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主將)이 바뀌어 치른 ‘칠천량해전’, 7년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칠천량해전공원에서 바라보는 ‘칠천량 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전사한 곳이다. 조선 수군들이 왕래하며 숱하게 정박하기도 했던 곳인데,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 장졸들과 전함들의 수중 무덤이 되고 말았다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400여년 전 옛날,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침범했을 때 이순신장군의 지휘로 23전 23승한 전쟁, 전승(全勝)한 전쟁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와 각종 드라마를 통해 주요 해전들에 대해 많이들 알고 있다. 당시, 3도수군통제사 중 한 사람이었던 ‘원균’에 대해 얘기를 하면 대부분 ‘부정적’으로 얘기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원균’장군이 지휘했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대해서 얘기하면 대부분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말문이 막힌다. 그 해전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도 지도를 봐야만 알 정도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승리한 전쟁 중심의 역사를 배웠다. 그런 나머지, 패한 전쟁에 대한 것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아예 관심 밖의 것이 되고 말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패했을 때 왜 패했는지를 알아야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데 말이다.
‘칠천량 바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전사한 대참패의 현장이다. ‘패전’이란 이유만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잊혀 오다가 2013년에 ‘칠천량해전공원’ 개관을 계기로 우리들 곁으로 한 발 다가온 전투가 ‘칠천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은 어떤 전투인가
1597년, ‘강화협상∙휴전 기’를 거쳐 7년 전쟁 마지막 시기인 ‘정유재란 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시작점이 바로 ‘칠천량해전’이다. 이 해전은 ‘7년 전쟁’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으로 기록되고,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패전 중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기도 한다. 칠천량해전 자체는 단순하다. 하지만 정유재란기의 첫 해전인 이 전투가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아는 것은 정유재란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칠천량해전을 설명하는 거북선 형상의 ‘안내판’(칠천교 입구에 있다). 패전 사실과 이순신의 복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왜 ‘최대의 패전’을 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1597년 2월,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했다. 같은 시기 그간 진행되던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됐고, 강화협상 기간 동안 본토에서 ‘재정비’를 마친 일본군이 현해탄을 건너오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됐다. 그 첫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하루속히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 선조는 도체찰사(이원익)와 도원수(권율)를 통해 원균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출정하여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다. 육군과 함께 ‘수륙병진전술’을 원했던 원균은 상부의 ‘강요’를 견디지 못한 채 전(全) 함대를 몰아 부산으로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까지 진출했던 조선 수군은 기상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칠천량’으로 물러나게 된다.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인 이곳 ‘칠천량’ 바다에서 새벽에 일본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전라도’를 넘어 ‘서해 바다’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의 원대한 목표인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남원’과 ‘전주’를 목표로 공격을 이어나가게 된다.
조∙명연합군애 패한 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하다
부산포해전(1592년 9월) 이후, 1593년 초부터 평양성∙벽제관(경기 고양시)∙행주산성 등지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조선을 비롯한 3국은 지난 1년 여 간의 전투로 입은 병력 피해, 군량 부족, 전염병에 의한 전력 손실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그래서 1593년 4월경부터 ‘명’과 ‘일본’은 전쟁의 당사자이자 ‘전장’의 주인인 조선을 제쳐놓은 채 강화회담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칠천량해전을 총지휘한 도원수 ‘권율장군’. 임진왜란 중,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퇴각하고 강화교섭으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행주대첩’을 총지휘했다. 권율 휘하의 조선군 3천명이, 인해전술을 펴던 일본군 3만 대군을 화차와 신기전 등 강력한 화약무기로 패주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조선은 수도 한성을 수복했고, 권율장군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정유재란을 지휘하게 된다
‘명군’의 참전은 처음부터 전쟁이 ‘중국 본토’까지 확산하는 것을 막는데 있었으니,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까지 찾아줬으니 명군은 그들이 해야 할 ‘도리’는 다했다라고 인식하게 됐다. 전비(戰費) 충당 등의 어려움에 처한 명군은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아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게 됐다. 그저 현상∙체면치례만 유지하는 가운데, 전투가 아닌 휴전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측에 강화협상을 ‘먼저’ 제안하게 됐다.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1593년 1월)에서 조∙명연합군에 대패한 뒤 한양 일대까지 퇴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양 북방 ‘벽제’에서 실시한 ‘반격작전’(벽제관전투)을 통해 조∙명 연합군을 임진강 이북으로 퇴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개전 후 조선에서 치른 1년간의 전투와, 혹독한 겨울 날씨로 말미암아 수많은 병력 피해를 입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전투를 이어갈 수 없었던 일본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일본은 명(明)이 제안한 ‘강화협상’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고, 부대를 남쪽으로 재배치하여 ‘재충전’하면서 다음 기회를 도모하게 됐다.
일본군을 상대로 ‘한성(漢城) 수복전’을 펼치려던 조선 관군(권율장군) 입장에서는 벽제관 전투(1593년 2월)에서 조∙명연합군이 패주함에 따라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오히려 조선 관군은 절대 다수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단독’으로 싸워야만 했다. 일본군에 절대 열세했던 조선 관군과 백성들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수적 우위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크게 이겼다. 이게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후, 일본군은 본국 일본과 가까운 남쪽으로 부대 재배치를 서두르게 된다. 명군은 진행 중인 일본과의 ‘강화협상’ 분위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조선군의 손발을 묶어놓았다. 남해안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조선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명군도 따라 남하했다. 이로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진해만 전체 바다를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트인 ‘웅천왜성’. 건너편 거제도의 왜성과 협조된 작전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군의 남하와 ‘왜성’ 구축,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다
명군의 보호 아래 남해안(울산∙부산∙진해∙고성 등)으로 재배치한 일본군은 해전(海戰)은 아예 포기하고, 해안 요지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쌓은 왜성이 30개가 넘는데, 이중 60% 정도가 1593년부터 시작된 ‘강화교섭기’ 중에 쌓았다.
1592년 ‘부산포 해전’ 때 본거지가 공격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일본군은 그들의 최대 전진∙보급기지인 ‘부산포’를 방호하기 위해 왜성을 쌓기 시작했다. ‘거제도’와 ‘부산포’로 이어지는 항로를 연하여, 조선 수군에 대해 ‘측∙후방 공격’이 용이한 곳, 조선 수군들이 항해 중 ‘정박∙묘박지’로 사용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선점(先占)하여 왜성을 겹겹이 쌓았다.
당시의 전선(戰船)들은 기동할 때, ‘돛’의 힘을 일부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격군’의 힘에 의존하였다. ‘전투’ 시에는 ‘전적’으로 격군의 ‘힘’에 의존해야만 했다. ‘격군’ 자체가 전선의 ‘엔진’이었던 시대라 원활한 전투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엔진의 ‘파워’(격군들의 ‘힘’)를 항시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휴식이 필수조건이었다.
왜군은 해전의 주 무대인 ‘진해만’ 일대에 있는 왜성들은 남∙북쪽 해안을 따라 촘촘하게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여 서로 의지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견내량을 넘어 진해만을 거쳐 부산 쪽으로 동진(東進)해야 하는 조선 수군의 기동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노출되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측∙후방의 왜군으로부터 포위 공격당할 수 있는 가능성(위험)이 증대되기 마련이었다. 한마디로, 왜성으로 말미암아 조선 수군의 기동에 대한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안골포왜성에서 바라본 안골포와 ‘웅천왜성’.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할 경우 ‘왜성’들에 포진한 왜군의 후방공격을 각오해야만 했다. 진해만의 왜성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매우 위협적이다
‘3도수군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다
일본이 지상군 부대를 남해안으로 재배치하고, 진해만 일대에 왜성을 쌓는 등의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에 조선이 택한 큰 변화는 ‘3도수군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이진’한 것이다.
1593년 8월, 조선 조정은 수군에 ‘3도수군통제사(정2품)’ 직책을 신설했다. 임진왜란 초기, 육상전투에서는 ‘도체찰사’ 등 ‘임시’로 임명된 직책이 많아 전쟁 지휘에 혼란을 빚는 사례가 많았다. 이에 비해 수군은 ‘수사-첨절제사-만호’로 이어지는 ‘일원적 지휘체계’를 유지한 결과,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동급의 수군절도사 3명이 ‘협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다 보니,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없지 않았다’라는 점이었다. 지휘체계상의 혼란이나 갈등이 ‘전승’에 가려져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수군을 통합 지휘할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水使)’들끼리 협의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던 체제상의 문제점을 식별했다. 조정은 조선 수군 전체를 하나로 묶어 연합 함대를 편성하고, 통일된 작전을 펼칠 필요성을 인정해서 ‘3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신설했다. 이 직책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이 ‘겸직’하게 하여 해상작전을 총괄하게 했다.
이순신이 초대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직전인 1593년 7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 공략에 보다 용이하고 왜군의 서진(西進)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했다. 이어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면서 전라좌수영이 ‘통제영’으로 확대 설치됐다.
한산도로의 이전은 ‘견내량’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작전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 수군은 목표인 전라도와 서해바다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야만 한다. 이런 일본군의 기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곳이 ‘견내량’인 것이다.
거제도와 통영을 가르는 ‘견내량’. 일본군의 서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목’이었다.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명량, 노량, 한산)의 배경이 된 곳은 이처럼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있는 곳이었다. 완벽하게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목’을 넘은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참패했다
견내량은 부산으로부터 약 80km의 거리에 있다. 일본군이 서진하여 이곳에 다다를 때쯤이면 장거리 기동으로 인해 지치게 마련이고, 이때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요충지가 견내량인 것이다.
반대로, 조선 수군이 왜군의 본거지 부산을 공략하기 위해 장거리 기동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해소시켜줄 수 있기도 하다.
