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송이 품어주는 숲의 격조
황금빛을 발하고 곧게 뻗은 금강송이 숲의 최고 품격을 완성한다
인적 없는 울창한 숲속... 역시 첫 느낌은 공포다. 서구문화에서 숲은 정령과 요정, 유령, 맹수와 산적이 들끓는 공포와 금단의 공간이다. 모든 공포 동화는 그 무대가 숲이다. 우리에게는 극히 드물지만 유럽에는 평지에 광대하게 펼쳐진 숲이 매우 많다. 완전한 평지여서 숲속에 들어서는 순간 방향을 가늠할 수 없고 길을 잃으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고개’ 혹은 ‘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워낙 산이 많고 평야가 드물어서이기도 한데, ‘고개와 산’이라고 하면 이미 ‘숲’은 포함된다. 우리는 숲을 고개와 산에 부수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독자적인 공간으로는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치유의 숲은 오봉산(542m) 북쪽 자락에 있고 다양한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맨발로도 걷기 좋은 길. 금강송이 바로 길가에 서서 심신을 지탱해주는 듯
대관령 남쪽을 옹위하는 제왕산(840m) 줄기가 흘러내려 마지막으로 뾰족한 오봉산(542m)을 빚었는데 이 오봉산 북쪽에 금강송 자생지가 있다. 용 몸통 같은 줄기를 하늘로 굳게 치켜세우고 나무 이상의 기품과 위용을 발하는 금강송은 가히 나무의 제왕답다.
이곳에 국립대관령치유의숲이 들어섰다. ‘국립’이라 뜻밖인데 알고 보니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이란 기관이 운영주체이며 전국에 이 같은 치유의 숲과 숲체원을 16곳 운영하고 있다. 산림 차원의 복지서비스를 위한 기관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2016년 개원).
코스 위치를 번호로 표시하고 중간중간 이정표도 잘 되어 있다 계곡이 시작되는 곳. 지하에서 스며나온 물이 마침내 지표면을 적시며 흐름을 시작한다
아무도 없다. 관리인도, 찾는 이도 없다. 망가진 데크로는 그대로 방치된 채이지만 인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운영은 하나 보다. 아무도 없지만 그대로 열려 있는 개방성, 자유는 좋다.
아름드리를 훌쩍 넘는 금강송 군락은 실로 장관이다. 산중에 만든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이고 동화의 무대에 들어선 느낌마저 든다.
맨발로도 걸을 수 있게 부드럽게 다진 길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산기슭을 오른다. 경사를 최대한 낮춰 길 따라 걷노라면 숨은 크게 차지 않는다. 바로 길가에 선 금강송은 그냥 손을 스치거나 마음이 동하면 가만히 안을 수 있다. 용 비늘 같은 껍질이 징그럽지만 두 팔로 감싸 안으면 공기가 흐르는 통로가 되어 ‘쿨한’ 거리감을 만든다. 이런 거리감, 침범을 허용치 않는 사적 공간마저도 품위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은 숲의 원시미를 말해준다. 나무도 안전하게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맨발로 걷고 발을 씻는 옹달샘. 계류가 어느새 상당한 수량으로 흐른다. 숲의 마력은 이처럼 생명수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지금 내게 숲은 관대하고 안온하다. 병약한 몸으로 찾아드니 숲은 치유의 마음으로 가만히 안아줄 뿐이다. 처음 느꼈던 일말의 공포는 멀리 소외된다. 저쪽에서 멧돼지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네 갈 길을 가거라’ 하는 마음이다.
금강송은 다르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숲의 교양을 크게 높여준다. 그 속을 거니는 나 역시 귀한 대접을 받는 것만 같다.
