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살다
남호의 수생식물원. 데크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뒤편에는 솔밭이 그윽하다
강릉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엄습해 3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강릉행을 택했다. 고향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동경해온 곳이고 아름답고 다채로운 자연 경관과 맑은 공기가 요양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아직 회복 중이라 당분간은 강릉 주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먼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강릉이라고는 하지만 북으로는 고성, 속초에서 남으로는 삼척, 울진까지 동해안 북부가 동일 생활권이고 인제, 평창, 정선 등 영서지방도 같은 권역에 들어 광역권은 매우 넓다. 그리고 강릉 자체가 무한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습지 주위로 산책로가 잘 나 있지만 남호 일부는 아직 길이 나 있지 않다(빨간 실선 구간)
정착해서 지내다보니 강릉의 매력이 더욱 다채롭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한마디로, 자연경관과 명승에서 강릉은 제주도의 절반쯤을 떼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실제로 강릉의 면적은 1,040㎢로 대단히 넓어서 서울의 1.7배에 달하고, 제주도(1,850㎢)의 56%나 된다. 백두대간이 완전한 단절선을 이뤄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 지방으로 나눌 정도로 지형과 기후가 확연히 다르고, 육지 속의 섬 같은 고립지대의 느낌도 강하다.
사천면 즈음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대관령(맨 왼쪽 안부)을 비롯한 백두대간은 아득히 물러나 있다
단순히 면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연환경 역시 강릉은 제주도와 비슷하다. 바다에서 시작해 들판이 있고, 낮은 구릉지는 제주도의 중산간지대에 해당하며 대관령(832m)에서 선자령(1157m)~황병산(1408m)~노인봉(1339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한라산에 필적한다. 대관령은 한라산 1100고지에 비견할 수 있다. 실제로도 해안에서 백두대간을 바라보면 제주도 해변에서 한라산을 올려다보는 것과 비슷한 거리감과 공간감, 웅장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한라산(1950m)이 훨씬 더 높기는 하지만 해안에 가까운 1400m급 봉우리도 굉장한 웅장미를 발한다. 4월말에도 황병산 정상부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하다. 게다가 조금만 북상하면 천하절경 설악산(1708m)이고, 남쪽에는 두타산(1353m)이 빼어나다.
제주도에는 없고 강릉에만 있는 것으로는 평지에 펼쳐진 그윽한 운치의 솔밭과 해안에 인접한 자연호수(석호), 최대 10km에 달하는 장대한 백사장을 들 수 있다. 인문지리 측면에서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 점도 꼽을 수 있겠다.
물이 얕고 호안에는 수초가 많이 자라는, 전형적인 습지 모습이다. 수중의 나무 조형물이 자연스럽다 호젓하고 예쁜 산책로
탐조대에는 서식 조류의 사진과 특징이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망원경 성능이 부족한 것이 다소 아쉽다
경포대 인근 바닷가에 자리한 집에서는 대관령을 비롯한 백두대간의 줄달음이 정면으로 마주보이고, 동쪽으로는 수평선 아득한 대해가 펼쳐지며, 바로 옆에는 아늑한 분위기의 솔밭과 ‘평야’라고 해도 될 정도로 꽤 넓은 들판이 있다.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면서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 매일이 즐거운 고민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고 또 내일은 어디로 갈지 갈 곳이 너무나 많고, 걷거나 라이딩 하고 싶은 길이 지천이다. 일단은 걷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처음으로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은 순포습지다. 경포대에서 가깝지만 관광지로는 알려지지 않아 조용한 습지다.
푸근한 정겨움이 감도는 습지. 물은 깊지 않고 키 작은 수초와 작은 생명들이 깃들어 사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경포호나 속초 영랑호처럼 해안에 생겨난 석호(潟湖)이며 개간 등으로 인해 면적이 크게 줄어 작은 습지로 남았다. 옛날 지도를 보면 1920년대만 해도 호수 면적은 8만9000㎡(약 2만7천평)이었으나 지금은 1만5000㎡(약 4500평)으로 1/6로 줄었다. 남호와 북호 두 호수로 나뉘어 있고 2017년 외곽 순환 산책로와 데크탐방로가 조성되었다. 외곽을 일주하면 2.5km 정도다.
