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참한 파괴인가, 재생의 순리인가
경포대 뒤편 구릉지대. 한때는 숲길이었으나 지금은 사방이 드러난 민둥능선으로 변했다
매캐한 불 냄새는 사라졌지만 신발과 자전거 바퀴에는 검댕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숲이 사라진 구릉지가 생경하고 이채롭다. 불이 난 지 1년8개월이 지났건만 복구와 정리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강릉 경포대 서편에서 큰 불이 난 것은 23년 4월 11일 아침이었다. 강풍에 넘어진 나무가 전선을 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며, 단 하루만에 추구장 540개 면적(379ha)을 태웠다.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주택 40채, 펜션 28곳, 호텔 3곳이 피해를 입었고 산불을 진압하는 화선(火線)이 8.8km에 달했다. 피해가 이렇게 컸던 것은 건조한 날씨에 최고 초속 30m에 달하는 강풍이 불씨를 멀리 퍼트렸기 때문이다.
23년 4월 발생한 산불의 피해지역(빨간 선 안쪽). 경포호 서쪽 낮은 구릉지대 대부분이 해당한다
산불이 남긴 흔적과 산불 전후의 풍경이 너무나 달라 115만평에 달하는 피해지대를 누비며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운치 있는 금강송과 해송이 가득 했던 구릉지는 말갛게 머리를 밀어 민둥산으로 변했건만 길은 그대로 남았고 숲이 사라진 대신 조망은 시원해지기도 했다.
피해지역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지가 대부분이어서 산불 전후 경관의 차이는 가히 격변이다. 아무리 낮은 구릉지라도 숲이 있으면 ‘산’으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높이 10~20m의 헌칠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뤘으니 산체가 부풀어오른 듯 과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삽시간에 나무가 사라지자 처참할 정도로 앙상하고 빈약한 몸집이 드러나고 말았다. 숲이 지면을 장식하고 과장하는 장치이기도 함을 실감한다. 눈을 현혹하는 그런 도구를 걷어내고 남는 실체는 이렇게 앙상한 살풍경일 뿐이다. 인간도 무엇이 다를까.
경포호반의 경포대와 주변 숲은 소방당국의 집중적인 보호 덕분에 화마를 피했다
출발지는 강릉의 대표적인 명소인 경포대로 잡는다. 경포대(鏡浦臺)는 경포호 서쪽 언덕에 있는 누각으로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큰 규모로 경포호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운치를 더해준다. 산불이 났을 당시 소방당국은 강릉의 상징이자 국가 보물인 경포대를 지키기 위해 진력한 결과 다행히 화마를 피했고 주변 숲도 보존되었다. 하지만 경포호 일대에 산재하는 정자 중에는 피해를 입은 곳도 있다. 산불지대 중에 있는 정자들의 상황을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경포대에서 호안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차례로 경호정, 상영정, 금란정, 방해정이 나온다. 경포호 주변에 정자가 많은 것은 경관이 빼어나고 호반에 낮은 구릉지가 많아 풍류를 즐기는 정자 입지로 최적이기 때문이다.
경호정과 금란정은 무사한데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상영정은 전소되어 불에 탄 잔해만이 폭삭 내려앉아 있다. 잔해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둬서 더욱 처참하다. 방해정은 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최근에 복구가 끝나 말끔해졌다.
경호정은 바로 뒤 능선까지 불이 닥쳤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로 뒤편 숲이 전소했지만 금란정도 살아남았다
경호정과 금란정 사이에 있던 상영정은 지대가 높고 숲과 너무 가까워서인지 화마를 면하지 못했다. 잔해가 그대로 남아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다시 경포대로 돌아와 뒤편 언덕으로 올라서면 헐벗은 구릉지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시루봉(87m)까지 이어지고 주변으로 황량한 피해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듬성듬성 남은 나무들은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싶다. 지난여름만 해도 관목과 잡초가 우거져 황량함을 잘 몰랐는데 모든 것이 조락하는 겨울이 되고 보니 불 탄 대지의 상흔이 아프게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산이든 구릉지든 숲이 없는 곳을 찾기 어렵다. 헐벗은 구릉지로 구불대는 길이 이국적인 느낌마저 주는 것은 보기 드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이 지나간 작은 골짜기마다 예쁜 집들이 새로 들어서 산뜻한 생기를 더해주고는 있다.
