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긴 여운, 나의 픽(국내편)
박물관에 비치된 안내 팜플렛에는 60분 짜기 권장코스와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밖에도 각 층마다 유명한 유물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도 ‘모나리자’ ‘비너스상’ ‘다비드상’ 같은 작품은 별도로 위치가 표기되고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린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이들 유물만 돌아봐도 의미 있는 관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유물 150만 점, 전시 유물만 1만 점에 달하니 하나하나 제대로 보자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 4번 연속 관람하면서 느낀 것은, 시간뿐 아니라 체력과 요령도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내내 선 채 관람하고 걸어 다녀야 해서 개인적으로는 체력적으로 또 집중력 측면에서 3시간이 한계였다. 차분하고 정밀한 관람을 위해 휠체어를 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내 전시관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유물을 몇 가지 추려보았다. 때마침 주로 경주 일대에서 발굴된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토용 등을 모은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23년 5월 26일 ~ 10월 9일)은 유물은 초소형이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였다. 1500년 전 사람들의 손때와 지문이 묻어날 것만 같은 작은 유물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 특별전은 뒤쪽에 따로 소개한다.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명 호우(廣開土大王銘 壺杅)
‘광개토대왕’ 이름이 붙었는데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발견되어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릇 바닥에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명문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광개토대왕이 죽은 것은 412년이고, 3년 상을 끝낸 415년이 을묘년인데 이때를 기념해서 만든 그릇이다. 맨 뒤의 십(十)은 한정판으로 제작한 그릇의 순번을 나타낸다. 이것이 경주 한복판에서 발견된 것이 특이한데, 당시 가장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기는 입장이어서 하사품으로 내린 것 같다. 서기 400년 왜군(가야군도 포함된 듯)이 경주를 공격했을 때 광개토왕이 5만의 원군을 보내 구원해주었으니 신라는 광개토왕을 은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명문은 집안(옛 국내성 터)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글씨와 유사하며, 1600년 세월을 넘은 작은 그릇임에서 숱한 사연을 읽는다.
무위자연을 동경한 백제인, 산수무늬 벽돌/산수봉황무늬 벽돌
산수무늬 벽돌
산수봉황무늬 벽돌
예전에는 ‘산경문전(山景文塼)’이었는데 한글 명칭으로 바뀌었다.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이 작은 벽돌 문양 앞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부여에서 발굴된 6~7세기 작품으로 진경과 추상을 복합적으로 묘사한 한 폭의 산수화다. 둥근 산봉우리와 뾰족한 기암괴석, 소나무와 구름이 어우러져 자연동화 혹은 무위자연의 신선사상을 보여준다. 생계와 정국 모두 안정되어야 비로소 상상할 수 있는 현실도피적 무위자연을 백제인이 꿈꿨다는 것이 놀랍다. 함께 전시된 산수봉황무늬 벽돌은 비슷한 산수화 풍경인데 가장 높은 산 위에 봉황이 앉아 있는 것이 다르다. 봉황은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 했던 상상의 길조로 백제인 역시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유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 역시 비슷한 개념으로 맨 위에 봉황이 앉은 모습이다. 이런 벽돌로 장식한 방에 앉아 있으면 먼 산에 들지 않아도 탈속감에 젖어들어 온갖 세속사가 하찮게 보이지 않을까.
