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높이 15m, 1km 해안 방벽 갖춘 난공불락
남문터를 제외하고 성벽은 완연하게 남아 있고 숲이 뒤덮여 산줄기처럼 보인다. 북동쪽에서 바다를 향해 해안 방벽이 뻗어나 있다
점점 높아지더니 이 정도면 15m를 넘지 않을까. 겨울이 되어 수풀이 잦아들자 겨우 드러난 길을 따라 토성의 성벽을 걸으며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둘레가 930m 정도 되는 작은 성인데 몇 개의 단층을 이룬 북벽은 높이가 15m에 달했다. 평지가 저 아래로 보이고 성벽은 평지에 뿌리 내린 웬만한 나무 높이를 넘어섰다.
강릉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해안에 이처럼 높은 성벽을 쌓은 이유와 목적이 매우 궁금하다. 이곳은 ‘방내리 토성’으로 불리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성벽은 전혀 보존되지 못하고 숲에 묻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된 데다 일부는 아예 유실되었다.
마치 산줄기 같은 거대한 성벽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성에서 분기한 별도의 장벽은 인근의 연곡천과 나란히 동해까지 뻗어나 있고, 성벽인지 산줄기인지 구분이 힘든 능선에는 오래된 고분까지 분포한다. 과연 누가 잠들어 있고 언제 무슨 목적으로 이런 성을 쌓은 것일까.
돌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영진리고분군. 연계 성벽(해안 장벽)의 남쪽 능선에 여러 기가 분포하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영진리고분군의 돌방은 1500년이 지났건만 튼튼하게 잘 남아 있다. 묘실은 도굴로 인해 텅텅 비었다. 무덤의 주인은 방내리 토성을 지키던 수장급 인물이 아니었을까
‘방내리 토성’은 지역명을 딴 것이고 이마저 오래전 성벽에 세워진 작은 비석에 새겨져 있을 뿐, 성 아래에는 아무런 안내문도 없다. 다만, 성내를 지나는 도로가 ‘성안길’로 명명된 것만이 유일한 단서다.
이 토성이 범상치 않은 것은 주위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때문이다. 성 바로 동쪽에 있는 ‘연곡고분’은 외곽 장벽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 언덕 정상에 있다. 지름 12m, 높이 3m의 상당히 큰 규모로, 신라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500m 동쪽 능선에서도 여러 기의 신라계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시기는 5~6세기로 추정된다. 이즈음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402)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던 시기다. 특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영토를 넓혔는데 북에서 내려온 말갈족(여진족의 전신)과 부딪히게 된다. 395년에는 실직(삼척)에서 말갈족을 몰아내 하슬라(何瑟羅, 강릉)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말갈족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면서 지금의 함경도를 포함해 동해안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방내리 토성 인근에 연곡고분과 영진리 고분이 분포한다. 방내리 토성과 연결된 해안 장벽 남쪽에 있다
높이 3m, 지름 12m의 상당한 크기로 지역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연곡고분. 방내리 토성 동쪽 언덕 정상에 있다
당시 실직(삼척)은 고구려 영토였으나 장수왕(412~491)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정책을 펴면서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공세에 나선다. 그전까지 신라는 서기 400년 경주를 포위한 왜, 가야군을 광개토대왕이 물리쳐준 이후 고구려에 신속(臣屬)에 가까운 저자세로 대했으나 장수왕의 남진을 계기로 적대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의 분쟁은 특히 동해안에서 첨예했다.
450년(눌지마립간 34) 7월에는 하슬라(강릉) 성주(城主) 삼직(三直)이 실직(삼척)의 들판에서 마치 제 땅인 양 사냥을 하고 있던 고구려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장수왕은 말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직접 출전, 468년에는 하슬라주에 이어 신라의 동해안 전초기지인 실직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신라 지증왕은 505년 실직주를 되찾았고, 우산국(울릉도)을 복속한 이사부 장군을 지역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는 우산국에 이어 하슬라주도 회복하고 군주가 되었다.
이렇게 5~6세기 강릉 지방은 신라와 고구려(말갈) 간 전투가 끊이지 않던 최전선이었다. 이 시기에 축성된 방내리 토성과 주변 고분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10m 이상 높이로 완연하게 남아 있는 방내리 토성 북벽. 왼쪽이 외부이다성벽 한쪽에 세워진 방내리성지 비석이 유일한 안내문이다
높낮이 차가 심할 정도로 훼손된 성벽
방내리는 연곡면소재지로 시골마을 치고는 큰 편이다. 남쪽으로는 오대산 진고개에서 흘러내린 연곡천이 바다로 흘러들고 동해안에서는 1.4km 떨어져 있다.
