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절정 진경산수화 rm 속에 들다
양폭대피소가 멀지 않은 어느 길목. 공룡능선에서 뻗어내린 칠형제봉 암릉이 굉장하다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설악산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불동계곡에 들어서고부터 다음 일정을 잊었고 심신을 압박하는 암벽과 암봉의 위용에 애써 저항하며, 위로는 고개를 꺾어 첨봉에 감탄하고 밑으로는 에메랄드빛 계류에 넋이 나갔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우리는 막연한 꿈이었던 설악산으로 향했다. 그동안 산행을 함께하며 친해진 친구들이어서 나름대로 경험과 안목이 있었고 체력에도 자신만만하던 시절이었다. 오색온천에서 1박하고 대청봉을 넘어 천불동계곡에 들어서면서 모두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그게 1980년대 중반이니 정보가 많이 없던 그 시절 처음 마주한 천불동은 그냥 충격이었다.
그 뒤로 국내외의 숱한 산들을 누볐으나 내 마음속에 남은 부동의 계곡미 1위는 천불동이다. 국내 3대 계곡으로 천불동 외에 한라산 탐라계곡, 지리산 칠선계곡을 들지만 경관의 빼어남과 웅장미에서 천불동은 단연 압권이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으나 금강산 만폭동이라야 비교가 가능할까. 여러 번 말했듯이 아무리 금강산이 근처에 있다고 해도 과거에 설악산의 존재감이 낮았던 것은 이처럼 장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접근성과, 금강산과 달리 산 외곽에서는 골산(骨山)의 미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엄폐성 때문이다.
외설악 등산코스 초입에 수호신처럼 정좌한 신흥사 통일대불. 높이 14.6m, 좌대 높이 4.3m 무게 108톤의 거대 청동불상으로 비례미와 완성도가 뛰어나다
비선대에서 올려다본 장군봉(왼쪽)과 적벽(오른쪽 붉은 암봉). 장군봉은 계곡 바닥에서 350m, 적벽은 180m나 되어 실제로 보면 규모가 내뿜는 위압감이 대단하다. 장군봉 중턱 검은 부분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금강굴이다 단풍나무는 붉게, 다른 나무는 노랗게 물든다. 그 아래 너무나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속초에 살며 설악산을 뒷동산 가듯 샅샅이 누비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리 멀지 않은 강릉에 살고 있으니 뒷동산까지는 아니지만 옆마을 뒷산 정도로 공간적으로 가까워졌다. 틈 날 때마다 설악산을 찾고 있으나 가고픈 곳만 다 보는데도 2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30여년 만에 천불동계곡을 찾았다. 천불동계곡은 쉽게 갈 수 없는 것이, 제대로 보자면 왕복 15km 이상 걸어야 하기에 체력적 바탕이 없으면 무리다. 나 역시 나름대로 체력을 길러 천불동으로 향하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귀면암? 오련폭포? 양폭대피소? 가는 데까지 가다가 체력과 시간 상황을 보고 결정할 생각이다. 딱히 목표가 있거나 쫓기는 일정이 아니어서 느긋하게 경관을 즐기며 걷고 싶다.