저걸 어떻게 입었을까, 가야 갑옷과 투구
최약체인 가야지만 철기문화는 놀랍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4~5세기의 판갑옷과 투구를 보고 있으면 정말 저런 것을 착용하고 전투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자전거 헬멧은 200~300g이 고작이고 오토바이 헬멧도 1kg 대인데, 철 투구는 2~3kg는 되어 보인다. 자세한 제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김해박물관에서 같은 크기로 복원한 결과 철갑옷은 10kg이나 되었다. 저렇게 무겁고 딱딱한 갑옷을 입고 날쌘 동작이 필요한 전투에서 활동이 가능했을까.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전투 현장에서 지배층의 위세를 과시하는 용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위세품이든 실전용이든 저런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려면 기본적으로 단단한 체격과 튼튼한 체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층도 전사였음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상식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의 왼쪽 뒤 갑옷과 투구는 5세기 대가야 것으로, 일본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출토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대가야의 시조로 이진아시(伊珍阿豉) 왕이 등장한다. 신라의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에도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응감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나온다. 일본의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일본을 창조한 신으로 이자나기(伊邪那岐命 또는 伊弉諾神)가 등장한다. 한일고대사에 밝은 김용운 박사는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가 이자나기로 추정된다고 지적했는데,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진아시왕이 패전 등의 이유로 낙동강을 따라 일본열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우지 않았을까. 하나둘 드러나는 수많은 증거에서 고대 일본열도는 한반도 제국(諸國)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1600년을 땅에 묻혀 녹슬고 뒤틀린 저 갑옷과 투구는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상상의 나래가 끝 없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가야 토기
가야관에는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대가야(고령), 소가야(고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비교 전시하고 있다. 이들 소국은 도읍 기준으로 겨우 40km 정도로 가깝지만 토기 형상은 조금씩 달라 흥미롭다. 그만큼 연맹의 결속력이 느슨했던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라가야 굽다리접시 받침의 불꽃무늬로, 시기는 4~6세기이며 일본 긴키(近畿) 지방에서도 출토되었다. 아라가야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야토기는 일본에서도 발견되어 가야인의 일본 진출을 뒷받침하고 있다.
로마에서 온 유리잔
경주의 고분에서는 유리잔이 여럿 발견되었지만, 전시물은 5세기 합천 옥전고분에서 출토되었다. 합천 옥전리는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에 쫓긴 금관가야 지배층이 낙동강을 따라 북상해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며,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도 유리잔 조각이 발견되었다. 한반도가 아니라 서역(시리아)에서 제작되어 무역으로 들어온 물건으로 로마에서 유행하고 세계로 퍼졌다고 해서 ‘로만글라스’라고 부른다. 무려 1600년 전, 대부분의 사람이 토기를 사용할 때 누군가는 저 잔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의 소주잔에 비해서도 오히려 형상미와 디자인이 뛰어나다. 그대로 복원해서 술잔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기마민족의 상징, 청동솥
‘동복(銅鍑)’이라고도 하며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품 중 하나다. 말 등에 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나무에 걸고 불을 때 조리하던 취사도구다. 중국 지린성과 랴오허강 서부 등 유목지대에서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며, 국내는 금관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금관가야의 왕족 무덤인 대성동고분에서 나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 출신임을 뒷받침한다. 김수로왕의 탄강 설화, 구지가 등도 말을 타고 내려온 북방 유목민의 원주민 정복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 있던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있던 비석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 비봉에 남아 있는 비석은 복제품이다. 비봉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급경사에 거대한 암봉을 이뤄 올라가기기 쉽지 않아 비석을 세우는 데 엄청난 공역이 들었을 것이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고, 비석 옆면에 그 사실을 새겨놓았다. 신라 진흥왕이 서기 555년 한강하류를 차지하고 새 영토를 순방하며 그 기념으로 세웠으니 진흥왕도 저 비봉을 올랐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금의 서울과 김포 일원을 바라보며 영토개척의 야망을 키웠을 것이다. 대형 비봉 사진을 배경으로 전시해 현장감을 살렸다.
철조 비로자나불의 미소
통일신라말-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 비로자나불은 8~9세기에 유행했다. 비로자나불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중생 교화를 위해 제시한 부처로, 온 세상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상징하며 왼쪽 검지를 쥐고 있는(지권인, 智拳印) 모습으로 표현된다. 석조나 목조도 아니고, 가장 어려운 철로 만든 불상이라 상당한 주조기술과 예술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인자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이다. 달관의 표정이 있다면 꼭 저렇지 않을까. 불안, 불만, 욕망 심지어는 기쁨까지 사라진 온화함과 관용, 자족의 극치랄까.
초정밀 조각미 완벽 비례미, 금동 관음보살 좌상
15세기 조선초에 제작된 금동 관음보살이다. 높이 38.6cm의 소형이지만 조각기법과 비례, 장식의 표현이 대단히 섬세하고 미려하다. 얼굴의 도금은 살짝 벗겨졌으나 다른 부위는 도금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고, 머리에 쓴 보관과 장식줄, 옷주름의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여성미가 감도는 표정에는 어떤 요청이든 받아들이고 이해해줄 것만 같은 모성애적 포용성이 어려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너무나 사실적인 형상과 표정이라 슬며시 자세를 바꾸며 일어설 것만 같다. 시대가 늦어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걸작이다.
