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천 평야가 한눈에, 한강 진출 교두보

이포보를 발밑으로 바라보는 파사성. 굴곡이 졌으나 대체로 삼각형 모양이며, 왼쪽 아래가 최고지점이자 파사산(230m) 정상이다
강원과 충북 내륙 산악지대를 거칠게 흘러온 한강(남한강)은 여주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속도를 줄이며 광대한 들판을 맞이한다. 흙을 깎아 실어 온 토사를 내려놓아 여기저기 모래톱이 생겨났고 고도는 확 낮아져 이제 바다가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여주를 지나면 강물은 다시 양평과 남양주 즈음의 산악지대로 들어서고 이를 통과하면 강폭이 1km로 확대되며 광야가 펼쳐지는 서울 외곽으로 들어선다.
성벽 안내도. 문은 남문과 동문이 있고 세 군데 포루를 겸한 치성이 있다

복원된 북벽과 이포보. 성벽 높이는 5~6m이나 삭토한 기단부를 포함하면 10m 정도의 거벽을 이룬다
주출입구인 남문. 급사면에 설치되어 방어력을 높였고 원래는 허공에 떠서 사다리로 출입하는 현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 남은 8각기둥과 문틀은 임진왜란 때 수축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 옆에 있는 수구.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상하 두 군데 수구를 열어 놓았고 아래쪽 수구는 외부에서만 보인다 
남문 주변에 허물어진 서벽. 미리 삭토하고 아찔한 높이로 잔돌을 켜켜이 쌓은 공역이 놀랍다
여주 들판지대가 끝나는 최후의 강변 언덕에 웅장한 성채가 있으니 바로 파사성(婆娑城)이다. 서울과 한강하류로 이어지는 한강변 요지를 통제하고 드넓은 여주 벌판을 바라보는 천혜의 입지다. 장소 하나만으로 신라의 성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신라가 세를 키워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한강하류로 진출할 때 반드시 필요한 거점이기 때문이다.
경주를 기점으로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다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을 넘으면 충주를 거쳐 곧장 여주를 거쳐 파사성 아래로 이어진다. 계립령은 서기 156년(신라 아달라왕 3년)에 개척한 고갯길로 문경새재와 죽령에 앞서 소백산맥을 넘는 길로 가장 먼저 열렸다. 신라는 이 길을 통해 한강하류로 착착 진격해 왔던 것이다.
서벽 안쪽에는 주둔지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을 꽤 넓은 평지가 있다 
서벽에서 바라본 남문 일대. 높고 육중한 성벽은 보은 삼년산성을 닮았다
성벽이 허물어진 동문 터
파사성은 신라 제5대 파사왕(재위 80~110) 때 축성해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때는 신라가 경주 일원에서 벗어나기 전이고, 여주 일원은 오히려 위례성(서울 풍납토성 비정)에 도읍한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백제가 점유했다가 신라가 차지하고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婆娑)는 ‘흔들리다, 빙빙 돌다, 우아한 자태’ 등의 뜻이 있으나 어떻게 성 이름이 되었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 수없다.
