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옆 강변에 우뚝한 고구려 산성
서울양양고속도로 양양IC 옆에 후천을 끼고 길고 가파른 석성산(94m) 정상부에 석성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가 특히 좋아하는 입지에 남쪽을 견제하는 방향이라 고구려가 신라를 겨냥해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저기라면 고구려성이 들어서기에 최고의 입지인데…’
서울양양고속도로 양양JC를 지날 때마다 남대천 지류인 후천 저편에 길게 뻗은 산줄기(석성산, 94m)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시 ‘석성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양양군이 석성산 서단에 상하수도사업소를 건설하면서 성곽 유구가 발견되어 일부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2008년 발간된 보고서를 보면 출토 유물과 연대측정 결과 통일신라시기에 축성되었고 나말여초 시기에 주로 활용되었다가 몽고군 침입 즈음에 폐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유물만으로 초축 연대를 단정하기는 어렵고, 내 생각으로는 산성의 입지와 견제 방향으로 볼 때 고구려가 초축한 것을 통일신라 때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후천 변에서 바라본 석성산. 산성은 왼쪽 정상부를 길게 감싸고 있었다. 강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고 후천이 해자가 되어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있다석성산성 위치도(발굴조사보고서). 석성산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628m이다. 후천을 해자로, 급경사 절벽을 천연 성벽으로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남쪽 상공에서 본 석성산성. 후천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혜의 요새 지형이다(발굴조사 보고서)
고구려는 강변 절벽을 활용해 방어 성격의 성을 쌓는 경향이 있다. 백제, 신라와 접경을 이루던 한탄강 변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등이 모두 한탄강을 천연해자로 삼고 절벽을 자연성벽으로 활용해 축성한 고구려 성들이다. 10여 년 전 압록강을 답사하면서 강변절벽에 쌓은 고구려 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첫도읍지로 추정되는 오녀산성 역시 압록강 지류인 훈강을 해자로 삼고 사방의 바위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해 축성을 최소화하면서도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의 피난성인 환도산성 역시 압록강 지류인 계아강을 해자로 삼고 강변 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반도의 큰 강은 대체로 동서로 흘러 지역의 경계를 이루고 전술적으로는 자연 방어선이 된다. 이 때문에 남북으로 대치한 고구려와 백제는 강을 끼고 도시를 발전시키면서도 강을 활용한 방어성을 구축했다.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위례성(서울 풍납토성으로 비정)과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은 모두 강을 북쪽으로 끼고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는 위치다. 한편 신라는 남북으로 흐르는 낙동강유역 전체를 영역으로 차지해서 백제와 접경을 이룬 소백산맥 일원에 산성을 많이 축조했고, 강변 성은 역시 고구려와 접경한 소백산맥 북부에 몇 곳 보이는데 단양의 적성과 온달산성이 대표적이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석성산성(발굴조사 보고서). 오른쪽 건물은 공사중인 상하수도사업소이고 위로 후천이 흐른다. 성벽은 사업소 외곽을 돌아나가지만 알아보기 어렵다 봉화대에서 바라본 상하수도사업소. 사업소 공사로 성벽은 묻혀 버렸고 멀리 설악산이 배경을 이룬다
석성산성은 과연 어떤 규모이고, 고구려가 처음 쌓은 성이 맞는 것일까. 궁금증과 호기심을 안고 석성산으로 향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산줄기 끝, 해발 80m 지점에 양양상하수도사업소가 들어서 있어 진입로는 잘 나 있다.
석성산 뒤편으로 하얗게 눈을 인 설악산 대청봉(1708m)~화채봉(1320m) 능선이 하늘 위에 넘실댄다. 다만 대청봉과 화채봉 동쪽은 설악 답지 않게 거의 육산(肉山)을 이뤄 무던하다. 덕분에 양양읍 주변 풍광은 모가 나거나 살벌하지 않고 풍만하고 여유롭다. 석성산도 원래는 대청봉~관모산(880m)에서 흘러나온 산줄기 끝자락에 자리하지만 44번 국도가 산줄기를 끊어놓아 독립적인 산으로 보인다.