1592년의 ‘부산포 해전’에서와 ‘부산포’를 공략했을 때의 ‘기동 거리’(해남-여수 190km. 여수-부산 180km. 한산도-부산 90km)를 절반 이상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전투에 임하는 조선 수군들의 ‘전투피로도’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어 작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량(梁)은 좁은 길목이란 뜻이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 규모의 적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이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통과해야 하는 공간(수로)의 ‘폭(크기)’이 좁아 공자(功者)가 아무리 많은 전선을 보유했을지라도 물목인 ‘량’에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전선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산해전에서의 전훈을 활용하여 ‘통제영’을 견내량 직 후방인 한산도에 설치한 것이다.
일본군은 임진년 첫해 견내량 직후방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패했던 쓰라린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왜군은 보통의 큰 각오 없이는 이곳 견내량을 넘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틀어막고 기다리기만 하면 왜군들은 무조건 오게 되어 있었다.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당항만’. 길이는 약 15km, 입구는 300m가 조금 넘지만 ‘만’내로 들어오면 폭이 2km가 넘는 곳도 많다. 충분히 해전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당항만에서 2차례의 해전이 있었고 모두 승리했다. 저 멀리 당항포전승기념공원과 당항포 관광단지가 있다
선조,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강화협상이 진전함에 따라, 명나라와 일본군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해안 지역에는 4만 여명의 왜군들이 왜성에 칩거한 채 장기전을 펼치고 있었다. 선조는 꼴도 보기 싫은 일본군을 한시라도 빨리 조선 땅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단독의 ‘힘’만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하여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강화협상을 결렬시키지 않을 정도(범위 내)에서의 ‘제한전’이었다.
1593~4년 사이에는 대기근과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수군의 여건은 전쟁을 치르기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1594년 봄에는 전체 병력 18,500명 중 감염자가 1/3 수준이었고, 이의 1/3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순신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열흘 이상을 고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594년이 되자, 조정은 남해안에 칩거 중인 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게 바로 ‘제2차 당항포해전(1594년 3월. 고성군 회화면)’이고, ‘장문포해전’(1594년 9월. 거제시 장목면)인 것이다. 이중, ‘제2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장군이 ‘3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처음으로 펼친 대규모 해전이었다. 1593년 2월의 ‘웅포해전’ 이후 점증하기 시작한 일본군의 ‘서진(西進)’ 시도를 차단하고, ‘진해만’ 일대에 대한 제해권을 굳건히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전투이다. 이순신은 진해만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3도 수군 ‘전 함대(124척)’을 출동시켰다.
이 해전에서 당항포에 정박 중인 왜선 31척 모두를 격침시켰다. 하지만, 전선을 포기한 채 육지에 틀어박혀 바다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일본군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육군과의 ‘합동작전’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 해전에서 3도수군 전 함대를 출전시킨 것은 부산포해전 후, 신규 건조한 전선과 새로이 충원된 수군들의 ‘실전 경험’을 축적함은 물론, 조선 수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당항만을 굽어보는 ‘충무공 당항포대첩기념비’. 임진년 2차 출정 때(1592년 6월)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 부임 후 첫 출정인 ‘2차 당항포해전’에서 또 이겼다
강화회담 중에 실시한 또 다른 전투는 ‘장문포해전(거제도공략작전. 1594년 9월)’이다. 이 작전은 최초의 ‘대규모 수륙합동작전’으로, 육군(권율)과 의병(곽재우, 김덕룡)이 이순신 연합함대와 합류하여 ‘장문포’를 공격한 작전이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한사코 응하지 않고, 왜성만 지키는 방어전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마침내, 육군 부대(의병)를 상륙시켜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일본군의 대응으로 인해 다수의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왜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몇 차례 왜성 공격을 실시했으나 피해만 입었을 뿐이고, 전선 2척 분멸이라는 초라한 전과가 전부였다.
뒤늦게 도착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종료하고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했다. 전투 중, 작전을 주도했던 총지휘관 격인 도체찰사 ‘윤두수’는 순천에, 합참의장격인 ‘도원수’는 구례에 위치하고 있었다. 준비가 부족하고 의미 없는 전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전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직속상관인 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좌의정이자 도체찰사인 윤두수에게 ‘장문포 공격’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된 전투다. 이를 기화로 이순신장군이 ‘스스로’ 보직 변경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는 원균과 이순신 간의 ‘갈등 확산’의 원인이 됨은 물론, 조선 수군의 지휘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인이 됐다.
전쟁을 지휘한 선조와 조정, 도체찰사나 도원수는 그만큼 전투 현장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문외한’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장문포해전지 ‘장목항’. ‘대규모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항구 좌우에 구축된 왜성을 이용한 왜군의 저항을 제압할 수 없었다(한화오션 근무 진승원씨 제공 사진)
선조, 정유재란이 코앞인데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하다
강화 교섭이 진행 중이던 15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전개했던 명나라 군대 ‘모두’가 요동지역으로 철수했다. 이때부터 조선 조정은 남해안 왜성에 칩거 중인 왜군과 ‘홀로’ 대치하면서, 일본의 ‘대규모 재침’에 대비한 대책 마련에 몰두하게 된다.
‘장문포해전(거제도공략작전. 1594년 9월)’이 끝난 이후, 정유재란(칠천량 해전) 때까지는 더 이상의 해전은 없었다. 장문포해전 직후, 해전 결과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원균 간의 ‘갈등문제’와 함께 수군 지휘부 내의 ‘불협화음’이 노출됐다. 심각한 문제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간 두 사람 간의 불협 요인은 작전계획 수립 간 협조 및 지원, 작전간 구조 지원, 작전 후 전공처리 등에서 마찰이 누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원균이 직속상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정(3도체찰사 윤두수)에 보고하여 작전을 실시하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스스로’ 보직 변경을 요청할 정도로 심각했던 두 사람 간의 갈등문제는 원균을 ‘충청병마사’로 옮기며 일단락됐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보직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론됐다.
한편, 1594년부터 선조는 이순신의 직무수행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보기 드문 용장’이라 평가하는 등 ‘극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균이 ‘충청병마사’로 전보된 뒤의 근무행태와 관련하여 사헌부는 ‘탄핵’을 상소하게 된다. ‘원균에게 미리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된다. 평상시에 군사를 주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라며 혹평에 가까운 의견들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선조의 ‘옹호’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6년 년 말이 되면서, 일본군이 ‘전라도’를 목표로 ‘수륙병진’으로 재침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됐다. 조선 조정은 수군을 이용한 ‘해로차단전술’을 대비책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균의 ‘수사(水使) 재임용’ 문제가 또다시 제기됐다. 이런 과정에서, 이순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두 사건’(일본에 의한 ‘반간계’와 ‘부산왜영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장문포왜성’. 칠천량해전 때 조선 수군은 이곳에서 발진한 일본 왜선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왜성의 위협을 실감할 수 있다. 거제도에는 총 4개의 왜성이 있다
먼저, 일본에 의한 ‘반간계(反間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이중간첩 ‘요시라’가 꾸민 사건이다. 본국으로 일시 복귀했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조선으로 다시 전개하는 일정’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이는 조선 조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흘린 이 정보를 그대로 믿은 조정(선조)은, 이순신에게 ‘현해탄을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통제사 이순신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입수된 정보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술수’라고 판단했다. ‘가토’의 도해 일정을 정확히 알 수도 없었다. 부산 해역은 해상상태 등 작전 여건이 매우 불리한 곳이다. 또한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대병력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조선으로 전개해올 ‘가토 부대’를 바다 위에서 며칠이고 기다린다? 조선 수군의 전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인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다.
며칠 후, 150여 척으로 구성된 ‘가토 부대’가 울산(서생포)으로 건너왔다. 이 사건은 선조의 의심을 폭발시켜 이순신에 대한 처벌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거제도와 부산을 오가는 길목 ‘진해만’.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이고 공간이 충분하여 전투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곳 ‘만’을 지나는 모든 움직임은 한눈에 보인다. 기습 달성은 아예 생각할 수 없다
다음으로,‘부산왜영 방화사건’은, 1596년 12월 12일 부산의 왜영에 불이 나서 가옥 1천여 채와 미곡창고, 군기 등이 모두 불타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후,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작전을 성공시킨 부하들에 대한 군공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방화사건이 도체찰사(이원익) 휘하의 장졸들이 준비하여 성공한 것이라며 포상해줄 것을 요청하는 부체찰사(김신국)의 별도 장계로 인해 내막이 드러나게 됐다. 도체찰사 휘하의 군관이 부산 왜영을 방화하는 과정에서, 이순신 휘하의 장졸(안위 등)들이 ‘배를 태워준’ 뒤의 보고를 전공으로 판단하여 이순신이 장계를 잘못 썼던 것이다. 이 장계로 말미암아 선조는 이순신을 남의 공을 탐하는 정직하지 못한 장수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순신의 ‘파직’에 대한 결론이 났다. 선조실록(1597년 3월 13일)에 의하면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모함하기까지 했다...(중략)...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라고 하문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 치열했던 해전에서 연승함으로써 풍전등화의 위기로부터 ‘조선’을 구한 장수였다. 1593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부터 더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최고의 지휘관이 됐다. 이순신장군이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받는 장수로 인식되면서, 명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했던 국왕 선조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사례는 동서고금을 통해 결코 낯선 것이 아니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과정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사례가 된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와 의심은 ‘혹시 일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발언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선조실록 1594년 8월 21일). 이후 해를 거듭해가면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의심’을, 원균에 대해서는 ‘극찬’하는 사례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원균으로 통제사가 교체됐다. 통제사 이순신의 파직이 임금 선조 자신과 세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죄’, 이순신의 명성에 대한 임금 선조의 ‘열등의식∙조급성’과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위의 죄목들은 그냥 불편하게 붙어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상은 필자 ‘혼자만’의 궁금증일지 모르겠다.