더 걷고 싶은데 길이 끝났다. 왔던 길을 되짚어도 되지만 이번에는 체력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 격조 높은 숲을 오래 만나려면 속도를 더 줄이거나 체력을 길러야 할까 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금강송이 품어주는 숲의 격조
황금빛을 발하고 곧게 뻗은 금강송이 숲의 최고 품격을 완성한다
인적 없는 울창한 숲속... 역시 첫 느낌은 공포다. 서구문화에서 숲은 정령과 요정, 유령, 맹수와 산적이 들끓는 공포와 금단의 공간이다. 모든 공포 동화는 그 무대가 숲이다. 우리에게는 극히 드물지만 유럽에는 평지에 광대하게 펼쳐진 숲이 매우 많다. 완전한 평지여서 숲속에 들어서는 순간 방향을 가늠할 수 없고 길을 잃으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고개’ 혹은 ‘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워낙 산이 많고 평야가 드물어서이기도 한데, ‘고개와 산’이라고 하면 이미 ‘숲’은 포함된다. 우리는 숲을 고개와 산에 부수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독자적인 공간으로는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치유의 숲은 오봉산(542m) 북쪽 자락에 있고 다양한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맨발로도 걷기 좋은 길. 금강송이 바로 길가에 서서 심신을 지탱해주는 듯
대관령 남쪽을 옹위하는 제왕산(840m) 줄기가 흘러내려 마지막으로 뾰족한 오봉산(542m)을 빚었는데 이 오봉산 북쪽에 금강송 자생지가 있다. 용 몸통 같은 줄기를 하늘로 굳게 치켜세우고 나무 이상의 기품과 위용을 발하는 금강송은 가히 나무의 제왕답다.
이곳에 국립대관령치유의숲이 들어섰다. ‘국립’이라 뜻밖인데 알고 보니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이란 기관이 운영주체이며 전국에 이 같은 치유의 숲과 숲체원을 16곳 운영하고 있다. 산림 차원의 복지서비스를 위한 기관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2016년 개원).
코스 위치를 번호로 표시하고 중간중간 이정표도 잘 되어 있다 계곡이 시작되는 곳. 지하에서 스며나온 물이 마침내 지표면을 적시며 흐름을 시작한다
아무도 없다. 관리인도, 찾는 이도 없다. 망가진 데크로는 그대로 방치된 채이지만 인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운영은 하나 보다. 아무도 없지만 그대로 열려 있는 개방성, 자유는 좋다.
아름드리를 훌쩍 넘는 금강송 군락은 실로 장관이다. 산중에 만든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이고 동화의 무대에 들어선 느낌마저 든다.
맨발로도 걸을 수 있게 부드럽게 다진 길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산기슭을 오른다. 경사를 최대한 낮춰 길 따라 걷노라면 숨은 크게 차지 않는다. 바로 길가에 선 금강송은 그냥 손을 스치거나 마음이 동하면 가만히 안을 수 있다. 용 비늘 같은 껍질이 징그럽지만 두 팔로 감싸 안으면 공기가 흐르는 통로가 되어 ‘쿨한’ 거리감을 만든다. 이런 거리감, 침범을 허용치 않는 사적 공간마저도 품위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은 숲의 원시미를 말해준다. 나무도 안전하게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맨발로 걷고 발을 씻는 옹달샘. 계류가 어느새 상당한 수량으로 흐른다. 숲의 마력은 이처럼 생명수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지금 내게 숲은 관대하고 안온하다. 병약한 몸으로 찾아드니 숲은 치유의 마음으로 가만히 안아줄 뿐이다. 처음 느꼈던 일말의 공포는 멀리 소외된다. 저쪽에서 멧돼지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네 갈 길을 가거라’ 하는 마음이다.
금강송은 다르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숲의 교양을 크게 높여준다. 그 속을 거니는 나 역시 귀한 대접을 받는 것만 같다.
더 걷고 싶은데 길이 끝났다. 왔던 길을 되짚어도 되지만 이번에는 체력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 격조 높은 숲을 오래 만나려면 속도를 더 줄이거나 체력을 길러야 할까 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