수도사업소는 출입이 안 되어 바로 옆 암봉으로 올라서니 산불감시초소에서 감시원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온다. 마침 산불조심기간(11월1일~12월15일)이긴 하지만 화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마을 옆 등산로는 양해해 주는데 감시원은 진입을 막아섰다. 산성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자 “성은 없고 봉화대 터밖에 없다”면서 초소 바로 뒤 바위를 가리킨다. 그럼 봉화대라도 잠시 보고 가겠다고 하니 빨리 다녀오란다.
봉화대가 있었다는 바위에는 '석성산성봉화대장군 위'라는 비석이 서 있다. 산성이 운용될 당시에는 망대였을 것이다
봉화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 양양IC 옆으로 후천이 구룡령 방면으로 이어지고 있다성 안쪽은 관목이 가득해 진입이 아예 불가능하다
봉화대 바위 옆에는 ‘석성산봉화대장군위(石城山烽火大將軍位)’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봉화대라지만 석축 흔적은 없고 자연암만 남았다. 봉화대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조망이 탁 트여 주변을 감제하기에 최적이다. 봉화대 바로 아래에서 장대지가 발견된 것도 당연한 입지다.
발 아래로 후천이 천연의 해자가 되어 흐르고 서쪽으로는 한계령, 남서쪽으로는 구룡령 방면 협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오대산 방면에서 흘러오는 남대천 상류가, 동쪽으로는 남대천 하류와 동해안이 훤하니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경계하는 입지임이 분명하다. 세 나라가 쟁패하던 삼국시대,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전술적 요충지를 절대 놓치지 않았으니 지도도 없이 이처럼 최적의 입지를 어떻게 선정했는지 매번 놀랍다.
산불감시원의 제지도 있지만 봉화대에서 산성 내부로 진입하는 길이 아예 없다. 낙엽이 지고 잡초가 말랐어도 잡목이 뒤엉켜 헤쳐 나가기가 어렵고 성벽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산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발굴 당시 항공사진(발굴조사 보고서). 가운데 바위가 봉화대이고 봉화대 북쪽에 장대지가 발결되었다. 봉화대 남쪽으로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후천 건너편 양양IC 방면에서 보면 석성산성의 기막힌 입지에 또 감탄하게 된다. 폭이 거의 200m나 되는 후천이 범접불가의 해자가 되어주고, 설령 강을 건너더라도 산성의 남사면은 인력으로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며 높이 80m의 절벽을 이룬다. 산성이 건재할 당시에는 경사면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적당히 삭토해서 자연 성벽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수목이 우거지긴 했지만 어쨌든 산성에 진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증거다.
산성 북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마천이 흐르고 그 사이에는 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강변에 둑을 쌓아 반듯하고 넓은 들판이 됐지만 옛날에는 대부분 모래톱이었을 것이다.
강원도 북단에서 고구려 성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감회가 특별하다. 석상산성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은 ‘석성(石城)이 있는 산(석성산)’에서 유래한 편의상의 명칭이고 원래의 이름이야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때 양양의 이름이 익현현(翼峴縣) 혹은 이문현(伊文縣)이었고 읍내에서 가까웠던 것을 감안하면 ‘익현산성’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양양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한계령(920m)의 조선시대 이름은 오색령(五色嶺)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날개가 있어야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높고 험하다는 뜻에서 익현(翼峴)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양양(陽壤)은 중국 호북성 한수(漢水)를 낀 도시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선 태종 16년(1416년) 양양도호부가 되면서 처음 쓰였다.