이순신장군, 선조의 명을 받들어 부산 진공 작전에 나서다
어쨌든, 일본군이 시도한 이순신 제거를 위한 술책은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순신은 2월 26일 3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파직되어 3월 4일 하옥(下獄)됐다. 하옥된 지 28일 만인 1597년 4월 1일 출옥했다. 이후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될 때까지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약 4개월 동안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다대포’ 일대. 합수(合水)지역이라 파도가 세고 풍랑이 자주 인다. 칠천량해전 직전에 이곳까지 진출했다가 풍랑을 만나 가덕도를 거쳐서 칠천량으로 퇴각했다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기 직전, 부산해역으로 출정했다가 원대복귀 하자마자 압송됐다. ‘가토’는 이미 상륙하였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하면, 일본군 다른 부대들이 함부로 못 건너올 것이라는 논리로 부산포 공격을 지시했고, 이순신은 이를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압송 직전에 실시한 ‘부산해역 출정’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고, 상세하게 전하지도 않는다. 일부 기록의 요지는, 1597년 2월 초 이순신통제사는 보유 전선 124척 중 63척만으로 함대를 편성하여 부산 일대로 출정했다. 출정 중 두 차례의 교전이 있었는데 ‘다수 사살∙피랍’이라는 결과만 간단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사(正史)’인 ‘선조실록’(1597년 3월 20일)에는 원균이 통제사 부임 직후 이순신의 부산해역 출정과 관련된 사항을 올린 장계가 기록되어있다. 장계의 요지는 ‘이순신이 부산포 앞바다로 진출했을 때, 통제사가 탄 전선이 조수에 밀려 좌초되고, 이순신이 부하의 등에 업혀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번 출정에서 많은 군졸들이 죽어 그 시체가 바다 가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실록 내용의 진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엄연한 정사의 기록이다.
임란∙정유재란 최대의 참패, 칠천량 해전
정유재란 첫 전투인 ‘칠천량 해전’은 1597년 7월 14일 통제사 원균이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6월 말부터 7월 초에 걸쳐 상부의 지시대로 웅포와 안골포,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몇 차례 해전을 벌여 약간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조선 수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7월 8일에 있었던 출정 때에는 원균은 ‘출정하지 않은 채’ 휘하 수사들이 연합하여 함대 절반인 80여 척만으로 출전했다. 이 출정에서, 일본 군선 8여 척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조선 수군 판옥선 20여척이 표류한 나머지 일본군에 의해 전멸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부산으로 출동했던 조선 수군이 귀환할 때쯤 ‘원균’은 도원수로부터 ‘출두명령’을 받는다. 이 연장선에서 도원수로부터 ‘장벌(杖罰)’을 받고, 칠천량해전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대패하게 된다.
칠천량해전 당시 조선∙일본 수군의 기동 경로를 일목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칠천량해전 직전까지도 조선은 ‘전략전술’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도체찰사와 도원수는 조정의 의도에 맞게 ‘해로차단전술’을 주장한 반면, 통제사(원균)는 ‘수륙병진전술’을 주장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전에는, ‘수군을 이끌고 부산 쪽으로 진군하여 일본군의 침입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겠다’라며 조정이 주장하는 ‘해로차단전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장계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통제사로 부임한 이후 왜군의 상황과 작전 환경 등을 파악한 결과,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간의 입장을 바꿔 ‘수륙병진전술’을 주장하게 됐다. 원균은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쪽으로 진군하겠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2차례나 올렸다. 그러나 가시적인 전과에 목말랐던 조정(선조)은 도체찰사∙도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해로차단전술’ 시행을 승인(묵인)했다.
원균을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명령이 있은 직후인 7월 11일, 도원수 권율에 의한 통제사 원균 ‘장벌’ 사건이 있었고, 그 직후인 7월 14일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면서 ‘해전’이 시작됐다. 원균 함대는 이날 새벽 한산도를 출항하여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후 일본 함대와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원균함대의 규모가 큰 것을 보고 ‘회피전술’만을 펼치며 조선 수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를 계속 추격하던 원균 함대는 지친데다 풍랑까지 만나면서 일부 함대가 표류하기도 했으나, 원균은 함대를 수습하여 오후 늦은 시간에 ‘가덕도’로 회항했다.
판옥선 ‘격군’의 모습(통영한산대첩광장). 격군은 판옥선의 ‘엔진’이요 기동력이다. 엔진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작전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한산도를 출항하여 거의 쉬지도 못한 채 부산 앞바다까지 90여km를 항해했다. 무리한 항해로 말미암아 격군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작전을 제대로 구사할 수가 없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산도를 출항하여 하루 종일 기동하느라 전 장졸들 완전히 피로에 지치고 갈증에 목이 탄 나머지, ‘물(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수군들은 이곳에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400명을 잃고 퇴각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해만 일대의 섬들과 연안 일대에 육군을 배치하여 ‘수륙합동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5일, 비가 오는 가운데 풍랑이 일어 바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원균함대는 ‘칠천량’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곳 칠천량 일대는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 임란 초기부터 조선 함대가 자주 정박했던 곳이다. 전날부터 왜군을 쫓아 접적(接敵)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떠내려가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며 도주하느라 수군 장졸들의 기력은 완전히 고갈됐다. 칠천량에 도착한 조선 함대는 전투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경계대책’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스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곳이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을 쫓아 칠천량에 도착한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를 겹겹이 에워쌌다. ‘야간기습’과 ‘포위협격’을 펼친 일본군은 16일 새벽부터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수군은 전열이 무너진 조선 함대를 상대로 그들의 장기인 ‘단병전술(육박전)’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각개 격파된 조선 수군은, 명령과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장졸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양쪽의 좁은 물목이 일본군에 의해 봉쇄된 가운데, 조선 수군은 주변의 섬과 육지에 올랐으나 미리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면치 못했다.
칠천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폭이 500m에 불과하다. 칠천량 서쪽 출입구도 마찬가지다. 칠천량해전 때 왜군에 의해 이곳 ‘목’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 자루의 ‘목’과 같은 역할을 했다(한화오션 근무 진승원씨 제공 사진)
단 하루의 전투로 말미암아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원균),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등이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패전한 것이다. 그동안 힘들여 쌓아왔던 조선 수군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 수군의 대 일본군 우위의 ‘총통공격’도 ‘거북선 공격’ 실시 여부도 전혀 알 수가 없다(참패한 전쟁이라 기록도 없고, 사료가 많지 않다).
이 격전의 와중에도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느린 10여척의 함대는 적에 맞서 힘을 합치지 않고 도주했다. 물론 이 전선들이 이후 명량해전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나름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래서 배설의 행위에 ‘관대한’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적전(敵前) 이탈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칠천량해전 때 일본군이 구사한 전술은 ‘야간기습’, ‘포위협격’, ‘등선육박’, ‘수륙합동’으로 요약된다. 이 전술들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전패(全敗)한 원인을 분석하여 강화교섭기 동안 정립한 ‘결론’ 그대로였다. 이순신이 염려했듯이, 부산 앞바다로 출전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이 모두 현실로 나타났고, 반대로 일본군이 세운 전략전술은 거의 완벽하게 적용됐다
이러한 일본군의 전술에 관한 첩보는 1596년 일본에 사절로 갔던 ‘황신’이 입수하여 조정에 보고했던 사항이다. 조정(비변사)에서도 보고서에 제시된 일본군의 전술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통제사’에게 알려 대비하게 했다. 이때의 통제사는 ‘이순신’이었다. 신임 통제사 원균이 이 첩보자료를 알고 대비했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참패당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번 가정해본다. 일본의 반간계가 일부 작용하기도 하고 복잡한 요인에 의해 ‘통제사 교체’가 있었는데, 만약 통제사 교체가 없었더라도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있었을까. 통제사 원균이 부산 앞바다 진공 후 복귀할 때 칠천량 일대로 피항하지 말고 견내량(20km 이격)이나 한산도(30km 이격)까지 퇴각한 다음,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칠천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통제사 ‘원균’의 묘로 추정되는 ‘엉규이 무덤’(통영시 광도면 황리). ‘엉규이’는 ‘원균’이란 이름의 방언이나 어떤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간신히 탈출하여 추원포(춘원포)에 상륙했는데, 이때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라고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전한다(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지역 주민이 ‘목’ 없는 장군의 묘가 있었던 곳을 전해줬다. ‘엉규이 묘’가 원균의 실제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최악의 해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칠천량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임진왜란 초기부터 장악해오던 남해에 대한 제해권이 완전히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일본군은 개전 후 변함없는 목표인 ‘전라도∙서해바다’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로 인해 대규모의 ‘수륙병진정책’을 전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후, 한양을 조기에 점령하여 긴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전쟁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전라도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조선군은 ‘인적∙물적 보급원’(補給源)을 잃게 됐다. 반대로 일본군은 최대의 어려움인 보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조선 수군은 이번 전쟁을 통해 그간 정성들여 키웠던 ‘전력’(병력, 무기, 판옥선, 거북선 등)을 한 순간에 상실하게 됐다. 특히 6년간의 ‘실전전투경험’을 쌓은 해전의 주역들, 유능한 장졸들을 잃게 된 것이 가장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칠천량해전공원(기념관). 임진∙정유재란 중 유일한 패전인 칠천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곳이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다크투어리즘’의 공간이다. 어두운 역사에 접근하여 패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곳이다
일본군은 8월에 접어들면서 14만 명의 대병력을 좌∙우군으로 편성하여 중간 목적지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좌군’은 해안을 통해 남원을 거쳐서, ‘우군’은 창녕∙육십령을 거쳐서 ‘전주’로 진격해갔다. 일본 수군에게는 맞서 싸워야할 적 ‘조선 수군’이 사라지자 거칠 것이 없게 됐다. 그러나 일본 육군이 ‘전주’를 점령한 후 한양을 목표로 북진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며 부대를 추스르고 있었다. ‘이 기간이 정유재란 전쟁의 전체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완전 궤멸되자 조정으로서도 어떤 대책도 취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선조는 체면 구겨가며 이순신에게 사과하고, 다시 복직시켜 수군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이 크게 떨치어 변방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날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가 이순신을 갈고 원균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게 한 자신의 정책이 ‘과오’였음을 토로하고 있는 내용이다.
