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고지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산악 조망

계방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조망. 오대산에 포함되는 동대산과 노인봉이 보이고 대관령삼양목장을 안은 황병산이 저편으로 물러나 있다. 동대산과 노인봉 사이로 진고개(950m)가 넘어간다
계방산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인기도 높지 않다. 높이는 국내 5위지만 4위 덕유산(1614m) 다음부터는 인지도와 관심이 크게 떨어지는데 계방산부터 그 ‘낙폭’이 대단하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해발 1577m로 1600m에 가깝지만 해발 600~700m에 달하는 내륙 고원에 자리해 실제 산 아래에서 바라보는 체감높이는 900m급 정도여서 대단히 높거나 웅장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완연한 육산(肉山)이라 경관미를 더해주는 돌출바위나 암벽이 없고, 숲이 울창해 등산로에서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오대산의 유명세에 가린 측면도 작지 않다. 산은 더 높으나 ‘오대산국립공원’ 경역에 포함되어 오대산의 한 봉우리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계방산과 운두령. 해발 1089m 고갯마루에서 능선을 따라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 그 아래 노동계곡에 이승복 생가가 보인다 
계방산은 좀처럼 깔끔한 전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운두령 근처에서 바라본 정상. 높이 차이가 500m도 되지 않는데 훨씬 높고 먼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계방산은 큰 장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주능선을 넘는 운두령이다. 운두령은 높이가 1089m나 되어 국내 고개 중 6번째로 높다. 참고로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 중 높이 기준 순위는 함백산 만항재(1330m), 함백산 두문동재(1268m), 지리산 정령치(1172m), 한라산 1100고지(1100m), 지리산 성삼재(1090m) 차례다. 운두령은 성삼재와 단 1m 차이로 6위다.
해발 1089m라면 웬만한 산보다 높은 고지여서 이곳에서 출발할 경우 계방산 정상과는 고도차가 488m 밖에 되지 않아 산행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나는 높은 고개에서 출발해 고도차를 줄이는, ‘약고 게으른 산행’을 좋아하는데 체력과 시간을 줄이는 대신 여유로운 심신으로 자연과 풍경을 즐기자는 심산이다. 수치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과연 운두령과 계방산도 이 계산이 통할까.
이승복이 다녔던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장(1998년 폐교). 여기서 생가까지는 4km나 되지만 8, 9세 아이가 걸어 다녔다. 주변은 이승복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계방산과 가장 근접한 영동고속도로 속사IC에서 나와 운두령 가는 길에는 이승복기념관을 꼭 거쳐야 한다. 계방산은 이승복의 비극을 안은 산이기도 하다. 이승복이 다니던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장(1998년 폐교) 일대에 자리 잡은 기념관은 마음이 아파도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 왔을 때보다 정리가 잘 되고 시설이 확장, 세련되어진 것은 관심과 예산이 계속 투입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때 논란이 있었으나 이승복의 언행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겨우 9살 난 그는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되었다. 1959년생이니 살아 있다면 아직 65세의 초로에 지나지 않는다.
