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 철폐령’을 극복하고 ‘천행(天幸)’으로 이룬 ‘명량의 기적’
조선의 ‘운명(運命)’을 바꾸다!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보는 ‘명량해전’의 현장 울돌목 주변. 칠천량 바다에서 ‘참패’했던 조선 수군이 한 달 동안 ‘속성’으로 건설한 ‘초미니 함대’로 ‘10배’가 넘는 일본 수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진도대교 북서쪽 ‘양도’ 일대의 바다가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교 오른 쪽으로 ‘우수영 국민관광지’가 보인다(진도타워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명에 이르는 대 병력을 편성하여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이 전쟁이 1597년에 있었던 정유재란이며, 그 시작점은 ‘칠천량해전’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까지 진출하려던 임진전쟁의 목표를 ‘조선 4도 점령’으로 조정했고, 이에 따라 조선의 남해 바다에 대한 제해권 확보와 전라도 함락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전쟁을 재개했다.
일본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와해시킨 후, 공세의 박차를 가하여 1달 만에 전라도 요충지인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 수군은 바다로 나와 전라도로 공략해 나갔다.
칠천량 패전으로 인해 조선 수군 전체가 사라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은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하여 수군을 재건하게 한다. 그러나 그간의 전투에서 전승(全勝) 신화를 창출한 이순신이라 할지라도 수군을 재건하여 일본 수군을 맞아 대적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 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순신은 말없이 ‘전라도’로 향했다. 그나마 전화(戰禍)로부터 피해를 덜 입은 전라도, 제일 익숙한 곳 전라도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한 가마니의 군량이라도 더, 한 명의 군사라도 더, 한 점의 무기라도 더, 한 척의 전선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고난의 여정을 이어갔다.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서며 수군 재건에 나선지 보름 만에 12척이라는 초라하지만 ‘정예 함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순신함대를 쫓아 맹렬히 서진해온 일본 대 함대를 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의 접경인 ‘울돌목’에서 맞아 한 판 싸움을 벌였다. 이곳을 통과해 서해 바다로 들어서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완전히 꺾은 ‘대첩’을 이뤘다. 이 대첩은 정유재란의 국면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 7년간 끌어온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 대첩의 토대는 16일간의 ‘수군 재건’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화 된 것이다.
선조, 칠천량 패전의 뒷수습을 이순신에게 맡겼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뒤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한지 석 달 보름이 지날 때,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소식을 접했다. 7월 18일 칠천량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그날의 일기에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임진왜란 5년 동안 힘들여 키워온 조선 수군이 하루아침에 궤멸되고 말아, 울음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가장 먼저 찾았던 ‘노량 바다’. 동고동락하던 장수와 병사들을 만나 위로하고 당시의 전투상황을 전해 들었다. 뒤로 남해대교(1973년)와 노량대교(2018년)가 나란히 보인다(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누군가는 수습해야만 했다. 이순신은 도원수에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보고한 다음 패전의 그 바다로 나갔다. 그 길에서 패전의 현장에 있다 생환한 장수들로부터 전장 상황을 제대로 듣고 싶었다. 패전의 현장에 가까운 ‘노량’에서 거제현령(안위), 영등포 만호(조계종) 등 동고동락했던 옛 부하들, 칠천량 바다에서 전선을 이끌고 도망쳐 나온 경상우수사(배설)도 만났다. 백의종군 중인 처지라 특별히 조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일본군에 대적할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눴을 뿐이다. 그러고서 그간의 행적과 참전 용사들과 나눴던 의견을 종합하여 도원수에게 보고한 다음, 진주의 ‘손경례의 집’(수곡면 원계리)으로 거처를 옮겨 묵으며, 향후의 대책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중이던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 받았던 ‘진주 손경례 가옥’. 선조는 이때 내린 ‘교서’에서 자신의 과오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사과하며 수군 재건을 당부했다(진주 수곡면 원계리)
8월 3일 진주 ‘손경례 집’에서 3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받았다. 선조는 교서를 통해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의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다. 그래서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조의 교서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직책을 맡아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선조 자신이 자초한 일이기는 하나 자존심도 상하고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었다. 이로서 이순신은 백의(白衣)를 벗고 ‘3도 수군통제사’란 직책으로 휘하 장졸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이순신장군, 그는 말없이 ‘수군 재건’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떠났다.
이순신이 걸었던 ‘수군 재건의 길’, 결과는 명량해전의 승리였다
정유재란을 얘기할 때는 칠천량에서의 참패, 명량∙노량에서의 승전 등 큰 전투 중심으로 얘기한다. 7년 전쟁의 대전환점이 됐던 명량해전, 긴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게 한 이순신장군의 피 눈물 났던 ‘수군재건의 과정’은 그렇게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군 재건’이란? 전패를 당한 수군, 남은 것이라곤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것 없는 수군을 일본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룩한 것이라 더욱 눈물겹다. 그 현장을 함께 가고자 한다.
바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육지를 떠돌며 ‘수군 재건’을 위해 걸었던 14박16일 간의 대장정 700리길(진주 수곡~장흥 군영구미)
-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십여 명의 장졸들만 대동하고 그날 바로 ‘수군 재건’을 위한 장도에 올랐다. 목적지는 ‘전라도’이다. 이순신이 전라도를 목적지로 정한 것은, 과거 전라좌수사나 발포만호로 재직하면서 지역 여건을 잘 알고 있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전라도가 개전 이래 가장 피해가 적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산이 풍부한지라, 무너진 수군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전라도가 ‘최적지’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됐지만 배도, 군사도 없는 빈손의 통제사다. 수군 재건의 길을 나섰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이순신이 인수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해야 불과 10여 척에 불과한 전선과 전쟁공포증에 감염됐을 일부 장졸들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수군 재건의 대 장정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공격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軍器), 군량, 군선(軍船)을 확보해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8월 3일 진주를 떠나 8월 17일 그토록 그리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15일 간 300여km의 대 장정인 것이다. 지척의 거리에서 진격 중인 일본군을 피해가며 군사∙무기∙군량미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하동의 ‘두치진’(두곡마을). 남해바다를 거쳐 올라온 일본 수군들이 이곳에서 육지로 올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다(소형선박들은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올라갔다). 전라도로 직행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이순신장군이 이곳 ‘두치진’을 지나가고 한 나절 뒤에 일본군이 이곳을 지나 구례까지 진출하여 상륙했다(하동읍 두곡리)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날 일본 육군(좌군)은 진주성을 무혈입성한 후, 남원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좌군의 남원성으로 향하는 침략 접근로와 이순신의 수군 재건 길이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두치진’에서 교차할 뻔 했다. 한 나절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지체했다가는 자칫 왜군을 만날 수도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이 전멸하면서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군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일본군 14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눠 전라도를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가기 시작했다. 지리멸렬한 조선 수군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전라도 바다로 향하는 것은 일단 제쳐놓고, 남원성전투에 집중 투입됐다. 일본군은 과연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장군에 관해서 생각은 하였을까...? 이순신장군이 복직했는지 여부도 확실히 인지한 것도 아니고, 이순신장군이 돌아왔다 치더라도 전함도 없고, 수군도 흩어져 없는 상황에서 그가 돌아와 본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 온 마을이 텅텅 비었다. 무엇으로 수군을 건설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
구례를 거쳐 전라도 내륙, 남원∙전주에 이르는 관문 ‘석주관’ 일대. 석주관문을 지키다 순절한 구례 출신 ‘칠(7) 의사’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현감을 함께 모신 ‘칠(7)의사 묘’가 있다. 이곳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병 153명과 일반 의병 3500명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이순신 일행은 하동을 거쳐 ‘구례’에 다다른다. 구례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남원성으로 진출하는 일본군도 이곳 구례를 거쳐서 갔다. 구례 입구에 있는 ‘석주관성’ 방어에 필요한 물자와 남원성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보낸 뒤라 ‘구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일본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산성으로 옮기거나 감추거나 태우는 ‘청야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한 ‘곡성’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청야책이 일본군에 대비하는 최선책이 될지 모르나,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이순신에게는 필요한 어느 것도 구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본 육군이 하동(악양)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순신 일행이 이동하는 길은 수많은 피난민 백성으로 가득 찼다. 이순신장군은 이들 피난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조선 수군 재건’에 장정들이 동참해줄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피난민 중에서 많은 지원자들이 수군 재건 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순천에 도착할 때는 60명으로, 보성에 도착할 때는 120명이 되었고 계속 지원자가 늘어났다. 모집 인원만으로 병력을 충원할 수 없는 경우 일부는 긁어모은 무지렁이 백성도 없지 않았다. 또한, 과거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많은 부하들이 찾아와 합류함으로써 이순신장군에게 힘을 보탰다. 이제, 군관을 포함한 군사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가능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군량미∙전선 확보 문제는 여전히 이순신장군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군재건 길에 올라 첫날을 묵은 구례 ‘손인필 집’ 일대. 백의종군 중에도 묵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묵으며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최초 결의’를 다졌다. ‘손인필’을 기리는 비각이 있는 곳에 ‘조선수군 출정공원’을 조성했다(구례읍 봉북리 258)
구례와 곡성을 떠난 대장정(大長程)은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은 전라도 중에서도 인원과 물자가 풍부한 곳이라 많은 것을 기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곡성을 출발할 즈음 일본군(좌군)이 구례에 당도하고 있었다. 이순신 일행과 약 30여 km의 거리여서 말로서는 1~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서로 스치듯 지나갔다.