선조도 이순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3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 직책을 다시 받은 이순신은 ‘수군 재건의 길’을 걸어가며 ‘기적’을 준비해나가게 된다.
칠천량해전의 참패 소식을 전해들은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첫 마디 “통곡이 터져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을 위한 추모의 공간,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연전연승의 조선 수군, 왜 이렇게 허망하게 대패했을까?
칠천량해전 패전의 원인과 책임에 관한 사항은 참으로 많고 복잡하다.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패전에 관한 책임은 현장 지휘관인 ‘원균’에게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엄격히 얘기한다면 원균 못지않게 ‘도원수∙도체찰사’는 물론 ‘선조’는 또 다른 차원의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군령권(작전권)’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① 당시, 군령권 행사의 최 정점은 국왕 ‘선조’다. 칠천량 패전의 원인을 선조의 책임에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직접적인 패인은 ‘3도수군통제사’의 교체에서 비롯됐고, 통제사의 교체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선조의 ‘부정적 시각’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도 전쟁이 임박한 4개월 전에 이뤄져, 일본군의 재침에 대한 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바다’를 지키는 ‘현장 지휘관’들의 합리적인 의견∙조언을 무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 채택 시 ‘통제사’들(이순신, 원균)의 의견인 ‘수륙병진전술’이 무시되고, 조정과 도체찰사∙도원수가 주장한 ‘해로차단전술’을 밀어붙였다. 이것이 통제사 교체로, 더 나아가 선조(조정)의 기대와 달리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이어졌다. 이로써, 무적의 조선 수군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선조는 수군에 관한 ‘군령권’을 ‘통제사’에게 부여하지 않고,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부여했다. 이는 결국 ‘바다’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신’들에 의해 ‘해전’이 지휘됐다는 것이다.
원릉군 기념관(평택 도일동) 앞에 있는 어록 벽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선조실록에서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기사에서 수륙병진전술의 즉각 시행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선조실록 1597년 4월 19일)
그러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는 것과 같은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했다’, ‘칠천량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運)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한산(견내량)을 지키겠다는 이순신을 교체시키고, 출전을 주저하는 ‘원균’의 등을 밀어 출정하게 하여 패전을 초래한 것에 대한 ‘책임’이 선조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전쟁의 승패에 관한 책임은 결국 군령권을 발휘하는 최고의 자리 ‘통수권자’의 몫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에 해당한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장능이군불어자승(將能而君不御者勝)’이란 말이 있다. ‘장수가 능력 있고, 군주가 간섭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란 뜻이다. 현장 지휘관들의 의견을 존중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지 않으나 오늘날에도 새길 필요가 있다.
② 바다를 책임진 최고 지휘관 ‘원균’의 책임은 이미 넘치고 넘친다. 원균 개인의 인품 등은 예외로 하고, 무엇보다 전장 환경을 포함한 전쟁 전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적’(일본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대비도 소홀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싸운 일본군의 ‘전투방식’은 전쟁 직전 입수된 비밀정보에 나타나 있던 일본군의 ‘전술’ 그대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균은 그 비밀정보에 대한 이해와 대비가 부족했다. 원균함대는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한 채, 조선 수군이 보유한 우수한 전법을 구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수륙합공 등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일본군의 전술에 걸려들었다.
평택에 있는 ‘원균 묘’와 ‘원릉군 기념관’. 원균 생가에 원균의 신발과 담뱃대를 전하고 죽은 말의 무덤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원균과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은 편이다. 방문객들의 부정적인 질문에 답변하느라 기념관 관계자는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또한, 전술원칙에 대한 이해∙조치가 부족했다. 대표적인 것이 칠천량에서 정박할 때 ‘경계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퇴로(탈출구)’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투가 벌어지고 왜군에게 밀리면서도, 왜군을 차단∙격멸이 가능한 견내량(한산도) 쪽이 아닌 ‘춘원포’ 쪽으로 기동함으로써 더 피해를 키웠다.
그로 인해 일본과 대비하여 두 배가 넘는(일본군 후속 부대 투입 전까지) ‘전선’과 화포, 비장의 무기 ‘거북선(3~5척)’ 등 우수한 전력을 갖고도 참패를 당한 것은 가용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전투지휘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휘권이 확립된 연합함대를 구성하지 못했다. 부임 후 극소수의 장수들(경상우수사 배설 등)만 교체하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유임시킬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부대장악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전임 통제사(이순신)와는 6년 이상 ‘원 팀’이 되어 전투를 치러왔던 반면, 신임 통제사(원균)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것은 겨우 4개월 남짓하였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도 전에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장군은 옛 부하들과 방문, 서신 교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류했다. 이순신이 하루에 14통의 편지를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이순신은, 하루 이틀이면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계 유지가 원균과 부하 장수들과의 관계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소지가 ‘충분’하다.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을 통하여 이순신과 원균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해전을 ‘함께’ 치렀다. 결과로, 원균은 이순신과 함께 선무공신 18명 중 나란히 1등 공신이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과(功過)’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완전히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원균장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은 ‘칠천량해전’ 패배로부터 기인한다. 최고 지휘관으로서 패전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조정의 잘못까지 ‘전가’된 부분도 없지 않다고 전한다. 최근 들어 ‘평택시’ 주도로 원균장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별도로 ‘원균’ 관련 연구와 서적 발간, 학술 행사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재평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③ 칠천량 해전을 얘기하면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을 뺄 수 없다.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임진왜란 중반 이후 ‘도원수’가 되어 ‘칠천량해전’을 주도됐다. ‘도원수’란 직책은 모든 조선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이지, 육군만을 관할하는 지휘관이 아니다.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 결정 과정에서 권율은 조정(선조)의 뜻을 받들어 ‘해로차단전술’ 채택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순신 파직의 발단이기도 했던 ‘해로차단전술’을 새 통제사 원균도 불가하다 했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의견을 들어봤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칠천량해전을 앞두고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친 다음, 부산으로 출정하게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통제사는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군 최고 지휘관 중 한명이다. 통제사 원균의 ‘전략전술’의 번복 주장에 당황스럽기도 했겠지만, 부하들이 보는 가운데 ‘곤장’을 친 직후 출정을 종용했다는 것은 도원수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분개한 원균이 전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칠천량해전이 시작됐다. 이렇게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출정하였으니 전투가 순조로울 수 있었겠는가.
도원수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전쟁 상황 관련 얘기는 물론, 도원수와 통제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토로할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전한다. 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그러나 두 사람이 칠천량해전을 앞두고 ‘해로차단전술’의 적절∙부적절성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조선 수군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있던 이순신 입장에서도 수군 상황과 관련하여 어떤 형태로든 의견을 개진할 여건은 되었다.
칠천량해전 지역을 여행하려면...
‘칠천량 해전’ 전적지 답사는 임진왜란 해전지 중 유일한 ‘다크투어리즘’ 답사 코스이다. 임진왜란 중 ‘명량∙노량∙부산포해전’ 등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전은 창원(마산.진해), 통영, 거제도, 가덕도(부산)로 둘러싸인 ‘진해만’ 일대에서 벌어졌다. 전라도 점령을 위해 줄기차게 진출을 기도하던 일본 수군에게나,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음과 동시에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려던 조선 수군에게나 ‘진해만’은 핵심 해역 중의 핵심이었다. 정유재란기의 첫 해전인 ‘칠천량해전’이 바로 이곳 ‘진해만’에서 벌어졌다.
칠천량 지역 여행 안내
‘칠천량 해전’이 발생한 바다는 칠천도에 있는 ‘칠천량해전공원’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그 해전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칠천도(량) 방문에 앞서 주변에 있는 왜성들(장문포∙송진포∙영등포왜성)부터 둘러볼 것을 권한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가 주변의 왜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왜란 중의 ‘두 사람의 통제사’들이 부산의 일본 수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꺼려했던 이유가 바로 이 왜성들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왜성’들이 정유재란 당시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해하려면 ‘발품’을 팔아 진해만 건너에 있는 ‘웅천왜성’과 ‘안골포왜성’ 등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또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밀려 퇴각했던 ‘춘원포(통영시 광도면)’와 ‘진동만(마산합포구 진동면)’까지 둘러보는 것은 이 해전은 물론, 임진왜란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일본군에 몰렸던 조선 수군들은 이곳까지 퇴각한 다음 뭍으로 올랐으나 이미 이곳에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춘원포 직후방에는 원균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전해오던 ‘엉규이 무덤’(통영시 광도면 황리)도 있다. 첫 승전지였던 ‘옥포만’은 물론, ‘한산도’와 한산도를 방호하던 ‘견내량’, ‘통영’ 등도 함께 연계하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원종섭, <새로 쓰는 원균 이야기 >, 북랩, 2022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주장(主將)이 바뀌어 치른 ‘칠천량해전’, 7년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칠천량해전공원에서 바라보는 ‘칠천량 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전사한 곳이다. 조선 수군들이 왕래하며 숱하게 정박하기도 했던 곳인데,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 장졸들과 전함들의 수중 무덤이 되고 말았다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400여년 전 옛날, 일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침범했을 때 이순신장군의 지휘로 23전 23승한 전쟁, 전승(全勝)한 전쟁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와 각종 드라마를 통해 주요 해전들에 대해 많이들 알고 있다. 당시, 3도수군통제사 중 한 사람이었던 ‘원균’에 대해 얘기를 하면 대부분 ‘부정적’으로 얘기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원균’장군이 지휘했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 대해서 얘기하면 대부분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말문이 막힌다. 그 해전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도 지도를 봐야만 알 정도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승리한 전쟁 중심의 역사를 배웠다. 그런 나머지, 패한 전쟁에 대한 것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아예 관심 밖의 것이 되고 말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패했을 때 왜 패했는지를 알아야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데 말이다.