전시물 중 이승복이 사용했을 작은 책걸상과 검정고무신, 사기그릇이 놓인 곳에서 나는 그 초라함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남은 생활기록부를 보면, 담임교사는 ‘성실침착하며 맡은 일을 잘 처리함’ ‘학습태도가 바르고 열심히 노력함’ ‘당번 일을 성실히 잘 한다’라고 적고 있어 이승복이 차분하면서도 성실한 아이였음을 알 수 있다. 1, 2학년에 걸쳐 8일의 결석이 있는데 ‘가사 조력으로 인한 결석’이라고 적혀 있어 그 나이에도 농사일을 돕느라 결석한 것을 알 수 있다. 생활환경에 대해서는 ‘화전민으로 살림이 어려우나 단란한 가정임’이라고 평가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초라한 검정고무신과 낡은 책걸상, 단촐한 식기가 가엾다
기념관에 전시된 생활기록부. 성실하고 침착하며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가가 눈에 띈다
기념관 뒤편 언덕에 있는 이승복의 묘. 오른쪽으로 같이 희생된 두 동생의 묘가 나란하다
마냥 천진난만해야 할 9살 어린이가 무기와 사상으로 중무장한 공비 앞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은 신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반복학습에서 나온 자동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어 안타깝다. 하지만 어떤 전란이나 위급상황에서도 인간은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이 본능이고 인륜의 근본이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어떤 악인도 구해낸다”면서 이런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기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공비들은 9살 이승복을 포함해 4살, 7살 동생까지 모두 죽였다. 형(15세)은 38곳을 칼에 찔렸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함께 있던 어머니(34세)도 죽었고, 출타했다 귀가하던 아버지는 공비의 칼에 찔렸지만 가까스로 탈출해 예비군 초소에 신고했다. 동거하던 할머니는 마침 외출 중이어서 화를 피했지만 공비들은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나고 이승복이 저항하자 전가족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기층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가 가장 가난하고 무력한 화전민을, 그것도 어린이들까지 죽인 것은 자기모순을 넘어 자기부정이다. 이 사건 하나로 북한정권과 공산주의는 민심과 명분을 모두 잃었고 자유세계의 경각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승복기념관에 복원되어 있는 생가. 전형적인 초가삼간으로, 뒤쪽 언덕 위에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묘가 있다
기념관에 복원된 생가는 말 그대로 방 둘에 부엌 하나 딸린 ‘초가삼간’으로 방은 가마니를 깔고 벽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민속촌에 남은 조선시대 민가와 다를 것이 없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내가 어릴 때 산간벽지에 있던 외가도 비슷한 초가였고, 그나마 방바닥을 기름종이로 바르고 벽은 신문지로 도배했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승복의 진짜 생가는 여기서 4km나 더 들어간 계방산 노동계곡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 8, 9세 아이가 왕복 8km를 걸어 다닌 것을 생각하면 기가 턱 막힌다.
사건이 난 1968년, 미국은 달나라로 아폴로 우주선을 보내고 있었고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최초의 고속철도 신칸센을 운영하고 있을 때다. 그즈음 우리는 먹을 것조차 부족해 허덕였으나 불과 50년 만에 세계일류로 올라서는 기적의 부흥을 일궈냈다. 짧은 시간에 극심한 급변을 겪은 우리는 그 여파이자 부작용으로 지금도 많은 내홍을 겪고 있다. 이를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해결에 조급해 하지 않으면 문제는 가라앉을 것이고 해결책도 보일 것이다.
산행 기점인 운두령. 약간의 주차공간과 매점, 식당이 있으며 고갯길 주행을 즐기는 오토바이가 여럿 보인다

고도가 높아 단풍은 거의 졌지만 양지바른 곳에는 아직도 원색을 자랑하는 단풍이 남았다
이승복기념관을 들린 다음 찾는 계방산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 산에, 이 길에 깃든 비극은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사치스럽게 만들고, 자중자애로 이끈다.
계방산 일대의 산줄기가 시야를 가려 정상은 거의 보이지 않다가 운두령 오르는 길에 잠시 모습을 보인다. 단풍이 지고 겨울이 서성이는 정상부는 창공 깊숙이 머리를 내밀어 공간감이 과장되고 순간적으로 부담을 주지만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갯마루에 서면 다시 자신감이 샘솟는다. 정상까지 500m 차이도 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랴.
너무 만만히 본 것일까. 운두령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시작되는 능선길에서 아득히 높고 먼 정상을 보며 이른 절망감을 맛본다. 과연 1577m 고봉은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싶다. 초반에 기복이 연속되는 구간도 체력을 소모시킨다. 1.5km나 왔는데 고도는 오히려 운두령보다 낮은 1073m까지 떨어져 심리적 충격을 준다. 이 안부에서부터 전망대봉(1495m)까지는 오직 오르막이고, 중간쉼터부터는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최난구간이다. 도중에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고 단풍마저 져 쓸쓸한데, 잔뜩 쌓인 낙엽은 자꾸만 스틱에 꽂혀들어 성가시다.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까지는 4.1km이고 고도차는 488m밖에 되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 
전망대봉(1495m)에서 바라본 정상. 1600m에 육박하는 고봉답게 정상부는 이미 낙엽이 졌고 키 작은 관목이 자란다. 전망대봉과의 고도차는 100m가 되지 않으나 거리가 1km나 되고 도중에 기복도 있어서 마지막 힘을 짜내야 한다
마침내 전망대봉이 보이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1500고지의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를 호흡한다. 하지만 정상은 아직도 멀찍이 떨어져 있고 도중에 기복도 더해져 탄식을 부른다.