바로 옆으로 경포대~주문진 간 해안도로가 지나가 소음이 다소 있지만 인파가 없고 주변에는 예쁜 주택들만 있어 한갓지다. 바다가 지척인데도 솔밭이 사이에 있어 내륙 깊숙한 곳으로 느껴지는 것도 특별하다.
남호와 북호 사이에는 분위기 좋은 솔밭이 우거져 있다
습지 깊숙이 자리한 벤치는 비어 있어도 주변 풍경이 가득 채워준다
산책길을 따라 바다에서 멀어지면 자동차 소리도 점점 줄어들고 작은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30~50m 정도의 완만하고 낮은 구릉이 일렁여서 안온하다.
겨울 철새는 떠났으나 몇 마리 오리와 홀로 남은 왜가리, 백로가 못가에 외롭다. 탐조대에는 서식하는 조류의 사진과 특성을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민물과 바다가 뒤섞이는 기수(沂水) 호수여서 생물 다양성이 특별하다.
습지 혹은 늪지는 땅과 물의 점이지대라고 할까. 게다가 해안의 만(灣)이 사구로 갇혀 호수가 된 석호는 바다와 호수의 점이지대이기도 하니 순포습지는 이래저래 각별하다.
수심은 1m 남짓이고 수초와 물억새, 갈대가 공생하며 온갖 생명들이 모여 사는 습지는 생동감이 차분히 가라앉아 들뜨지 않고 정겹다.
남호와 북호 사이에는 그윽한 솔밭까지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담한 습지를 본 적이 있던가. 과하지 않은 개발과 보존 노력도 마음에 와 닿는다. 동해안자전거길과 접해 있어 지나는 길에 찾기도 좋다. 다행히 강릉은 자전거에 친화적이어서 모든 호수와 습지는 자전거 출입이 가능하다.
이제 순포습지는 나의 단골 산책로가 될 것이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볼까.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에 살다
남호의 수생식물원. 데크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뒤편에는 솔밭이 그윽하다
강릉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엄습해 3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강릉행을 택했다. 고향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동경해온 곳이고 아름답고 다채로운 자연 경관과 맑은 공기가 요양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아직 회복 중이라 당분간은 강릉 주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먼저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강릉이라고는 하지만 북으로는 고성, 속초에서 남으로는 삼척, 울진까지 동해안 북부가 동일 생활권이고 인제, 평창, 정선 등 영서지방도 같은 권역에 들어 광역권은 매우 넓다. 그리고 강릉 자체가 무한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습지 주위로 산책로가 잘 나 있지만 남호 일부는 아직 길이 나 있지 않다(빨간 실선 구간)
정착해서 지내다보니 강릉의 매력이 더욱 다채롭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한마디로, 자연경관과 명승에서 강릉은 제주도의 절반쯤을 떼어놓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실제로 강릉의 면적은 1,040㎢로 대단히 넓어서 서울의 1.7배에 달하고, 제주도(1,850㎢)의 56%나 된다. 백두대간이 완전한 단절선을 이뤄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 지방으로 나눌 정도로 지형과 기후가 확연히 다르고, 육지 속의 섬 같은 고립지대의 느낌도 강하다.
사천면 즈음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대관령(맨 왼쪽 안부)을 비롯한 백두대간은 아득히 물러나 있다
단순히 면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연환경 역시 강릉은 제주도와 비슷하다. 바다에서 시작해 들판이 있고, 낮은 구릉지는 제주도의 중산간지대에 해당하며 대관령(832m)에서 선자령(1157m)~황병산(1408m)~노인봉(1339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한라산에 필적한다. 대관령은 한라산 1100고지에 비견할 수 있다. 실제로도 해안에서 백두대간을 바라보면 제주도 해변에서 한라산을 올려다보는 것과 비슷한 거리감과 공간감, 웅장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한라산(1950m)이 훨씬 더 높기는 하지만 해안에 가까운 1400m급 봉우리도 굉장한 웅장미를 발한다. 4월말에도 황병산 정상부에는 잔설이 희끗희끗 하다. 게다가 조금만 북상하면 천하절경 설악산(1708m)이고, 남쪽에는 두타산(1353m)이 빼어나다.
