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 속 선풍(仙風)

마을과 전답이 바로 옆인데 진한 탈속감의 선경을 이뤘다. 이것이 정자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바로 옆에 논이 질펀하고 마을도 멀지 않은데 아주 짙고 그윽한 선풍(仙風)이 감돈다. 하필 정자 뒤 언덕에는 백로가 무리 지어 서식하니 선풍의 격을 더해준다.
정자는 높이 7m 정도의 수직바위 위에 날 듯이 앉았고 그 앞에는 둥근 연못이 짝을 이뤄 토극수(土克水)의 상극이 선명하다. 여름이면 연잎이 가득 채우는 연못 주위에는 온갖 풍파를 견뎌온 고목이 듬성듬성 도열해 세속과의 경계를 짓는다. 못 가운데는 작은 인공섬인 석가산(石假山)이 조영되어 격조 있는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연못은 바위에 막혀 완전한 원을 이루지 못하고 2/3 정도 원형인데 지름은 70m 정도다. 연못과 정자를 다 합쳐도 전체 면적은 5천㎡(약 1,500평)인데 이 정도 땅으로 세속의 한가운데서 빚어낸 선풍의 격리감, 탈속감은 경이롭다.
'屛巖' 글씨가 새겨진 암벽 위에 날듯이 앉은 병암정. 고목과 연못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정면 5칸, 측면 2.5칸의 긴 형태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널찍하지만 담장이 시야를 가리는 것이 흠이다
정자는 절벽 위 좁고 응달진 터에서 북향을 하고 있어 막상 가까이 다가서면 미감과 운치가 덜하다 
대청마루는 시원하지만 시야를 막는 담장이 아쉽다. 바로 절벽이라 안전을 위해 필요하긴 하다
병암정은 1898년 대한제국 시절 한성부판윤,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이유인(李裕寅, 1843~1907)이 고향 금당실마을로 내려왔을 때 세웠고 처음 이름은 옥소정(玉蕭亭)이었다고 한다. 이유인은 완전히 낙향한 적이 없어 정자는 1920년 예천권씨 문중에서 매입해 병암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병암(屛巖)은 정자 아래 바위가 넓고 길죽해 병풍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정자가 살짝 돌출해 있어 연못은 반달 모양이 되었다. 오른쪽 아래는 예천권씨 사당
정자 뒤편 언덕에는 백로가 서식해 도교풍의 운치를 더해준다
예천권씨 문중은 조선 초기의 문신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며 그를 제향하는 사당이 정자 옆에 이건되어 있다. 권오복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여서 훈구파가 신흥 사림파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병암정 아래 연못을 ‘여각지’라고 하는데 이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중에 나오는 “나는 꿈을 깨어(余覺之)”에서 따온 것 같다. 이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성종실록 사초에 넣으면서 김종직을 중심으로 대두한 신흥 사림파를 견제하던 훈구파와 연산군에게 빌미를 주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패왕 항우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초나라 황제 의제를 추모하는 글로, 김종직이 여행길 꿈에 나타난 의제와 대화하는 내용이 있다. 의제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김종직이 놀라 일어나는 장면에서 “나는 꿈을 깨어(余覺之)”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여각지(余覺池)는 김종직과 권오복을 함께 기리는 명명 아닐까 싶다.
이름은 꿈에서 깬다고 했건만 연못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마치 꿈속에 드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연못 가운데 조성한 석가산. 뒤쪽 멀리에 금당실 마을이 있다
실내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2칸짜리 온돌방을 각각 두었다. 전등까지 설치해서 문중 행사 때 실제로 사용하는 것 같다
실용적으로 가구한 대들보와 서까래는 근래에 손을 본 듯하다. 편액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병암정은 멀리서 볼 때는 참 좋은데 가까이 다가서면 조금 실망스럽다. 병암 위 좁은 공간에 북향을 하고 있어 햇살이 잘 들지 않는 데다 어중간한 높이의 담장을 둘러 조망을 가린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2.5칸의 상당히 큰 규모여서 정자가 아니라 정사(精舍)에 가깝다. 장중한 팔작지붕에 단차를 둔 겹처마가 위세를 발하고 앞쪽 전체를 차지하는 긴 대청마루도 당당하다. 측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뒤쪽에는 아궁이와 굴뚝을 나란히 두었다.