전망대봉에는 데크전망대를 만들어 놓았고 사방 조망이 장쾌하다. 여기서 보니 계방산을 강원내륙의 산악조망 중심으로 불러도 좋겠다. 일단 북으로 아득히 먼 설악산(1708m)을 제외하면 사방에 더 높은 봉우리가 없다. 동쪽으로 오대산 주릉의 호령봉(1566m)~비로봉(1563m) 능선이 비슷한 높이로 가까워 시야를 가리는 정도다.
서쪽으로는 강원 산악지대의 수문장격인 치악산(1288m) 비로봉이 첨봉으로 솟았고, 살짝 남쪽에는 백덕산(1350m)의 쌍봉이 봉긋하다. 남쪽으로는 가리왕산(1561m)의 둔중한 산체가 시야를 크게 차지한다.
아래로는 운두령 고갯길이 구불거리고, 장벽처럼 직선으로 뻗은 보래봉(1326m) 능선 아래로 창촌고원이 그림 같다. 해발 700m 전후의 창촌고원지은 고랭지밭이 곳곳에 개간되어 있고, 고원 저편에는 해발 1000m에 자리해 마치 공중정원 같은 경천마을이 꿈결 같다.
헬기장이 있는 널찍한 정상
이제 정상까지 1km, 고도차는 100m도 되지 않는다. 울창하던 숲은 점점 관목으로 줄어들더니 이윽고 정상에 올라섰다. 몇 명의 등산객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쉬고 있다. 산행 이후 마주친 사람은 10명이 되지 않으니 단풍철이 살짝 지났다고는 하지만 국내 5위봉의 인기는 나락이다. 오히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손쉽게 설경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상의 개방감과 조망은 전망대봉을 훨씬 능가한다. 국내최고의 산악지대인 강원내륙의 광대한 조망을 즐기고 싶다면 계방산이 위치와 고도에서 단연 최고다. 43km나 떨어진 설악산 대청봉과 서북능선이 선명하고, 동쪽으로는 황병산(1408m)과 대관령고원 일대를 넘어 동해마저 희미하다. 같은 줄기를 이룬 오대산은 고산의 위용을 발하며 거대 장벽을 이룬다. 마침 날씨가 쾌청해 조망거리가 매우 길어서 굉장히 먼 산까지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운두령과 고갯길. 오른쪽 풍력발전기 바로 위가 고갯마루다. 운두령에서 보래산 쪽으로 임도가 신설된 것이 보인다

정상에서 동쪽 조망. 대관령 일원이 잘 보인다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가리왕산이 압도적이고, 멀리 함백산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남서쪽으로 시선을 더 옮기면 아득히 백덕산과 치악산이 반갑다. 바로 앞의 계단길은 삼거리교 방면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 83km 거리의 양평 용문산(1157m), 89km 떨어진 가평 화악산(1468m)을 확인했을 때는 감동이 몰려 왔다. 남쪽은 가리왕산(1561m)과 상원산(1422m) 사이로 74km 거리를 뚫고 함백산(1573m)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 거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대기가 아주 깨끗한 날은 100km 조망이 어렵지 않다. 오래 전 신안 가거도 독실산(573m)에 올랐을 때는 무려 150km 떨어진 한라산을 본 적도 있다. 고산에 올라 장쾌한 조망을 보며 먼 산과 지명을 확인하는 것은 산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런 조망의 즐거움을 알리고자 나는 <한국의 전망대여행>(2015년)이란 책을 낸 적도 있다. 참고로 계방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찍은 사진에는 원경 지명을 표시해 놓았다. 일종의 ‘풍경 해석’이랄까.
