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다 산성의 나라(1) - 강릉 석교토성

자생투어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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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최대 대공산성의 전초기지?


국내 산성 중 가장 웅장한 보은 삼년산성. 원형의 치성은 높이가 15m에 달한다. 신라 자비왕 3년(470)에 축성했고 지금도 대부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석교토성. 성벽에 소나무가 자라 성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이제부터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고성(古城) 답사를 시작한다. 성곽은 엄청난 공역과 기술이 필요한 대단한 유산이면서 전쟁이 횡행하던 이 땅의 전국시대(戰國時代, 5~7세기)에는 생사가 오가는 근거지였다. 하지만 대부분 방치되고 잊혀져 전국시대에는 생존의 조건이자 기풍이었던 상무정신까지 함께 망각되고 문약(文弱)에 찌들었던 조선시대를 주된 유산으로 이해한다. 국내(남한)에서 확인된 성곽이 2천곳에 이르러 밀도에서는 단연 세계 최다이다.

나는 특히 산성에 주목해서 많은 곳을 답사했고, 이 웅장하고 공학적으로 아름다우며 선조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유산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산성 삼국기>라는 실록소설도 펴냈다.

라이딩이 제한되는 겨울을 맞아 성곽 답사를 시작하면서 그 목표와 의미를 <산성 삼국기> 서문으로 대신한다.


“山城은 전쟁시설로 특별한 입지와 설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역이 필요한 대규모 토목공사의 결과물이다. 모두 조선시대 이전에 축조되었으니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역사이자 요충시설이었다. 그런 산성이 남쪽에만 2천 곳을 헤아리고, 북한과 만주 지방까지 포함하면 2천500곳 정도로 추산된다. 일단 숫자에서 세계최고의 密度다. 이처럼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유명한 몇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방치되어 있고, 그 가치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 땅에 이렇게 산성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처절하고 장구한 전쟁의 시대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몽골, 중국, 일본 등 외세에 굴복한 고려나 조선시대가 아니라 바로 삼국시대였다. 대부분의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그 이후 시대에는 기존 산성을 조금 손보는 정도인 증축이나 수축이 간혹 이뤄졌을 뿐이다. 오히려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 경우가 많아서, 조선시대에는 사용중인 산성이 전국에 30여 곳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시대는 민족사 최고의 戰國時代였던 것이다. 이 좁은 땅에 수천개의 산성을 쌓을 정도로 왜 그렇게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싸웠던 것일까.

산성을 무대로 펼쳐진 삼국통일전쟁을 실록소설로 낸 <산성삼국기>(필자 저, 2012년)   

삼국시대 중에서도 최고의 전국시대는 5~7세기였고, 이 시기는 삼국통일전쟁기와 일치한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에서 시작해 문무왕이 당을 요동으로 몰아낼 때까지 이 300년간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자고나면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의 시대를 겪었다. 이 지독했던 전쟁시대는 삼국이 통일되면서 끝난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때와 같은 전국시대는 이 땅에 다시 없었다. ‘같은 민족’이란 개념이 없던 삼국은 이 전쟁시대를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울타리를 가진 한 나라가 되어 마침내 ‘한민족’이란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전국시대의 전투는 대부분 산성에서 벌어졌다. 들판에서 접전을 벌인 일도 있지만 삼국시대의 전투는 대개는 성곽전이었다. 웅혼한 尙武의 시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 바로 산성인 것이다. 산성을 무대로 벌어진 한반도의 전국시대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장엄한 대서사시였다.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지만 이 시대에 敍情詩는 깃들지 않았다. 김유신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애마를 벴고, 계백은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으며, 반굴과 관창은 아버지의 명으로 목숨을 草芥같이 버렸다. 살벌하고 처절한 현실감이 농후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정과 감동이 불타오르던 이 웅장한 시대를 과장과 허구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

 

이 전국시대 이후는 평화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오히려 文弱에 찌들면서 주변 강국에 휘둘리는 치욕의 역사가 기다린다. 여기서 문약이란, ‘책상붙이’의 골수병인 공허한 명분론과 그에 따른 당파싸움, 부패, 사대주의 따위를 총괄하는 대명사다. 7세기 세계최강의 제국이던 唐과도 결전해서 몰아낸 신라의 통일정신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정신과 육체의 총체적 몰락이다. 1000년의 시간차가 있는 통일신라와 조선의 문화유산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것이 더 우수한 것이 많다. 고려와 조선 1000년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퇴행과 몰락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몰락의 底点이 조선말의 한일합방이다.