궁극의 절경에 내 몸이 내놓는 댓구는 감탄사뿐이다
옥빛 계류와 농염한 단풍, 높이 모를 암봉이 실로 진경산수화를 빚어낸다
10월 중순의 어느 아침, 소공원 주차장은 만원을 이뤄 주차 정체가 일어날 정도다. 평일이라 한가할 줄 알았는데 과연 단풍철 설악은 다르다. 천불동계곡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다녀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기우였다. 신흥사 산문인 ‘설악산문’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상당수는 관광객이어서 케이블카에서 절반 이상 빠지고, 비룡폭포~토왕성폭포 방면으로 또 빠지고 그 다음은 울산바위 방면에서 빠져나가니 천불동으로 향하는 사람은 처음 본 인파의 10%도 되지 않았다. 이마저도 비선대에서 되돌아가거나, 금강굴로 가는 사람으로 나뉘어 비선대 상류로 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등산객이 띄엄띄엄 있어 아예 사람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특이한 것은 천불동계곡으로 진입한 사람의 근 절반이 서구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대부분 가벼운 캐주얼 복장에 운동화를 신어 나중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비선대의 장군봉과 적벽은 여전히 놀라웠다. 장군봉은 계곡바닥에서 350m, 적벽은 180m나 솟은 거대 암봉으로 위압감이 엄청나다. 국내에서는 극히 드문 오버행(over hang)을 이루고 붉은 빛을 띠는 적벽은 신비감까지 발산한다. 장군봉 중턱의 금강굴을 옛 수행자들은 어떻게 오갔는지 신통스럽다. 비선대 계곡 바위에 옛 사람들의 각자가 즐비하지만 상류에는 드문 것을 보면 옛날에는 비선대까지만 유람코스였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절벽 옆에도 철제 데크로가 잘 정비되었지만 옛날에는 암벽 사이를 흐르는 계곡을 더 이상 거슬러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른쪽 귀면암 옆으로 폭이 급격하게 줄어 병목을 이룬 천불동계곡. 급류가 분기탱천 할 때는 엄청난 장관일 것이다숲이 울창하고 단풍이 짙어도 그 많고 넓은 암벽을 가릴 수가 없다
천불동계곡의 내밀한 풍경은 3시간은 걸어들어와야 볼 수 있다천하절경인데 봉우리가 너무 많으니 무명봉이 지천이다.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면 설악산 봉우리는 몇이나 될까
만산홍엽에 고봉 돌출의 기경이나 이런 곳에 사람이 오래 기대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가공의 신선을 떠올렸을 것이다
오련폭포 일대의 절경. 천불동 깊숙이 들어온 탐방객의 절반이 서구 외국인이란 사실이 놀랍다. 설악산이 세계적 명산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겠다
저지대는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가 많았는데 해발 300m 비선대를 지나자 단풍이 절정에 가깝고 색도 짙어졌다. 잦은바위골 입구를 지나 귀면암이 가까워지면 협곡 좌우로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암봉이 아찔하게 치솟아 있고 허리에는 단풍 색감이 화려하다. 계곡가에 우뚝한 귀면암 옆은 협곡이 매우 좁아서 폭우 때는 장관을 이룰 것이다. 금강산에도 귀면암이 있는데 설악산의 일부 지명은 금강산에서 차용한 경우가 있다.
천불동계곡의 백미는 비선대와 더불어 오련폭포 일대다. 90도로 꺾이는 협곡에 폭포는 5단으로 떨어지고 좌우로는 쏟아질 듯한 암벽이 굉장하다. 폭포는 높지 않아서 5개를 합쳐도 낙차는 40m가 되지 않지만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설악산 계곡수가 특히 맑은 것은 온통 암벽과 암반이어서 토양의 이물질이 섞여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선의 은신처 같은 양폭대피소. 해발 700m 지점이다
깊고 둥근 소를 파내고 있는 양폭포. 낙차는 17m 정도로 높지 않으나 분위기가 일품이다
음폭포 상류부터는 계곡이 크게 줄어들고 대청봉과 공룡능선 사이의 무너미고개(1070m)로 가파르게 이어진다
공식탐방로가 없는 음폭골은 단절감 때문인지 골짜기 저편이 더욱 궁금해진다
황혼이 다가서는 하산길에 적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를 만났다. 오버행을 이룬 암벽이라 아찔함이 더한다
천불동계곡의 핵심은 비선대~양폭대피소 간 3.5km 구간이다
오련폭포를 지나면 오늘의 목표인 양폭대피소가 멀지 않다. 대피소는 사방으로 수직암벽이 에워싸고 있어 산수화 속 선가(仙家) 같고, 조금 상류에는 양폭포가 쏟아진다. 양폭포 바로 상류에는 천당폭포가 있지만 계곡이 크게 줄어들어 사실상 천불동계곡의 경관미는 여기까지다. 반대편 음폭포 방면의 음폭골은 공식탐방로가 없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듯, 원시적인 단절감이 이질적이다.