북쪽으로는 설악산이 단연 눈에 띈다. 두 산 사이 1300~1400m급 산들은 아래로 푹 가라앉아 보인다 
북동쪽 가까이는 오대산 주능선이 비슷한 눈높이로 다가선다

방금 지나온 전망대봉이 가깝고 그 뒤로 창촌고원이 펼쳐진다. 맨 뒤로 83km 떨어진 양평 용문산이 희미하다. 경천마을 뒤쪽으로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90km 거리의 가평 화악산이 보인다 
등산로에 있는 국가지정번호와 고도 표시는 매우 유용하다. 화살표 방향 따라 거리도 함께 표시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정상은 고도 때문에 상당히 서늘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여유롭게 쉬며 경관을 즐기기 좋았다.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발밑으로, 멀리 내려다보면 세속의 온갖 걱정과 갈등, 희로애락이 하찮게 잦아들고 삶과 우주를 차분히 관조하게 된다. 이의 극단적인 경우가 1977년 태양계와 성간우주 탐사를 위해 떠난 탐사선 보이저호다. 1, 2호 두 기가 출발했고 1호기가 명왕성을 지나 위성계를 벗어날 즈음, 탐사선은 방향을 돌려 마지막으로 지구를 찍었다. 아득한 거리에서 찍은 지구는 아주 작고 희미한 점으로 보였다.
보이저 프로젝트를 이끈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부르고 동명의 책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태양빛에 걸려 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운두령에서 정상까지 2시간 걸린다. 이승복생가나 삼거리교 방면으로 하산해도 되지만 원점회귀가 곤란한 것이 단점이다
아직 해는 중천이지만 늦가을 해는 금방 기운다. 한동안 정상에서 머물다 하산을 시작한다. 세월 따라 관절도 쇠퇴해 오르기도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다. 천천히, 느긋하게 한발 한발 디뎌가노라면 거리는 줄고 고도는 낮아져 있지만 작은 기복도 매우 힘들다.
십리 하산길이 멀기도 하다. 조망도 없어 답답한데 문득 보이는 운두령 풍력발전기의 하얀 바람개비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1600고지에서 바라보는 최고의 산악 조망
계방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조망. 오대산에 포함되는 동대산과 노인봉이 보이고 대관령삼양목장을 안은 황병산이 저편으로 물러나 있다. 동대산과 노인봉 사이로 진고개(950m)가 넘어간다
계방산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인기도 높지 않다. 높이는 국내 5위지만 4위 덕유산(1614m) 다음부터는 인지도와 관심이 크게 떨어지는데 계방산부터 그 ‘낙폭’이 대단하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해발 1577m로 1600m에 가깝지만 해발 600~700m에 달하는 내륙 고원에 자리해 실제 산 아래에서 바라보는 체감높이는 900m급 정도여서 대단히 높거나 웅장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완연한 육산(肉山)이라 경관미를 더해주는 돌출바위나 암벽이 없고, 숲이 울창해 등산로에서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 있는 오대산의 유명세에 가린 측면도 작지 않다. 산은 더 높으나 ‘오대산국립공원’ 경역에 포함되어 오대산의 한 봉우리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계방산과 운두령. 해발 1089m 고갯마루에서 능선을 따라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 그 아래 노동계곡에 이승복 생가가 보인다
계방산은 좀처럼 깔끔한 전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운두령 근처에서 바라본 정상. 높이 차이가 500m도 되지 않는데 훨씬 높고 먼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계방산은 큰 장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주능선을 넘는 운두령이다. 운두령은 높이가 1089m나 되어 국내 고개 중 6번째로 높다. 참고로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 중 높이 기준 순위는 함백산 만항재(1330m), 함백산 두문동재(1268m), 지리산 정령치(1172m), 한라산 1100고지(1100m), 지리산 성삼재(1090m) 차례다. 운두령은 성삼재와 단 1m 차이로 6위다.
해발 1089m라면 웬만한 산보다 높은 고지여서 이곳에서 출발할 경우 계방산 정상과는 고도차가 488m 밖에 되지 않아 산행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나는 높은 고개에서 출발해 고도차를 줄이는, ‘약고 게으른 산행’을 좋아하는데 체력과 시간을 줄이는 대신 여유로운 심신으로 자연과 풍경을 즐기자는 심산이다. 수치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과연 운두령과 계방산도 이 계산이 통할까.
