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동 소금강

자생투어
20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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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이 감탄한 도교적 이상향

 

심심 계곡을 따라 탐방로가 잘 나 있다. 골짜기가 길고 완만해 기복은 심하지 않다 

“냇물의 근원이 오대산 북대(北臺)에서 나왔는데 그 흐름을 따라 들어가면 학이 깃든 곳을 볼 수 있다.”

이율곡의 이모부 권화(權和)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율곡에게 정자 앞을 흐르는 냇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권화의 집이 있던 곳은 지금의 주문진 남쪽, 연곡천이 합류하는 무진정 언덕이다. 1569년 34세의 율곡은 외할머니 간병을 위해 벼슬을 그만 두고 외가인 강릉에 내려와 있다가 연곡현 서쪽에 오대산에서 뻗어 내린 깊은 골짜기에 청학이 기암 봉우리에 깃들어 산다는 얘기를 듣고 탐방에 나선 길이었다. 율곡은 2박3일 간 청학동 소금강을 돌아보고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남겼다. 율곡이 금강산에 필적하는 풍경으로 ‘소금강’이라 칭하면서 ‘청학동 소금강’이 되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청학산은 계곡 북쪽의 백마봉(1094m)을 나타내는 것 같다.

내 방에서는 소금강을 품고 있는 소황병산(1329m)과 노인봉(1338m)이 잘 보인다. 마침 날씨도 청명해 율곡의 행로를 따라 나도 청학동을 찾아보련다.

청학동 소금강 개요도. 골짜기는 소황병산과 노인봉 사이에서 발원해 북동쪽으로 길게 패어 있다  

청학동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이상향이니 은둔자가 갈망하는 피신처이기도 하다. 지리산에도 청학동이 있고 여기 오대산 자락에도 청학동이 있으며, 깊고 은근한 산속을 자신만의 청학동으로 삼고 은둔하는 현대의 ‘자연인’들도 적지 않다.

오대산은 내륙의 평창에 있는 산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동쪽 줄기는 강릉 방면으로 흘러내린다. 그 중 노인봉 북서쪽으로 장장 13km나 패어있는 골짜기가 소금강이다. 무던한 육산인 오대산이 유일하게 기암괴석과 암봉을 드러낸 곳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나 있지만 옛날에는 접근이 힘든 험산이었을 것이다. 율곡은 오죽헌을 출발해 무진정을 거쳐 소금강 식당암까지 가는데 2박3일이 걸렸다. 지금의 나는 무진정에서 소금강 입구까지 20여분에 도착한다. 소금강 계곡은 연곡천에 합류하지만 골짜기 초입부터 협곡이라 길이 없고 청학동을 거쳐서 들어가야 한다. 청학동은 산줄기로 둘러싸인 해발 200m의 산중 분지로, 옛날에는 격리된 지형 때문에 청학동 같은 은둔지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소금강 가는 길목의 청학동. 해발 200m의 산중고원으로 옛날에는 천혜의 피난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소금강 계곡 입구에 조성된 주차장과 식당가는 사실 계곡 초입에서 5.5km나 들어온 허리춤이다. 여기서 계곡 초입(퇴곡리)까지는 길이 없는, 천연 그대로의 계류를 이루지만 기암괴석이 많지 않아 경관미는 상류에 미치지 못한다.

주말임에도 오후 늦은 시간이라 한산하다. 한창 봄이 익어가고 신록이 찬란한데 수량이 그득한지 물소리가 굉장하다. 초입에는 무릉계(武陵溪) 각자가 있는 작은 폭포와 큰 소(沼)가 있고 율곡이 구름이 몰아쳐 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창운(漲雲)’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다. 율곡의 탐방로는 ‘1569 율곡 유산(遊山) 길’이란 테마로 설명문을 붙여 놓았다.

계곡 초입이 해발 210m, 2.5km 들어간 구룡폭포가 340m 정도이니 대단히 완만한 편이다. 오늘은 구룡폭포에서 1.3km 상류의 만물상까지 다녀올 생각인데 시간이 조금 늦어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구룡폭포 상류는 산불조심기간(3.4~5.15) 통제구간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계곡 초입의 무릉계. 작은 폭포와 큰 소(沼)가 있고 율곡이 구름이 몰아쳐 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창운(漲雲)’이라고 이름 붙였다

1569년 이율곡의 탐방행로 안내도

골짜기가 13km에 달할 정도로 워낙 길고 주변 산이 높은데다 숲이 울창해 수림이 품었던 물이 모여 쏟아지는 계곡수 수량이 대단하다. 산속의 적막을 기대한다면 여기 소금강에서는 오산이다. 숲과 산을 울리는 물소리가 주위뿐 아니라 감각과 사색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인공의, 도시의 소음과는 근본이 다른 소리다. 그래, 이왕 시끄럽게 흐르는 저 급류에 걱정과 고뇌, 한숨마저 같이 흘려보내자. 소금강답게 금강산 지명이 때로 겹친다. 깊고 큰 소(沼)인 연화담은 금강산 연주담에 빗댄 것이다.