일본군은 남원성전투에 집중한 나머지, 당시에는 이순신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이순신이란 존재가 아예 잊힌 상태라,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러나 순천 또한, 남원성 집결을 명받은 전라병사(이복남)가 청야책을 시행하고 떠난 다음이라 텅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원성으로 떠나면서 순천 관내의 많은 창고들을 불태웠지만 ‘무기’만큼은 소각하지 않고 남겨두고 떠났다. 이순신장군이 반드시 순천을 다시 찾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획득한 활∙화살∙창∙화약 등은 져 나르고, 총통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을 위해 땅에 깊이 묻고 표시해뒀다.
곡성군 ‘옥과’. 이순신장군이 옛 군관들을 각지로 보내 병력 확충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곳이다. 정탐보고를 통해 일본군의 주(主) 진군로가 북쪽(남원) 방향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순신은 행로를 급격히 남쪽으로 돌려 ‘순천’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순천∙낙안은 모든 물자가 풍부했던 곳이다(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 ‘수군을 혁파하라’는 왕명에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며 반발하다 -
대장정은 ‘보성’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의 군사와 무기는 확보하였지만, 아직 ‘군량미’ 확보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낙안’의 군량창고는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8월 9일 도착한 보성의 ‘조양창’(세곡보관창고)과 군기창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순신장군은 안도할 수 있었다. 봉인된 창고에서 군량미 1,200가마를 확보했다. 장정 600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식량인 것이다.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칠천량 패전으로 흩어졌던 옛 부하 장수들이 속속 모여들고, ‘의승(義僧)’들도 규합하기 시작했다.
군량 가득한 채 봉인돼 있던 보성 ‘조양창’ 터. 사람은 없고 창고의 곡식∙무기들을 봉해둔 채 그대로였다고 한다. 마을 뒤 ‘창등’ 일대에 창고가 있었다. 주변에 성곽 흔적과 우물 2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성곽을 이루던 돌을 마을 돌담도 쌓고, 득량만 방조제를 쌓을 때 사용했다니 기분이 묘하다. 또한 주변에 자라는 ‘신우대’로 화살을 제조했다고 한다(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150-1)
8월 15일 중추절에, 선조는 ‘선전관’을 통해 보성의 ‘열선루’로 ‘유지’를 보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수군재건을 중지하고 육군에 합류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라”는 임금 선조의 명령 즉, ‘수군 철폐령’인 것이다. 조선 수군의 실체는 아직도 확실치 않고, 한양으로 치고 올라오는 일본 육군의 기세가 맹렬하여 남원성 방어를 위한 병력이 필요해서 내린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로 알려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썼다. 이순신은 하루 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전라도를 지키는 것이 조선 전체를 구하는 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하여 장계를 올린 것이다. 조선 수군을 폐지하라는 선조의 ‘유지’에 대한 ‘거부’이자 ‘항명’을 한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없어지는 것은 일본군이 제일 원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됐을 때,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까지 바로 위협할 것이라는 것을 조정(선조)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순신장군이 ‘수군 재건’을 위해 분투 중일 때 선조로부터 ‘수군을 혁파하라’는 왕명을 받은 곳 보성 ‘열선루’. 이순신은 이곳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려 왕명에 ‘반발’하며 조선 수군 건설을 계속하여 명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보성읍성은 일제 강점기 때 폐성되었다. 열선루와 읍성을 이루던 각종 석재들이 1960년대까지 주변에 있었으나 학교 확장 공사 등으로 인해 소실되고 몇 점의 댓돌 등만 전해지고 있다. 현재, 보성 ‘신흥동산’ 일대에 ‘열선루’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보성군 보성읍 주봉리 308-7)
- 일본군의 추격 상황 속에서 ‘정예함대’를 창설하다 -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획득한 포로 심문을 통해 이순신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행보를 알게 됐다. 일본군은 급하게 됐다. 일본 수군을 급히 남해로 전환함과 동시에, 일본 좌군 ‘별동대’는 일본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라도를 휩쓸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도 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재임명 교서를 받은 지 보름이 지나고,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아직 ‘수중’에는 단 한척의 전선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 속히 배설이 지휘하던 12척의 판옥선 행방을 찾고, 넘겨받아야 ‘수군 재건작전’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다. 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8일, 이순신은 ‘보성’(군영구미 : 보성군 회천면)을 출발하여 ‘장흥(회령포)’으로 향했다. 보성의 백성들이 제공한 배(향선-鄕船) 10척에 그간 확보한 식량, 무기들을 실었다. 통제사로 재임된 뒤 그토록 그리던 바다에 처음으로 올랐다. 이튿날, ‘장흥(회령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군에 제일 중요한 ‘전선(판옥선)’을 넘겨받았다. 그 동안은 지휘할 전선도, 전선을 움직일 병사도, 그들을 먹일 군량도, 전투에 필요한 화약 등 무기도 없었다. 칠천량에서 잃은 160여 척의 판옥선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지만, ‘수군재건의 길’에 나서면서 노심초사하던 이순신에게는 ‘천군만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제야 ‘이젠 됐다’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구속돼 바다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다시 배에 오른 ‘군영구미(군학)’. 이곳이 ‘이순신의 수군 재건의 길’의 육상 종점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장흥(회령포)으로 이동했다(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다음날 아침, 임금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숙배행사’를 행했다. 이순신은 장졸들에게 임금이 내린 교서와 임명 교지를 공개했다. 그리고 “한 번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깝겠는가. 오직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쳤다. 이순신장군이 재임명 교서를 받은 지 16일 만에 700리 길을 걸으며 ‘함대’를 건설하고 나서야 삼도수군통제사로 ‘취임하는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이순신함대는 바닷길을 통해 해남의 ‘이진’과 ‘어란진’, 진도의 ‘벽파진’을 거치면서 일본군과 싸울 최적의 장소인 ‘명량’으로 진출하게 된다.
결전의 장소를 찾아 나선 조선 수군. 이를 추격하는 일본 수군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알게 된 일본 수군은 급히 남해 바다로 나와 이순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수군 철폐령’에 대해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쓴 ‘반발’의 장계를 ‘선전관’이 들고 한양으로 떠난 날이었다. 이순신이 단 한 척의 전선을 갖지도 못한 상태인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함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일본 수군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된 지 16일째(8월 18일). 군영구미에서 배에 올라 ‘장흥(회령포)’에 도달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꿈에 그리던 판옥선을 인수했다. 그러나 ‘배설’은 뱃멀미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숙배행사’와 함께 ‘취임행사(출정식)’을 갖고, 결전의 현장 ‘명량’을 향해 나아갔다(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2184)
8월 18일, 천신만고 끝에 회령포에 도착하고서야 ‘배설’이 빼돌린 판옥선 12척을 회수하여 ‘함대 창설식’과 ‘통제사 취임식’을 개최했다. 아직 함대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했고, 결전을 펼칠 ‘전장(戰場)’도 정하지 못했는데 일본 수군이 쫒아오고 있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척’의 함대로는 일본의 대 함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아는 이순신은 ‘결전’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서 서진해야만 했다.
8월 20일 ‘회령포’를 떠난 이순신함대는 탐망군 첩보를 통해 일본군의 서진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진’(해남군 북평면), ‘어란진’(해남군 송지면)을 거쳐 ‘벽파진’(진도군 고군면)에 이르렀다. 어느 곳도 소규모의 조선 수군으로 일본 수군을 상대하여 결전을 시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넓게 트인 바다는 소규모 함대에게는 결전의 장소로는 절대 불리한 곳이다. 벽파진에 이르고서야 최종 결전의 장소로 ‘명량(울돌목)’ 일대가 정해졌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신설(?) 함대’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으나, 함대의 세부 전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런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이순신 함대가 주둔하던 곳을 추적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조선 수군의 전력을 탐색해왔다. 그게 ‘어란진해전’이고 ‘벽파진 해전’이었다.