초거대 불화, 청양 장곡사 괘불
청양 칠곡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장곡사 소장 괘불이다. 조선 중기인 1673년 삼베에 색을 입혀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엄청난 그림 크기다. 세로 8.69m, 가로 5.99m에 달하며, 중앙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꽃 가지를 든 본존불이 있고 좌우로 여러 인물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그렸다고 한다. 화면 아래에는 ‘강희 12년(1673) 5월 청양 동쪽 칠갑산 장곡사 대웅전 마당에서 열린 영산대회(靈山大會)에 걸기 위한 괘불’이라고 기록돼 있다. 350년 전 그날, 장곡사 대웅전 마당에 걸린 괘불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 봐도 놀라운데 당시 사람들 눈에는 위용이 더욱 강조되어 누구나 넙죽 엎드리고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괘불은 1층 복도에 걸려 있으나 2층에서 찍은 사진임에도 얼굴 이상은 카메라 시점보다 더 높다. 23년 10월 9일까지 한정 전시된다.
특별전시 -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본관 1층 특별전시실에는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이란 이름으로 신라, 가야의 장송의례에 사용되었던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경주 황남동 출토 토우장식 토기 100여 점과 함안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토기 등 최근의 발굴성과를 종합한 300여 점이 선보였다.
작은 인형인 토우(土偶)와 토우장식 토기는 고분의 부장품으로 발견되어 고대인의 내세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크기는 10cm 안팎으로 매우 작고 조형미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를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제작 시기는 5~6세기다. 전시기간은 23년 5월 26일 ~ 10월 9일이며, 별도 입장료 5천원을 내야 한다.
감상평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꼭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흙인형이 이렇게 기나긴 여운을 남길 줄이야.
남과 여, 첫만남
남자는 어색하고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려 수줍어한다. 남자는 관모를 쓰고 매부리코가 우뚝하며,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있어 관리로 추정된다. 고개를 살짝 돌린 여자는 소략한 기법에도 이목구비 선명한 미인이 분명하다. 무덤 속 부장품임을 감안하면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육신은 1300년을 지나면서 먼지를 거쳐 원자로 분해되었지만 첫만남의 설렘은 이렇게 토용(土俑)으로 남아 수천 년을 전해질 것이다. 상형토기나 토우장식은 6세기에 사라지고 이후에는 독립된 상(像)인 토용이 함께 묻힌다. 크기와 완성도가 한 단계 올라가고, 당시에 도입된 관복제에 따라 신분 차이가 옷차림에 나타난다.
서역에서 온 신라인
앞쪽 한 쌍은 부부로 추정되며 후덕한 인상과 화려한 복장으로 보아 왕족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뒤 인물은 덥수룩한 수염과 선명한 이목구비가 서역인 같다. 경주에는 괘릉과 흥덕왕릉 석인(石人) 중에도 분명한 서역인 외모를 하고 있는 것이 여럿 있어 당시 경주는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사는 국제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처용설화 역시 서역인의 도래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내륙의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수많은 서역인이 경주를 오갔던 것 같다. 당시 실크로드의 종점은 장안(지금의 시안)이 아니라 경주였을 것이다. 서역인은 두 손으로 홀(笏, 관인이 손에 쥐던 수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관직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앞쪽의 부부를 모시던 관인이어서 무덤에도 형상화되어 함께 묻혔던 것 같다. 토용이 순장(殉葬) 대용이었음도 고려하면, 죽은 이가 내세에서도 외롭지 않게 곁에서 보좌하기 위한 의미로 보인다.
웃는 개
보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주인을 만났는지 개가 활짝 웃고 있다. 실제와는 다르지만 인간적 관점을 반영한 반달 모양 눈, 벌린 입, 쫑긋 세운 귀가 더없는 반가움을 표현한다. 15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애견을 키웠고 또 서로 소통한 모양이다. 나 역시 웃음으로 답했지만 얼마 전 떠난 강아지가 생각나 가슴이 아파왔다. 죽은 이가 귀여워했고, 또 그를 특별히 따랐던 개를 빚어 함께 묻었나 보다. 참으로 영원의 세계까지 함께 하는 반려견이다.
