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절정-정자(10) 제천 관란정(觀瀾亭)

자생투어
202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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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절경에 담긴 충심


관란정 정면으로는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류해서 휘돌아가는 물돌이 지형이 극적이다(오른쪽이 청령포와 하류 방면). 왼쪽 멀리 뾰족한 첨봉은 대규모 석회암광산이 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월 다래산(702m)  


왕조의 정통성을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성리학을 지존의 가치로 여기던 선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이 건국된 지 겨우 60년만에 일어난 쿠데타였다.

유교 창시자인 공자는 주(周)나라 초기 주공(周公)이 다스리던 시기를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했던 태평성대로 간주했고, 주공을 성인으로 숭앙해 공자 스스로 주공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 주공은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으로 무왕 시절에는 형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켰고 무왕 사후에는 그의 어린 아들인 성왕(주공에게는 조카)을 끝까지 보필했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의 수양대군(뒤에 세조)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주공의 길을 거꾸로 간 셈이다. 공자와 주공을 숭모하는 조선 선비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도리를 뒤엎은 이 정변을 용납할 수 없었다.

수양대군과 그를 옹립한 한명회 등 42명의 중신들은 단종이 13세에 불과하고 왕실에 수렴청정할 대비마저 없어 모든 권력이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자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종의 각별한 부탁을 받은 김종서 등은 단종을 잘 보필할 생각이었을 뿐 역성혁명을 꿈꾸지는 않았으니 수양대군의 야심에 명분이 됐을 뿐이다.

서강 옆 해발 285m 언덕 위에 올라 앉은 관란정과 원호유허비 비각. 정자는 정면과 측면 각 2칸의 작은 규모지만 언덕 위에 도드라져 팔작지붕이 날개를 펴 날아갈 듯 하다 관란정에서 바라본 청령포 방면. 원호는 매일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절을 하고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흘려보냈다

관란정 앞쪽은 근 100m 높이의 아찔한 절벽이다 

세조의 왕권 찬탈을 차마 묵과할 수 없었던 충신들은 결국 세조 제거를 계획하지만 실패로 돌아가 또 한 번 피바람이 불게 된다. 거사를 주도한 성삼문 등 6명은 처형당하고 직접 가담하지 않은 6명은 끝까지 단종에 충절을 지켜 각각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으로 부른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 1396~1463)는 계유정난 직후 도의가 뒤집힌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원주로 낙향했다. 그러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를 오자 상류로 10여km 떨어진 강변 언덕에 단을 쌓고 그 옆에 정자를 지어 청령포를 향해 매일 절을 올리고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을 박통에 담아 청령포로 떠내려 보냈다.

주나라 초기 백이와 숙제가 당시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국이던 은나라(상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하극상을 보고 무왕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며 수양산에 은둔해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상된다. 원호 역시 세조 시대를 용납할 수 없어 백이숙제와 같은 심정으로 낙향했을 것이다. 단종이 죽은 후에는 청령포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3년상까지 지냈으니 그의 충절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후에 세조가 유화적인 태도로 원호를 관직에 불렀으나 결코 나아가지 않았다.

관란정 뒤편(남쪽)은 제천 송학면 일원이다. 오른쪽 뒤편으로 송학산(819m)이 높다  

정자 안에서 바라본 청령포 방면정자로 오르는 길목에는 고려 때의 무신인 지녹연(智祿延, 1069~1126)의 무덤을 비롯해 고급스런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원호와 무관한 봉산지씨 문중 소유다   

원호의 호를 딴 관란정(觀瀾亭)은 조망 스케일이 굉장하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류해서 서강(西江)이 시작되는 초입의 강변 절벽 위에 턱 하니 올라앉았는데 절벽 높이가 근 100m에 달해 위용이 압도적이다. 표고는 285m로 높지 않으나 지독하게 구불거리는 서강의 물돌이를 내려다보며 애써 동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청령포를 의식했음이 분명하다. 언덕 정상부는 나무가 없는 민둥이라 정자와 원호유허비 비각이 더욱 도드라진다.

정자는 정면 측면 각 2칸의 소규모여서 거창한 풍광에 비해 작아 은둔자의 심경을 말해주는 듯하다. 1845년(헌종 11년) 중수하고 1941년 개축했으니 건물 자체는 오래되지 않았다. 원호유허비는 18세기 홍양호(1724~1802)가 글을 짓고 세웠으니 300년에 가깝다.

정자로 오르는 길목에는 고려 때의 무신인 지녹연(智祿延, 1069~1126)의 무덤을 비롯해 고급스런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원호와 무관한 봉산지씨 문중 소유다.

서강 위에 우뚝한 관란정관란정이 올라앉아 주변 풍광은 문인풍의 산수화가 되었다원호의 유고비와 그가 지은 탄세사  

 

정자 옆에는 원호유허비와 함께 원호의 유고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유고 시를 보자.

 

歎世詞(탄세사) 세상을 탄식하며

 

瞻波東岡松葉蒼蒼(첨파동강송엽창창) 물결 이는 동쪽 언덕 바라보니 솔잎 푸르구나

采之擣之療我飢腸(채지도지요아기장) 그 솔잎 따다 찧어 내 주린 배 채우니

目渺渺兮天一方(목묘묘혜천일방) 눈은 가물가물 하늘 저편을 향하고

懷黯黯兮雲五光(회암암혜운오광) 마음은 어둑어둑 구름에는 오색 빛 어리네

嗟夷齊邈焉寡儔兮(차이제막언과주혜) 아아, 백이숙제 높은 절개 짝할 이 드무니

空摘翠於首陽(공정취어수양) 공연히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먹었네

世皆忘義徇祿兮(세개망의순녹혜) 세상은 의를 잊고 녹봉만 구하니

我獨潔身而徜徉(아독결신이상양) 나 홀로 몸 맑게 하고 배회하네


기존 질서를 뒤엎는 혁명이나 쿠데타, 정변은 그 순간은 세태를 격랑으로 몰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쉽게 물결은 가라앉고 일상을 회복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에 순응해간다. 한때 영화를 누리던 인물들도 시간의 물결 속에 사라져가면서 옛일은 쉽게 잊히고 눈앞의 회로애락에 휩쓸려 간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누적되어 새로운 역사가 씌어진다.

충직 청렴한 원호는 계유정난 이후 이어진 단종의 폐위와 사사까지 일련의 가치전복이 금방 잊히고 세조 시대에 적응하는 세태가 목불인견이었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세태는 탄식을 부를 뿐이다. 세상에 도(道)가 없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굳이 누항(陋巷)에 나아가서 무엇하리. 물러나 은둔하며 자락(自樂)을 찾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관란정은 입지와 의미, 분위기 모든 것이 원호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어린 폐왕에 대한 절절한 충절은 지금도 청령포를 바라보는 정자에 깊게 어려 있다.

관란정 주변은 성긴 솔밭을 이뤄 그윽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필자의 찬시.

 

觀瀾亭 義氣(관란정 의기)

 

嵬嵬江璧三百丈 (외외강벽삼백장) 아득히 높은 강 절벽 300길인데

陋亭東向揖遠望 (누정동향읍천망) 동쪽 향한 작은 정자 멀리 인사하네

曲江千回拜謫王 (곡강천회배적왕) 강물도 천 번을 돌아 유배 왕에게 절하니

孤臣義比夷齊郞 (고신의비이제랑) 외로운 신하 높은 절개 백이숙제에 비하리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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