이승복이 다녔던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장(1998년 폐교). 여기서 생가까지는 4km나 되지만 8, 9세 아이가 걸어 다녔다. 주변은 이승복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계방산과 가장 근접한 영동고속도로 속사IC에서 나와 운두령 가는 길에는 이승복기념관을 꼭 거쳐야 한다. 계방산은 이승복의 비극을 안은 산이기도 하다. 이승복이 다니던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장(1998년 폐교) 일대에 자리 잡은 기념관은 마음이 아파도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 왔을 때보다 정리가 잘 되고 시설이 확장, 세련되어진 것은 관심과 예산이 계속 투입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때 논란이 있었으나 이승복의 언행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겨우 9살 난 그는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되었다. 1959년생이니 살아 있다면 아직 65세의 초로에 지나지 않는다.
전시물 중 이승복이 사용했을 작은 책걸상과 검정고무신, 사기그릇이 놓인 곳에서 나는 그 초라함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남은 생활기록부를 보면, 담임교사는 ‘성실침착하며 맡은 일을 잘 처리함’ ‘학습태도가 바르고 열심히 노력함’ ‘당번 일을 성실히 잘 한다’라고 적고 있어 이승복이 차분하면서도 성실한 아이였음을 알 수 있다. 1, 2학년에 걸쳐 8일의 결석이 있는데 ‘가사 조력으로 인한 결석’이라고 적혀 있어 그 나이에도 농사일을 돕느라 결석한 것을 알 수 있다. 생활환경에 대해서는 ‘화전민으로 살림이 어려우나 단란한 가정임’이라고 평가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초라한 검정고무신과 낡은 책걸상, 단촐한 식기가 가엾다
기념관에 전시된 생활기록부. 성실하고 침착하며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가가 눈에 띈다
기념관 뒤편 언덕에 있는 이승복의 묘. 오른쪽으로 같이 희생된 두 동생의 묘가 나란하다
마냥 천진난만해야 할 9살 어린이가 무기와 사상으로 중무장한 공비 앞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은 신념이나 지식이 아니라 반복학습에서 나온 자동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어 안타깝다. 하지만 어떤 전란이나 위급상황에서도 인간은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이 본능이고 인륜의 근본이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어떤 악인도 구해낸다”면서 이런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기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공비들은 9살 이승복을 포함해 4살, 7살 동생까지 모두 죽였다. 형(15세)은 38곳을 칼에 찔렸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함께 있던 어머니(34세)도 죽었고, 출타했다 귀가하던 아버지는 공비의 칼에 찔렸지만 가까스로 탈출해 예비군 초소에 신고했다. 동거하던 할머니는 마침 외출 중이어서 화를 피했지만 공비들은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나고 이승복이 저항하자 전가족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기층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공산주의자가 가장 가난하고 무력한 화전민을, 그것도 어린이들까지 죽인 것은 자기모순을 넘어 자기부정이다. 이 사건 하나로 북한정권과 공산주의는 민심과 명분을 모두 잃었고 자유세계의 경각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승복기념관에 복원되어 있는 생가. 전형적인 초가삼간으로, 뒤쪽 언덕 위에 이승복을 포함한 일가족 묘가 있다
기념관에 복원된 생가는 말 그대로 방 둘에 부엌 하나 딸린 ‘초가삼간’으로 방은 가마니를 깔고 벽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민속촌에 남은 조선시대 민가와 다를 것이 없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이, 내가 어릴 때 산간벽지에 있던 외가도 비슷한 초가였고, 그나마 방바닥을 기름종이로 바르고 벽은 신문지로 도배했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승복의 진짜 생가는 여기서 4km나 더 들어간 계방산 노동계곡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 8, 9세 아이가 왕복 8km를 걸어 다닌 것을 생각하면 기가 턱 막힌다.