길은 계곡에서 조금씩 멀어져 살짝 고도를 높이기는 하지만 기복이 심하지 않아 걷기 좋다. 금강사까지는 사면이 급하긴 해도 기암절벽이 드물다가 금강사 주변부터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뒹굴고 아찔한 암벽이 좌우로 솟아난다.

계곡과 암벽 사이 좁은 터에 자리한 금강사(金剛寺)는 1964년 창건되었으나 원래 근처에 비구니 사찰인 청학사가 있었다고 한다. 율곡 일행이 머물렀던 절도 청학사로 추정된다. 비구니 사찰답게 절집이 정갈하고 뜰에 핀 갖가지 꽃에서는 향기가 감도는 것만 같다. 중년의 비구니가 사람들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깎은 머리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지게를 지고 씩씩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늘상 하는 일인 듯, 사하촌에서 생필품을 지고 올 모양이다. 외견상 가장 ‘덜’ 아름답고 누추한 모습이지만 고고한 기품과 함께 구도자 특유의 은은한 사색풍이 감돈다.

큰 소를 이룬 연화담은 금강산 연주담에 빗댄 이름이다  

아름답고 정갈한 비구니 사찰 금강사 

금강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널찍한 암반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별천지가 나오는데 바로 율곡 일행이 식사를 했다는 식당암이다. 길이 30m, 폭 12m의 너럭바위는 100여명이 한 번에 앉을 만하다. 1569년 율곡은 여기까지 왔다가 비 때문에 되돌아갔다. 탐방로가 정비되지 않은 당시 비를 무릅쓰고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순식간에 계곡물이 불어나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암 일대는 율곡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 그 감흥을 <유청학산기>에 남기고 있다. 율곡은 식당암을 비선암(秘仙巖)이라 부르고, 식당암 서쪽의 암봉을 촉운봉(矗雲峰)이라 했으며 주변 계곡은 천유동(天遊洞), 산은 청학산(靑鶴山)이라 이름 지었다. 모두 도교적 지명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율곡 역시 노장사상에 깊이 심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선비들이 대개 다 그랬다. 유학자를 자임했지만 도교와 불교적 정서도 체득하고 있어서 내면에는 현실주의와 현실도피주의가 혼재했다.

넓은 반석을 이룬 식당암. 주변이 절경이다  

식당암에는 다녀간 선비들이 새긴 이름이 지천이다. '무오년 4월'이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60갑자에 갇혀 지낸 시절이었다 

식당암에서 구룡폭포까지는 800m 남짓. 골짜기는 더욱 가파른 협곡으로 조여들고 좌우에는 기암절벽이 까마득하다. 어느 순간 계류의 소음을 압도하는 폭음이 울리기 시작하면 구룡폭포에 다 온 것이다.

남쪽 천마봉(1015m)에서 흘러내린 지계곡이 합수하는 지점에 걸린 폭포는 2단으로 꺾여 떨어지고, 소 아래에는 작은 폭포가 또 있어서 총 3단의 복합폭포다. 위쪽 2단 폭포는 높이 20m, 아래쪽 폭포는 10m로 총낙차는 30m에 달한다. 금강산 구룡폭포(74m)에 비견해서 붙인 이름이고 폭포 위쪽에 8개의 못, 상팔담이 있는 것도 같다.

온 산을 울리는 폭음,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패인 소(沼), 주위를 에워싼 기암괴석은 신비와 공포를 한데 담고 있다. 옛사람들이 이런 폭포에서 도교적 이상향과 무속적 초월성을 감각한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감성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혹은 위압적인 자연은 언제나 ‘초월’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홀로 폭포를 마주하고 있으니 서늘한 기운이 감싼다. 산이, 대자연만이 줄 수 있는 ‘까칠한’ 포용이다. 내가 맞춰야 하는, 그러면 살 길이 열리는.

구룡폭포 상부쪽 2단(높이 20m). 폭포 위에는 금강산 구룡폭포처럼 상팔담이 있다 

물살이 가장 센 하부 폭포(10m). 소의 깊이도 대단해 보인다  

구룡폭포 상류 만물상 방면은 5월 15일까지 출입금지다. 좌우 기슭이 더욱 조여들어 협곡이 심해지고 있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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