후천 방면의 남벽은 2단 석축으로 구축되었다. 잔존 석축 높이가 2m에 불과한 것은 자연절벽을 활용하고 석축 아래를 삭토해 방어력을 극대화해서 최후방어선 개념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이다
내성(동편)의 남벽. 아래쪽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큰 돌을 쌓고 위로 갈수록 뒤로 물려 쌓아 강도를 높였다
양양군과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8년에 낸 석성산성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석성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된 이중성으로 밝혀졌고, 현재 상하수도사업소가 자리한 서쪽 저지대가 외성, 동쪽의 고지대가 내성이다. 봉수대 아래에 2층 누각 형태의 장대지가 확인되었다. 전체 성벽 둘레는 628m, 성내 면적은 12,219㎡(약 4,040평)이며, 내성과 외성의 면적은 거의 비슷하다. 석축 성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았고 높이는 2m 정도다. 석축이 이렇게 낮은 것은 자연절벽을 활용하고 석축 아래를 삭토해 방어력을 극대화해서 최후방어선 개념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성벽은 총 120m 정도이며, 내성 남벽이 80~85m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지만 발굴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아 다시 수풀에 묻혀 외견상 성벽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봉화대 아래에서 발견된 장대지(將臺址)는 정면(동-서) 5칸, 측면(남-북) 3칸으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같은 2층 누각 형태로 추정된다. 일대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는데, 산성 전체가 후천을 방어선으로 남쪽을 견제하는 입지임에도 장대는 오히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점거해 북방을 감제하는 용도로 바꾼 것 같다
발굴 당시 확인된 잔존성벽은 120m(보라색 부분) 정도였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토사와 수풀에 묻혀 접근조차 어렵고 성벽을 알아볼 수도 없다(발굴조사 보고서)
출토유물은 기와류 44점, 토기류 36점, 금속류 10점으로, 기와류는 나말여초(羅末麗初), 토기류는 7세기말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석성산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고 나말여초 시기에 주로 운용되다가 몽고군이 양주성(양양)을 함락한 1253년 직전에 폐성된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건물지에서 나온 목탄을 활용해 측정한 방사성탄소연대가 서기 900년 전후인 점도 나말여초 시기에 적극 활용된 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산성의 전술적 입지와 감제 방향을 볼 때 나는 고구려가 처음 쌓았고 신라를 거쳐 고려 초까지 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설악산 옆 강변에 우뚝한 고구려 산성
서울양양고속도로 양양IC 옆에 후천을 끼고 길고 가파른 석성산(94m) 정상부에 석성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가 특히 좋아하는 입지에 남쪽을 견제하는 방향이라 고구려가 신라를 겨냥해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저기라면 고구려성이 들어서기에 최고의 입지인데…’
서울양양고속도로 양양JC를 지날 때마다 남대천 지류인 후천 저편에 길게 뻗은 산줄기(석성산, 94m)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시 ‘석성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양양군이 석성산 서단에 상하수도사업소를 건설하면서 성곽 유구가 발견되어 일부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2008년 발간된 보고서를 보면 출토 유물과 연대측정 결과 통일신라시기에 축성되었고 나말여초 시기에 주로 활용되었다가 몽고군 침입 즈음에 폐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유물만으로 초축 연대를 단정하기는 어렵고, 내 생각으로는 산성의 입지와 견제 방향으로 볼 때 고구려가 초축한 것을 통일신라 때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후천 변에서 바라본 석성산. 산성은 왼쪽 정상부를 길게 감싸고 있었다. 강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고 후천이 해자가 되어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있다석성산성 위치도(발굴조사보고서). 석성산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628m이다. 후천을 해자로, 급경사 절벽을 천연 성벽으로 활용한 것을 알 수 있다남쪽 상공에서 본 석성산성. 후천을 끼고 절벽을 이룬 천혜의 요새 지형이다(발굴조사 보고서)