회령포를 떠나 ‘이진’으로 함대를 옮겼다.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사흘을 몸져누워야만했다. 수군 재건이란 큰 부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의 과로가 겹쳤을 것이다. 그리고 곧 있을 큰 전투를 앞두고 심리적으로 부담이 됐을 것이다(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 어란포 해전 -
칠천량 패배의 바다를 빠져나갔던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하여 ‘취임행사’를 마친 이순신 함대는 ‘이진’(해남군 북평면)을 거쳐 함대를 수용하기에 보다 유리한 ‘어란포’(해남군 송지면)로 진을 옮겼다. 어란포로 진을 옮긴지 사흘이 되던 26일, 탐망선으로부터 ‘이진’에 일본 수군들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진’은 이순신 함대가 이틀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장군의 존재와 복직, 조선 수군의 재건 진행 상황을 알게 됐다. 급히 남해 바다로 나온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찾아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30km 미만) 접근해온 것이다.
8월 28일 일본 전선 8척이 ‘어란포’ 일대까지 정탐하러 왔다가 이순신 함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탐활동을 펴던 일본 수군(8척)은 조선 수군의 추격을 받자마자 재빨리 도주하면서 직접적인 교전 없이 상황은 끝났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 후의 첫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을 퇴각시킴으로써 그간 침체됐던 조선 수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번 교전을 통해 일본군의 서진(西進)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됐고, 머지않아 피할 수 없는 일전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단서가 된 것이었다. 조선 수군을 추적하던 일본 수군도 드디어 조선 함대의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어란진’에 들이닥친 일본 수군의 도발. 일본 수군이 조선의 ‘신설(?) 함대’를 지속적으로 추격해왔다는 명확한 증거다. 칠천량해전 후의 첫 교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했다. 이제 결정적인 ‘일전’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 벽파진 해전 -
이순신은 8월 29일, 일본 수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곳 진도 ‘벽파진’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벽파진 직후방이 바로 울돌목, 명량으로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는 곳이다.
이순신 함대는 장흥(회령포)에서 곧바로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일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 간격으로 ‘진’을 옮기면서 ‘조금씩’ 서진했다. 일본 수군을 맞아 결전을 펼칠 장소를 찾느라 이동을 늦춘 측면도 있지만, 일본 수군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명량’으로 유인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벽파진에서 보름 이상 머무르다가 명량해전 발발 하루 전날에 울돌목을 지나 우수영 쪽으로 이동했다. 벽파진에서 전라좌수영 판옥선(1척)이 합류함으로써 조선 수군은 총 13척의 함대가 됐다.
9월 7일, 탐망군으로부터 일본군 전선 13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전선들이 어란포를 출발하여 ‘벽파진’으로 접근해왔다. 이순신 함대가 돌진하며 일본 수군에 맞서 공세를 취하자, 아군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일본 함대는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일본수군들이 칠천량해전을 거치면서 분명히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비록 일본 함대가 물러났으나 야간을 이용하여 재차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전 함대가 철저히 대비하게 했다. 예상대로 한밤중에 일본함대가 다시 공격해왔다. 이순신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전 함대가 함포로 공격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자정 어간에 완전히 물러갔다. 이번의 ‘벽파진해전’도 조선 수군의 세력 규모를 파악함은 물론, 울돌목 일대의 지형과 물살을 살피기 위한 정탐 기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전투를 통하여 일본은 조선 수군의 규모가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순신이 복귀하여 조선 함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서해 바다로 넘어가는 길목 ‘벽파진’.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다. 벽파진 앞바다는 섬도 많지 않고 넓게 트여 대 함대(최소 100척 이상, 최대 300척)를 맞아 싸울 전장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이순신은 결전의 장소로 ‘명량’을 선택했다. ‘전장’은 조선 수군이 정할 수 있지만, 결전의 ‘시기∙때’는 일본 수군이 정하게 됐다. 이곳까지 일본 수군을 끌어들였고, 이곳에서 2회의 교전이 있은 후 양국 수군은 각 진영으로 복귀하여 ‘결전’을 준비하게 됐다(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59)
벽파진에 머물던 9월 14일, 탐망군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고 보고해 왔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진출 상황과 함께 곧 일전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벽파진’을 떠나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대비하게 됐다. 벽파진의 여건은, 소규모 함대로서는 막다른 좁은 길목인 명량을 등지고 있어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하여 싸우기엔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진영을 옮긴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전’은 이렇게 펼쳐졌다
9월 16일 아침 일찍 7시경 ‘순조류’를 타고 ‘어란진’을 출발한 일본 함대(300여 척의 전선)은 오전 10시 경 명량수로까지 접근해왔다. 일본군은 앞서 있었던 ‘어란진∙벽파진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력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아무리 전승(全勝)의 지휘관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함대라 할지라도 양국 간의 전력을 비교할 때, 일본군에겐 조선 수군이 조금도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은 대형 전선인 ‘아타게부네’가 협수로를 통과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중형 전선인 ‘세키부네’ 133척 만으로 진용을 짜고 명량 협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어란진∙벽파진∙명량해전 위치
탐망보고를 통해 이미 일본 함대의 명량으로의 접근 상황을 파악한 이순신 함대는 ‘전라우수영’ 전방에 위치한 ‘양도’ 일대로 나와 ‘일자진’ 진형을 갖추고 일본 함대가 접근해오기를 기다렸다. 진용 후방에는 피난민들이 운용하는 100여 척의 ‘향선’이 조선 수군의 위용을 더해줬다. 명량해협을 통과한 일본 함대는 우수영 앞바다(직전방의 양도 주변)에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이순신 함대를 향해 돌진하여 에워싸면서 명량해전이 시작됐다.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로 추정된다.
명량해전의 기적적인 승리 요인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철쇄’(鐵鎖). 결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에 해당된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철쇄가 명량해전 승인 중 하나로 역할을 했다는데 ‘난중일기∙장계∙실록’ 등의 역사적 기록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철쇄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임란 후 200년 지난 후에 작성), 전라좌수사 ‘김억추’의 후손들이 선조의 무용담을 적은 개인적 기록(호남절의록)을 제시하지만, 대체로 ‘설화’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임란 전, 여수 앞바다에 설치한 전라좌수영의 ‘철쇄’를 사례로 비교하여 주장하기도 한다. 전라좌수영의 철쇄 설치 장소는 ‘내해’라 조류 속도가 울돌목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다. 무엇보다, 울돌목의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는 가운데 ‘수군 재건’을 달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어서 엄청난 공사를 요하는 ‘철쇄’를 설치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이곳의 철쇄 전시물은 오류와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왜곡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우수영국민관광지)
전투에 앞서,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必死卽生), 살려고 하는 자는 곧 죽을 것이다(必生卽死)’라며 결전의지를 다졌으나, 정작 해전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장수들은 뒤로 물러설 태세였다. 이 때문에 최초에는 이순신의 대장선만이 강한 역류 속에서 일본군에 둘러싸인 채 홀로 적선을 향해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면서 한 시간 이상을 방어했다. 이로서, 대장선 군사들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겁’에 질린 나머지 동요하자, 이순신은 “적이 비록 1000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라”며 독전했다.
처음부터 겁에 질려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나머지 조선 전선들은 대장선이 ‘건재함’을 보고서야 대장선에서 올린 ‘군령 깃발’의 명령대로 거제현령(안위) 등이 급히 달려왔다. 조금 지나자, 나머지 전선들도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펼쳐졌다. 시간이 흘러 12:40분 경(추정) 조류가 이순신 함대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뀌었고, 바뀐 조류를 타고 이순신 함대 전 전선은 일본 함대를 향해 우세한 화력을 이용하면서 돌진하자 일대 혼전이 펼쳐졌다.
혼전 중, 최선두에 섰던 ‘안위’의 전선이 일본군에 포위되면서 한때 위기에 처하게 됐다.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을 구출하는 과정에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남동류’가 점차 빠르게 흘렀고, 파괴된 일본군 전선은 서로 뒤엉킨 상태에서 명량해협을 벗어나 벽파진 방향으로 떠내려갔다. 순조류를 타고 일본 함대를 추격한 이순신 함대는 벽파진 아래에서 해적 출신인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한 다음 효시(梟示)하자 일본군의 기세가 일순간 꺾이고 말았다.