어떤 집과 나무는 살아남고, 바로 옆에 있던 집과 나무는 불에 탔으니 선택적 명운이 판이하다. 덕을 쌓은 착한 사람이 사는 집만 살아남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연과 인간 도덕을 결부시키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미신이다.
그런데 피해면적이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남북으로 2.5km, 동서로는 최대 2km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 산불에 휩싸였다. 겨울이 되니 숲이 있고 없는 경계선을 따라 피해지역이 일목요연하다. 불 탄 나무를 걷어내고 곳곳에 묘목을 심어놓았지만 어느 세월에 우뚝 자라 다시 숲을 이룰지 아득하다. 적어도 30년은 지나야 성긴 숲 형태라도 갖출까.
민둥 능선 아래 집들은 새단장을 했다. 오른쪽으로 경포호가 살짝 보이고 경포해변의 스카이베이 호텔이 우뚝하다
산불 피해지역에서 가장 높은 시루봉(87m) 가는 길목. 가옥은 새단장을 했거나 복구중이고 숲은 대부분 사라졌다
경포호 서쪽 내륙에 자리한 호해정은 바로 옆까지 화마가 미쳐 주변 숲이 다 탔는데도 잘 보존되었다
피해지역에서 베어낸 목재를 쌓아놓은 야적장. 그 양이 엄청나다바로 이웃해 있으면서도 어떤 집과 나무는 살아 남고 어떤 집과 나무는 불에 탔다. 요행일 뿐이다
산불은 바다 직전까지 치달았고 해안의 일부 콘도와 펜션이 피해를 입었다숲에 둘러싸여 있던 묘는 창졸간에 환하게 모습이 드러나 버렸다
경포호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지 언덕에 있던 호해정은 다행히 불을 피했지만 주변 구릉지는 완전히 헐벗었다. 산불지대 가운데를 흐르는 안현천 옆에는 피해지역의 나무를 베어내 쌓아놓은 야적장이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피해지역 목재를 모두 벌목해서 치우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안현천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보니 사근진해변 직전까지 화마가 미쳤고, 해변 일대에 있던 일부 콘도와 펜션이 큰 피해를 입었다.
고목 숲에 포근히 둘러싸여 있던 오래된 묘는 그대로 전모가 드러나 햇볕과 시선에 노출되어 보기에 안쓰럽고 풍화도 한층 빨리 진행될 것이다.
산불지대 한쪽을 차지한 골프장은 잔디밭이 일종의 방화선이 되어 불이 내륙으로 옮겨 붙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지만 군데군데 숲 지대는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최초의 발화점도 골프장 입구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며 전봇대 전선을 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하필 거기에 전봇대가 있었나 싶겠지만 초속 30m에 달하는 엄청난 강풍이 불었으니 바람이, 자연이 일으킨 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광대한 숲을 가진 나라에서는 자연발화로 인한 대형 산불이 흔히 발생한다. 어쩌면 자연발화 산불은 파괴와 재생의 순환을 자극하는 대자연의 섭리일지 모른다.