중무장 기마무사 토기
5~6세기에 축조된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되었고, 일종의 주전자다. 인물 뒤의 입구로 물이나 술을 넣어 말 가슴 앞쪽 돌출부로 따르는 방식이다. 비례미는 떨어지지만 비교적 정밀하게 조형되어 당시 무장의 차림과 말갖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말머리와 말꼬리를 짧게 모아 뿔처럼 만든 것은 지금도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해지는 방식으로 신라 지배층이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고깔모자를 쓴 인물은 중무장을 하고 있고 말갖춤은 더없이 화려하다. 발을 끼우는 등자 아래에는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막아주는 말다래가 달려 있다. 천마총의 유명한 천마도 말다래가 떠오른다. 인상적인 것은 인물의 얼굴이다. 날카로운 코와 가는 눈매에는 귀족의 기품과 강단이 느껴진다. 아마도 죽은 이의 모습을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에서 출토되었으니 당시 신라왕은 전사(戰士)이기도 했나 보다. 전쟁이 횡행하던 삼국시대는 왕도 출전하고 장수가 앞장서던 ‘노블리스 오불리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술은 여럿이 함께, 4인용 뿔잔 받침
각배(角盃)라고 하는 뿔잔은 소뿔을 뒤집어 사용한 데서 기원했고, 손에 잡기는 좋지만 놓아두기가 참 애매하다. 그래서 거치할 수 있는 받침대를 따로 만들었는데 1개 또는 2개의 뿔잔을 거치하는 것은 봤어도 4개를 동시에, 그것도 아주 간단한 구조로 거치할 수 있는 받침대는 처음 본다. 고리가 잔 끝을 잡으면서 받침 테두리는 뿔잔이 돌아가지 않도록 잡아주도록 오므려져 효과적이다. 네 명이 둘러 앉아 뿔잔으로 건배하며 큰 소리로 담소를 나누는 고대인이 떠오른다. 호전적인 기마민족에서 유래한 뿔잔과 거치대에서 거친 남성미가 묻어난다. 저 모양 그대로 복원해 맥주잔으로 사용해도 좋지 않을까. 4~6세기 동해 구호동 출토.
그때도 앙숙이었다, 멧돼지와 개
5세기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토우장식 뚜껑에는 개와 멧돼지 토우가 붙어 있다. 두 마리의 개가 멧돼지 한 마리와 대치하는 모습이다. 그때도 멧돼지는 농작물을 해치는 골칫거리였나 보다. 길쭉한 주둥이와 뻣뻣한 등줄기 털을 세운 멧돼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이 토기를 부장한 무덤의 주인공은 멧돼지 사냥꾼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적나라할 수가, 토우장식 항아리
이 항아리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는 것인데, 적나라한 성행위 장면이 있고, 한쪽에서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뱀은 개구리 뒷다리를 물고 있다. 해설문에는 당시의 장송의례와 관련한 정형화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토속신앙이 모티브가 된 것 아닐까 싶다. 생명의 잉태와 일상 그리고 죽음을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장례식장 풍경은, 비명횡사가 아닐 경우 대체로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였다. 장례는 결국 죽은 이가 아니라 남은 자를 위한 위로이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지를 자각하는 계기이기도 하니 슬픔과 상실감에만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슬픔을 어쩌나, 신라의 피에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설명문을 읽고 자세히 살펴보니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다. 죽은 위를 무릎에 두고 비탄에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이라니…. ‘신라의 피에타’라는 설명이 적절하다. ‘피에타(pieta)’는 ‘비탄, 슬픔’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로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보다 훨씬 작고 예술성은 비할 수도 없지만 가슴을 울리는 비탄의 감정만은 그대로 전해진다.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모습에서 죽은 이는 남편보다는 자식인 것 같다. 어떤 죽음이든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다시 볼 기약 없는 영원의 이별은 극단적인 슬픔과 절망을 낳는다. 인간이 혈육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도 저 길을 갈 것이고, 어쩌면 저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다시 해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가 필요하고 삶과 죽음,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이 요구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소소하지만 긴 여운, 나의 픽(국내편)