파사성은 남한강변에 자리한 해발 230m의 파사산 정상부에 자리하며 야트막한 골짜기를 안은 포곡식이면서 정상을 아울러 테뫼식 형태도 섞여 있다. 높이 230m라면 아주 낮은 산이지만 여주 일원의 저지대 평원 외곽에 자리해 비고가 높고 조망이 탁월해 산성 입지로 더할 나위가 없다. 산성 바로 아래에 백로의 날개에 알을 올려놓은 형상의 이포보가 강을 가로지른다. 이포보 옆에는 이포대교가 여주와 광주를 이어줘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정상부 뒤로 동그란 추읍산(583m)이 가깝고 그 뒤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용문산(1157m)이 웅장하다
정상부에서 바라본 북류하는 한강 줄기. 가까이는 양평 개군면소재지이고 그 뒤 산 너머로 양평읍내가 아득하다 
거대한 용처럼 정상부로 치닫는 북벽. 경사면을 따라 자유자재로 구비치는 성벽은 입체감과 역동성이 각별하다
파사성은 영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해 조선시대에도 중시되어 임진왜란 중인 1595년 서애 유성룡의 제안으로 승려 의암(義巖)이 승병을 이끌고 수년에 걸쳐 전면적으로 수축했다. 하지만 왜란이 끝난 후에는 그대로 방치되어 몇 년 후에는 폐성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니 다시는 왜란 같은 사태가 없을 것으로 방심한 것인지, 성을 지킬 인력과 장비, 재정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최근에 복원한 성벽 외에 잔존하는 성벽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증축한 것으로 보이며 성벽에 돌출한 공격시설인 치(雉)와 삼국시대에는 없던 포루 역시 임란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부 아래로 여러 단에 걸쳐 평지가 있고 건물지가 발견되어 성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남쪽으로 펼쳐진 여주이천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한강으로 뛰어들 듯 뻗어내리는 북벽 
성내는 수풀을 많이 제거해 조망이 잘 트이고 유적을 알아보기 쉽게 해놓았다
정상 북쪽 200m 지점에 있는 마애불(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높이 5.5m에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되어 파사성과의 관련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산성 입구 바로 옆으로 남한강 자전거길이 지나며 자전거길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육교가 가설되어 있다. 예전에 자전거로 오른 적도 있으나 업힐이 매우 가파르고 성곽을 찬찬히 일주하려면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서 600m 오르면 주출입구인 남문에 이른다. 문은 성곽에서 취약한 부분이라 특별히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마련인데, 신라의 성이 특별히 그렇듯이 성벽 아래를 가파르게 삭토하고 석축을 쌓아올려 총높이 10m 이상의 거벽을 이루었다. 사면이 가팔라 공격자 입장에서는 고개를 한참 올려보아야 하니 대단한 난공불락이다. 문 입구에는 8각 기둥이 좌우로 놓였는데 임란 때 수축할 당시 만든 문 기둥 같다.
안내문에는 성둘레가 1800m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는 950m 정도다. 왜 이렇게 큰 오차가 났는지 알 수 없는데 잠깐 봐도 1.8km의 거성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성은 크게 보아 정상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이루며 남벽 일부와 북벽이 잘 복원되어 있다. 복원 성벽은 높이 5~6m 내외다.
북벽 위에 용케 남은 소나무 뒤로 한강이 도도하다
삼국시대의 잔존성벽. 1500년 풍파를 잘도 버텼다 
수습된 와편과 토기편은 상당한 상주인원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문 옆에 돌출한 치성
남쪽 상공에서 바라본 파사성. 천혜의 성곽 입지를 잘 활용한 선조들의 안목에 매번 감탄한다
남벽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일주한다. 다행히 성내는 수풀을 많이 제거해 어디서든 조망이 잘 트인다. 바로 발밑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펼쳐진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서면 남한강 최후의 산악지대인 양평 방면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고 북쪽 멀리는 일대의 최고봉인 용문산(1157m)이 거대한 장벽을 이룬다. 파사성과 용문산 사이에는 부채를 편 듯 동그란 추읍산(583m)이 기이하다. 기가 막힌 사방 조망에 전략적으로 탁월한 입지임을 거듭 확인한다. 하지만 삼국시대는 물론 임진왜란 때도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전략적 거점으로 이 강변에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군에는 든든하고, 적군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정상에는 필시 장대가 있었을텐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성내 곳곳에 흩어진 기와편과 토기편만이 건물과 상주인원이 상당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뉘엿해지는 햇살이 서쪽 저편 양자산(710m) 위로 나른하게 흩어지고 있지만 나그네는 이 오래된 성돌의 자력에 끌려 갈 길을 잊었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여주이천 평야가 한눈에, 한강 진출 교두보
이포보를 발밑으로 바라보는 파사성. 굴곡이 졌으나 대체로 삼각형 모양이며, 왼쪽 아래가 최고지점이자 파사산(230m) 정상이다
강원과 충북 내륙 산악지대를 거칠게 흘러온 한강(남한강)은 여주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속도를 줄이며 광대한 들판을 맞이한다. 흙을 깎아 실어 온 토사를 내려놓아 여기저기 모래톱이 생겨났고 고도는 확 낮아져 이제 바다가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여주를 지나면 강물은 다시 양평과 남양주 즈음의 산악지대로 들어서고 이를 통과하면 강폭이 1km로 확대되며 광야가 펼쳐지는 서울 외곽으로 들어선다.