소공원 주차장에서 양폭포까지 8.4km이니 왕복하면 근 17km이다. 아침에 출발했건만 산을 내려서니 어둑하니 저녁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단풍 절정 진경산수화 rm 속에 들다
양폭대피소가 멀지 않은 어느 길목. 공룡능선에서 뻗어내린 칠형제봉 암릉이 굉장하다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설악산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불동계곡에 들어서고부터 다음 일정을 잊었고 심신을 압박하는 암벽과 암봉의 위용에 애써 저항하며, 위로는 고개를 꺾어 첨봉에 감탄하고 밑으로는 에메랄드빛 계류에 넋이 나갔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우리는 막연한 꿈이었던 설악산으로 향했다. 그동안 산행을 함께하며 친해진 친구들이어서 나름대로 경험과 안목이 있었고 체력에도 자신만만하던 시절이었다. 오색온천에서 1박하고 대청봉을 넘어 천불동계곡에 들어서면서 모두 입이 딱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그게 1980년대 중반이니 정보가 많이 없던 그 시절 처음 마주한 천불동은 그냥 충격이었다.
그 뒤로 국내외의 숱한 산들을 누볐으나 내 마음속에 남은 부동의 계곡미 1위는 천불동이다. 국내 3대 계곡으로 천불동 외에 한라산 탐라계곡, 지리산 칠선계곡을 들지만 경관의 빼어남과 웅장미에서 천불동은 단연 압권이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으나 금강산 만폭동이라야 비교가 가능할까. 여러 번 말했듯이 아무리 금강산이 근처에 있다고 해도 과거에 설악산의 존재감이 낮았던 것은 이처럼 장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접근성과, 금강산과 달리 산 외곽에서는 골산(骨山)의 미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엄폐성 때문이다.
외설악 등산코스 초입에 수호신처럼 정좌한 신흥사 통일대불. 높이 14.6m, 좌대 높이 4.3m 무게 108톤의 거대 청동불상으로 비례미와 완성도가 뛰어나다
비선대에서 올려다본 장군봉(왼쪽)과 적벽(오른쪽 붉은 암봉). 장군봉은 계곡 바닥에서 350m, 적벽은 180m나 되어 실제로 보면 규모가 내뿜는 위압감이 대단하다. 장군봉 중턱 검은 부분이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금강굴이다 단풍나무는 붉게, 다른 나무는 노랗게 물든다. 그 아래 너무나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속초에 살며 설악산을 뒷동산 가듯 샅샅이 누비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리 멀지 않은 강릉에 살고 있으니 뒷동산까지는 아니지만 옆마을 뒷산 정도로 공간적으로 가까워졌다. 틈 날 때마다 설악산을 찾고 있으나 가고픈 곳만 다 보는데도 2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30여년 만에 천불동계곡을 찾았다. 천불동계곡은 쉽게 갈 수 없는 것이, 제대로 보자면 왕복 15km 이상 걸어야 하기에 체력적 바탕이 없으면 무리다. 나 역시 나름대로 체력을 길러 천불동으로 향하지만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귀면암? 오련폭포? 양폭대피소? 가는 데까지 가다가 체력과 시간 상황을 보고 결정할 생각이다. 딱히 목표가 있거나 쫓기는 일정이 아니어서 느긋하게 경관을 즐기며 걷고 싶다.