‘칠천량 바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전사한 대참패의 현장이다. ‘패전’이란 이유만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잊혀 오다가 2013년에 ‘칠천량해전공원’ 개관을 계기로 우리들 곁으로 한 발 다가온 전투가 ‘칠천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은 어떤 전투인가
1597년, ‘강화협상∙휴전 기’를 거쳐 7년 전쟁 마지막 시기인 ‘정유재란 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 시작점이 바로 ‘칠천량해전’이다. 이 해전은 ‘7년 전쟁’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으로 기록되고,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패전 중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기도 한다. 칠천량해전 자체는 단순하다. 하지만 정유재란기의 첫 해전인 이 전투가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아는 것은 정유재란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칠천량해전을 설명하는 거북선 형상의 ‘안내판’(칠천교 입구에 있다). 패전 사실과 이순신의 복귀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왜 ‘최대의 패전’을 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1597년 2월,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했다. 같은 시기 그간 진행되던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됐고, 강화협상 기간 동안 본토에서 ‘재정비’를 마친 일본군이 현해탄을 건너오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됐다. 그 첫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다.
하루속히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 선조는 도체찰사(이원익)와 도원수(권율)를 통해 원균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출정하여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을 공격하게 했다. 육군과 함께 ‘수륙병진전술’을 원했던 원균은 상부의 ‘강요’를 견디지 못한 채 전(全) 함대를 몰아 부산으로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까지 진출했던 조선 수군은 기상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칠천량’으로 물러나게 된다.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인 이곳 ‘칠천량’ 바다에서 새벽에 일본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전라도’를 넘어 ‘서해 바다’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의 원대한 목표인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남원’과 ‘전주’를 목표로 공격을 이어나가게 된다.
조∙명연합군애 패한 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하다
부산포해전(1592년 9월) 이후, 1593년 초부터 평양성∙벽제관(경기 고양시)∙행주산성 등지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조선을 비롯한 3국은 지난 1년 여 간의 전투로 입은 병력 피해, 군량 부족, 전염병에 의한 전력 손실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그래서 1593년 4월경부터 ‘명’과 ‘일본’은 전쟁의 당사자이자 ‘전장’의 주인인 조선을 제쳐놓은 채 강화회담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칠천량해전을 총지휘한 도원수 ‘권율장군’. 임진왜란 중,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퇴각하고 강화교섭으로 전환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행주대첩’을 총지휘했다. 권율 휘하의 조선군 3천명이, 인해전술을 펴던 일본군 3만 대군을 화차와 신기전 등 강력한 화약무기로 패주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조선은 수도 한성을 수복했고, 권율장군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정유재란을 지휘하게 된다
‘명군’의 참전은 처음부터 전쟁이 ‘중국 본토’까지 확산하는 것을 막는데 있었으니,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까지 찾아줬으니 명군은 그들이 해야 할 ‘도리’는 다했다라고 인식하게 됐다. 전비(戰費) 충당 등의 어려움에 처한 명군은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아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게 됐다. 그저 현상∙체면치례만 유지하는 가운데, 전투가 아닌 휴전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측에 강화협상을 ‘먼저’ 제안하게 됐다.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1593년 1월)에서 조∙명연합군에 대패한 뒤 한양 일대까지 퇴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양 북방 ‘벽제’에서 실시한 ‘반격작전’(벽제관전투)을 통해 조∙명 연합군을 임진강 이북으로 퇴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개전 후 조선에서 치른 1년간의 전투와, 혹독한 겨울 날씨로 말미암아 수많은 병력 피해를 입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전투를 이어갈 수 없었던 일본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일본은 명(明)이 제안한 ‘강화협상’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고, 부대를 남쪽으로 재배치하여 ‘재충전’하면서 다음 기회를 도모하게 됐다.
일본군을 상대로 ‘한성(漢城) 수복전’을 펼치려던 조선 관군(권율장군) 입장에서는 벽제관 전투(1593년 2월)에서 조∙명연합군이 패주함에 따라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오히려 조선 관군은 절대 다수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단독’으로 싸워야만 했다. 일본군에 절대 열세했던 조선 관군과 백성들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수적 우위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크게 이겼다. 이게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후, 일본군은 본국 일본과 가까운 남쪽으로 부대 재배치를 서두르게 된다. 명군은 진행 중인 일본과의 ‘강화협상’ 분위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조선군의 손발을 묶어놓았다. 남해안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조선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명군도 따라 남하했다. 이로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진해만 전체 바다를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트인 ‘웅천왜성’. 건너편 거제도의 왜성과 협조된 작전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군의 남하와 ‘왜성’ 구축,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다
명군의 보호 아래 남해안(울산∙부산∙진해∙고성 등)으로 재배치한 일본군은 해전(海戰)은 아예 포기하고, 해안 요지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쌓은 왜성이 30개가 넘는데, 이중 60% 정도가 1593년부터 시작된 ‘강화교섭기’ 중에 쌓았다.
1592년 ‘부산포 해전’ 때 본거지가 공격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일본군은 그들의 최대 전진∙보급기지인 ‘부산포’를 방호하기 위해 왜성을 쌓기 시작했다. ‘거제도’와 ‘부산포’로 이어지는 항로를 연하여, 조선 수군에 대해 ‘측∙후방 공격’이 용이한 곳, 조선 수군들이 항해 중 ‘정박∙묘박지’로 사용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선점(先占)하여 왜성을 겹겹이 쌓았다.
당시의 전선(戰船)들은 기동할 때, ‘돛’의 힘을 일부 활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격군’의 힘에 의존하였다. ‘전투’ 시에는 ‘전적’으로 격군의 ‘힘’에 의존해야만 했다. ‘격군’ 자체가 전선의 ‘엔진’이었던 시대라 원활한 전투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엔진의 ‘파워’(격군들의 ‘힘’)를 항시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휴식이 필수조건이었다.
왜군은 해전의 주 무대인 ‘진해만’ 일대에 있는 왜성들은 남∙북쪽 해안을 따라 촘촘하게 하나의 ‘벨트’로 연결하여 서로 의지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견내량을 넘어 진해만을 거쳐 부산 쪽으로 동진(東進)해야 하는 조선 수군의 기동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노출되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측∙후방의 왜군으로부터 포위 공격당할 수 있는 가능성(위험)이 증대되기 마련이었다. 한마디로, 왜성으로 말미암아 조선 수군의 기동에 대한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안골포왜성에서 바라본 안골포와 ‘웅천왜성’.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할 경우 ‘왜성’들에 포진한 왜군의 후방공격을 각오해야만 했다. 진해만의 왜성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매우 위협적이다
‘3도수군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다
일본이 지상군 부대를 남해안으로 재배치하고, 진해만 일대에 왜성을 쌓는 등의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던 시기에 조선이 택한 큰 변화는 ‘3도수군통제사’ 직책을 신설하고,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이진’한 것이다.
1593년 8월, 조선 조정은 수군에 ‘3도수군통제사(정2품)’ 직책을 신설했다. 임진왜란 초기, 육상전투에서는 ‘도체찰사’ 등 ‘임시’로 임명된 직책이 많아 전쟁 지휘에 혼란을 빚는 사례가 많았다. 이에 비해 수군은 ‘수사-첨절제사-만호’로 이어지는 ‘일원적 지휘체계’를 유지한 결과,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동급의 수군절도사 3명이 ‘협의’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다 보니,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없지 않았다’라는 점이었다. 지휘체계상의 혼란이나 갈등이 ‘전승’에 가려져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수군을 통합 지휘할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水使)’들끼리 협의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던 체제상의 문제점을 식별했다. 조정은 조선 수군 전체를 하나로 묶어 연합 함대를 편성하고, 통일된 작전을 펼칠 필요성을 인정해서 ‘3도수군통제사’란 직책을 신설했다. 이 직책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이 ‘겸직’하게 하여 해상작전을 총괄하게 했다.
이순신이 초대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기 직전인 1593년 7월,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 공략에 보다 용이하고 왜군의 서진(西進)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했다. 이어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면서 전라좌수영이 ‘통제영’으로 확대 설치됐다.
한산도로의 이전은 ‘견내량’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작전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 수군은 목표인 전라도와 서해바다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야만 한다. 이런 일본군의 기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곳이 ‘견내량’인 것이다.
거제도와 통영을 가르는 ‘견내량’. 일본군의 서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목’이었다.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명량, 노량, 한산)의 배경이 된 곳은 이처럼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있는 곳이었다. 완벽하게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목’을 넘은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참패했다
견내량은 부산으로부터 약 80km의 거리에 있다. 일본군이 서진하여 이곳에 다다를 때쯤이면 장거리 기동으로 인해 지치게 마련이고, 이때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요충지가 견내량인 것이다.
반대로, 조선 수군이 왜군의 본거지 부산을 공략하기 위해 장거리 기동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해소시켜줄 수 있기도 하다.
1592년의 ‘부산포 해전’에서와 ‘부산포’를 공략했을 때의 ‘기동 거리’(해남-여수 190km. 여수-부산 180km. 한산도-부산 90km)를 절반 이상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전투에 임하는 조선 수군들의 ‘전투피로도’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어 작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량(梁)은 좁은 길목이란 뜻이다.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 규모의 적을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이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통과해야 하는 공간(수로)의 ‘폭(크기)’이 좁아 공자(功者)가 아무리 많은 전선을 보유했을지라도 물목인 ‘량’에 동시에 투입할 수 있는 전선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산해전에서의 전훈을 활용하여 ‘통제영’을 견내량 직 후방인 한산도에 설치한 것이다.
