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절정-정자(2) 강릉 임경당(臨鏡堂)

자생투어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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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살아 있구나, 대청마루에서 커피 한 잔

 

임경당은 지금도 살아 있다. 탁 트인 대청마루에 앉아 느긋하게 풍경을 보며 커피 한 잔을 즐기는 여유와 격조   

여기 생생히 살아있는 정자가 있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정자는 말단급 문화재나 문중의 유산 정도로 보존될 뿐 딱히 활용하지는 않는데 지금도 풍류객이 노닐고 온돌방에는 온기가 도는 곳이 있으니 바로 대관령과 강릉 시내 사이에 자리한 임경당(臨鏡堂)이다.

임경당을 포함한 고택은 후손이 카페를 열어 운영하고 있어 지금도 생동하고 유용한 공간이 되고 있다. 카페 이름도 서정과 품격이 묻어나는 ‘지나는 나그네’ 과객(過客). 정자가 건립되고 대관령을 넘어오거나 넘어가는 수많은 과객들이 들렀을 테고, 지금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으니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고 잇는, 멋진 이름이다.

고택의 별당으로 지어진 임경당. 앞에는 작은 뜰이 있고 본채와 함께 카페로 운영된다  

지나는 나그네라면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과객(過客)이란 카페 이름이 격조 있고 서정적이다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본채는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마당을 에워싼 ㄷ자 구조다

'과객'의 본채 안마당. 좁은 대신 아늑하다  '과객' 구조 안내도. 생각보다 방이 많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임경당 대청마루에 앉았다. 명문가 후예답게 품위 있는 중년 부부가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건물에 대해 질문하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겨울에 평일이라 손님이 몇 명 없어 마루는 독차지다. 하지만 최고명당 자리인 한칸짜리 온돌방은 중년 부인들이 차지했고 외부에서 들릴 정도로 한담이 끝이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는 본채와 바로 붙어 있어 새로운 경관을 창조하거나 풍경의 일원으로 녹아들기보다는 고택의 생활공간 중 하나로 느껴진다. 본채에 딸린 별당(別堂) 개념으로 지어서 당(堂)으로 이름 붙였지만 건물 자체는 팔작지붕에 대청마루와 온돌방을 조합한 전형적인 정자 구조이고, 앞으로는 대관령에서 흘러온 남대천과 작은 들판을 건너 칠봉산(361m)을 바라본다. 다만 교각 높이가 55m, 길이는 1040m나 되는 동해고속도로 남대천대교가 시야를 가르고 도로 소음이 심한 것이 옥의 티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유당 김노경이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내외부에는 시인묵객의 편액이 다수 붙어 있다 임경당 한쪽에는 온돌방을 마련했다. 불을 때는 아궁이 옆에 겸손을 부르는 쪽문이 귀엽다 

450년 묵은 백일홍 가지가 뻗쳐내린 임경당 뒤편  

임경당은 여기 말고도 1km 떨어진 곳에 또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열(金說, 1506~?)이 경포호를 마주본다는 뜻의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 임경당의 시작이다. 시내쪽에 있는 것은 김열이 살았던 집이고, 지금 찾은 임경당은 김열의 아버지인 김광헌(金光軒, 1487~1539)이 터 잡은 본가이다. 김광헌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를 겪으며 관직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 이 임경당을 ‘진사댁’ 혹은 ‘상 임경임당’이라고 하고, 시내쪽 임경당은 그냥 임경당 혹은 하 임경당이라 부른다. 임경당의 초축시기는 1530년 경으로 추정된다.