성벽 안내도. 문은 남문과 동문이 있고 세 군데 포루를 겸한 치성이 있다

복원된 북벽과 이포보. 성벽 높이는 5~6m이나 삭토한 기단부를 포함하면 10m 정도의 거벽을 이룬다
주출입구인 남문. 급사면에 설치되어 방어력을 높였고 원래는 허공에 떠서 사다리로 출입하는 현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 남은 8각기둥과 문틀은 임진왜란 때 수축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 옆에 있는 수구.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상하 두 군데 수구를 열어 놓았고 아래쪽 수구는 외부에서만 보인다 
남문 주변에 허물어진 서벽. 미리 삭토하고 아찔한 높이로 잔돌을 켜켜이 쌓은 공역이 놀랍다
여주 들판지대가 끝나는 최후의 강변 언덕에 웅장한 성채가 있으니 바로 파사성(婆娑城)이다. 서울과 한강하류로 이어지는 한강변 요지를 통제하고 드넓은 여주 벌판을 바라보는 천혜의 입지다. 장소 하나만으로 신라의 성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신라가 세를 키워 당나라와의 교류를 위해 한강하류로 진출할 때 반드시 필요한 거점이기 때문이다.
경주를 기점으로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다 계립령(지금의 하늘재)을 넘으면 충주를 거쳐 곧장 여주를 거쳐 파사성 아래로 이어진다. 계립령은 서기 156년(신라 아달라왕 3년)에 개척한 고갯길로 문경새재와 죽령에 앞서 소백산맥을 넘는 길로 가장 먼저 열렸다. 신라는 이 길을 통해 한강하류로 착착 진격해 왔던 것이다.
서벽 안쪽에는 주둔지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을 꽤 넓은 평지가 있다
서벽에서 바라본 남문 일대. 높고 육중한 성벽은 보은 삼년산성을 닮았다
성벽이 허물어진 동문 터
파사성은 신라 제5대 파사왕(재위 80~110) 때 축성해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때는 신라가 경주 일원에서 벗어나기 전이고, 여주 일원은 오히려 위례성(서울 풍납토성 비정)에 도읍한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백제가 점유했다가 신라가 차지하고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婆娑)는 ‘흔들리다, 빙빙 돌다, 우아한 자태’ 등의 뜻이 있으나 어떻게 성 이름이 되었는지 정확한 유래는 알 수없다.