박물관에 비치된 안내 팜플렛에는 60분 짜기 권장코스와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밖에도 각 층마다 유명한 유물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도 ‘모나리자’ ‘비너스상’ ‘다비드상’ 같은 작품은 별도로 위치가 표기되고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린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이들 유물만 돌아봐도 의미 있는 관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유물 150만 점, 전시 유물만 1만 점에 달하니 하나하나 제대로 보자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 4번 연속 관람하면서 느낀 것은, 시간뿐 아니라 체력과 요령도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내내 선 채 관람하고 걸어 다녀야 해서 개인적으로는 체력적으로 또 집중력 측면에서 3시간이 한계였다. 차분하고 정밀한 관람을 위해 휠체어를 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내 전시관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유물을 몇 가지 추려보았다. 때마침 주로 경주 일대에서 발굴된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토용 등을 모은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23년 5월 26일 ~ 10월 9일)은 유물은 초소형이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였다. 1500년 전 사람들의 손때와 지문이 묻어날 것만 같은 작은 유물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 특별전은 뒤쪽에 따로 소개한다.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명 호우(廣開土大王銘 壺杅)
‘광개토대왕’ 이름이 붙었는데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발견되어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릇 바닥에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명문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광개토대왕이 죽은 것은 412년이고, 3년 상을 끝낸 415년이 을묘년인데 이때를 기념해서 만든 그릇이다. 맨 뒤의 십(十)은 한정판으로 제작한 그릇의 순번을 나타낸다. 이것이 경주 한복판에서 발견된 것이 특이한데, 당시 가장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기는 입장이어서 하사품으로 내린 것 같다. 서기 400년 왜군(가야군도 포함된 듯)이 경주를 공격했을 때 광개토왕이 5만의 원군을 보내 구원해주었으니 신라는 광개토왕을 은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명문은 집안(옛 국내성 터)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글씨와 유사하며, 1600년 세월을 넘은 작은 그릇임에서 숱한 사연을 읽는다.
무위자연을 동경한 백제인, 산수무늬 벽돌/산수봉황무늬 벽돌
산수무늬 벽돌
산수봉황무늬 벽돌
예전에는 ‘산경문전(山景文塼)’이었는데 한글 명칭으로 바뀌었다.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이 작은 벽돌 문양 앞에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부여에서 발굴된 6~7세기 작품으로 진경과 추상을 복합적으로 묘사한 한 폭의 산수화다. 둥근 산봉우리와 뾰족한 기암괴석, 소나무와 구름이 어우러져 자연동화 혹은 무위자연의 신선사상을 보여준다. 생계와 정국 모두 안정되어야 비로소 상상할 수 있는 현실도피적 무위자연을 백제인이 꿈꿨다는 것이 놀랍다. 함께 전시된 산수봉황무늬 벽돌은 비슷한 산수화 풍경인데 가장 높은 산 위에 봉황이 앉아 있는 것이 다르다. 봉황은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 했던 상상의 길조로 백제인 역시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유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 역시 비슷한 개념으로 맨 위에 봉황이 앉은 모습이다. 이런 벽돌로 장식한 방에 앉아 있으면 먼 산에 들지 않아도 탈속감에 젖어들어 온갖 세속사가 하찮게 보이지 않을까.