멀리 소나무 5~6그루가 살아남은 시루봉 가는 길. 왼쪽 골짜기에는 새 동네가 들어섰다
샌드파인 골프장 근처에서 불이 시작되어 골프장 내 숲이 피해를 입었지만 잔디밭이 일종의 방화선 역할을 해서 더 멀리 번지는 것을 막았다시루봉 일대는 작년 12월말까지 목재 정리작업이 진행됐다(25년 1월 이후 다 치워짐)
시루봉에서 바라본 산불피해지역과 경포호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 공기돌 모양의 바위가 있는 시루봉 정상. 숲이 사라지면서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대가 되었다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 오똑한 시루봉은 전체가 불에 타 숲이 없지만 정상에만 몇 그루 소나무가 남은 기묘한 모습이라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다. 정상 바로 아래에 펜션이 있어 자전거로 올라가 조금만 걸어 오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시루봉은 피해지역에서 가장 높아 산불 정리도 마지막까지 한 듯 곳곳에 목재가 쌓여 있고 산판트럭이 와서 이를 실어내고 있다. 정상에서는 산불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경포호와 경포대해변도 가깝다. 반대편으로는 웅장한 장벽으로 턱 버티고 선 백두대간이 흰 눈을 이고 위용을 발한다. 관광용 전망대로도 최고의 입지다.
하산 길에 베어낸 목재의 나이테를 세어보니 50~60년 정도로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시루봉 바로 서쪽에는 울창한 솔숲이 백두대간까지 이어져 간발의 차이로 운명이 바뀐 나무의 일생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겨우 몇 미터, 몇 십 미터 차이로 어떤 나무는 참혹한 화형을 당하고 어떤 나무는 평온한 일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하기야 존재의 실상이 다 그렇다.
경포대에 돌아오니 연인들은 활짝, 무리는 큰 목청으로 파안대소하며 여행을 즐기지만 저편 불 탄 대지 무인지경에는 황량한 바람만이 스친다.
시루봉 중턱에 쌓아놓은 목재가 엄청나다. 뒤편으로 강릉올림픽파크와 강릉시내가 멀지 않다
시루봉 남쪽에서 숲의 운명이 갈렸다. 불이 미치지 않은 솔숲이 빽빽하다.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산줄기는 대관령을 포함한 백두대간
시루를 엎어놓은 듯 봉긋한 시루봉. 산불피해지대는 물론 경포호 일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무참한 파괴인가, 재생의 순리인가
경포대 뒤편 구릉지대. 한때는 숲길이었으나 지금은 사방이 드러난 민둥능선으로 변했다
매캐한 불 냄새는 사라졌지만 신발과 자전거 바퀴에는 검댕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숲이 사라진 구릉지가 생경하고 이채롭다. 불이 난 지 1년8개월이 지났건만 복구와 정리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강릉 경포대 서편에서 큰 불이 난 것은 23년 4월 11일 아침이었다. 강풍에 넘어진 나무가 전선을 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며, 단 하루만에 추구장 540개 면적(379ha)을 태웠다.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주택 40채, 펜션 28곳, 호텔 3곳이 피해를 입었고 산불을 진압하는 화선(火線)이 8.8km에 달했다. 피해가 이렇게 컸던 것은 건조한 날씨에 최고 초속 30m에 달하는 강풍이 불씨를 멀리 퍼트렸기 때문이다.
23년 4월 발생한 산불의 피해지역(빨간 선 안쪽). 경포호 서쪽 낮은 구릉지대 대부분이 해당한다
산불이 남긴 흔적과 산불 전후의 풍경이 너무나 달라 115만평에 달하는 피해지대를 누비며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운치 있는 금강송과 해송이 가득 했던 구릉지는 말갛게 머리를 밀어 민둥산으로 변했건만 길은 그대로 남았고 숲이 사라진 대신 조망은 시원해지기도 했다.
피해지역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지가 대부분이어서 산불 전후 경관의 차이는 가히 격변이다. 아무리 낮은 구릉지라도 숲이 있으면 ‘산’으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높이 10~20m의 헌칠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뤘으니 산체가 부풀어오른 듯 과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삽시간에 나무가 사라지자 처참할 정도로 앙상하고 빈약한 몸집이 드러나고 말았다. 숲이 지면을 장식하고 과장하는 장치이기도 함을 실감한다. 눈을 현혹하는 그런 도구를 걷어내고 남는 실체는 이렇게 앙상한 살풍경일 뿐이다. 인간도 무엇이 다를까.