내부에는 중간에 대청마루를 두고 온돌방이 양쪽에 자리한다. 앞 담장이 없다면 중앙 대청마루나 방에서 문을 열면 여각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들판도 훤히 보일 것이다. 내부는 전등이 가설되어 있고 깨끗하게 관리되어 지금도 문중행사 때 사용되는 것 같다. 다만 편액이나 주련이 전혀 없고 건물도 근래에 중수해서 깊은 유서감이나 고졸미는 없다. 아무래도 병암정은 조금 떨어져 바라볼 때가 진수다.
연못을 두르고 있는 제방은 인공으로 축조했지만 신비스런 분위기의 고목이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연못 수위는 동쪽 들판보다 조금 높은데 이는 땅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은 서쪽 수로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어 고인 상태는 아니다.
겨울이라 연은 줄기가 마르고 주변에도 녹색 생기가 없으나 어차피 정자에 올라 음풍농월 할 수 없다면 풍광은 본래의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이 낫다. 장식과 과장을 걷어낸 경관의 바닥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바위 절벽의 ‘병암(屛巖)’ 각석도 선명하고 뒷동산에는 백로가 하얗게 비상한다.
연못 주위의 고목이 그윽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병암정에서 1.2km 북쪽에는 전통 건축이 잘 보존된 금당실마을이 있고, 금당실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6km 지점에는 초간정(草澗亭)이 또 다른 선경을 이루고 있다. 초간정은 암벽 위에 돌출한 병암정과 반대로 신기하게 주변 평지 아래로 푹 꺼져서 흐르는 개울가 암반에 자리해 또 다른 비경을 이룬다.
지근거리에 도로와 마을이 있지만 최소한의 조영으로 탁월한 격세감과 선풍을 발산하는 병암정…. 여각지를 한 바퀴 돌거나 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정서적 위안과 공감을 얻게 된다.
필자의 찬시.
屛巖亭 過客(병암정 과객)
突兀巖上鶴飛來(돌올암상학비래) 바위 위에 우뚝 학이 날아들고
靈木三四池塘對(영목삼사지당대) 영기 어린 서너 그루 나무 못을 둘렀네
深慮漫步暫當仙(심려만보잠당선)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잠시 신선이 된 듯
眞仙不遇何處在(진선불우하처재) 진짜 신선은 못만났는데 어디에 있으려나
글/사진 김병훈 대표
평범 속 선풍(仙風)
마을과 전답이 바로 옆인데 진한 탈속감의 선경을 이뤘다. 이것이 정자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바로 옆에 논이 질펀하고 마을도 멀지 않은데 아주 짙고 그윽한 선풍(仙風)이 감돈다. 하필 정자 뒤 언덕에는 백로가 무리 지어 서식하니 선풍의 격을 더해준다.
정자는 높이 7m 정도의 수직바위 위에 날 듯이 앉았고 그 앞에는 둥근 연못이 짝을 이뤄 토극수(土克水)의 상극이 선명하다. 여름이면 연잎이 가득 채우는 연못 주위에는 온갖 풍파를 견뎌온 고목이 듬성듬성 도열해 세속과의 경계를 짓는다. 못 가운데는 작은 인공섬인 석가산(石假山)이 조영되어 격조 있는 정자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연못은 바위에 막혀 완전한 원을 이루지 못하고 2/3 정도 원형인데 지름은 70m 정도다. 연못과 정자를 다 합쳐도 전체 면적은 5천㎡(약 1,500평)인데 이 정도 땅으로 세속의 한가운데서 빚어낸 선풍의 격리감, 탈속감은 경이롭다.