파사성은 남한강변에 자리한 해발 230m의 파사산 정상부에 자리하며 야트막한 골짜기를 안은 포곡식이면서 정상을 아울러 테뫼식 형태도 섞여 있다. 높이 230m라면 아주 낮은 산이지만 여주 일원의 저지대 평원 외곽에 자리해 비고가 높고 조망이 탁월해 산성 입지로 더할 나위가 없다. 산성 바로 아래에 백로의 날개에 알을 올려놓은 형상의 이포보가 강을 가로지른다. 이포보 옆에는 이포대교가 여주와 광주를 이어줘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정상부 뒤로 동그란 추읍산(583m)이 가깝고 그 뒤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용문산(1157m)이 웅장하다
정상부에서 바라본 북류하는 한강 줄기. 가까이는 양평 개군면소재지이고 그 뒤 산 너머로 양평읍내가 아득하다 
거대한 용처럼 정상부로 치닫는 북벽. 경사면을 따라 자유자재로 구비치는 성벽은 입체감과 역동성이 각별하다
파사성은 영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해 조선시대에도 중시되어 임진왜란 중인 1595년 서애 유성룡의 제안으로 승려 의암(義巖)이 승병을 이끌고 수년에 걸쳐 전면적으로 수축했다. 하지만 왜란이 끝난 후에는 그대로 방치되어 몇 년 후에는 폐성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니 다시는 왜란 같은 사태가 없을 것으로 방심한 것인지, 성을 지킬 인력과 장비, 재정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최근에 복원한 성벽 외에 잔존하는 성벽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증축한 것으로 보이며 성벽에 돌출한 공격시설인 치(雉)와 삼국시대에는 없던 포루 역시 임란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부 아래로 여러 단에 걸쳐 평지가 있고 건물지가 발견되어 성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남쪽으로 펼쳐진 여주이천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한강으로 뛰어들 듯 뻗어내리는 북벽
성내는 수풀을 많이 제거해 조망이 잘 트이고 유적을 알아보기 쉽게 해놓았다
정상 북쪽 200m 지점에 있는 마애불(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높이 5.5m에 고려 초 작품으로 추정되어 파사성과의 관련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산성 입구 바로 옆으로 남한강 자전거길이 지나며 자전거길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육교가 가설되어 있다. 예전에 자전거로 오른 적도 있으나 업힐이 매우 가파르고 성곽을 찬찬히 일주하려면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서 600m 오르면 주출입구인 남문에 이른다. 문은 성곽에서 취약한 부분이라 특별히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마련인데, 신라의 성이 특별히 그렇듯이 성벽 아래를 가파르게 삭토하고 석축을 쌓아올려 총높이 10m 이상의 거벽을 이루었다. 사면이 가팔라 공격자 입장에서는 고개를 한참 올려보아야 하니 대단한 난공불락이다. 문 입구에는 8각 기둥이 좌우로 놓였는데 임란 때 수축할 당시 만든 문 기둥 같다.
안내문에는 성둘레가 1800m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는 950m 정도다. 왜 이렇게 큰 오차가 났는지 알 수 없는데 잠깐 봐도 1.8km의 거성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성은 크게 보아 정상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을 이루며 남벽 일부와 북벽이 잘 복원되어 있다. 복원 성벽은 높이 5~6m 내외다.
북벽 위에 용케 남은 소나무 뒤로 한강이 도도하다
삼국시대의 잔존성벽. 1500년 풍파를 잘도 버텼다 
수습된 와편과 토기편은 상당한 상주인원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문 옆에 돌출한 치성
남쪽 상공에서 바라본 파사성. 천혜의 성곽 입지를 잘 활용한 선조들의 안목에 매번 감탄한다
남벽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일주한다. 다행히 성내는 수풀을 많이 제거해 어디서든 조망이 잘 트인다. 바로 발밑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펼쳐진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서면 남한강 최후의 산악지대인 양평 방면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고 북쪽 멀리는 일대의 최고봉인 용문산(1157m)이 거대한 장벽을 이룬다. 파사성과 용문산 사이에는 부채를 편 듯 동그란 추읍산(583m)이 기이하다. 기가 막힌 사방 조망에 전략적으로 탁월한 입지임을 거듭 확인한다. 하지만 삼국시대는 물론 임진왜란 때도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전략적 거점으로 이 강변에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군에는 든든하고, 적군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정상에는 필시 장대가 있었을텐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성내 곳곳에 흩어진 기와편과 토기편만이 건물과 상주인원이 상당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뉘엿해지는 햇살이 서쪽 저편 양자산(710m) 위로 나른하게 흩어지고 있지만 나그네는 이 오래된 성돌의 자력에 끌려 갈 길을 잊었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