저걸 어떻게 입었을까, 가야 갑옷과 투구
최약체인 가야지만 철기문화는 놀랍다.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4~5세기의 판갑옷과 투구를 보고 있으면 정말 저런 것을 착용하고 전투를 했을까 궁금해진다. 자전거 헬멧은 200~300g이 고작이고 오토바이 헬멧도 1kg 대인데, 철 투구는 2~3kg는 되어 보인다. 자세한 제원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김해박물관에서 같은 크기로 복원한 결과 철갑옷은 10kg이나 되었다. 저렇게 무겁고 딱딱한 갑옷을 입고 날쌘 동작이 필요한 전투에서 활동이 가능했을까.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전투 현장에서 지배층의 위세를 과시하는 용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위세품이든 실전용이든 저런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려면 기본적으로 단단한 체격과 튼튼한 체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층도 전사였음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상식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의 왼쪽 뒤 갑옷과 투구는 5세기 대가야 것으로, 일본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출토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대가야의 시조로 이진아시(伊珍阿豉) 왕이 등장한다. 신라의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에도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응감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나온다. 일본의 고대 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일본을 창조한 신으로 이자나기(伊邪那岐命 또는 伊弉諾神)가 등장한다. 한일고대사에 밝은 김용운 박사는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가 이자나기로 추정된다고 지적했는데,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진아시왕이 패전 등의 이유로 낙동강을 따라 일본열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우지 않았을까. 하나둘 드러나는 수많은 증거에서 고대 일본열도는 한반도 제국(諸國)의 식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1600년을 땅에 묻혀 녹슬고 뒤틀린 저 갑옷과 투구는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상상의 나래가 끝 없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가야 토기
가야관에는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대가야(고령), 소가야(고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비교 전시하고 있다. 이들 소국은 도읍 기준으로 겨우 40km 정도로 가깝지만 토기 형상은 조금씩 달라 흥미롭다. 그만큼 연맹의 결속력이 느슨했던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라가야 굽다리접시 받침의 불꽃무늬로, 시기는 4~6세기이며 일본 긴키(近畿) 지방에서도 출토되었다. 아라가야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야토기는 일본에서도 발견되어 가야인의 일본 진출을 뒷받침하고 있다.
로마에서 온 유리잔
경주의 고분에서는 유리잔이 여럿 발견되었지만, 전시물은 5세기 합천 옥전고분에서 출토되었다. 합천 옥전리는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이 보낸 군사에 쫓긴 금관가야 지배층이 낙동강을 따라 북상해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며,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도 유리잔 조각이 발견되었다. 한반도가 아니라 서역(시리아)에서 제작되어 무역으로 들어온 물건으로 로마에서 유행하고 세계로 퍼졌다고 해서 ‘로만글라스’라고 부른다. 무려 1600년 전, 대부분의 사람이 토기를 사용할 때 누군가는 저 잔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의 소주잔에 비해서도 오히려 형상미와 디자인이 뛰어나다. 그대로 복원해서 술잔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기마민족의 상징, 청동솥
‘동복(銅鍑)’이라고도 하며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품 중 하나다. 말 등에 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나무에 걸고 불을 때 조리하던 취사도구다. 중국 지린성과 랴오허강 서부 등 유목지대에서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며, 국내는 금관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금관가야의 왕족 무덤인 대성동고분에서 나와 금관가야 지배층이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 출신임을 뒷받침한다. 김수로왕의 탄강 설화, 구지가 등도 말을 타고 내려온 북방 유목민의 원주민 정복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 있던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있던 비석을 옮겨온 것이다. 지금 비봉에 남아 있는 비석은 복제품이다. 비봉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급경사에 거대한 암봉을 이뤄 올라가기기 쉽지 않아 비석을 세우는 데 엄청난 공역이 들었을 것이다.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고, 비석 옆면에 그 사실을 새겨놓았다. 신라 진흥왕이 서기 555년 한강하류를 차지하고 새 영토를 순방하며 그 기념으로 세웠으니 진흥왕도 저 비봉을 올랐을 것이다. 그곳에서 지금의 서울과 김포 일원을 바라보며 영토개척의 야망을 키웠을 것이다. 대형 비봉 사진을 배경으로 전시해 현장감을 살렸다.
철조 비로자나불의 미소
통일신라말-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 비로자나불은 8~9세기에 유행했다. 비로자나불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중생 교화를 위해 제시한 부처로, 온 세상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상징하며 왼쪽 검지를 쥐고 있는(지권인, 智拳印) 모습으로 표현된다. 석조나 목조도 아니고, 가장 어려운 철로 만든 불상이라 상당한 주조기술과 예술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인자하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이다. 달관의 표정이 있다면 꼭 저렇지 않을까. 불안, 불만, 욕망 심지어는 기쁨까지 사라진 온화함과 관용, 자족의 극치랄까.
초정밀 조각미 완벽 비례미, 금동 관음보살 좌상
15세기 조선초에 제작된 금동 관음보살이다. 높이 38.6cm의 소형이지만 조각기법과 비례, 장식의 표현이 대단히 섬세하고 미려하다. 얼굴의 도금은 살짝 벗겨졌으나 다른 부위는 도금 상태가 대체로 양호하고, 머리에 쓴 보관과 장식줄, 옷주름의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여성미가 감도는 표정에는 어떤 요청이든 받아들이고 이해해줄 것만 같은 모성애적 포용성이 어려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너무나 사실적인 형상과 표정이라 슬며시 자세를 바꾸며 일어설 것만 같다. 시대가 늦어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걸작이다.