사건이 난 1968년, 미국은 달나라로 아폴로 우주선을 보내고 있었고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최초의 고속철도 신칸센을 운영하고 있을 때다. 그즈음 우리는 먹을 것조차 부족해 허덕였으나 불과 50년 만에 세계일류로 올라서는 기적의 부흥을 일궈냈다. 짧은 시간에 극심한 급변을 겪은 우리는 그 여파이자 부작용으로 지금도 많은 내홍을 겪고 있다. 이를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해결에 조급해 하지 않으면 문제는 가라앉을 것이고 해결책도 보일 것이다.
산행 기점인 운두령. 약간의 주차공간과 매점, 식당이 있으며 고갯길 주행을 즐기는 오토바이가 여럿 보인다
고도가 높아 단풍은 거의 졌지만 양지바른 곳에는 아직도 원색을 자랑하는 단풍이 남았다
이승복기념관을 들린 다음 찾는 계방산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 산에, 이 길에 깃든 비극은 지금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사치스럽게 만들고, 자중자애로 이끈다.
계방산 일대의 산줄기가 시야를 가려 정상은 거의 보이지 않다가 운두령 오르는 길에 잠시 모습을 보인다. 단풍이 지고 겨울이 서성이는 정상부는 창공 깊숙이 머리를 내밀어 공간감이 과장되고 순간적으로 부담을 주지만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갯마루에 서면 다시 자신감이 샘솟는다. 정상까지 500m 차이도 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랴.
너무 만만히 본 것일까. 운두령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시작되는 능선길에서 아득히 높고 먼 정상을 보며 이른 절망감을 맛본다. 과연 1577m 고봉은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싶다. 초반에 기복이 연속되는 구간도 체력을 소모시킨다. 1.5km나 왔는데 고도는 오히려 운두령보다 낮은 1073m까지 떨어져 심리적 충격을 준다. 이 안부에서부터 전망대봉(1495m)까지는 오직 오르막이고, 중간쉼터부터는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최난구간이다. 도중에 조망은 거의 트이지 않고 단풍마저 져 쓸쓸한데, 잔뜩 쌓인 낙엽은 자꾸만 스틱에 꽂혀들어 성가시다.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까지는 4.1km이고 고도차는 488m밖에 되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
전망대봉(1495m)에서 바라본 정상. 1600m에 육박하는 고봉답게 정상부는 이미 낙엽이 졌고 키 작은 관목이 자란다. 전망대봉과의 고도차는 100m가 되지 않으나 거리가 1km나 되고 도중에 기복도 있어서 마지막 힘을 짜내야 한다
마침내 전망대봉이 보이고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1500고지의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를 호흡한다. 하지만 정상은 아직도 멀찍이 떨어져 있고 도중에 기복도 더해져 탄식을 부른다.
전망대봉에는 데크전망대를 만들어 놓았고 사방 조망이 장쾌하다. 여기서 보니 계방산을 강원내륙의 산악조망 중심으로 불러도 좋겠다. 일단 북으로 아득히 먼 설악산(1708m)을 제외하면 사방에 더 높은 봉우리가 없다. 동쪽으로 오대산 주릉의 호령봉(1566m)~비로봉(1563m) 능선이 비슷한 높이로 가까워 시야를 가리는 정도다.
서쪽으로는 강원 산악지대의 수문장격인 치악산(1288m) 비로봉이 첨봉으로 솟았고, 살짝 남쪽에는 백덕산(1350m)의 쌍봉이 봉긋하다. 남쪽으로는 가리왕산(1561m)의 둔중한 산체가 시야를 크게 차지한다.
아래로는 운두령 고갯길이 구불거리고, 장벽처럼 직선으로 뻗은 보래봉(1326m) 능선 아래로 창촌고원이 그림 같다. 해발 700m 전후의 창촌고원지은 고랭지밭이 곳곳에 개간되어 있고, 고원 저편에는 해발 1000m에 자리해 마치 공중정원 같은 경천마을이 꿈결 같다.
