나다. 누구나 와서 ‘구경’할 수는 있으나 아무나 참여할 수는 없으며, 구경꾼이라면 장시간에 걸친 노력과 화합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유림)만의 아득한 ‘울타리’를 실감하게 된다.
두께가 다른 돌판을 매단 편경은 생각보다 낭랑한 소리를 냈다. 특이한 국악기의 소리를 듣는 것도 각별한 경험이다
공자는 내게 특별한 존재다. 외가가 바로 공자의 직계인 곡부(曲阜) 공씨(孔氏)이니 내 혈연의 반은 공자의 후예인 셈이다. 그런 인연으로 중국 여행 중에 일부러 공자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곡부를 찾아 공자의 묘(孔林)를 참배한 적이 있다.
2400년 전에 죽은 그를 이토록 찬양하고 성대한 제례로 모시는 곳은 한국뿐이다. 성균관을 비롯해 234곳의 향교와 36곳의 서원이 공자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으니 그의 위세와 이념은 여전히 이 땅에서 막강하다.
이 번다한 제례를 711년 간 끊이지 않고 답습하는 자체도 대단하지만, 제례를 준비하고 후원하는 유도회(儒道會)가 잘 조직되어 있고 회원수도 상당한 것이 더 놀랍다.
석전대제를 시작한지 1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대성전에서는 여전히 구호가 흘러나오고 헌관들은 술잔을 바치고 절하기에 바쁘다. 원래 일무(佾舞)는 남성이 추었을 텐데 명륜당 앞 무원은 모두 젊은 여성이다. 체구만 작을 뿐 품이 큰 예복을 입어 젠더 특성은 드러나지 않지만 춤사위가 유연하고 우아해서 맵시가 넘친다.
돌아서는 길에 마주친 600살 명륜당 기둥은 지금도 당당해서 앞으로 수백 년은 더 견딜 듯하고 석전대제도 계속될 것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