경포호반의 경포대와 주변 숲은 소방당국의 집중적인 보호 덕분에 화마를 피했다
출발지는 강릉의 대표적인 명소인 경포대로 잡는다. 경포대(鏡浦臺)는 경포호 서쪽 언덕에 있는 누각으로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큰 규모로 경포호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운치를 더해준다. 산불이 났을 당시 소방당국은 강릉의 상징이자 국가 보물인 경포대를 지키기 위해 진력한 결과 다행히 화마를 피했고 주변 숲도 보존되었다. 하지만 경포호 일대에 산재하는 정자 중에는 피해를 입은 곳도 있다. 산불지대 중에 있는 정자들의 상황을 먼저 확인해보기로 했다.
경포대에서 호안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차례로 경호정, 상영정, 금란정, 방해정이 나온다. 경포호 주변에 정자가 많은 것은 경관이 빼어나고 호반에 낮은 구릉지가 많아 풍류를 즐기는 정자 입지로 최적이기 때문이다.
경호정과 금란정은 무사한데 조금 높은 곳에 있던 상영정은 전소되어 불에 탄 잔해만이 폭삭 내려앉아 있다. 잔해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둬서 더욱 처참하다. 방해정은 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최근에 복구가 끝나 말끔해졌다.
경호정은 바로 뒤 능선까지 불이 닥쳤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로 뒤편 숲이 전소했지만 금란정도 살아남았다
경호정과 금란정 사이에 있던 상영정은 지대가 높고 숲과 너무 가까워서인지 화마를 면하지 못했다. 잔해가 그대로 남아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다시 경포대로 돌아와 뒤편 언덕으로 올라서면 헐벗은 구릉지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시루봉(87m)까지 이어지고 주변으로 황량한 피해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듬성듬성 남은 나무들은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싶다. 지난여름만 해도 관목과 잡초가 우거져 황량함을 잘 몰랐는데 모든 것이 조락하는 겨울이 되고 보니 불 탄 대지의 상흔이 아프게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산이든 구릉지든 숲이 없는 곳을 찾기 어렵다. 헐벗은 구릉지로 구불대는 길이 이국적인 느낌마저 주는 것은 보기 드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이 지나간 작은 골짜기마다 예쁜 집들이 새로 들어서 산뜻한 생기를 더해주고는 있다.
어떤 집과 나무는 살아남고, 바로 옆에 있던 집과 나무는 불에 탔으니 선택적 명운이 판이하다. 덕을 쌓은 착한 사람이 사는 집만 살아남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연과 인간 도덕을 결부시키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미신이다.
그런데 피해면적이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남북으로 2.5km, 동서로는 최대 2km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 산불에 휩싸였다. 겨울이 되니 숲이 있고 없는 경계선을 따라 피해지역이 일목요연하다. 불 탄 나무를 걷어내고 곳곳에 묘목을 심어놓았지만 어느 세월에 우뚝 자라 다시 숲을 이룰지 아득하다. 적어도 30년은 지나야 성긴 숲 형태라도 갖출까.
민둥 능선 아래 집들은 새단장을 했다. 오른쪽으로 경포호가 살짝 보이고 경포해변의 스카이베이 호텔이 우뚝하다
산불 피해지역에서 가장 높은 시루봉(87m) 가는 길목. 가옥은 새단장을 했거나 복구중이고 숲은 대부분 사라졌다
경포호 서쪽 내륙에 자리한 호해정은 바로 옆까지 화마가 미쳐 주변 숲이 다 탔는데도 잘 보존되었다
피해지역에서 베어낸 목재를 쌓아놓은 야적장. 그 양이 엄청나다바로 이웃해 있으면서도 어떤 집과 나무는 살아 남고 어떤 집과 나무는 불에 탔다. 요행일 뿐이다
산불은 바다 직전까지 치달았고 해안의 일부 콘도와 펜션이 피해를 입었다숲에 둘러싸여 있던 묘는 창졸간에 환하게 모습이 드러나 버렸다
경포호에서 조금 떨어진 구릉지 언덕에 있던 호해정은 다행히 불을 피했지만 주변 구릉지는 완전히 헐벗었다. 산불지대 가운데를 흐르는 안현천 옆에는 피해지역의 나무를 베어내 쌓아놓은 야적장이 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피해지역 목재를 모두 벌목해서 치우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안현천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보니 사근진해변 직전까지 화마가 미쳤고, 해변 일대에 있던 일부 콘도와 펜션이 큰 피해를 입었다.