김열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지극한 효심과 학식이 알려져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끝내 사양해 ‘김처사(金處士)’로 불렸고 강릉에서 인정받는 십이향현(十二鄕賢) 중 한 사람이었다. 집 뒤쪽에는 선친 김광헌이 심고 가꾼 소나무숲이 있었는데 김열 역시 이를 아꼈고, 자신을 찾아온 율곡 이이에게 솔밭과 관련한 글을 부탁했다. 당시 조정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율곡은 병중의 외조모 봉양차 잠시 강릉에 왔다가 지역 어른인 김열을 찾은 터였다. 그때 김열은 63세, 율곡은 33세였다. 이 부탁을 받고 율곡이 ‘후손들은 솔밭을 잘 가꾸라’며 써준 것이 호송설(護松設)로 하 임경당에 편액이 걸려있다. 강릉에 기품 있는 솔밭이 많은 것은 이것도 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추사체의 특징이 흔연한 김정희의 글씨 硏華寄北(연화기북). '꽃을 키워 북(조정, 임금?)으로 보낸다'는 뜻일까 

온돌방에는 별도로 임경당(김열)을 추모한다는 '모경제(慕鏡齋)' 현판이 붙어 있고 그 옆에는 추사의 글씨 '벽장(碧莊, 푸른 장원)'이 걸려 있다 천장과 기둥 곳곳에 걸려 있는 편액

카페로 활용되는 상 임경당과 달리 생활의 흔적 없이 세트장처럼 메말라가는 하 임경당   

상하 임경당 사이에는 500년 묵은 은행나무 고목이 외롭다. 김열의 부친 김광헌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 임경당은 실제 사용은 않고 보존만 하고 있어 생동감이나 유용성은 상 임경당이 훨씬 앞선다. 이름을 당(堂)으로 붙인 것은 가옥의 일부인 별당 개념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상 임경당의 기세 좋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썼다. 건물 내외부에는 편액이 많은데 율곡 이이의 호송설과 김열이 쓴 송어시(松魚詩)도 걸려 있다.

송어시 유래가 흥미롭다. 강릉으로 유배 왔다가 다시 높은 벼슬을 받고 위세가 대단한 인물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서생이 찾아와 송어 한 마리를 두고 갔다. 송어의 배를 갈라 보니 비단에 쓴 시가 나왔다. 이 시를 보고 크게 깨달은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뒤 큰 사화(士禍)가 일어나 많은 벼슬아치가 목숨을 잃고 유배되었지만 그는 환난을 피해 그 시를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 이 송어시를 쓴 이가 임경당의 주인 김열이다. 아버지 김광헌부터 사화를 피해 벼슬에 나가지 않은 까닭을 여기서도 알 수 있고,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김열의 탁월한 안목도 드러난다.

 

松魚詩(송어시)

 

發發纖鱗氣力多(발발섬린기력다) 가는 비늘에 펄떡펄떡 힘 좋으니

龍門九級可跳過(용문구급가도과) 용문협 아홉단까지 뛰어넘겠네

可憐知進不知退(가련지진부지퇴) 가련쿠나, 전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니

終失滄溟萬里波(종실창명만리파) 푸른 물결 넘실대는 큰 바다를 끝내 못 보네

(필자 역)

 

이밖에도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여럿 보여서 아버지 김노경 때부터 두 집안이 친하게 지내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련(기둥에 걸린 글귀)에는 김광헌-김열 부자의 행적을 기리는 글이 씌어 있다.

 

先君遺志皎言遵(선군유지교언준) 선대 남긴 뜻과 말을 쫓아

儒賢扁額耀千春(유현편액요천춘) 뛰어난 선비들 글귀 천년에 빛나네

若使後昆隨肯撰(약사후곤수긍찬) 이렇게 후손들이 선대를 잘 따른다면

古址重修曠感新(고지중수광감신) 옛터는 새로워지고 감개가 밝겠네

(필자 역)

 

필자의 화답이다.

 

處士遺志五百年(처사유지오백년) 처사의 높은 뜻 오백년을 이어오니

鬱鬱松林滿丘山(울울송림만구산) 울창한 솔밭 언덕과 산에 가득

高雅俊堂生茶室(고아준당생다실) 우아한 별당 다실로 되살아나니

暮日過客遊愁安(모일과객유수안) 해질녘 나그네 시름을 달래주네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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