일본군은 임진년 첫해 견내량 직후방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패했던 쓰라린 ‘악몽’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왜군은 보통의 큰 각오 없이는 이곳 견내량을 넘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틀어막고 기다리기만 하면 왜군들은 무조건 오게 되어 있었다.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당항만’. 길이는 약 15km, 입구는 300m가 조금 넘지만 ‘만’내로 들어오면 폭이 2km가 넘는 곳도 많다. 충분히 해전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당항만에서 2차례의 해전이 있었고 모두 승리했다. 저 멀리 당항포전승기념공원과 당항포 관광단지가 있다
선조,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강화협상이 진전함에 따라, 명나라와 일본군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해안 지역에는 4만 여명의 왜군들이 왜성에 칩거한 채 장기전을 펼치고 있었다. 선조는 꼴도 보기 싫은 일본군을 한시라도 빨리 조선 땅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단독의 ‘힘’만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하여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강화협상을 결렬시키지 않을 정도(범위 내)에서의 ‘제한전’이었다.
1593~4년 사이에는 대기근과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수군의 여건은 전쟁을 치르기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1594년 봄에는 전체 병력 18,500명 중 감염자가 1/3 수준이었고, 이의 1/3 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순신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열흘 이상을 고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594년이 되자, 조정은 남해안에 칩거 중인 왜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게 바로 ‘제2차 당항포해전(1594년 3월. 고성군 회화면)’이고, ‘장문포해전’(1594년 9월. 거제시 장목면)인 것이다. 이중, ‘제2차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장군이 ‘3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처음으로 펼친 대규모 해전이었다. 1593년 2월의 ‘웅포해전’ 이후 점증하기 시작한 일본군의 ‘서진(西進)’ 시도를 차단하고, ‘진해만’ 일대에 대한 제해권을 굳건히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전투이다. 이순신은 진해만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3도 수군 ‘전 함대(124척)’을 출동시켰다.
이 해전에서 당항포에 정박 중인 왜선 31척 모두를 격침시켰다. 하지만, 전선을 포기한 채 육지에 틀어박혀 바다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일본군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육군과의 ‘합동작전’이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 해전에서 3도수군 전 함대를 출전시킨 것은 부산포해전 후, 신규 건조한 전선과 새로이 충원된 수군들의 ‘실전 경험’을 축적함은 물론, 조선 수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당항만을 굽어보는 ‘충무공 당항포대첩기념비’. 임진년 2차 출정 때(1592년 6월)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 부임 후 첫 출정인 ‘2차 당항포해전’에서 또 이겼다
강화회담 중에 실시한 또 다른 전투는 ‘장문포해전(거제도공략작전. 1594년 9월)’이다. 이 작전은 최초의 ‘대규모 수륙합동작전’으로, 육군(권율)과 의병(곽재우, 김덕룡)이 이순신 연합함대와 합류하여 ‘장문포’를 공격한 작전이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한사코 응하지 않고, 왜성만 지키는 방어전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마침내, 육군 부대(의병)를 상륙시켜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일본군의 대응으로 인해 다수의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왜성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몇 차례 왜성 공격을 실시했으나 피해만 입었을 뿐이고, 전선 2척 분멸이라는 초라한 전과가 전부였다.
뒤늦게 도착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종료하고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했다. 전투 중, 작전을 주도했던 총지휘관 격인 도체찰사 ‘윤두수’는 순천에, 합참의장격인 ‘도원수’는 구례에 위치하고 있었다. 준비가 부족하고 의미 없는 전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전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직속상관인 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좌의정이자 도체찰사인 윤두수에게 ‘장문포 공격’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된 전투다. 이를 기화로 이순신장군이 ‘스스로’ 보직 변경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는 원균과 이순신 간의 ‘갈등 확산’의 원인이 됨은 물론, 조선 수군의 지휘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인이 됐다.
전쟁을 지휘한 선조와 조정, 도체찰사나 도원수는 그만큼 전투 현장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문외한’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장문포해전지 ‘장목항’. ‘대규모 수륙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계획이 치밀하지 못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항구 좌우에 구축된 왜성을 이용한 왜군의 저항을 제압할 수 없었다(한화오션 근무 진승원씨 제공 사진)
선조, 정유재란이 코앞인데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하다
강화 교섭이 진행 중이던 15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전개했던 명나라 군대 ‘모두’가 요동지역으로 철수했다. 이때부터 조선 조정은 남해안 왜성에 칩거 중인 왜군과 ‘홀로’ 대치하면서, 일본의 ‘대규모 재침’에 대비한 대책 마련에 몰두하게 된다.
‘장문포해전(거제도공략작전. 1594년 9월)’이 끝난 이후, 정유재란(칠천량 해전) 때까지는 더 이상의 해전은 없었다. 장문포해전 직후, 해전 결과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원균 간의 ‘갈등문제’와 함께 수군 지휘부 내의 ‘불협화음’이 노출됐다. 심각한 문제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간 두 사람 간의 불협 요인은 작전계획 수립 간 협조 및 지원, 작전간 구조 지원, 작전 후 전공처리 등에서 마찰이 누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원균이 직속상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정(3도체찰사 윤두수)에 보고하여 작전을 실시하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이 ‘스스로’ 보직 변경을 요청할 정도로 심각했던 두 사람 간의 갈등문제는 원균을 ‘충청병마사’로 옮기며 일단락됐다. 하지만, 두 사람의 ‘보직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론됐다.
한편, 1594년부터 선조는 이순신의 직무수행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반면, 원균에 대해서는 ‘보기 드문 용장’이라 평가하는 등 ‘극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균이 ‘충청병마사’로 전보된 뒤의 근무행태와 관련하여 사헌부는 ‘탄핵’을 상소하게 된다. ‘원균에게 미리 군사를 주어서는 안 된다. 평상시에 군사를 주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라며 혹평에 가까운 의견들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선조의 ‘옹호’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6년 년 말이 되면서, 일본군이 ‘전라도’를 목표로 ‘수륙병진’으로 재침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됐다. 조선 조정은 수군을 이용한 ‘해로차단전술’을 대비책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균의 ‘수사(水使) 재임용’ 문제가 또다시 제기됐다. 이런 과정에서, 이순신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두 사건’(일본에 의한 ‘반간계’와 ‘부산왜영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장문포왜성’. 칠천량해전 때 조선 수군은 이곳에서 발진한 일본 왜선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왜성의 위협을 실감할 수 있다. 거제도에는 총 4개의 왜성이 있다
먼저, 일본에 의한 ‘반간계(反間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이중간첩 ‘요시라’가 꾸민 사건이다. 본국으로 일시 복귀했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조선으로 다시 전개하는 일정’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이는 조선 조정에 혼란을 일으키고, 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흘린 이 정보를 그대로 믿은 조정(선조)은, 이순신에게 ‘현해탄을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통제사 이순신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입수된 정보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술수’라고 판단했다. ‘가토’의 도해 일정을 정확히 알 수도 없었다. 부산 해역은 해상상태 등 작전 여건이 매우 불리한 곳이다. 또한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대병력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조선으로 전개해올 ‘가토 부대’를 바다 위에서 며칠이고 기다린다? 조선 수군의 전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인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다.
며칠 후, 150여 척으로 구성된 ‘가토 부대’가 울산(서생포)으로 건너왔다. 이 사건은 선조의 의심을 폭발시켜 이순신에 대한 처벌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거제도와 부산을 오가는 길목 ‘진해만’. 크고 작은 섬으로 둘러싸이고 공간이 충분하여 전투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이곳 ‘만’을 지나는 모든 움직임은 한눈에 보인다. 기습 달성은 아예 생각할 수 없다
다음으로,‘부산왜영 방화사건’은, 1596년 12월 12일 부산의 왜영에 불이 나서 가옥 1천여 채와 미곡창고, 군기 등이 모두 불타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후,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작전을 성공시킨 부하들에 대한 군공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방화사건이 도체찰사(이원익) 휘하의 장졸들이 준비하여 성공한 것이라며 포상해줄 것을 요청하는 부체찰사(김신국)의 별도 장계로 인해 내막이 드러나게 됐다. 도체찰사 휘하의 군관이 부산 왜영을 방화하는 과정에서, 이순신 휘하의 장졸(안위 등)들이 ‘배를 태워준’ 뒤의 보고를 전공으로 판단하여 이순신이 장계를 잘못 썼던 것이다. 이 장계로 말미암아 선조는 이순신을 남의 공을 탐하는 정직하지 못한 장수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순신의 ‘파직’에 대한 결론이 났다. 선조실록(1597년 3월 13일)에 의하면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모함하기까지 했다...(중략)...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라고 하문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 치열했던 해전에서 연승함으로써 풍전등화의 위기로부터 ‘조선’을 구한 장수였다. 1593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부터 더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최고의 지휘관이 됐다. 이순신장군이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받는 장수로 인식되면서, 명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했던 국왕 선조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사례는 동서고금을 통해 결코 낯선 것이 아니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과정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 사례가 된다.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와 의심은 ‘혹시 일을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발언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선조실록 1594년 8월 21일). 이후 해를 거듭해가면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의심’을, 원균에 대해서는 ‘극찬’하는 사례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원균으로 통제사가 교체됐다. 통제사 이순신의 파직이 임금 선조 자신과 세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죄’, 이순신의 명성에 대한 임금 선조의 ‘열등의식∙조급성’과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위의 죄목들은 그냥 불편하게 붙어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상은 필자 ‘혼자만’의 궁금증일지 모르겠다.
