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다 산성의 나라(3) - 강릉 삼한산성

자생투어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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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바로 옆, 삼국시대 철옹성

 

주황색 라인이 성벽으로 고구려 방면인 동쪽과 북쪽 성벽이 특히 높다. 둘레는 약 600m. 오른쪽 정동진천은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왼쪽 위 계곡은 화비령을 넘어 강릉으로 연결되어 동해안 남북교통의 축선을 통제하는 위치다. 산성임에도 평지에서 멀지 않은 것은 언제든 기동이 가능한 공격적 성격을 말해준다  


진입로조차 분명치 않고 외부에서는 성곽을 전혀 알아볼 수 없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기록도 성벽이 다 허물어졌고 규모도 크지 않다고 되어 있다. 산 아래를 한 바퀴 돌며 진입로를 찾아보니 산성우리 마을 북쪽, 산성을 품은 산줄기의 북동 모서리에서 가늘게 나 있다. 낙엽이 무성하고 잡초가 심한 것으로 봐서 여름에는 아예 진입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잡초가 마르고 낙엽 진 겨울에는 길 ‘흔적’을 따라 진입은 가능하다. 이마저 성 안에 있는 몇 기의 무덤 관리용으로 실낱같이 남았다.

그런데... 이건? 마을 뒤 급경사 사면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급사면은 도로를 내거나 마을 조성을 위해 삭토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성벽 접근을 어렵게 만든 인공적 구축이 분명하다. 활처럼 가운데가 살짝 들어가며 휘어진 것은 경사면에 붙은 적을 좌우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감안한 일종의 치성(雉城) 개념이다.

뿐만 아니다. 돌로 쌓은 동벽은 거의 허물어졌지만 그 아래는 여러 개의 단으로 경사면을 재구축해서 성벽 높이를 과장함과 동시에 적군의 접근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 성벽 맨위에 쌓은 석축 성벽은 원래 높이가 3~4m 정도로 추정되지만 전체 성벽은 15m에 달하는 가공할 스케일이다. 이 정도면 국내최고 방어성인 보은 삼년산성에 필적한다. 왜 이런 외진 바닷가에 이처럼 엄청난 철옹성을 구축한 것일까.

성으로 진입하는 도중의 동쪽 경사면. 마을과 도로를 내기 위해 근래에 구축한 것이 아니라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급경사로 삭토한 것을 알 수 있다  동벽 옆에는 길이 100m, 폭 50m 정도의 넓은 평지가 있다. 돌더미는 건물터나 제단 흔적 같다
허물어진 북벽 중 석축이 남은 부분. 쐐기 모양으로 거칠게 다듬은 돌을 쌓아올렸다  

높이 100m의 낮은 야산에, 그것도 해발 60~90m 중턱에 거성을 쌓았다면 이는 우리나라에 많은 도피성(위급 시 성에 들어가 농성으로 적군을 피함.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대표적)이 아니라 산 아래를 직격할 수 있는 공격성이라는 뜻이다. 이 성은 위치를 보면 그 중요성을 바로 알 수 있다. 성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입지와 감제방향 등을 보면 신라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 강릉 일원의 여러 성곽들과 마찬가지로 5~6세기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북방으로 진출하던 당시 고구려(말갈 포함)를 막는 거점이었다.

특히 동쪽 전면으로는 정동진 해변이 1.6km 거리에 있고 서쪽으로는 지금은 동해터널을 거쳐 7번 국도가 지나지만 옛날에는 화비령(火飛嶺, 231m)을 넘어 강릉 방면으로 이어지는 동해안 교통축선의 요지였다. 신라 입장에서는 화비령을 넘거나 정동진 해변에서 진입하는 적을 삼한산성 한 곳에서 감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지나 남쪽으로 밤치(175m)를 넘으면 옥계를 거쳐 동해와 삼척까지는 순탄대로다. 신라 때는 삼척(당시는 실직-悉直)이 동해안 거점으로 중요해서 삼한산성은 실직의 북방 방어성 역할이 주임무였을 것이다. 지금도 산성 주변으로 동해고속도로와 7번 국도, 동해선 철도, 지방 도로(율곡로, 헌화로) 등 모든 교통로가 지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삼한산성은 강릉과 동해, 삼척을 잇는 중요한 교통축선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고속도로와 철도, 국도, 지방도가 산성 주변을 지난다