고구려는 강변 절벽을 활용해 방어 성격의 성을 쌓는 경향이 있다. 백제, 신라와 접경을 이루던 한탄강 변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등이 모두 한탄강을 천연해자로 삼고 절벽을 자연성벽으로 활용해 축성한 고구려 성들이다. 10여 년 전 압록강을 답사하면서 강변절벽에 쌓은 고구려 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첫도읍지로 추정되는 오녀산성 역시 압록강 지류인 훈강을 해자로 삼고 사방의 바위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해 축성을 최소화하면서도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의 피난성인 환도산성 역시 압록강 지류인 계아강을 해자로 삼고 강변 절벽을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반도의 큰 강은 대체로 동서로 흘러 지역의 경계를 이루고 전술적으로는 자연 방어선이 된다. 이 때문에 남북으로 대치한 고구려와 백제는 강을 끼고 도시를 발전시키면서도 강을 활용한 방어성을 구축했다.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위례성(서울 풍납토성으로 비정)과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은 모두 강을 북쪽으로 끼고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는 위치다. 한편 신라는 남북으로 흐르는 낙동강유역 전체를 영역으로 차지해서 백제와 접경을 이룬 소백산맥 일원에 산성을 많이 축조했고, 강변 성은 역시 고구려와 접경한 소백산맥 북부에 몇 곳 보이는데 단양의 적성과 온달산성이 대표적이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석성산성(발굴조사 보고서). 오른쪽 건물은 공사중인 상하수도사업소이고 위로 후천이 흐른다. 성벽은 사업소 외곽을 돌아나가지만 알아보기 어렵다 봉화대에서 바라본 상하수도사업소. 사업소 공사로 성벽은 묻혀 버렸고 멀리 설악산이 배경을 이룬다
석성산성은 과연 어떤 규모이고, 고구려가 처음 쌓은 성이 맞는 것일까. 궁금증과 호기심을 안고 석성산으로 향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산줄기 끝, 해발 80m 지점에 양양상하수도사업소가 들어서 있어 진입로는 잘 나 있다.
석성산 뒤편으로 하얗게 눈을 인 설악산 대청봉(1708m)~화채봉(1320m) 능선이 하늘 위에 넘실댄다. 다만 대청봉과 화채봉 동쪽은 설악 답지 않게 거의 육산(肉山)을 이뤄 무던하다. 덕분에 양양읍 주변 풍광은 모가 나거나 살벌하지 않고 풍만하고 여유롭다. 석성산도 원래는 대청봉~관모산(880m)에서 흘러나온 산줄기 끝자락에 자리하지만 44번 국도가 산줄기를 끊어놓아 독립적인 산으로 보인다.
수도사업소는 출입이 안 되어 바로 옆 암봉으로 올라서니 산불감시초소에서 감시원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온다. 마침 산불조심기간(11월1일~12월15일)이긴 하지만 화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마을 옆 등산로는 양해해 주는데 감시원은 진입을 막아섰다. 산성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자 “성은 없고 봉화대 터밖에 없다”면서 초소 바로 뒤 바위를 가리킨다. 그럼 봉화대라도 잠시 보고 가겠다고 하니 빨리 다녀오란다.
봉화대가 있었다는 바위에는 '석성산성봉화대장군 위'라는 비석이 서 있다. 산성이 운용될 당시에는 망대였을 것이다
봉화대에서 내려다 본 모습. 양양IC 옆으로 후천이 구룡령 방면으로 이어지고 있다성 안쪽은 관목이 가득해 진입이 아예 불가능하다
봉화대 바위 옆에는 ‘석성산봉화대장군위(石城山烽火大將軍位)’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봉화대라지만 석축 흔적은 없고 자연암만 남았다. 봉화대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조망이 탁 트여 주변을 감제하기에 최적이다. 봉화대 바로 아래에서 장대지가 발견된 것도 당연한 입지다.
발 아래로 후천이 천연의 해자가 되어 흐르고 서쪽으로는 한계령, 남서쪽으로는 구룡령 방면 협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오대산 방면에서 흘러오는 남대천 상류가, 동쪽으로는 남대천 하류와 동해안이 훤하니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경계하는 입지임이 분명하다. 세 나라가 쟁패하던 삼국시대,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전술적 요충지를 절대 놓치지 않았으니 지도도 없이 이처럼 최적의 입지를 어떻게 선정했는지 매번 놀랍다.
산불감시원의 제지도 있지만 봉화대에서 산성 내부로 진입하는 길이 아예 없다. 낙엽이 지고 잡초가 말랐어도 잡목이 뒤엉켜 헤쳐 나가기가 어렵고 성벽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산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했다.