이순신장군, 선조의 명을 받들어 부산 진공 작전에 나서다
어쨌든, 일본군이 시도한 이순신 제거를 위한 술책은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순신은 2월 26일 3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파직되어 3월 4일 하옥(下獄)됐다. 하옥된 지 28일 만인 1597년 4월 1일 출옥했다. 이후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될 때까지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약 4개월 동안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다대포’ 일대. 합수(合水)지역이라 파도가 세고 풍랑이 자주 인다. 칠천량해전 직전에 이곳까지 진출했다가 풍랑을 만나 가덕도를 거쳐서 칠천량으로 퇴각했다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기 직전, 부산해역으로 출정했다가 원대복귀 하자마자 압송됐다. ‘가토’는 이미 상륙하였지만 어쨌든 해상으로 압박하면, 일본군 다른 부대들이 함부로 못 건너올 것이라는 논리로 부산포 공격을 지시했고, 이순신은 이를 충실히 복종해 부산포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압송 직전에 실시한 ‘부산해역 출정’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고, 상세하게 전하지도 않는다. 일부 기록의 요지는, 1597년 2월 초 이순신통제사는 보유 전선 124척 중 63척만으로 함대를 편성하여 부산 일대로 출정했다. 출정 중 두 차례의 교전이 있었는데 ‘다수 사살∙피랍’이라는 결과만 간단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사(正史)’인 ‘선조실록’(1597년 3월 20일)에는 원균이 통제사 부임 직후 이순신의 부산해역 출정과 관련된 사항을 올린 장계가 기록되어있다. 장계의 요지는 ‘이순신이 부산포 앞바다로 진출했을 때, 통제사가 탄 전선이 조수에 밀려 좌초되고, 이순신이 부하의 등에 업혀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번 출정에서 많은 군졸들이 죽어 그 시체가 바다 가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실록 내용의 진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엄연한 정사의 기록이다.
임란∙정유재란 최대의 참패, 칠천량 해전
정유재란 첫 전투인 ‘칠천량 해전’은 1597년 7월 14일 통제사 원균이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6월 말부터 7월 초에 걸쳐 상부의 지시대로 웅포와 안골포, 부산 앞바다로 진출하여 몇 차례 해전을 벌여 약간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조선 수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7월 8일에 있었던 출정 때에는 원균은 ‘출정하지 않은 채’ 휘하 수사들이 연합하여 함대 절반인 80여 척만으로 출전했다. 이 출정에서, 일본 군선 8여 척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조선 수군 판옥선 20여척이 표류한 나머지 일본군에 의해 전멸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부산으로 출동했던 조선 수군이 귀환할 때쯤 ‘원균’은 도원수로부터 ‘출두명령’을 받는다. 이 연장선에서 도원수로부터 ‘장벌(杖罰)’을 받고, 칠천량해전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대패하게 된다.
칠천량해전 당시 조선∙일본 수군의 기동 경로를 일목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칠천량해전 직전까지도 조선은 ‘전략전술’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도체찰사와 도원수는 조정의 의도에 맞게 ‘해로차단전술’을 주장한 반면, 통제사(원균)는 ‘수륙병진전술’을 주장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전에는, ‘수군을 이끌고 부산 쪽으로 진군하여 일본군의 침입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겠다’라며 조정이 주장하는 ‘해로차단전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장계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통제사로 부임한 이후 왜군의 상황과 작전 환경 등을 파악한 결과,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간의 입장을 바꿔 ‘수륙병진전술’을 주장하게 됐다. 원균은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쪽으로 진군하겠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2차례나 올렸다. 그러나 가시적인 전과에 목말랐던 조정(선조)은 도체찰사∙도원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해로차단전술’ 시행을 승인(묵인)했다.
원균을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명령이 있은 직후인 7월 11일, 도원수 권율에 의한 통제사 원균 ‘장벌’ 사건이 있었고, 그 직후인 7월 14일 부산 앞바다로 출정하면서 ‘해전’이 시작됐다. 원균 함대는 이날 새벽 한산도를 출항하여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후 일본 함대와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원균함대의 규모가 큰 것을 보고 ‘회피전술’만을 펼치며 조선 수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를 계속 추격하던 원균 함대는 지친데다 풍랑까지 만나면서 일부 함대가 표류하기도 했으나, 원균은 함대를 수습하여 오후 늦은 시간에 ‘가덕도’로 회항했다.
판옥선 ‘격군’의 모습(통영한산대첩광장). 격군은 판옥선의 ‘엔진’이요 기동력이다. 엔진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작전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한산도를 출항하여 거의 쉬지도 못한 채 부산 앞바다까지 90여km를 항해했다. 무리한 항해로 말미암아 격군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작전을 제대로 구사할 수가 없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산도를 출항하여 하루 종일 기동하느라 전 장졸들 완전히 피로에 지치고 갈증에 목이 탄 나머지, ‘물(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수군들은 이곳에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400명을 잃고 퇴각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해만 일대의 섬들과 연안 일대에 육군을 배치하여 ‘수륙합동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5일, 비가 오는 가운데 풍랑이 일어 바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원균함대는 ‘칠천량’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이곳 칠천량 일대는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 임란 초기부터 조선 함대가 자주 정박했던 곳이다. 전날부터 왜군을 쫓아 접적(接敵)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떠내려가고 죽어가는 상황을 보며 도주하느라 수군 장졸들의 기력은 완전히 고갈됐다. 칠천량에 도착한 조선 함대는 전투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경계대책’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스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곳이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을 쫓아 칠천량에 도착한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를 겹겹이 에워쌌다. ‘야간기습’과 ‘포위협격’을 펼친 일본군은 16일 새벽부터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수군은 전열이 무너진 조선 함대를 상대로 그들의 장기인 ‘단병전술(육박전)’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각개 격파된 조선 수군은, 명령과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장졸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양쪽의 좁은 물목이 일본군에 의해 봉쇄된 가운데, 조선 수군은 주변의 섬과 육지에 올랐으나 미리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면치 못했다.
칠천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칠천교’. 폭이 500m에 불과하다. 칠천량 서쪽 출입구도 마찬가지다. 칠천량해전 때 왜군에 의해 이곳 ‘목’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 자루의 ‘목’과 같은 역할을 했다(한화오션 근무 진승원씨 제공 사진)
단 하루의 전투로 말미암아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원균),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등이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전멸에 가까운 패전한 것이다. 그동안 힘들여 쌓아왔던 조선 수군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 수군의 대 일본군 우위의 ‘총통공격’도 ‘거북선 공격’ 실시 여부도 전혀 알 수가 없다(참패한 전쟁이라 기록도 없고, 사료가 많지 않다).
이 격전의 와중에도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느린 10여척의 함대는 적에 맞서 힘을 합치지 않고 도주했다. 물론 이 전선들이 이후 명량해전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나름 ‘역할’을 한 것은 맞다. 그래서 배설의 행위에 ‘관대한’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적전(敵前) 이탈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칠천량해전 때 일본군이 구사한 전술은 ‘야간기습’, ‘포위협격’, ‘등선육박’, ‘수륙합동’으로 요약된다. 이 전술들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전패(全敗)한 원인을 분석하여 강화교섭기 동안 정립한 ‘결론’ 그대로였다. 이순신이 염려했듯이, 부산 앞바다로 출전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이 모두 현실로 나타났고, 반대로 일본군이 세운 전략전술은 거의 완벽하게 적용됐다
이러한 일본군의 전술에 관한 첩보는 1596년 일본에 사절로 갔던 ‘황신’이 입수하여 조정에 보고했던 사항이다. 조정(비변사)에서도 보고서에 제시된 일본군의 전술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통제사’에게 알려 대비하게 했다. 이때의 통제사는 ‘이순신’이었다. 신임 통제사 원균이 이 첩보자료를 알고 대비했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참패당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번 가정해본다. 일본의 반간계가 일부 작용하기도 하고 복잡한 요인에 의해 ‘통제사 교체’가 있었는데, 만약 통제사 교체가 없었더라도 칠천량 해전의 참패는 있었을까. 통제사 원균이 부산 앞바다 진공 후 복귀할 때 칠천량 일대로 피항하지 말고 견내량(20km 이격)이나 한산도(30km 이격)까지 퇴각한 다음, 견내량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했어도 이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칠천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통제사 ‘원균’의 묘로 추정되는 ‘엉규이 무덤’(통영시 광도면 황리). ‘엉규이’는 ‘원균’이란 이름의 방언이나 어떤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실록에는 ‘간신히 탈출하여 추원포(춘원포)에 상륙했는데, 이때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라고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전한다(선조실록 1597년 7월 22일). 지역 주민이 ‘목’ 없는 장군의 묘가 있었던 곳을 전해줬다. ‘엉규이 묘’가 원균의 실제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최악의 해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칠천량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임진왜란 초기부터 장악해오던 남해에 대한 제해권이 완전히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일본군은 개전 후 변함없는 목표인 ‘전라도∙서해바다’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로 인해 대규모의 ‘수륙병진정책’을 전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후, 한양을 조기에 점령하여 긴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전쟁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전라도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조선군은 ‘인적∙물적 보급원’(補給源)을 잃게 됐다. 반대로 일본군은 최대의 어려움인 보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 조선 수군은 이번 전쟁을 통해 그간 정성들여 키웠던 ‘전력’(병력, 무기, 판옥선, 거북선 등)을 한 순간에 상실하게 됐다. 특히 6년간의 ‘실전전투경험’을 쌓은 해전의 주역들, 유능한 장졸들을 잃게 된 것이 가장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칠천량해전공원(기념관). 임진∙정유재란 중 유일한 패전인 칠천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곳이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다크투어리즘’의 공간이다. 어두운 역사에 접근하여 패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곳이다
일본군은 8월에 접어들면서 14만 명의 대병력을 좌∙우군으로 편성하여 중간 목적지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좌군’은 해안을 통해 남원을 거쳐서, ‘우군’은 창녕∙육십령을 거쳐서 ‘전주’로 진격해갔다. 일본 수군에게는 맞서 싸워야할 적 ‘조선 수군’이 사라지자 거칠 것이 없게 됐다. 그러나 일본 육군이 ‘전주’를 점령한 후 한양을 목표로 북진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며 부대를 추스르고 있었다. ‘이 기간이 정유재란 전쟁의 전체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완전 궤멸되자 조정으로서도 어떤 대책도 취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선조는 체면 구겨가며 이순신에게 사과하고, 다시 복직시켜 수군을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이 크게 떨치어 변방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날 이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가 이순신을 갈고 원균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게 한 자신의 정책이 ‘과오’였음을 토로하고 있는 내용이다.