석축은 허물어졌지만 장대한 돌무지로 남아 원형의 웅자를 말해준다. 사진은 북벽으로 원래 석축 높이만 4~5m는 되었을 것이다 

북벽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나무 때문에 알아보기 어렵지만 석축 아래에도 여러단의 토축으로 성벽의 연장을 꾀해 총높이가 20m에 달한다 

성내에 들어서자 평탄한 대지가 나온다. 일부는 묘지와 밭이 들어섰지만 나머지는 풀밭으로 방치되어 있는데 돌무지가 있는 것으로 봐서 원래는 건물이나 제단이 있었을 것이다.

성안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경사면을 이루며, 동벽 옆 평탄지는 남벽에서 북벽에 이르기까지 길이 100m, 폭 50m 정도로 상당히 넓다. 많은 군사가 집결했을 때 야영하거나 훈련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성벽은 간간이 석축을 유지한 곳이 있지만 대부분 허물어졌고, 다행히 허물어진 성돌은 봉긋하게 모여 줄을 짓고 있어 원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벽 위까지 잡목이 자라 진행이 쉽지 않은데 여름이라면 접근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북벽을 따라 걸으며 그 높이에 다시 경악했다. 석축 아래 다단으로 구축한 성벽을 더하면 총높이는 20m에 달해 전체 성벽 중 가장 높다. 이 정도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아닐 수 없다. 화비령과 정동진 해안으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동시에 감당하는 방향이라 더욱 높고 강고하게 쌓은 것 같다.

허물어지고 숲에 뒤덮이긴 했어도 성벽 형태를 완연히 보존하고 있는 남벽  

남벽의 건재한 부분. 얇고 넓은 쐐기형 성돌은 대표적인 신라 성인 보은 삼년산성, 문경 견훤산성과 닮았다 

성벽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한 모자 모양이고, 내부는 서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경사면을 이룬다. 서쪽 꼭지점에서 산 정상까지 60m 구간에도 토축 성벽이 이어져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산정은 해발 100m에 불과해 평지와의 고도차나 거리감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성벽 위까지 나무로 뒤덮여 산 아래에서는 산성의 존재를 알아채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남벽은 북벽에 비해 낮은 편인데 이는 고구려 방면인 화비령과 정동진 방향의 북벽과 동벽이 주방어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육안으로 확인한 성문은 북문과 남문 두 곳이고, 현재 진입로가 나 있는 동벽 남단도 성벽을 원형으로 쌓아 옹성이나 치성 효과를 낸 것으로 봐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 산 위에 숲이 꺼져내린 곳이 삼한산성, 오른쪽 뒤 해변이 정동진이다 

파란 실선은 필자의 답사 루트이며, 삐딱한 모자 모양의 노란 선이 성벽이다. 왼쪽 끝이 산의 정상부, 오른쪽 아래로 동해선 철도와 정동진천이 나란하다. 지도상 성벽 둘레는 583m, 성안 면적은 약 4300평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만든 지도에 산성이 표기되어 있지만(붉은 점선) 이름은 없다. 산성 아래 마을이 산성우리(山城隅里, '산성 절벽 마을'이란 뜻)인 데서 성의 존재를 짐작케 할 뿐이다

성안은 동벽 부근 외에는 잡목으로 가득해서 진입이 어렵다. 바닥에는 오래된 토기나 기와 조각만이 간혹 흩어져 있다. 삼한산성(三韓山城)은 전해오는 이름일 뿐 원래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큰 성이 옛기록에는 없다가 20세기 초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토루이며 둘레는 약 300간(540m)이고 일반에 삼한성지(三韓城址)라고 알려져 있다”고 되어 있다. 삼한은 삼국시대와 비슷한 개념으로 주민들이 오래전 옛날에 축성된 성임을 말한 것 같다.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성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니 통탄할 일이다. 벌목으로 성벽만 드러내도 위용을 드러낼 것이고, 후대를 위한 유산이자 관광자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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