헬기장이 있는 널찍한 정상
이제 정상까지 1km, 고도차는 100m도 되지 않는다. 울창하던 숲은 점점 관목으로 줄어들더니 이윽고 정상에 올라섰다. 몇 명의 등산객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쉬고 있다. 산행 이후 마주친 사람은 10명이 되지 않으니 단풍철이 살짝 지났다고는 하지만 국내 5위봉의 인기는 나락이다. 오히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손쉽게 설경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상의 개방감과 조망은 전망대봉을 훨씬 능가한다. 국내최고의 산악지대인 강원내륙의 광대한 조망을 즐기고 싶다면 계방산이 위치와 고도에서 단연 최고다. 43km나 떨어진 설악산 대청봉과 서북능선이 선명하고, 동쪽으로는 황병산(1408m)과 대관령고원 일대를 넘어 동해마저 희미하다. 같은 줄기를 이룬 오대산은 고산의 위용을 발하며 거대 장벽을 이룬다. 마침 날씨가 쾌청해 조망거리가 매우 길어서 굉장히 먼 산까지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운두령과 고갯길. 오른쪽 풍력발전기 바로 위가 고갯마루다. 운두령에서 보래산 쪽으로 임도가 신설된 것이 보인다

정상에서 동쪽 조망. 대관령 일원이 잘 보인다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가리왕산이 압도적이고, 멀리 함백산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남서쪽으로 시선을 더 옮기면 아득히 백덕산과 치악산이 반갑다. 바로 앞의 계단길은 삼거리교 방면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 83km 거리의 양평 용문산(1157m), 89km 떨어진 가평 화악산(1468m)을 확인했을 때는 감동이 몰려 왔다. 남쪽은 가리왕산(1561m)과 상원산(1422m) 사이로 74km 거리를 뚫고 함백산(1573m)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 거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대기가 아주 깨끗한 날은 100km 조망이 어렵지 않다. 오래 전 신안 가거도 독실산(573m)에 올랐을 때는 무려 150km 떨어진 한라산을 본 적도 있다. 고산에 올라 장쾌한 조망을 보며 먼 산과 지명을 확인하는 것은 산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런 조망의 즐거움을 알리고자 나는 <한국의 전망대여행>(2015년)이란 책을 낸 적도 있다. 참고로 계방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찍은 사진에는 원경 지명을 표시해 놓았다. 일종의 ‘풍경 해석’이랄까.
북쪽으로는 설악산이 단연 눈에 띈다. 두 산 사이 1300~1400m급 산들은 아래로 푹 가라앉아 보인다
북동쪽 가까이는 오대산 주능선이 비슷한 눈높이로 다가선다
방금 지나온 전망대봉이 가깝고 그 뒤로 창촌고원이 펼쳐진다. 맨 뒤로 83km 떨어진 양평 용문산이 희미하다. 경천마을 뒤쪽으로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90km 거리의 가평 화악산이 보인다
등산로에 있는 국가지정번호와 고도 표시는 매우 유용하다. 화살표 방향 따라 거리도 함께 표시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정상은 고도 때문에 상당히 서늘했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여유롭게 쉬며 경관을 즐기기 좋았다.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발밑으로, 멀리 내려다보면 세속의 온갖 걱정과 갈등, 희로애락이 하찮게 잦아들고 삶과 우주를 차분히 관조하게 된다. 이의 극단적인 경우가 1977년 태양계와 성간우주 탐사를 위해 떠난 탐사선 보이저호다. 1, 2호 두 기가 출발했고 1호기가 명왕성을 지나 위성계를 벗어날 즈음, 탐사선은 방향을 돌려 마지막으로 지구를 찍었다. 아득한 거리에서 찍은 지구는 아주 작고 희미한 점으로 보였다.
보이저 프로젝트를 이끈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부르고 동명의 책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태양빛에 걸려 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운두령에서 정상까지 2시간 걸린다. 이승복생가나 삼거리교 방면으로 하산해도 되지만 원점회귀가 곤란한 것이 단점이다
아직 해는 중천이지만 늦가을 해는 금방 기운다. 한동안 정상에서 머물다 하산을 시작한다. 세월 따라 관절도 쇠퇴해 오르기도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다. 천천히, 느긋하게 한발 한발 디뎌가노라면 거리는 줄고 고도는 낮아져 있지만 작은 기복도 매우 힘들다.
십리 하산길이 멀기도 하다. 조망도 없어 답답한데 문득 보이는 운두령 풍력발전기의 하얀 바람개비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