발굴 당시 항공사진(발굴조사 보고서). 가운데 바위가 봉화대이고 봉화대 북쪽에 장대지가 발결되었다. 봉화대 남쪽으로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후천 건너편 양양IC 방면에서 보면 석성산성의 기막힌 입지에 또 감탄하게 된다. 폭이 거의 200m나 되는 후천이 범접불가의 해자가 되어주고, 설령 강을 건너더라도 산성의 남사면은 인력으로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며 높이 80m의 절벽을 이룬다. 산성이 건재할 당시에는 경사면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적당히 삭토해서 자연 성벽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수목이 우거지긴 했지만 어쨌든 산성에 진입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증거다.
산성 북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거마천이 흐르고 그 사이에는 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지금은 강변에 둑을 쌓아 반듯하고 넓은 들판이 됐지만 옛날에는 대부분 모래톱이었을 것이다.
강원도 북단에서 고구려 성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감회가 특별하다. 석상산성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은 ‘석성(石城)이 있는 산(석성산)’에서 유래한 편의상의 명칭이고 원래의 이름이야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때 양양의 이름이 익현현(翼峴縣) 혹은 이문현(伊文縣)이었고 읍내에서 가까웠던 것을 감안하면 ‘익현산성’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양양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한계령(920m)의 조선시대 이름은 오색령(五色嶺)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날개가 있어야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높고 험하다는 뜻에서 익현(翼峴)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양양(陽壤)은 중국 호북성 한수(漢水)를 낀 도시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선 태종 16년(1416년) 양양도호부가 되면서 처음 쓰였다.
후천 방면의 남벽은 2단 석축으로 구축되었다. 잔존 석축 높이가 2m에 불과한 것은 자연절벽을 활용하고 석축 아래를 삭토해 방어력을 극대화해서 최후방어선 개념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이다
내성(동편)의 남벽. 아래쪽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큰 돌을 쌓고 위로 갈수록 뒤로 물려 쌓아 강도를 높였다
양양군과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008년에 낸 석성산성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석성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된 이중성으로 밝혀졌고, 현재 상하수도사업소가 자리한 서쪽 저지대가 외성, 동쪽의 고지대가 내성이다. 봉수대 아래에 2층 누각 형태의 장대지가 확인되었다. 전체 성벽 둘레는 628m, 성내 면적은 12,219㎡(약 4,040평)이며, 내성과 외성의 면적은 거의 비슷하다. 석축 성벽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았고 높이는 2m 정도다. 석축이 이렇게 낮은 것은 자연절벽을 활용하고 석축 아래를 삭토해 방어력을 극대화해서 최후방어선 개념으로 석축을 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성벽은 총 120m 정도이며, 내성 남벽이 80~85m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지만 발굴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아 다시 수풀에 묻혀 외견상 성벽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봉화대 아래에서 발견된 장대지(將臺址)는 정면(동-서) 5칸, 측면(남-북) 3칸으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같은 2층 누각 형태로 추정된다. 일대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는데, 산성 전체가 후천을 방어선으로 남쪽을 견제하는 입지임에도 장대는 오히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점거해 북방을 감제하는 용도로 바꾼 것 같다
발굴 당시 확인된 잔존성벽은 120m(보라색 부분) 정도였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토사와 수풀에 묻혀 접근조차 어렵고 성벽을 알아볼 수도 없다(발굴조사 보고서)
출토유물은 기와류 44점, 토기류 36점, 금속류 10점으로, 기와류는 나말여초(羅末麗初), 토기류는 7세기말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석성산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고 나말여초 시기에 주로 운용되다가 몽고군이 양주성(양양)을 함락한 1253년 직전에 폐성된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건물지에서 나온 목탄을 활용해 측정한 방사성탄소연대가 서기 900년 전후인 점도 나말여초 시기에 적극 활용된 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산성의 전술적 입지와 감제 방향을 볼 때 나는 고구려가 처음 쌓았고 신라를 거쳐 고려 초까지 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