'屛巖' 글씨가 새겨진 암벽 위에 날듯이 앉은 병암정. 고목과 연못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정면 5칸, 측면 2.5칸의 긴 형태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널찍하지만 담장이 시야를 가리는 것이 흠이다
정자는 절벽 위 좁고 응달진 터에서 북향을 하고 있어 막상 가까이 다가서면 미감과 운치가 덜하다
대청마루는 시원하지만 시야를 막는 담장이 아쉽다. 바로 절벽이라 안전을 위해 필요하긴 하다
병암정은 1898년 대한제국 시절 한성부판윤,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이유인(李裕寅, 1843~1907)이 고향 금당실마을로 내려왔을 때 세웠고 처음 이름은 옥소정(玉蕭亭)이었다고 한다. 이유인은 완전히 낙향한 적이 없어 정자는 1920년 예천권씨 문중에서 매입해 병암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병암(屛巖)은 정자 아래 바위가 넓고 길죽해 병풍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정자가 살짝 돌출해 있어 연못은 반달 모양이 되었다. 오른쪽 아래는 예천권씨 사당
정자 뒤편 언덕에는 백로가 서식해 도교풍의 운치를 더해준다
예천권씨 문중은 조선 초기의 문신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며 그를 제향하는 사당이 정자 옆에 이건되어 있다. 권오복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여서 훈구파가 신흥 사림파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병암정 아래 연못을 ‘여각지’라고 하는데 이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중에 나오는 “나는 꿈을 깨어(余覺之)”에서 따온 것 같다. 이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성종실록 사초에 넣으면서 김종직을 중심으로 대두한 신흥 사림파를 견제하던 훈구파와 연산군에게 빌미를 주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패왕 항우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초나라 황제 의제를 추모하는 글로, 김종직이 여행길 꿈에 나타난 의제와 대화하는 내용이 있다. 의제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김종직이 놀라 일어나는 장면에서 “나는 꿈을 깨어(余覺之)”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여각지(余覺池)는 김종직과 권오복을 함께 기리는 명명 아닐까 싶다.
이름은 꿈에서 깬다고 했건만 연못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마치 꿈속에 드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연못 가운데 조성한 석가산. 뒤쪽 멀리에 금당실 마을이 있다
실내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2칸짜리 온돌방을 각각 두었다. 전등까지 설치해서 문중 행사 때 실제로 사용하는 것 같다
실용적으로 가구한 대들보와 서까래는 근래에 손을 본 듯하다. 편액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다
병암정은 멀리서 볼 때는 참 좋은데 가까이 다가서면 조금 실망스럽다. 병암 위 좁은 공간에 북향을 하고 있어 햇살이 잘 들지 않는 데다 어중간한 높이의 담장을 둘러 조망을 가린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2.5칸의 상당히 큰 규모여서 정자가 아니라 정사(精舍)에 가깝다. 장중한 팔작지붕에 단차를 둔 겹처마가 위세를 발하고 앞쪽 전체를 차지하는 긴 대청마루도 당당하다. 측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뒤쪽에는 아궁이와 굴뚝을 나란히 두었다.
내부에는 중간에 대청마루를 두고 온돌방이 양쪽에 자리한다. 앞 담장이 없다면 중앙 대청마루나 방에서 문을 열면 여각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들판도 훤히 보일 것이다. 내부는 전등이 가설되어 있고 깨끗하게 관리되어 지금도 문중행사 때 사용되는 것 같다. 다만 편액이나 주련이 전혀 없고 건물도 근래에 중수해서 깊은 유서감이나 고졸미는 없다. 아무래도 병암정은 조금 떨어져 바라볼 때가 진수다.
연못을 두르고 있는 제방은 인공으로 축조했지만 신비스런 분위기의 고목이 그윽한 운치를 자아낸다. 연못 수위는 동쪽 들판보다 조금 높은데 이는 땅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은 서쪽 수로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어 고인 상태는 아니다.
겨울이라 연은 줄기가 마르고 주변에도 녹색 생기가 없으나 어차피 정자에 올라 음풍농월 할 수 없다면 풍광은 본래의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이 낫다. 장식과 과장을 걷어낸 경관의 바닥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바위 절벽의 ‘병암(屛巖)’ 각석도 선명하고 뒷동산에는 백로가 하얗게 비상한다.
연못 주위의 고목이 그윽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병암정에서 1.2km 북쪽에는 전통 건축이 잘 보존된 금당실마을이 있고, 금당실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6km 지점에는 초간정(草澗亭)이 또 다른 선경을 이루고 있다. 초간정은 암벽 위에 돌출한 병암정과 반대로 신기하게 주변 평지 아래로 푹 꺼져서 흐르는 개울가 암반에 자리해 또 다른 비경을 이룬다.
지근거리에 도로와 마을이 있지만 최소한의 조영으로 탁월한 격세감과 선풍을 발산하는 병암정…. 여각지를 한 바퀴 돌거나 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정서적 위안과 공감을 얻게 된다.
필자의 찬시.
屛巖亭 過客(병암정 과객)
突兀巖上鶴飛來(돌올암상학비래) 바위 위에 우뚝 학이 날아들고
靈木三四池塘對(영목삼사지당대) 영기 어린 서너 그루 나무 못을 둘렀네
深慮漫步暫當仙(심려만보잠당선)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잠시 신선이 된 듯
眞仙不遇何處在(진선불우하처재) 진짜 신선은 못만났는데 어디에 있으려나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