울돌목의 ‘조류’. 이곳의 조류는 최대 13노트까지 관측되기도 하나 통상 7~10노트의 유속을 보인다. 명량해전 당일엔 약 9.7노트의 북서류가 흘렀다가 8.4노트의 남동류가 흘렀다. 이 정도면, 동력선으로도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힘든 정도이고, 노를 저어 기동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전함들의 기동이 거의 불가할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 해전이 벌어졌던 곳은 이곳 ‘울돌목’이 아니라 우수영 앞 ‘양도’ 일대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양도 일대의 조류는 이 보다는 훨씬 약해서 해상전투가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467-9)
칠천량 해전 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압도적인 우세를 통해 이순신 함대를 맞선 일본 함대는 의외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31척의 전선을 잃었다.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양국 수군 간에 대치를 계속하며 관망하던 중 일본함대가 조류를 타고 패주함으로써 명량해전은 종료됐다. 오후 3시경이었다. 전투를 끝낸 이순신 함대는 건너편 포구로 옮겼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자 다시 당사도(신안군 암태면) 일대로 함대를 옮겨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이순신장군은 이 전투를 정리하면서 ‘명량해전의 승리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차실천행. 此實天幸)’라고 했다.
명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의 활동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조선 수군은 단 한척의 전선도 잃지 않은 반면, 일본군은 전선 31척이 격침되고 100여 척이 반파되는 등 완벽하게 패했다. 명량해전이 끝난 직후, 이순신장군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비록 승전을 하였으나 일본 함대를 상대하여 더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겨우겨우 마련했던 전투물자 모두를 명량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맞아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도 지쳤고, 전선도 많은 손상을 입었다. 당장 손을 쓰고 보충하지 않으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조치함에 있어서 조정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없이 전적으로 수군 자체에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비. ‘만약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순신장군이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1593년 7월 16일) 현덕승(사헌부 근무 후배)에게 보내는 답서에 기록된 구절이다. 편지에서 호남을 지키기 위해 한산도로 진을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임을 밝혔다.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우수영국민관광지)
명량바다를 빠져나온 이순신함대는 신안군의 당사도와 어의도, 영광 법성포, 부안의 위도를 거쳐서 군산의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물러나 북상한 다음, 명량의 전라 우수영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만 실시한 다음 남해 동부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명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이 전장을 이탈한 것을 이유로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을 통과한 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한강까지 진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동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명량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육지에서 ‘직산’(천안시)까지 북상했던 일본 지상군이 조∙명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어 울산과 순천 등으로 남하하는 상황과 보조를 맞추어 함대를 경상도 쪽 바다로 되돌렸다.
명량해전 후 이순신 함대가 서해를 따라 군산 고군산군도까지 올라갔던 ‘북상로’. 가진 것 모두를 쏟아 부었던 명량해전. 일단은 한발 물러나 서해를 순항하며 함대를 정비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만했다. 순항에 나선 지 40여 일만에 남해로 복귀하면서 ‘고하도’에서 108일간 주둔했다. 이곳에서 제2의 수군 재건에 매진했다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했던 이순신 함대는 이곳에서 함대를 정비하였으며, 일본군을 추격하는 조∙명연합군(육군)과 보조를 맞추며 다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된다. 육군과 병행하여 남하해온 이순신함대는 목포의 ‘고하도’에 임시 통제영을 설치했다. 1597년 10월 29일이니, 이미 겨울의 초입이라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로 인해 더 이상 해상작전은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가 가장 중요한 업무다. 다음해 2월까지 108일 간 고하도에서 겨울을 나면서, 본격적인 재건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수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선 건조, 병력 충원, 군수물자 확보, 그리고 군사훈련 등을 실시했다.
이순신은 이 기간을 활용하여 무려 40여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고 병력도 두 배로 불렸다. 판옥선의 증가에 해당되는 병력과 군량은 물론 필요한 무기(총통, 활, 화살, 화약 등)를 확보하는 등 또 다른 엄청난 기적을 만들었다.
명량해전 이후의 작전은 이렇게 전개됐다
명량해전 직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쫓아 해남의 우수영을 넘어 ‘무안’ 일대까지 추적했으나 조선 수군을 찾지 못했다. 육지에서는 ‘직산전투’에서, 바다에서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대부분의 부대를 남부 지방으로 회군한 다음, 왜성을 축성하여 장기 주둔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일본 수군도 전라도 바다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육군과 함께 월동(越冬)을 위해 영남 남해안의 근거지로 회군했다. 이때 일본군은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 등을 축성하여 정유재란 마지막까지 결전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일제 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강제 철거되어 서울(경복궁 내)로 옮겨갔다. 광복 후 ‘되찾기 운동’을 펼친 끝에 1947년 해남(학동리)으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2011년에 최초의 설립지인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정유재란 말기인 1598년, 조∙명연합군은 남해안으로 회군한 일본군을 향해 대반격을 실시한다. 이때 4개 방면에서 총공세를 펼쳐 왜군을 축출하기 위한 전략인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시행하게 된다.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왜성이 공격의 목표이다. 이때 조∙명 연합 수군은 해로를 통해 순천왜성 공략에 가담하게 된다. 조∙명 연합 수군과 육군에게 포위됐던 ‘순천성 전투’ 후에 노량해전으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면서 한반도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7년 전쟁이 마무리된다.
명량해전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제해권 확보에 성공했다. 또한, 칠천량 패전의 늪에서 빠져나와 완전하게 제기하는데 성공했고, 왜소했던 수군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7년 전쟁의 ‘분수령’이자 ‘역전의 발판’이 아닐 수 없다.
정유재란 당시 육상의 ‘직산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들이 남부지방으로 후퇴하여 쌓았던 왜성 중의 하나인 ‘순천왜성(왜교∙예교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축성했다(보조 사진은 당시의 왜성 전체 모습이다). 전쟁 마지막 해인 1598년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예교해전’이 있었고, 뒤이어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펼쳐졌다(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수군 재건 길∙명량해전지에 대한 답사여행을 하려면...
이순신과 관련된 주요 ‘길’은 ‘백의종군길’(670km)과 ‘수군 재건길’(270km)이 있다. 이중 ‘백의종군길’은 이순신장군이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초계(경남 합천)’까지 갔던 670km의 길을 말한다. 8월 3일 통제사에 재임명될 때까지는 백의종군 신분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의 모든 활동도 백의종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수군재건길’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3일 ‘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진주(손경례 가옥)를 출발하여 수군 재건에 필요한 병력∙군량∙무기∙전선을 확보하며 전라도 ‘군학(군영구미)’(보성군 회천면)까지의16일 간 이동했던 700리(270km) 길을 말한다. 어느 길이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인지는 개개인이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이순신 함대가 108일 간이나 주둔했던 임시 통제영 ‘고하도’. 이곳은 북풍을 막아주어 전함을 보호하기 좋았고, 영산강을 통해 나주평야의 곡물 등 군수물자 운반하기에 편리한 길목이다. 이곳에서 조선 수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는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의 하나로 작용했다. 고하도 유적지에는 진성(鎭城)터가 남아 있으며, 이충무공 기념비를 모신 ‘모충각’이 있다(목포시 달동 산 214-6)
백의종군길은 ‘(사)한국체육진흥회’가 주관이 되어 전 구간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리본’을 부착 완료된 상태이며, 백의종군길 걷기 관련하여 행사가 많이 개최되고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답사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수군 재건길’은 전라남도에서 ‘조선수군 재건로’라 명명하여 구례 ‘석주관 7의사 묘’를 출발하여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까지 8개 시∙군을 연결하여 안내하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해상(판옥선)으로 이동한 구간은 ‘육로’로 안내하고 있다. 이 길은 이순신장군의 수군 재건 활동과 관련된 곳은 물론, 주변의 ‘관광 명소’들까지 포함해서 안내하고 있다.
이 길에 대한 ‘안내지도’는 별도로 제시하지 않고 주요 명소 ‘사진’과 함께 ‘주소’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선수군 재건로’에 관한 자료는 전남도청 관광과( 061-286-5230~1)으로 문의하면 관련 자료를 ‘파일’로 제공해준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 이 훈, <이순신과의 동행>, 푸른 역사, 2014
* 전라남도, <조선 수군 재건로, 명량으로 가는 길>, 전라남도 관광과, 2015
‘수군 철폐령’을 극복하고 ‘천행(天幸)’으로 이룬 ‘명량의 기적’
조선의 ‘운명(運命)’을 바꾸다!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보는 ‘명량해전’의 현장 울돌목 주변. 칠천량 바다에서 ‘참패’했던 조선 수군이 한 달 동안 ‘속성’으로 건설한 ‘초미니 함대’로 ‘10배’가 넘는 일본 수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진도대교 북서쪽 ‘양도’ 일대의 바다가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교 오른 쪽으로 ‘우수영 국민관광지’가 보인다(진도타워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명에 이르는 대 병력을 편성하여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이 전쟁이 1597년에 있었던 정유재란이며, 그 시작점은 ‘칠천량해전’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넘어 명나라까지 진출하려던 임진전쟁의 목표를 ‘조선 4도 점령’으로 조정했고, 이에 따라 조선의 남해 바다에 대한 제해권 확보와 전라도 함락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전쟁을 재개했다.