선조도 이순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3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 직책을 다시 받은 이순신은 ‘수군 재건의 길’을 걸어가며 ‘기적’을 준비해나가게 된다.
칠천량해전의 참패 소식을 전해들은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첫 마디 “통곡이 터져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을 위한 추모의 공간,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연전연승의 조선 수군, 왜 이렇게 허망하게 대패했을까?
칠천량해전 패전의 원인과 책임에 관한 사항은 참으로 많고 복잡하다.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패전에 관한 책임은 현장 지휘관인 ‘원균’에게 가장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엄격히 얘기한다면 원균 못지않게 ‘도원수∙도체찰사’는 물론 ‘선조’는 또 다른 차원의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군령권(작전권)’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① 당시, 군령권 행사의 최 정점은 국왕 ‘선조’다. 칠천량 패전의 원인을 선조의 책임에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직접적인 패인은 ‘3도수군통제사’의 교체에서 비롯됐고, 통제사의 교체는 이순신장군에 대한 선조의 ‘부정적 시각’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도 전쟁이 임박한 4개월 전에 이뤄져, 일본군의 재침에 대한 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바다’를 지키는 ‘현장 지휘관’들의 합리적인 의견∙조언을 무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 채택 시 ‘통제사’들(이순신, 원균)의 의견인 ‘수륙병진전술’이 무시되고, 조정과 도체찰사∙도원수가 주장한 ‘해로차단전술’을 밀어붙였다. 이것이 통제사 교체로, 더 나아가 선조(조정)의 기대와 달리 조선 수군이 전멸하는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이어졌다. 이로써, 무적의 조선 수군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선조는 수군에 관한 ‘군령권’을 ‘통제사’에게 부여하지 않고,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부여했다. 이는 결국 ‘바다’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신’들에 의해 ‘해전’이 지휘됐다는 것이다.
원릉군 기념관(평택 도일동) 앞에 있는 어록 벽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선조실록에서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기사에서 수륙병진전술의 즉각 시행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선조실록 1597년 4월 19일)
그러나, 선조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는 것과 같은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했다’, ‘칠천량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運)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한산(견내량)을 지키겠다는 이순신을 교체시키고, 출전을 주저하는 ‘원균’의 등을 밀어 출정하게 하여 패전을 초래한 것에 대한 ‘책임’이 선조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전쟁의 승패에 관한 책임은 결국 군령권을 발휘하는 최고의 자리 ‘통수권자’의 몫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에 해당한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장능이군불어자승(將能而君不御者勝)’이란 말이 있다. ‘장수가 능력 있고, 군주가 간섭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란 뜻이다. 현장 지휘관들의 의견을 존중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지 않으나 오늘날에도 새길 필요가 있다.
② 바다를 책임진 최고 지휘관 ‘원균’의 책임은 이미 넘치고 넘친다. 원균 개인의 인품 등은 예외로 하고, 무엇보다 전장 환경을 포함한 전쟁 전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적’(일본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대비도 소홀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싸운 일본군의 ‘전투방식’은 전쟁 직전 입수된 비밀정보에 나타나 있던 일본군의 ‘전술’ 그대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균은 그 비밀정보에 대한 이해와 대비가 부족했다. 원균함대는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한 채, 조선 수군이 보유한 우수한 전법을 구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수륙합공 등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일본군의 전술에 걸려들었다.
평택에 있는 ‘원균 묘’와 ‘원릉군 기념관’. 원균 생가에 원균의 신발과 담뱃대를 전하고 죽은 말의 무덤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원균과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은 편이다. 방문객들의 부정적인 질문에 답변하느라 기념관 관계자는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또한, 전술원칙에 대한 이해∙조치가 부족했다. 대표적인 것이 칠천량에서 정박할 때 ‘경계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퇴로(탈출구)’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투가 벌어지고 왜군에게 밀리면서도, 왜군을 차단∙격멸이 가능한 견내량(한산도) 쪽이 아닌 ‘춘원포’ 쪽으로 기동함으로써 더 피해를 키웠다.
그로 인해 일본과 대비하여 두 배가 넘는(일본군 후속 부대 투입 전까지) ‘전선’과 화포, 비장의 무기 ‘거북선(3~5척)’ 등 우수한 전력을 갖고도 참패를 당한 것은 가용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전투지휘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휘권이 확립된 연합함대를 구성하지 못했다. 부임 후 극소수의 장수들(경상우수사 배설 등)만 교체하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유임시킬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부대장악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전임 통제사(이순신)와는 6년 이상 ‘원 팀’이 되어 전투를 치러왔던 반면, 신임 통제사(원균)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것은 겨우 4개월 남짓하였다. 병조판서 이덕형은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도 전에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장군은 옛 부하들과 방문, 서신 교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류했다. 이순신이 하루에 14통의 편지를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이순신은, 하루 이틀이면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계 유지가 원균과 부하 장수들과의 관계 유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소지가 ‘충분’하다.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을 통하여 이순신과 원균은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해전을 ‘함께’ 치렀다. 결과로, 원균은 이순신과 함께 선무공신 18명 중 나란히 1등 공신이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과(功過)’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완전히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원균장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원인은 ‘칠천량해전’ 패배로부터 기인한다. 최고 지휘관으로서 패전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조정의 잘못까지 ‘전가’된 부분도 없지 않다고 전한다. 최근 들어 ‘평택시’ 주도로 원균장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별도로 ‘원균’ 관련 연구와 서적 발간, 학술 행사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재평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③ 칠천량 해전을 얘기하면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을 뺄 수 없다.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임진왜란 중반 이후 ‘도원수’가 되어 ‘칠천량해전’을 주도됐다. ‘도원수’란 직책은 모든 조선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이지, 육군만을 관할하는 지휘관이 아니다.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 결정 과정에서 권율은 조정(선조)의 뜻을 받들어 ‘해로차단전술’ 채택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순신 파직의 발단이기도 했던 ‘해로차단전술’을 새 통제사 원균도 불가하다 했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의견을 들어봤어야 했는데, 그런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칠천량해전을 앞두고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친 다음, 부산으로 출정하게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통제사는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군 최고 지휘관 중 한명이다. 통제사 원균의 ‘전략전술’의 번복 주장에 당황스럽기도 했겠지만, 부하들이 보는 가운데 ‘곤장’을 친 직후 출정을 종용했다는 것은 도원수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분개한 원균이 전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칠천량해전이 시작됐다. 이렇게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출정하였으니 전투가 순조로울 수 있었겠는가.
도원수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전쟁 상황 관련 얘기는 물론, 도원수와 통제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토로할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전한다. 이 얼마나 좋은 조건인가. 그러나 두 사람이 칠천량해전을 앞두고 ‘해로차단전술’의 적절∙부적절성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조선 수군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있던 이순신 입장에서도 수군 상황과 관련하여 어떤 형태로든 의견을 개진할 여건은 되었다.
칠천량해전 지역을 여행하려면...
‘칠천량 해전’ 전적지 답사는 임진왜란 해전지 중 유일한 ‘다크투어리즘’ 답사 코스이다. 임진왜란 중 ‘명량∙노량∙부산포해전’ 등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전은 창원(마산.진해), 통영, 거제도, 가덕도(부산)로 둘러싸인 ‘진해만’ 일대에서 벌어졌다. 전라도 점령을 위해 줄기차게 진출을 기도하던 일본 수군에게나,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음과 동시에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려던 조선 수군에게나 ‘진해만’은 핵심 해역 중의 핵심이었다. 정유재란기의 첫 해전인 ‘칠천량해전’이 바로 이곳 ‘진해만’에서 벌어졌다.
칠천량 지역 여행 안내
‘칠천량 해전’이 발생한 바다는 칠천도에 있는 ‘칠천량해전공원’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그 해전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칠천도(량) 방문에 앞서 주변에 있는 왜성들(장문포∙송진포∙영등포왜성)부터 둘러볼 것을 권한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가 주변의 왜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왜란 중의 ‘두 사람의 통제사’들이 부산의 일본 수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꺼려했던 이유가 바로 이 왜성들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왜성’들이 정유재란 당시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해하려면 ‘발품’을 팔아 진해만 건너에 있는 ‘웅천왜성’과 ‘안골포왜성’ 등도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한다.
또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밀려 퇴각했던 ‘춘원포(통영시 광도면)’와 ‘진동만(마산합포구 진동면)’까지 둘러보는 것은 이 해전은 물론, 임진왜란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일본군에 몰렸던 조선 수군들은 이곳까지 퇴각한 다음 뭍으로 올랐으나 이미 이곳에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춘원포 직후방에는 원균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전해오던 ‘엉규이 무덤’(통영시 광도면 황리)도 있다. 첫 승전지였던 ‘옥포만’은 물론, ‘한산도’와 한산도를 방호하던 ‘견내량’, ‘통영’ 등도 함께 연계하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박연, 2021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원종섭, <새로 쓰는 원균 이야기 >, 북랩, 2022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