구릉지 말단에 자리한 성곽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둘레 930m, 성벽 높이는 낮은 곳은 2~3m, 높은 곳은 15m나 된다. 남문, 서문, 북문 터가 확인되었고 민가가 들어선 남문 주변은 성벽이 70m 가량 유실되었다. 성안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문흥사를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있다.
서문터에서 성벽 위로 희미한 길이 나 있고 이 길은 동벽까지 이어진다. 성 북쪽에는 강릉전파관리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전파관리소 정문 근처에서도 성벽으로 진입하는 길이 나 있다.
성 중앙에는 성을 양분하는 내성이 일부 남아 있고 그 북단에는 성황당이 보존되어 있다. 축성 당시에는 내성 서쪽이 중심이고 동부는 병사나 백성의 거주지로 보인다.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해안 방벽. 북쪽 상공에서 남으로 본 모습이며 성벽 아래에는 해자의 흔적이 발견된다
해안 방벽은 높이가 10m를 넘나들 정도이고 해자까지 설치해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 아래 V자형으로 판 해자. 물이 없는 환호(環濠)였을 수도 있다
드러난 성벽 일부. 판축은 아니고 기존 능선을 삭토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성벽이 계속 이어져 해안에까지 이른다는 점이다. 이 외곽 성벽은 1km에 달하는 직벽으로 성안을 구성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해안까지 연결해 북쪽의 고구려와 말갈족 침입을 대비한 방벽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최고 10m를 넘고 북쪽에는 해자의 흔적도 보여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성벽의 중간 남쪽 자연 능선 위에 영진리고분군이 분포한다. 7번 국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일부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토광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널무덤), 횡구식석실분(앞트기식돌방무덤), 옹관(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 양식이 확인되었고 토기와 금동귀걸이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장시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의 주인은 성곽을 방어하던 장수나 지역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방내리 토성은 해안 방벽과 더불어 하슬라(강릉)를 방어하는 신라의 강력한 요새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벽을 뒤덮고 있는 숲을 걷어내고 성곽을 정리만 해도 당시의 위용이 상당 부분 드러날 것이다.
방내리 토성과 해안 방벽은 연곡천 하류에 자리하며 북방을 감시하는 신라의 전초 기지였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최대높이 15m, 1km 해안 방벽 갖춘 난공불락
남문터를 제외하고 성벽은 완연하게 남아 있고 숲이 뒤덮여 산줄기처럼 보인다. 북동쪽에서 바다를 향해 해안 방벽이 뻗어나 있다
점점 높아지더니 이 정도면 15m를 넘지 않을까. 겨울이 되어 수풀이 잦아들자 겨우 드러난 길을 따라 토성의 성벽을 걸으며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둘레가 930m 정도 되는 작은 성인데 몇 개의 단층을 이룬 북벽은 높이가 15m에 달했다. 평지가 저 아래로 보이고 성벽은 평지에 뿌리 내린 웬만한 나무 높이를 넘어섰다.
강릉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해안에 이처럼 높은 성벽을 쌓은 이유와 목적이 매우 궁금하다. 이곳은 ‘방내리 토성’으로 불리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성벽은 전혀 보존되지 못하고 숲에 묻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된 데다 일부는 아예 유실되었다.
마치 산줄기 같은 거대한 성벽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성에서 분기한 별도의 장벽은 인근의 연곡천과 나란히 동해까지 뻗어나 있고, 성벽인지 산줄기인지 구분이 힘든 능선에는 오래된 고분까지 분포한다. 과연 누가 잠들어 있고 언제 무슨 목적으로 이런 성을 쌓은 것일까.
돌방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영진리고분군. 연계 성벽(해안 장벽)의 남쪽 능선에 여러 기가 분포하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영진리고분군의 돌방은 1500년이 지났건만 튼튼하게 잘 남아 있다. 묘실은 도굴로 인해 텅텅 비었다. 무덤의 주인은 방내리 토성을 지키던 수장급 인물이 아니었을까
‘방내리 토성’은 지역명을 딴 것이고 이마저 오래전 성벽에 세워진 작은 비석에 새겨져 있을 뿐, 성 아래에는 아무런 안내문도 없다. 다만, 성내를 지나는 도로가 ‘성안길’로 명명된 것만이 유일한 단서다.