일본군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와해시킨 후, 공세의 박차를 가하여 1달 만에 전라도 요충지인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 수군은 바다로 나와 전라도로 공략해 나갔다.
칠천량 패전으로 인해 조선 수군 전체가 사라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은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하여 수군을 재건하게 한다. 그러나 그간의 전투에서 전승(全勝) 신화를 창출한 이순신이라 할지라도 수군을 재건하여 일본 수군을 맞아 대적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 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순신은 말없이 ‘전라도’로 향했다. 그나마 전화(戰禍)로부터 피해를 덜 입은 전라도, 제일 익숙한 곳 전라도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한 가마니의 군량이라도 더, 한 명의 군사라도 더, 한 점의 무기라도 더, 한 척의 전선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고난의 여정을 이어갔다.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서며 수군 재건에 나선지 보름 만에 12척이라는 초라하지만 ‘정예 함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순신함대를 쫓아 맹렬히 서진해온 일본 대 함대를 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의 접경인 ‘울돌목’에서 맞아 한 판 싸움을 벌였다. 이곳을 통과해 서해 바다로 들어서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완전히 꺾은 ‘대첩’을 이뤘다. 이 대첩은 정유재란의 국면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 7년간 끌어온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 대첩의 토대는 16일간의 ‘수군 재건’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화 된 것이다.
선조, 칠천량 패전의 뒷수습을 이순신에게 맡겼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뒤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한지 석 달 보름이 지날 때,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소식을 접했다. 7월 18일 칠천량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그날의 일기에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듣고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임진왜란 5년 동안 힘들여 키워온 조선 수군이 하루아침에 궤멸되고 말아, 울음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가장 먼저 찾았던 ‘노량 바다’. 동고동락하던 장수와 병사들을 만나 위로하고 당시의 전투상황을 전해 들었다. 뒤로 남해대교(1973년)와 노량대교(2018년)가 나란히 보인다(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이미 저질러진 일이고, 누군가는 수습해야만 했다. 이순신은 도원수에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보고한 다음 패전의 그 바다로 나갔다. 그 길에서 패전의 현장에 있다 생환한 장수들로부터 전장 상황을 제대로 듣고 싶었다. 패전의 현장에 가까운 ‘노량’에서 거제현령(안위), 영등포 만호(조계종) 등 동고동락했던 옛 부하들, 칠천량 바다에서 전선을 이끌고 도망쳐 나온 경상우수사(배설)도 만났다. 백의종군 중인 처지라 특별히 조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일본군에 대적할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눴을 뿐이다. 그러고서 그간의 행적과 참전 용사들과 나눴던 의견을 종합하여 도원수에게 보고한 다음, 진주의 ‘손경례의 집’(수곡면 원계리)으로 거처를 옮겨 묵으며, 향후의 대책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중이던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 받았던 ‘진주 손경례 가옥’. 선조는 이때 내린 ‘교서’에서 자신의 과오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사과하며 수군 재건을 당부했다(진주 수곡면 원계리)
8월 3일 진주 ‘손경례 집’에서 3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받았다. 선조는 교서를 통해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의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다. 그래서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조의 교서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직책을 맡아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선조 자신이 자초한 일이기는 하나 자존심도 상하고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었다. 이로서 이순신은 백의(白衣)를 벗고 ‘3도 수군통제사’란 직책으로 휘하 장졸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이순신장군, 그는 말없이 ‘수군 재건’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떠났다.
이순신이 걸었던 ‘수군 재건의 길’, 결과는 명량해전의 승리였다
정유재란을 얘기할 때는 칠천량에서의 참패, 명량∙노량에서의 승전 등 큰 전투 중심으로 얘기한다. 7년 전쟁의 대전환점이 됐던 명량해전, 긴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게 한 이순신장군의 피 눈물 났던 ‘수군재건의 과정’은 그렇게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군 재건’이란? 전패를 당한 수군, 남은 것이라곤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것 없는 수군을 일본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룩한 것이라 더욱 눈물겹다. 그 현장을 함께 가고자 한다.
바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육지를 떠돌며 ‘수군 재건’을 위해 걸었던 14박16일 간의 대장정 700리길(진주 수곡~장흥 군영구미)
-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십여 명의 장졸들만 대동하고 그날 바로 ‘수군 재건’을 위한 장도에 올랐다. 목적지는 ‘전라도’이다. 이순신이 전라도를 목적지로 정한 것은, 과거 전라좌수사나 발포만호로 재직하면서 지역 여건을 잘 알고 있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전라도가 개전 이래 가장 피해가 적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물산이 풍부한지라, 무너진 수군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전라도가 ‘최적지’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됐지만 배도, 군사도 없는 빈손의 통제사다. 수군 재건의 길을 나섰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이순신이 인수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해야 불과 10여 척에 불과한 전선과 전쟁공포증에 감염됐을 일부 장졸들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수군 재건의 대 장정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공격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軍器), 군량, 군선(軍船)을 확보해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8월 3일 진주를 떠나 8월 17일 그토록 그리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15일 간 300여km의 대 장정인 것이다. 지척의 거리에서 진격 중인 일본군을 피해가며 군사∙무기∙군량미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하동의 ‘두치진’(두곡마을). 남해바다를 거쳐 올라온 일본 수군들이 이곳에서 육지로 올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다(소형선박들은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올라갔다). 전라도로 직행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이순신장군이 이곳 ‘두치진’을 지나가고 한 나절 뒤에 일본군이 이곳을 지나 구례까지 진출하여 상륙했다(하동읍 두곡리)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날 일본 육군(좌군)은 진주성을 무혈입성한 후, 남원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좌군의 남원성으로 향하는 침략 접근로와 이순신의 수군 재건 길이 비슷한 시기에 하동의 ‘두치진’에서 교차할 뻔 했다. 한 나절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지체했다가는 자칫 왜군을 만날 수도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이 전멸하면서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군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일본군 14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눠 전라도를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가기 시작했다. 지리멸렬한 조선 수군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전라도 바다로 향하는 것은 일단 제쳐놓고, 남원성전투에 집중 투입됐다. 일본군은 과연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장군에 관해서 생각은 하였을까...? 이순신장군이 복직했는지 여부도 확실히 인지한 것도 아니고, 이순신장군이 돌아왔다 치더라도 전함도 없고, 수군도 흩어져 없는 상황에서 그가 돌아와 본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 온 마을이 텅텅 비었다. 무엇으로 수군을 건설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
구례를 거쳐 전라도 내륙, 남원∙전주에 이르는 관문 ‘석주관’ 일대. 석주관문을 지키다 순절한 구례 출신 ‘칠(7) 의사’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례현감을 함께 모신 ‘칠(7)의사 묘’가 있다. 이곳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병 153명과 일반 의병 3500명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이순신 일행은 하동을 거쳐 ‘구례’에 다다른다. 구례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남원성으로 진출하는 일본군도 이곳 구례를 거쳐서 갔다. 구례 입구에 있는 ‘석주관성’ 방어에 필요한 물자와 남원성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보낸 뒤라 ‘구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일본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산성으로 옮기거나 감추거나 태우는 ‘청야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한 ‘곡성’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청야책이 일본군에 대비하는 최선책이 될지 모르나,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이순신에게는 필요한 어느 것도 구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본 육군이 하동(악양)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순신 일행이 이동하는 길은 수많은 피난민 백성으로 가득 찼다. 이순신장군은 이들 피난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조선 수군 재건’에 장정들이 동참해줄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피난민 중에서 많은 지원자들이 수군 재건 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순천에 도착할 때는 60명으로, 보성에 도착할 때는 120명이 되었고 계속 지원자가 늘어났다. 모집 인원만으로 병력을 충원할 수 없는 경우 일부는 긁어모은 무지렁이 백성도 없지 않았다. 또한, 과거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많은 부하들이 찾아와 합류함으로써 이순신장군에게 힘을 보탰다. 이제, 군관을 포함한 군사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 가능성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군량미∙전선 확보 문제는 여전히 이순신장군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군재건 길에 올라 첫날을 묵은 구례 ‘손인필 집’ 일대. 백의종군 중에도 묵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묵으며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한 ‘최초 결의’를 다졌다. ‘손인필’을 기리는 비각이 있는 곳에 ‘조선수군 출정공원’을 조성했다(구례읍 봉북리 258)
구례와 곡성을 떠난 대장정(大長程)은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은 전라도 중에서도 인원과 물자가 풍부한 곳이라 많은 것을 기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곡성을 출발할 즈음 일본군(좌군)이 구례에 당도하고 있었다. 이순신 일행과 약 30여 km의 거리여서 말로서는 1~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서로 스치듯 지나갔다.