초거대 불화, 청양 장곡사 괘불
청양 칠곡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장곡사 소장 괘불이다. 조선 중기인 1673년 삼베에 색을 입혀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엄청난 그림 크기다. 세로 8.69m, 가로 5.99m에 달하며, 중앙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꽃 가지를 든 본존불이 있고 좌우로 여러 인물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그렸다고 한다. 화면 아래에는 ‘강희 12년(1673) 5월 청양 동쪽 칠갑산 장곡사 대웅전 마당에서 열린 영산대회(靈山大會)에 걸기 위한 괘불’이라고 기록돼 있다. 350년 전 그날, 장곡사 대웅전 마당에 걸린 괘불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 봐도 놀라운데 당시 사람들 눈에는 위용이 더욱 강조되어 누구나 넙죽 엎드리고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괘불은 1층 복도에 걸려 있으나 2층에서 찍은 사진임에도 얼굴 이상은 카메라 시점보다 더 높다. 23년 10월 9일까지 한정 전시된다.
특별전시 -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본관 1층 특별전시실에는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이란 이름으로 신라, 가야의 장송의례에 사용되었던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다. 경주 황남동 출토 토우장식 토기 100여 점과 함안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토기 등 최근의 발굴성과를 종합한 300여 점이 선보였다.
작은 인형인 토우(土偶)와 토우장식 토기는 고분의 부장품으로 발견되어 고대인의 내세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크기는 10cm 안팎으로 매우 작고 조형미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일상을 보냈는지를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제작 시기는 5~6세기다. 전시기간은 23년 5월 26일 ~ 10월 9일이며, 별도 입장료 5천원을 내야 한다.
감상평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꼭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흙인형이 이렇게 기나긴 여운을 남길 줄이야.
남과 여, 첫만남
남자는 어색하고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려 수줍어한다. 남자는 관모를 쓰고 매부리코가 우뚝하며,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있어 관리로 추정된다. 고개를 살짝 돌린 여자는 소략한 기법에도 이목구비 선명한 미인이 분명하다. 무덤 속 부장품임을 감안하면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육신은 1300년을 지나면서 먼지를 거쳐 원자로 분해되었지만 첫만남의 설렘은 이렇게 토용(土俑)으로 남아 수천 년을 전해질 것이다. 상형토기나 토우장식은 6세기에 사라지고 이후에는 독립된 상(像)인 토용이 함께 묻힌다. 크기와 완성도가 한 단계 올라가고, 당시에 도입된 관복제에 따라 신분 차이가 옷차림에 나타난다.
서역에서 온 신라인
앞쪽 한 쌍은 부부로 추정되며 후덕한 인상과 화려한 복장으로 보아 왕족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뒤 인물은 덥수룩한 수염과 선명한 이목구비가 서역인 같다. 경주에는 괘릉과 흥덕왕릉 석인(石人) 중에도 분명한 서역인 외모를 하고 있는 것이 여럿 있어 당시 경주는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사는 국제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처용설화 역시 서역인의 도래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내륙의 실크로드와 바닷길을 통해 수많은 서역인이 경주를 오갔던 것 같다. 당시 실크로드의 종점은 장안(지금의 시안)이 아니라 경주였을 것이다. 서역인은 두 손으로 홀(笏, 관인이 손에 쥐던 수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관직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앞쪽의 부부를 모시던 관인이어서 무덤에도 형상화되어 함께 묻혔던 것 같다. 토용이 순장(殉葬) 대용이었음도 고려하면, 죽은 이가 내세에서도 외롭지 않게 곁에서 보좌하기 위한 의미로 보인다.
웃는 개
보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주인을 만났는지 개가 활짝 웃고 있다. 실제와는 다르지만 인간적 관점을 반영한 반달 모양 눈, 벌린 입, 쫑긋 세운 귀가 더없는 반가움을 표현한다. 15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애견을 키웠고 또 서로 소통한 모양이다. 나 역시 웃음으로 답했지만 얼마 전 떠난 강아지가 생각나 가슴이 아파왔다. 죽은 이가 귀여워했고, 또 그를 특별히 따랐던 개를 빚어 함께 묻었나 보다. 참으로 영원의 세계까지 함께 하는 반려견이다.