제주도에는 없고 강릉에만 있는 것으로는 평지에 펼쳐진 그윽한 운치의 솔밭과 해안에 인접한 자연호수(석호), 최대 10km에 달하는 장대한 백사장을 들 수 있다. 인문지리 측면에서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한 점도 꼽을 수 있겠다.
물이 얕고 호안에는 수초가 많이 자라는, 전형적인 습지 모습이다. 수중의 나무 조형물이 자연스럽다 호젓하고 예쁜 산책로
탐조대에는 서식 조류의 사진과 특징이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망원경 성능이 부족한 것이 다소 아쉽다
경포대 인근 바닷가에 자리한 집에서는 대관령을 비롯한 백두대간의 줄달음이 정면으로 마주보이고, 동쪽으로는 수평선 아득한 대해가 펼쳐지며, 바로 옆에는 아늑한 분위기의 솔밭과 ‘평야’라고 해도 될 정도로 꽤 넓은 들판이 있다.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면서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 매일이 즐거운 고민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고 또 내일은 어디로 갈지 갈 곳이 너무나 많고, 걷거나 라이딩 하고 싶은 길이 지천이다. 일단은 걷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처음으로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은 순포습지다. 경포대에서 가깝지만 관광지로는 알려지지 않아 조용한 습지다.
푸근한 정겨움이 감도는 습지. 물은 깊지 않고 키 작은 수초와 작은 생명들이 깃들어 사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경포호나 속초 영랑호처럼 해안에 생겨난 석호(潟湖)이며 개간 등으로 인해 면적이 크게 줄어 작은 습지로 남았다. 옛날 지도를 보면 1920년대만 해도 호수 면적은 8만9000㎡(약 2만7천평)이었으나 지금은 1만5000㎡(약 4500평)으로 1/6로 줄었다. 남호와 북호 두 호수로 나뉘어 있고 2017년 외곽 순환 산책로와 데크탐방로가 조성되었다. 외곽을 일주하면 2.5km 정도다.
바로 옆으로 경포대~주문진 간 해안도로가 지나가 소음이 다소 있지만 인파가 없고 주변에는 예쁜 주택들만 있어 한갓지다. 바다가 지척인데도 솔밭이 사이에 있어 내륙 깊숙한 곳으로 느껴지는 것도 특별하다.
남호와 북호 사이에는 분위기 좋은 솔밭이 우거져 있다
습지 깊숙이 자리한 벤치는 비어 있어도 주변 풍경이 가득 채워준다
산책길을 따라 바다에서 멀어지면 자동차 소리도 점점 줄어들고 작은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30~50m 정도의 완만하고 낮은 구릉이 일렁여서 안온하다.
겨울 철새는 떠났으나 몇 마리 오리와 홀로 남은 왜가리, 백로가 못가에 외롭다. 탐조대에는 서식하는 조류의 사진과 특성을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민물과 바다가 뒤섞이는 기수(沂水) 호수여서 생물 다양성이 특별하다.
습지 혹은 늪지는 땅과 물의 점이지대라고 할까. 게다가 해안의 만(灣)이 사구로 갇혀 호수가 된 석호는 바다와 호수의 점이지대이기도 하니 순포습지는 이래저래 각별하다.
수심은 1m 남짓이고 수초와 물억새, 갈대가 공생하며 온갖 생명들이 모여 사는 습지는 생동감이 차분히 가라앉아 들뜨지 않고 정겹다.
남호와 북호 사이에는 그윽한 솔밭까지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소담한 습지를 본 적이 있던가. 과하지 않은 개발과 보존 노력도 마음에 와 닿는다. 동해안자전거길과 접해 있어 지나는 길에 찾기도 좋다. 다행히 강릉은 자전거에 친화적이어서 모든 호수와 습지는 자전거 출입이 가능하다.
이제 순포습지는 나의 단골 산책로가 될 것이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볼까.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