일본군은 남원성전투에 집중한 나머지, 당시에는 이순신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이순신이란 존재가 아예 잊힌 상태라,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러나 순천 또한, 남원성 집결을 명받은 전라병사(이복남)가 청야책을 시행하고 떠난 다음이라 텅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원성으로 떠나면서 순천 관내의 많은 창고들을 불태웠지만 ‘무기’만큼은 소각하지 않고 남겨두고 떠났다. 이순신장군이 반드시 순천을 다시 찾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획득한 활∙화살∙창∙화약 등은 져 나르고, 총통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을 위해 땅에 깊이 묻고 표시해뒀다.
곡성군 ‘옥과’. 이순신장군이 옛 군관들을 각지로 보내 병력 확충을 위해 총력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곳이다. 정탐보고를 통해 일본군의 주(主) 진군로가 북쪽(남원) 방향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순신은 행로를 급격히 남쪽으로 돌려 ‘순천’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순천∙낙안은 모든 물자가 풍부했던 곳이다(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 ‘수군을 혁파하라’는 왕명에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며 반발하다 -
대장정은 ‘보성’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의 군사와 무기는 확보하였지만, 아직 ‘군량미’ 확보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낙안’의 군량창고는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8월 9일 도착한 보성의 ‘조양창’(세곡보관창고)과 군기창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순신장군은 안도할 수 있었다. 봉인된 창고에서 군량미 1,200가마를 확보했다. 장정 600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식량인 것이다.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칠천량 패전으로 흩어졌던 옛 부하 장수들이 속속 모여들고, ‘의승(義僧)’들도 규합하기 시작했다.
군량 가득한 채 봉인돼 있던 보성 ‘조양창’ 터. 사람은 없고 창고의 곡식∙무기들을 봉해둔 채 그대로였다고 한다. 마을 뒤 ‘창등’ 일대에 창고가 있었다. 주변에 성곽 흔적과 우물 2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성곽을 이루던 돌을 마을 돌담도 쌓고, 득량만 방조제를 쌓을 때 사용했다니 기분이 묘하다. 또한 주변에 자라는 ‘신우대’로 화살을 제조했다고 한다(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150-1)
8월 15일 중추절에, 선조는 ‘선전관’을 통해 보성의 ‘열선루’로 ‘유지’를 보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수군재건을 중지하고 육군에 합류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우라”는 임금 선조의 명령 즉, ‘수군 철폐령’인 것이다. 조선 수군의 실체는 아직도 확실치 않고, 한양으로 치고 올라오는 일본 육군의 기세가 맹렬하여 남원성 방어를 위한 병력이 필요해서 내린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로 알려진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썼다. 이순신은 하루 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전라도를 지키는 것이 조선 전체를 구하는 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하여 장계를 올린 것이다. 조선 수군을 폐지하라는 선조의 ‘유지’에 대한 ‘거부’이자 ‘항명’을 한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없어지는 것은 일본군이 제일 원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됐을 때, 일본 수군이 서해를 통해 한양까지 바로 위협할 것이라는 것을 조정(선조)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순신장군이 ‘수군 재건’을 위해 분투 중일 때 선조로부터 ‘수군을 혁파하라’는 왕명을 받은 곳 보성 ‘열선루’. 이순신은 이곳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려 왕명에 ‘반발’하며 조선 수군 건설을 계속하여 명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보성읍성은 일제 강점기 때 폐성되었다. 열선루와 읍성을 이루던 각종 석재들이 1960년대까지 주변에 있었으나 학교 확장 공사 등으로 인해 소실되고 몇 점의 댓돌 등만 전해지고 있다. 현재, 보성 ‘신흥동산’ 일대에 ‘열선루’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보성군 보성읍 주봉리 308-7)
- 일본군의 추격 상황 속에서 ‘정예함대’를 창설하다 -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획득한 포로 심문을 통해 이순신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행보를 알게 됐다. 일본군은 급하게 됐다. 일본 수군을 급히 남해로 전환함과 동시에, 일본 좌군 ‘별동대’는 일본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라도를 휩쓸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도 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재임명 교서를 받은 지 보름이 지나고,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장계를 올렸지만 아직 ‘수중’에는 단 한척의 전선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 속히 배설이 지휘하던 12척의 판옥선 행방을 찾고, 넘겨받아야 ‘수군 재건작전’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다. 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8일, 이순신은 ‘보성’(군영구미 : 보성군 회천면)을 출발하여 ‘장흥(회령포)’으로 향했다. 보성의 백성들이 제공한 배(향선-鄕船) 10척에 그간 확보한 식량, 무기들을 실었다. 통제사로 재임된 뒤 그토록 그리던 바다에 처음으로 올랐다. 이튿날, ‘장흥(회령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군에 제일 중요한 ‘전선(판옥선)’을 넘겨받았다. 그 동안은 지휘할 전선도, 전선을 움직일 병사도, 그들을 먹일 군량도, 전투에 필요한 화약 등 무기도 없었다. 칠천량에서 잃은 160여 척의 판옥선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지만, ‘수군재건의 길’에 나서면서 노심초사하던 이순신에게는 ‘천군만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제야 ‘이젠 됐다’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구속돼 바다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다시 배에 오른 ‘군영구미(군학)’. 이곳이 ‘이순신의 수군 재건의 길’의 육상 종점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장흥(회령포)으로 이동했다(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다음날 아침, 임금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숙배행사’를 행했다. 이순신은 장졸들에게 임금이 내린 교서와 임명 교지를 공개했다. 그리고 “한 번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깝겠는가. 오직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외쳤다. 이순신장군이 재임명 교서를 받은 지 16일 만에 700리 길을 걸으며 ‘함대’를 건설하고 나서야 삼도수군통제사로 ‘취임하는 행사’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이순신함대는 바닷길을 통해 해남의 ‘이진’과 ‘어란진’, 진도의 ‘벽파진’을 거치면서 일본군과 싸울 최적의 장소인 ‘명량’으로 진출하게 된다.
결전의 장소를 찾아 나선 조선 수군. 이를 추격하는 일본 수군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알게 된 일본 수군은 급히 남해 바다로 나와 이순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선조의 ‘수군 철폐령’에 대해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쓴 ‘반발’의 장계를 ‘선전관’이 들고 한양으로 떠난 날이었다. 이순신이 단 한 척의 전선을 갖지도 못한 상태인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함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일본 수군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된 지 16일째(8월 18일). 군영구미에서 배에 올라 ‘장흥(회령포)’에 도달한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꿈에 그리던 판옥선을 인수했다. 그러나 ‘배설’은 뱃멀미를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숙배행사’와 함께 ‘취임행사(출정식)’을 갖고, 결전의 현장 ‘명량’을 향해 나아갔다(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2184)
8월 18일, 천신만고 끝에 회령포에 도착하고서야 ‘배설’이 빼돌린 판옥선 12척을 회수하여 ‘함대 창설식’과 ‘통제사 취임식’을 개최했다. 아직 함대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했고, 결전을 펼칠 ‘전장(戰場)’도 정하지 못했는데 일본 수군이 쫒아오고 있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척’의 함대로는 일본의 대 함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아는 이순신은 ‘결전’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서 서진해야만 했다.
8월 20일 ‘회령포’를 떠난 이순신함대는 탐망군 첩보를 통해 일본군의 서진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진’(해남군 북평면), ‘어란진’(해남군 송지면)을 거쳐 ‘벽파진’(진도군 고군면)에 이르렀다. 어느 곳도 소규모의 조선 수군으로 일본 수군을 상대하여 결전을 시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넓게 트인 바다는 소규모 함대에게는 결전의 장소로는 절대 불리한 곳이다. 벽파진에 이르고서야 최종 결전의 장소로 ‘명량(울돌목)’ 일대가 정해졌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신설(?) 함대’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으나, 함대의 세부 전력에 대해서는 아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런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이순신 함대가 주둔하던 곳을 추적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조선 수군의 전력을 탐색해왔다. 그게 ‘어란진해전’이고 ‘벽파진 해전’이었다.