궁극의 절경에 내 몸이 내놓는 댓구는 감탄사뿐이다
옥빛 계류와 농염한 단풍, 높이 모를 암봉이 실로 진경산수화를 빚어낸다
10월 중순의 어느 아침, 소공원 주차장은 만원을 이뤄 주차 정체가 일어날 정도다. 평일이라 한가할 줄 알았는데 과연 단풍철 설악은 다르다. 천불동계곡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다녀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기우였다. 신흥사 산문인 ‘설악산문’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상당수는 관광객이어서 케이블카에서 절반 이상 빠지고, 비룡폭포~토왕성폭포 방면으로 또 빠지고 그 다음은 울산바위 방면에서 빠져나가니 천불동으로 향하는 사람은 처음 본 인파의 10%도 되지 않았다. 이마저도 비선대에서 되돌아가거나, 금강굴로 가는 사람으로 나뉘어 비선대 상류로 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등산객이 띄엄띄엄 있어 아예 사람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특이한 것은 천불동계곡으로 진입한 사람의 근 절반이 서구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대부분 가벼운 캐주얼 복장에 운동화를 신어 나중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비선대의 장군봉과 적벽은 여전히 놀라웠다. 장군봉은 계곡바닥에서 350m, 적벽은 180m나 솟은 거대 암봉으로 위압감이 엄청나다. 국내에서는 극히 드문 오버행(over hang)을 이루고 붉은 빛을 띠는 적벽은 신비감까지 발산한다. 장군봉 중턱의 금강굴을 옛 수행자들은 어떻게 오갔는지 신통스럽다. 비선대 계곡 바위에 옛 사람들의 각자가 즐비하지만 상류에는 드문 것을 보면 옛날에는 비선대까지만 유람코스였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절벽 옆에도 철제 데크로가 잘 정비되었지만 옛날에는 암벽 사이를 흐르는 계곡을 더 이상 거슬러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른쪽 귀면암 옆으로 폭이 급격하게 줄어 병목을 이룬 천불동계곡. 급류가 분기탱천 할 때는 엄청난 장관일 것이다숲이 울창하고 단풍이 짙어도 그 많고 넓은 암벽을 가릴 수가 없다
천불동계곡의 내밀한 풍경은 3시간은 걸어들어와야 볼 수 있다천하절경인데 봉우리가 너무 많으니 무명봉이 지천이다.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면 설악산 봉우리는 몇이나 될까
만산홍엽에 고봉 돌출의 기경이나 이런 곳에 사람이 오래 기대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가공의 신선을 떠올렸을 것이다
오련폭포 일대의 절경. 천불동 깊숙이 들어온 탐방객의 절반이 서구 외국인이란 사실이 놀랍다. 설악산이 세계적 명산의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겠다
저지대는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가 많았는데 해발 300m 비선대를 지나자 단풍이 절정에 가깝고 색도 짙어졌다. 잦은바위골 입구를 지나 귀면암이 가까워지면 협곡 좌우로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암봉이 아찔하게 치솟아 있고 허리에는 단풍 색감이 화려하다. 계곡가에 우뚝한 귀면암 옆은 협곡이 매우 좁아서 폭우 때는 장관을 이룰 것이다. 금강산에도 귀면암이 있는데 설악산의 일부 지명은 금강산에서 차용한 경우가 있다.
천불동계곡의 백미는 비선대와 더불어 오련폭포 일대다. 90도로 꺾이는 협곡에 폭포는 5단으로 떨어지고 좌우로는 쏟아질 듯한 암벽이 굉장하다. 폭포는 높지 않아서 5개를 합쳐도 낙차는 40m가 되지 않지만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설악산 계곡수가 특히 맑은 것은 온통 암벽과 암반이어서 토양의 이물질이 섞여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선의 은신처 같은 양폭대피소. 해발 700m 지점이다
깊고 둥근 소를 파내고 있는 양폭포. 낙차는 17m 정도로 높지 않으나 분위기가 일품이다
음폭포 상류부터는 계곡이 크게 줄어들고 대청봉과 공룡능선 사이의 무너미고개(1070m)로 가파르게 이어진다
공식탐방로가 없는 음폭골은 단절감 때문인지 골짜기 저편이 더욱 궁금해진다
황혼이 다가서는 하산길에 적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를 만났다. 오버행을 이룬 암벽이라 아찔함이 더한다
천불동계곡의 핵심은 비선대~양폭대피소 간 3.5km 구간이다
오련폭포를 지나면 오늘의 목표인 양폭대피소가 멀지 않다. 대피소는 사방으로 수직암벽이 에워싸고 있어 산수화 속 선가(仙家) 같고, 조금 상류에는 양폭포가 쏟아진다. 양폭포 바로 상류에는 천당폭포가 있지만 계곡이 크게 줄어들어 사실상 천불동계곡의 경관미는 여기까지다. 반대편 음폭포 방면의 음폭골은 공식탐방로가 없어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듯, 원시적인 단절감이 이질적이다.
소공원 주차장에서 양폭포까지 8.4km이니 왕복하면 근 17km이다. 아침에 출발했건만 산을 내려서니 어둑하니 저녁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