고목 숲에 포근히 둘러싸여 있던 오래된 묘는 그대로 전모가 드러나 햇볕과 시선에 노출되어 보기에 안쓰럽고 풍화도 한층 빨리 진행될 것이다.
산불지대 한쪽을 차지한 골프장은 잔디밭이 일종의 방화선이 되어 불이 내륙으로 옮겨 붙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지만 군데군데 숲 지대는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최초의 발화점도 골프장 입구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며 전봇대 전선을 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하필 거기에 전봇대가 있었나 싶겠지만 초속 30m에 달하는 엄청난 강풍이 불었으니 바람이, 자연이 일으킨 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같은 광대한 숲을 가진 나라에서는 자연발화로 인한 대형 산불이 흔히 발생한다. 어쩌면 자연발화 산불은 파괴와 재생의 순환을 자극하는 대자연의 섭리일지 모른다.
멀리 소나무 5~6그루가 살아남은 시루봉 가는 길. 왼쪽 골짜기에는 새 동네가 들어섰다
샌드파인 골프장 근처에서 불이 시작되어 골프장 내 숲이 피해를 입었지만 잔디밭이 일종의 방화선 역할을 해서 더 멀리 번지는 것을 막았다시루봉 일대는 작년 12월말까지 목재 정리작업이 진행됐다(25년 1월 이후 다 치워짐)
시루봉에서 바라본 산불피해지역과 경포호
인공으로 만든 것 같은 공기돌 모양의 바위가 있는 시루봉 정상. 숲이 사라지면서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대가 되었다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 오똑한 시루봉은 전체가 불에 타 숲이 없지만 정상에만 몇 그루 소나무가 남은 기묘한 모습이라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다. 정상 바로 아래에 펜션이 있어 자전거로 올라가 조금만 걸어 오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시루봉은 피해지역에서 가장 높아 산불 정리도 마지막까지 한 듯 곳곳에 목재가 쌓여 있고 산판트럭이 와서 이를 실어내고 있다. 정상에서는 산불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경포호와 경포대해변도 가깝다. 반대편으로는 웅장한 장벽으로 턱 버티고 선 백두대간이 흰 눈을 이고 위용을 발한다. 관광용 전망대로도 최고의 입지다.
하산 길에 베어낸 목재의 나이테를 세어보니 50~60년 정도로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시루봉 바로 서쪽에는 울창한 솔숲이 백두대간까지 이어져 간발의 차이로 운명이 바뀐 나무의 일생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겨우 몇 미터, 몇 십 미터 차이로 어떤 나무는 참혹한 화형을 당하고 어떤 나무는 평온한 일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하기야 존재의 실상이 다 그렇다.
경포대에 돌아오니 연인들은 활짝, 무리는 큰 목청으로 파안대소하며 여행을 즐기지만 저편 불 탄 대지 무인지경에는 황량한 바람만이 스친다.
시루봉 중턱에 쌓아놓은 목재가 엄청나다. 뒤편으로 강릉올림픽파크와 강릉시내가 멀지 않다
시루봉 남쪽에서 숲의 운명이 갈렸다. 불이 미치지 않은 솔숲이 빽빽하다.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산줄기는 대관령을 포함한 백두대간
시루를 엎어놓은 듯 봉긋한 시루봉. 산불피해지대는 물론 경포호 일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