회령포를 떠나 ‘이진’으로 함대를 옮겼다. 이순신장군은 이곳에서 사흘을 몸져누워야만했다. 수군 재건이란 큰 부담으로 인해 몸과 마음의 과로가 겹쳤을 것이다. 그리고 곧 있을 큰 전투를 앞두고 심리적으로 부담이 됐을 것이다(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 어란포 해전 -
칠천량 패배의 바다를 빠져나갔던 12척의 판옥선을 인수하여 ‘취임행사’를 마친 이순신 함대는 ‘이진’(해남군 북평면)을 거쳐 함대를 수용하기에 보다 유리한 ‘어란포’(해남군 송지면)로 진을 옮겼다. 어란포로 진을 옮긴지 사흘이 되던 26일, 탐망선으로부터 ‘이진’에 일본 수군들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진’은 이순신 함대가 이틀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장군의 존재와 복직, 조선 수군의 재건 진행 상황을 알게 됐다. 급히 남해 바다로 나온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찾아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30km 미만) 접근해온 것이다.
8월 28일 일본 전선 8척이 ‘어란포’ 일대까지 정탐하러 왔다가 이순신 함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탐활동을 펴던 일본 수군(8척)은 조선 수군의 추격을 받자마자 재빨리 도주하면서 직접적인 교전 없이 상황은 끝났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 후의 첫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을 퇴각시킴으로써 그간 침체됐던 조선 수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번 교전을 통해 일본군의 서진(西進)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됐고, 머지않아 피할 수 없는 일전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단서가 된 것이었다. 조선 수군을 추적하던 일본 수군도 드디어 조선 함대의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어란진’에 들이닥친 일본 수군의 도발. 일본 수군이 조선의 ‘신설(?) 함대’를 지속적으로 추격해왔다는 명확한 증거다. 칠천량해전 후의 첫 교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퇴했다. 이제 결정적인 ‘일전’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 벽파진 해전 -
이순신은 8월 29일, 일본 수군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곳 진도 ‘벽파진’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벽파진 직후방이 바로 울돌목, 명량으로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되는 곳이다.
이순신 함대는 장흥(회령포)에서 곧바로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일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 간격으로 ‘진’을 옮기면서 ‘조금씩’ 서진했다. 일본 수군을 맞아 결전을 펼칠 장소를 찾느라 이동을 늦춘 측면도 있지만, 일본 수군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명량’으로 유인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벽파진에서 보름 이상 머무르다가 명량해전 발발 하루 전날에 울돌목을 지나 우수영 쪽으로 이동했다. 벽파진에서 전라좌수영 판옥선(1척)이 합류함으로써 조선 수군은 총 13척의 함대가 됐다.
9월 7일, 탐망군으로부터 일본군 전선 13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전선들이 어란포를 출발하여 ‘벽파진’으로 접근해왔다. 이순신 함대가 돌진하며 일본 수군에 맞서 공세를 취하자, 아군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일본 함대는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일본수군들이 칠천량해전을 거치면서 분명히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비록 일본 함대가 물러났으나 야간을 이용하여 재차 공격해 올 것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전 함대가 철저히 대비하게 했다. 예상대로 한밤중에 일본함대가 다시 공격해왔다. 이순신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전 함대가 함포로 공격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자정 어간에 완전히 물러갔다. 이번의 ‘벽파진해전’도 조선 수군의 세력 규모를 파악함은 물론, 울돌목 일대의 지형과 물살을 살피기 위한 정탐 기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전투를 통하여 일본은 조선 수군의 규모가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순신이 복귀하여 조선 함대를 직접 지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서해 바다로 넘어가는 길목 ‘벽파진’.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다. 벽파진 앞바다는 섬도 많지 않고 넓게 트여 대 함대(최소 100척 이상, 최대 300척)를 맞아 싸울 전장으로서는 적절치 않다. 이순신은 결전의 장소로 ‘명량’을 선택했다. ‘전장’은 조선 수군이 정할 수 있지만, 결전의 ‘시기∙때’는 일본 수군이 정하게 됐다. 이곳까지 일본 수군을 끌어들였고, 이곳에서 2회의 교전이 있은 후 양국 수군은 각 진영으로 복귀하여 ‘결전’을 준비하게 됐다(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59)
벽파진에 머물던 9월 14일, 탐망군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했다’고 보고해 왔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진출 상황과 함께 곧 일전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벽파진’을 떠나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대비하게 됐다. 벽파진의 여건은, 소규모 함대로서는 막다른 좁은 길목인 명량을 등지고 있어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하여 싸우기엔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진영을 옮긴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전’은 이렇게 펼쳐졌다
9월 16일 아침 일찍 7시경 ‘순조류’를 타고 ‘어란진’을 출발한 일본 함대(300여 척의 전선)은 오전 10시 경 명량수로까지 접근해왔다. 일본군은 앞서 있었던 ‘어란진∙벽파진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전력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아무리 전승(全勝)의 지휘관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함대라 할지라도 양국 간의 전력을 비교할 때, 일본군에겐 조선 수군이 조금도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은 대형 전선인 ‘아타게부네’가 협수로를 통과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중형 전선인 ‘세키부네’ 133척 만으로 진용을 짜고 명량 협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어란진∙벽파진∙명량해전 위치
탐망보고를 통해 이미 일본 함대의 명량으로의 접근 상황을 파악한 이순신 함대는 ‘전라우수영’ 전방에 위치한 ‘양도’ 일대로 나와 ‘일자진’ 진형을 갖추고 일본 함대가 접근해오기를 기다렸다. 진용 후방에는 피난민들이 운용하는 100여 척의 ‘향선’이 조선 수군의 위용을 더해줬다. 명량해협을 통과한 일본 함대는 우수영 앞바다(직전방의 양도 주변)에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이순신 함대를 향해 돌진하여 에워싸면서 명량해전이 시작됐다. 시간은 오전 11시 전후로 추정된다.
명량해전의 기적적인 승리 요인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철쇄’(鐵鎖). 결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에 해당된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다. 철쇄가 명량해전 승인 중 하나로 역할을 했다는데 ‘난중일기∙장계∙실록’ 등의 역사적 기록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철쇄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임란 후 200년 지난 후에 작성), 전라좌수사 ‘김억추’의 후손들이 선조의 무용담을 적은 개인적 기록(호남절의록)을 제시하지만, 대체로 ‘설화’를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임란 전, 여수 앞바다에 설치한 전라좌수영의 ‘철쇄’를 사례로 비교하여 주장하기도 한다. 전라좌수영의 철쇄 설치 장소는 ‘내해’라 조류 속도가 울돌목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다. 무엇보다, 울돌목의 경우는 당시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는 가운데 ‘수군 재건’을 달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어서 엄청난 공사를 요하는 ‘철쇄’를 설치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이곳의 철쇄 전시물은 오류와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왜곡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우수영국민관광지)
전투에 앞서,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必死卽生), 살려고 하는 자는 곧 죽을 것이다(必生卽死)’라며 결전의지를 다졌으나, 정작 해전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장수들은 뒤로 물러설 태세였다. 이 때문에 최초에는 이순신의 대장선만이 강한 역류 속에서 일본군에 둘러싸인 채 홀로 적선을 향해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면서 한 시간 이상을 방어했다. 이로서, 대장선 군사들이 일본군의 공격으로 ‘겁’에 질린 나머지 동요하자, 이순신은 “적이 비록 1000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 힘을 다해 적을 공격하라”며 독전했다.
처음부터 겁에 질려 멀찌감치 물러나 있던 나머지 조선 전선들은 대장선이 ‘건재함’을 보고서야 대장선에서 올린 ‘군령 깃발’의 명령대로 거제현령(안위) 등이 급히 달려왔다. 조금 지나자, 나머지 전선들도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펼쳐졌다. 시간이 흘러 12:40분 경(추정) 조류가 이순신 함대에 유리한 ‘남동류’로 바뀌었고, 바뀐 조류를 타고 이순신 함대 전 전선은 일본 함대를 향해 우세한 화력을 이용하면서 돌진하자 일대 혼전이 펼쳐졌다.
혼전 중, 최선두에 섰던 ‘안위’의 전선이 일본군에 포위되면서 한때 위기에 처하게 됐다.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을 구출하는 과정에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남동류’가 점차 빠르게 흘렀고, 파괴된 일본군 전선은 서로 뒤엉킨 상태에서 명량해협을 벗어나 벽파진 방향으로 떠내려갔다. 순조류를 타고 일본 함대를 추격한 이순신 함대는 벽파진 아래에서 해적 출신인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한 다음 효시(梟示)하자 일본군의 기세가 일순간 꺾이고 말았다.