중무장 기마무사 토기
5~6세기에 축조된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되었고, 일종의 주전자다. 인물 뒤의 입구로 물이나 술을 넣어 말 가슴 앞쪽 돌출부로 따르는 방식이다. 비례미는 떨어지지만 비교적 정밀하게 조형되어 당시 무장의 차림과 말갖춤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말머리와 말꼬리를 짧게 모아 뿔처럼 만든 것은 지금도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해지는 방식으로 신라 지배층이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고깔모자를 쓴 인물은 중무장을 하고 있고 말갖춤은 더없이 화려하다. 발을 끼우는 등자 아래에는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막아주는 말다래가 달려 있다. 천마총의 유명한 천마도 말다래가 떠오른다. 인상적인 것은 인물의 얼굴이다. 날카로운 코와 가는 눈매에는 귀족의 기품과 강단이 느껴진다. 아마도 죽은 이의 모습을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에서 출토되었으니 당시 신라왕은 전사(戰士)이기도 했나 보다. 전쟁이 횡행하던 삼국시대는 왕도 출전하고 장수가 앞장서던 ‘노블리스 오불리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술은 여럿이 함께, 4인용 뿔잔 받침
각배(角盃)라고 하는 뿔잔은 소뿔을 뒤집어 사용한 데서 기원했고, 손에 잡기는 좋지만 놓아두기가 참 애매하다. 그래서 거치할 수 있는 받침대를 따로 만들었는데 1개 또는 2개의 뿔잔을 거치하는 것은 봤어도 4개를 동시에, 그것도 아주 간단한 구조로 거치할 수 있는 받침대는 처음 본다. 고리가 잔 끝을 잡으면서 받침 테두리는 뿔잔이 돌아가지 않도록 잡아주도록 오므려져 효과적이다. 네 명이 둘러 앉아 뿔잔으로 건배하며 큰 소리로 담소를 나누는 고대인이 떠오른다. 호전적인 기마민족에서 유래한 뿔잔과 거치대에서 거친 남성미가 묻어난다. 저 모양 그대로 복원해 맥주잔으로 사용해도 좋지 않을까. 4~6세기 동해 구호동 출토.
그때도 앙숙이었다, 멧돼지와 개
5세기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토우장식 뚜껑에는 개와 멧돼지 토우가 붙어 있다. 두 마리의 개가 멧돼지 한 마리와 대치하는 모습이다. 그때도 멧돼지는 농작물을 해치는 골칫거리였나 보다. 길쭉한 주둥이와 뻣뻣한 등줄기 털을 세운 멧돼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이 토기를 부장한 무덤의 주인공은 멧돼지 사냥꾼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적나라할 수가, 토우장식 항아리
이 항아리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는 것인데, 적나라한 성행위 장면이 있고, 한쪽에서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뱀은 개구리 뒷다리를 물고 있다. 해설문에는 당시의 장송의례와 관련한 정형화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어서 토속신앙이 모티브가 된 것 아닐까 싶다. 생명의 잉태와 일상 그리고 죽음을 자연스런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장례식장 풍경은, 비명횡사가 아닐 경우 대체로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였다. 장례는 결국 죽은 이가 아니라 남은 자를 위한 위로이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지를 자각하는 계기이기도 하니 슬픔과 상실감에만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슬픔을 어쩌나, 신라의 피에타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 하지만 설명문을 읽고 자세히 살펴보니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다. 죽은 위를 무릎에 두고 비탄에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이라니…. ‘신라의 피에타’라는 설명이 적절하다. ‘피에타(pieta)’는 ‘비탄, 슬픔’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로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보다 훨씬 작고 예술성은 비할 수도 없지만 가슴을 울리는 비탄의 감정만은 그대로 전해진다.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모습에서 죽은 이는 남편보다는 자식인 것 같다. 어떤 죽음이든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다시 볼 기약 없는 영원의 이별은 극단적인 슬픔과 절망을 낳는다. 인간이 혈육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도 저 길을 갈 것이고, 어쩌면 저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다시 해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가 필요하고 삶과 죽음,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이 요구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