거대하고 정교한 중세 일본성은 백제 유민이 건너가 축성한 산성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일본성을 볼 때는 삼국시대 성곽과 1천년의 시차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사진은 오사카성, 나고야성과 함께 3대 일본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 임진왜란의 원흉 중 하나인 가토 기요마사가 지었다   

이제 우리는 1000년의 퇴행과 그 최저점인 한일합방의 치욕을 딛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일궈냈다. 대한민국은 조선의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신라의 부활인 것이다. 왜 그런가. 바로 尙武의 기풍에서 이런 차이가 났다.

상무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과 통한다. 대한민국은 1000년만에 상무의 기풍을 되살려 나라의 체질을 바꾸고 해외로 나아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다시금 분단된 이 땅에 바야흐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남쪽은 전국시대의 통일정신을 이어받은 개방과 자유 덕분에 풍요를 누리고 있다면, 북쪽은 사실상 조선왕조의 연장인 퇴행적 왕조체제로 남아 있다.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역사란 수많은 人生들의 총합이고, 인생이란 저마다 곡절은 다르지만 크게 보아 ‘生老病死’의 틀에 다 맞춰진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연들이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 인생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역사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삼국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지금 이 분단시대가 어떻게 끝나갈지 그 방향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대한민국은 통일신라의 길을 가고 있고 북한은, 그 실체는 민족사의 최저점인 조선시대 그대로이고, 행태는 고구려의 말기증세를 똑같이 보여준다. 민족사 최고의 전국시대에서 문약에 빠지지 않을 ‘백신’을 찾아내서 통일을 준비하자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다. 이를테면 1500년 전의 전국시대로 돌아가는 르네상스, 文藝 부흥이 아니라 ‘尙武의 부흥’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쓴 이유는, 산성이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벽을 이루는 투박한 돌 하나하나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적인 상황들이 역사로 스며있다. 성을 쌓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이 배어 있고, 숱한 생명들이 흘린 피와 창칼의 흔적이 묻어 있다. 성돌은 이미 자연석이 아니라 역사가 새겨진 ‘인간의 돌’인 것이다. 그리고 잘 보존된 성벽은 미학적으로도 대단히 아름다운 장관이다.” (중략)


하늘에서 내려다본 석교토성. 아래쪽 원형을 이룬 솔밭이 성벽으로, 들판과 만나는 구릉지 말단에 자리한다 

 

석교토성, 언제 왜 축성했나

석교토성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지역명을 붙인 것으로, 둘레 400m의 작은 토축 성이다. 낮은 구릉지 끝에 자리 잡아 평지성으로 봐도 무방하며, 위치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는다.

백두대간 매봉(1173m)과 곤신봉(1135m) 사이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내리는 사천천과 인접해 있으며 해안에서는 3.5km 떨어진 내륙이다.

석교토성은 사천천을 앞에 두고 남면해 있는데 옛기록에는 없다가 일제 때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토루(土壘)로 주위는 약 300간(1間=1.82m)이고 거의 붕괴되어 성내 대부분이 경지가 됨. 일반에 고려시대 만호첨사 청지(廳址)라고 알려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만호(萬戶)와 첨사(僉使)는 고려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직이어서 조선의 무관들이 성내에 거주했을 수는 있지만 성곽은 조선시대보다 축성연대가 훨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천 변에서 바라본 석교토성. 그냥 솔밭처럼 보인다 