울돌목의 ‘조류’. 이곳의 조류는 최대 13노트까지 관측되기도 하나 통상 7~10노트의 유속을 보인다. 명량해전 당일엔 약 9.7노트의 북서류가 흘렀다가 8.4노트의 남동류가 흘렀다. 이 정도면, 동력선으로도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 힘든 정도이고, 노를 저어 기동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전함들의 기동이 거의 불가할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 해전이 벌어졌던 곳은 이곳 ‘울돌목’이 아니라 우수영 앞 ‘양도’ 일대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양도 일대의 조류는 이 보다는 훨씬 약해서 해상전투가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467-9)
칠천량 해전 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압도적인 우세를 통해 이순신 함대를 맞선 일본 함대는 의외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31척의 전선을 잃었다.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양국 수군 간에 대치를 계속하며 관망하던 중 일본함대가 조류를 타고 패주함으로써 명량해전은 종료됐다. 오후 3시경이었다. 전투를 끝낸 이순신 함대는 건너편 포구로 옮겼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자 다시 당사도(신안군 암태면) 일대로 함대를 옮겨 정박하여 밤을 지냈다. 이순신장군은 이 전투를 정리하면서 ‘명량해전의 승리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차실천행. 此實天幸)’라고 했다.
명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의 활동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조선 수군은 단 한척의 전선도 잃지 않은 반면, 일본군은 전선 31척이 격침되고 100여 척이 반파되는 등 완벽하게 패했다. 명량해전이 끝난 직후, 이순신장군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비록 승전을 하였으나 일본 함대를 상대하여 더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겨우겨우 마련했던 전투물자 모두를 명량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맞아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도 지쳤고, 전선도 많은 손상을 입었다. 당장 손을 쓰고 보충하지 않으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조치함에 있어서 조정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없이 전적으로 수군 자체에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비. ‘만약 호남이 없어진다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순신장군이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1593년 7월 16일) 현덕승(사헌부 근무 후배)에게 보내는 답서에 기록된 구절이다. 편지에서 호남을 지키기 위해 한산도로 진을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임을 밝혔다.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우수영국민관광지)
명량바다를 빠져나온 이순신함대는 신안군의 당사도와 어의도, 영광 법성포, 부안의 위도를 거쳐서 군산의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물러나 북상한 다음, 명량의 전라 우수영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만 실시한 다음 남해 동부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명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이 전장을 이탈한 것을 이유로 일부 일본 학자들은 일본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을 통과한 후 서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한강까지 진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동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명량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육지에서 ‘직산’(천안시)까지 북상했던 일본 지상군이 조∙명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어 울산과 순천 등으로 남하하는 상황과 보조를 맞추어 함대를 경상도 쪽 바다로 되돌렸다.
명량해전 후 이순신 함대가 서해를 따라 군산 고군산군도까지 올라갔던 ‘북상로’. 가진 것 모두를 쏟아 부었던 명량해전. 일단은 한발 물러나 서해를 순항하며 함대를 정비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만했다. 순항에 나선 지 40여 일만에 남해로 복귀하면서 ‘고하도’에서 108일간 주둔했다. 이곳에서 제2의 수군 재건에 매진했다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까지 북상했던 이순신 함대는 이곳에서 함대를 정비하였으며, 일본군을 추격하는 조∙명연합군(육군)과 보조를 맞추며 다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된다. 육군과 병행하여 남하해온 이순신함대는 목포의 ‘고하도’에 임시 통제영을 설치했다. 1597년 10월 29일이니, 이미 겨울의 초입이라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로 인해 더 이상 해상작전은 어려운 시기였다. 이 시기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가 가장 중요한 업무다. 다음해 2월까지 108일 간 고하도에서 겨울을 나면서, 본격적인 재건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수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선 건조, 병력 충원, 군수물자 확보, 그리고 군사훈련 등을 실시했다.
이순신은 이 기간을 활용하여 무려 40여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고 병력도 두 배로 불렸다. 판옥선의 증가에 해당되는 병력과 군량은 물론 필요한 무기(총통, 활, 화살, 화약 등)를 확보하는 등 또 다른 엄청난 기적을 만들었다.
명량해전 이후의 작전은 이렇게 전개됐다
명량해전 직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쫓아 해남의 우수영을 넘어 ‘무안’ 일대까지 추적했으나 조선 수군을 찾지 못했다. 육지에서는 ‘직산전투’에서, 바다에서는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대부분의 부대를 남부 지방으로 회군한 다음, 왜성을 축성하여 장기 주둔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일본 수군도 전라도 바다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육군과 함께 월동(越冬)을 위해 영남 남해안의 근거지로 회군했다. 이때 일본군은 순천왜성, 사천왜성, 울산왜성 등을 축성하여 정유재란 마지막까지 결전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일제 강점기 때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강제 철거되어 서울(경복궁 내)로 옮겨갔다. 광복 후 ‘되찾기 운동’을 펼친 끝에 1947년 해남(학동리)으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 2011년에 최초의 설립지인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정유재란 말기인 1598년, 조∙명연합군은 남해안으로 회군한 일본군을 향해 대반격을 실시한다. 이때 4개 방면에서 총공세를 펼쳐 왜군을 축출하기 위한 전략인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시행하게 된다.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순천왜성, 사천성, 울산왜성이 공격의 목표이다. 이때 조∙명 연합 수군은 해로를 통해 순천왜성 공략에 가담하게 된다. 조∙명 연합 수군과 육군에게 포위됐던 ‘순천성 전투’ 후에 노량해전으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장군이 전사하면서 한반도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7년 전쟁이 마무리된다.
명량해전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기도를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제해권 확보에 성공했다. 또한, 칠천량 패전의 늪에서 빠져나와 완전하게 제기하는데 성공했고, 왜소했던 수군 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7년 전쟁의 ‘분수령’이자 ‘역전의 발판’이 아닐 수 없다.
정유재란 당시 육상의 ‘직산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들이 남부지방으로 후퇴하여 쌓았던 왜성 중의 하나인 ‘순천왜성(왜교∙예교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축성했다(보조 사진은 당시의 왜성 전체 모습이다). 전쟁 마지막 해인 1598년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예교해전’이 있었고, 뒤이어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펼쳐졌다(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수군 재건 길∙명량해전지에 대한 답사여행을 하려면...
이순신과 관련된 주요 ‘길’은 ‘백의종군길’(670km)과 ‘수군 재건길’(270km)이 있다. 이중 ‘백의종군길’은 이순신장군이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기 위해 ‘초계(경남 합천)’까지 갔던 670km의 길을 말한다. 8월 3일 통제사에 재임명될 때까지는 백의종군 신분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의 모든 활동도 백의종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수군재건길’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3일 ‘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진주(손경례 가옥)를 출발하여 수군 재건에 필요한 병력∙군량∙무기∙전선을 확보하며 전라도 ‘군학(군영구미)’(보성군 회천면)까지의16일 간 이동했던 700리(270km) 길을 말한다. 어느 길이 더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인지는 개개인이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이순신 함대가 108일 간이나 주둔했던 임시 통제영 ‘고하도’. 이곳은 북풍을 막아주어 전함을 보호하기 좋았고, 영산강을 통해 나주평야의 곡물 등 군수물자 운반하기에 편리한 길목이다. 이곳에서 조선 수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는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의 하나로 작용했다. 고하도 유적지에는 진성(鎭城)터가 남아 있으며, 이충무공 기념비를 모신 ‘모충각’이 있다(목포시 달동 산 214-6)
백의종군길은 ‘(사)한국체육진흥회’가 주관이 되어 전 구간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리본’을 부착 완료된 상태이며, 백의종군길 걷기 관련하여 행사가 많이 개최되고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답사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수군 재건길’은 전라남도에서 ‘조선수군 재건로’라 명명하여 구례 ‘석주관 7의사 묘’를 출발하여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까지 8개 시∙군을 연결하여 안내하고 있다. 이순신장군이 해상(판옥선)으로 이동한 구간은 ‘육로’로 안내하고 있다. 이 길은 이순신장군의 수군 재건 활동과 관련된 곳은 물론, 주변의 ‘관광 명소’들까지 포함해서 안내하고 있다.
이 길에 대한 ‘안내지도’는 별도로 제시하지 않고 주요 명소 ‘사진’과 함께 ‘주소’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선수군 재건로’에 관한 자료는 전남도청 관광과( 061-286-5230~1)으로 문의하면 관련 자료를 ‘파일’로 제공해준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8
*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7
* 제장명,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 박종평, <난중일기>, 글 항아리, 2018
* 이 훈, <이순신과의 동행>, 푸른 역사, 2014
* 전라남도, <조선 수군 재건로, 명량으로 가는 길>, 전라남도 관광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