이 토성이 범상치 않은 것은 주위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때문이다. 성 바로 동쪽에 있는 ‘연곡고분’은 외곽 장벽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 언덕 정상에 있다. 지름 12m, 높이 3m의 상당히 큰 규모로, 신라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500m 동쪽 능선에서도 여러 기의 신라계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시기는 5~6세기로 추정된다. 이즈음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402)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던 시기다. 특히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영토를 넓혔는데 북에서 내려온 말갈족(여진족의 전신)과 부딪히게 된다. 395년에는 실직(삼척)에서 말갈족을 몰아내 하슬라(何瑟羅, 강릉)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말갈족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면서 지금의 함경도를 포함해 동해안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방내리 토성 인근에 연곡고분과 영진리 고분이 분포한다. 방내리 토성과 연결된 해안 장벽 남쪽에 있다
높이 3m, 지름 12m의 상당한 크기로 지역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연곡고분. 방내리 토성 동쪽 언덕 정상에 있다
당시 실직(삼척)은 고구려 영토였으나 장수왕(412~491)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정책을 펴면서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공세에 나선다. 그전까지 신라는 서기 400년 경주를 포위한 왜, 가야군을 광개토대왕이 물리쳐준 이후 고구려에 신속(臣屬)에 가까운 저자세로 대했으나 장수왕의 남진을 계기로 적대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의 분쟁은 특히 동해안에서 첨예했다.
450년(눌지마립간 34) 7월에는 하슬라(강릉) 성주(城主) 삼직(三直)이 실직(삼척)의 들판에서 마치 제 땅인 양 사냥을 하고 있던 고구려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장수왕은 말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직접 출전, 468년에는 하슬라주에 이어 신라의 동해안 전초기지인 실직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신라 지증왕은 505년 실직주를 되찾았고, 우산국(울릉도)을 복속한 이사부 장군을 지역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는 우산국에 이어 하슬라주도 회복하고 군주가 되었다.
이렇게 5~6세기 강릉 지방은 신라와 고구려(말갈) 간 전투가 끊이지 않던 최전선이었다. 이 시기에 축성된 방내리 토성과 주변 고분도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10m 이상 높이로 완연하게 남아 있는 방내리 토성 북벽. 왼쪽이 외부이다성벽 한쪽에 세워진 방내리성지 비석이 유일한 안내문이다
높낮이 차가 심할 정도로 훼손된 성벽
방내리는 연곡면소재지로 시골마을 치고는 큰 편이다. 남쪽으로는 오대산 진고개에서 흘러내린 연곡천이 바다로 흘러들고 동해안에서는 1.4km 떨어져 있다.
구릉지 말단에 자리한 성곽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둘레 930m, 성벽 높이는 낮은 곳은 2~3m, 높은 곳은 15m나 된다. 남문, 서문, 북문 터가 확인되었고 민가가 들어선 남문 주변은 성벽이 70m 가량 유실되었다. 성안에는 마을이 들어섰는데 문흥사를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있다.
서문터에서 성벽 위로 희미한 길이 나 있고 이 길은 동벽까지 이어진다. 성 북쪽에는 강릉전파관리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전파관리소 정문 근처에서도 성벽으로 진입하는 길이 나 있다.
성 중앙에는 성을 양분하는 내성이 일부 남아 있고 그 북단에는 성황당이 보존되어 있다. 축성 당시에는 내성 서쪽이 중심이고 동부는 병사나 백성의 거주지로 보인다.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해안 방벽. 북쪽 상공에서 남으로 본 모습이며 성벽 아래에는 해자의 흔적이 발견된다
해안 방벽은 높이가 10m를 넘나들 정도이고 해자까지 설치해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 아래 V자형으로 판 해자. 물이 없는 환호(環濠)였을 수도 있다
드러난 성벽 일부. 판축은 아니고 기존 능선을 삭토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성벽이 계속 이어져 해안에까지 이른다는 점이다. 이 외곽 성벽은 1km에 달하는 직벽으로 성안을 구성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해안까지 연결해 북쪽의 고구려와 말갈족 침입을 대비한 방벽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최고 10m를 넘고 북쪽에는 해자의 흔적도 보여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 성벽의 중간 남쪽 자연 능선 위에 영진리고분군이 분포한다. 7번 국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일부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토광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널무덤), 횡구식석실분(앞트기식돌방무덤), 옹관(독무덤) 등 다양한 무덤 양식이 확인되었고 토기와 금동귀걸이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장시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의 주인은 성곽을 방어하던 장수나 지역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방내리 토성은 해안 방벽과 더불어 하슬라(강릉)를 방어하는 신라의 강력한 요새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벽을 뒤덮고 있는 숲을 걷어내고 성곽을 정리만 해도 당시의 위용이 상당 부분 드러날 것이다.
방내리 토성과 해안 방벽은 연곡천 하류에 자리하며 북방을 감시하는 신라의 전초 기지였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