석교토성의 잔존 성벽. 사진은 북벽으로 높이는 2m 전후로 원래보다 크게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토성 바로 앞으로 사천천이 흐르고 천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석교토성에서 사천천을 따라 상류로 끝까지 올라가면 곤신봉 바로 아래 해발 1008m 대궁산 정상에 대공산성이 있다. 둘레 1.5km의 상당한 거성으로 축성시기는 삼국시대로 보인다. 해발 1008m, 그것도 해안에 자리한 산이라면 까마득한 높이여서 고도에서는 국내 성곽 중 가장 높은 편에 든다. 설악산 줄기인 안산(1430m)을 중심으로 구축된 한계산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정상부를 비롯해 고지대 상당부분은 축성 없이 자연절벽을 그대로 활용해 단순비교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양산 영축산(1081m) 정상 일대 고위평탄면에 쌓은 단조산성(丹鳥山城)이 실질적으로 최고 고도라고 생각한다. 대공산성은 이 단조산성에 필적한다.

해발 1081m 영축산 정산 일원에 있는 양산 단조산성. 사방이 급경사를 이룬 고위평탄면을 활용했다. 왼쪽 위 길게 뻗은 돌길이 무너진 성벽이다. 뒤쪽 멀리 운문산(1195m)~가지산(1241m)이 보인다. 오래 전 자전거로 올라가 찍은 사진이다   

강릉 일대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난공불락으로 축성한 대공산성은 강릉 최후의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삼국이 쟁패하던 시절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이어서 신라가 고구려나 말갈족을 견제하던 용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대공산성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하류 11km 거리에 석교토성이 있으니 둘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석교토성은 대공산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규모 산성과 평지 토성의 연계구조는 청주지역의 거성인 상당산성과 미호강 강변에 있는 정북동토성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7.4km로 강과 들판을 낀 교통로에 자리한 소규모 토성은 높은 산중에 자리한 산성에서 육안으로 알아보기 힘든 적군의 이동이나 동태를 살피기 유리했을 것이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상당산성을 확보하고 정북동토성을 수축해 전초기지로 활용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대공산성과 석교토성 위치도.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대공산성에서 동해안 방면으로 11km 거리다

토성 동쪽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 멀리 대관령이 보이고 그 오른쪽 곤신봉 정상 아래에 대공산성이 있다  

석교토성 성벽 위는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왼쪽이 성 안쪽성안은 경작지와 6채의 가옥이 있다. 지금은 2가구만 거주 중이다

가장 큰 출입문인 남문터에는 가공한 석재가 일부 남아 있다북문터에 있는 돌은 출입문 초석으로 보인다

낮은 구릉지 말단에 자리한 석교토성은 타원형 모양으로 긴 지름이 150m, 둘레는 400m 정도다. 소나무가 많이 자리 마치 띠숲처럼 된 성벽은 완연하게 남아 있으나 높이는 많이 낮아졌고, 내부는 2/3가 경작지와 가옥이고 나머지는 수풀로 방치되어 있다. 사전지식 없이 지나친다면 성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성내 북쪽에 치우쳐 6채의 민가가 분포하며 현재는 2가구 정도만 실제 거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은 주출입구인 남문과 북문, 서문 세 군데가 확인되었고 성벽은 높이 2~3m 정도이며 남쪽 외벽은 4m 정도로 높게 남아 있다. 청주 정북동토성처럼 소나무를 이식하고 성벽을 드러내기만 해도 성곽을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성 곳곳에는 쓰레기가 나뒹굴고 어지러운 폐가 주변 등 속수무책으로 망가져가고 있다. 지면에 드러난 유물이 거의 없어 시대와 용도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표지판이나 안내문도 없으며 그나마 토성 옆을 지나는 소로가 ‘석교토성길’로 명명되어 성곽의 존재를 말해줄 뿐이다.

동해안에서 3.5km 떨어진 내륙에 자리한다. 해안에 보이는 빌딩들은 사천진항의 아파트와 호텔이다 

성내 남쪽은 단층을 북돋워 지대가 높고 대나무를 비롯한 잡목림으로 방치되어 있다. 건물터가 아니었나 싶다  

남벽 위에서 본 석교리 새 마을. 남쪽 성벽은 4~5m 정도로 높고 산뜻한 단독주택 마을이 들어서 있다 

 

* 석교토성 : 강릉시 사천면 석교토성길 17-3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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