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주전골 감탄 만보

자생투어
202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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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 편하게 만나는, 설악의 진수

 

성국사를 지나면 바로 100m를 넘나드는 암벽과 암봉의 별세계가 펼쳐진다. 계곡의 물은 또 얼마나 맑은지 


강릉에 사는 장점 중 하나는 국내최고의 산악 절경인 설악산이 가깝다는 것이다. 고교시절에는 수학여행으로 왔던 곳인데 자동차로 40여분이면 도착하니 그냥 마실 가는 품이다.

설악은 어쩌면 ‘재발견’ ‘재조명’된 산이다. 조선시대 이후 해방 전까지는 금강산에 압도되어 존재감이 거의 없다가 등산이 레포츠로 확산되면서 각광받게 된다. 잠시 금강산 관광이 허용되었을 때 막상 금강산을 본 사람들은 ‘설악도 금강산 못지않잖아…’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천하절경이라는 중국의 오악과 황산도 감탄스럽지만 실제 이들 산을 가본 사람들은 설악도 필적할 만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계곡 옆 암반에서 솟아나는 오색약수  

설악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은 외부에서는 절경이 잘 보이지 않고, 산이 너무 험해 접근 자체가 힘들었던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진경산수화를 방불케 하는 설악의 진수를 보려면 지금도 장시간 험로를 걸어들어가야 한다. 지금이야 협곡과 절벽에도 데크로가 놓여 편하게 가지만 옛날에는 아예 갈 수가 없었다. 사실 설악은 외부에서는 울산바위와 능선 상의 암봉과 암릉 정도만 보일 뿐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등산 베테랑이든 초보든 산 아래에서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절경을 만날 수 있어 시간과 체력적 부담이 상당히 크다.

옛 기록의 오색석사 터로 추정되는 성국사. 주전골의 초입에 있으며 절을 기점으로 풍경이 돌변한다. 전형적인 신라시대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좀 쉽게, 힘들지 않게, 간단하게 설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설악동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설악의 진수인 기암절벽을 바로 옆에서 보려면 아무래도 계곡으로 들어서야 한다. 설악의 수많은 계곡 중에 가장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남설악의 주전골이다. 남설악이라고 하면 한계령 남쪽 점봉산(1424m)과 오색약수 일원을 말한다. 주전골은 44번 국도변에 있는 오색약수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고, 주차장에서 10분만 걸어가면 거대한 진경산수화 속으로 접어든다.
남설악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만경대(560m). 반대편 44번 국도변에서 진입할 수 있으나 단풍철에만 개방된다. 암벽 높이가 150m를 넘는다 

만경대에서 흘러내린 작은 계곡 합수점에 제2 오색약수가 있다. 왼쪽 아래 암반에서 약수가 솟아나며 주변 바위가 철분으로 붉게 물든 것을 볼 수 있다 


온통 바위뿐인 수직의 협곡이 이어진다. 낙석방지용 장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계곡 초입에 있는 오색약수는 개울가 반석에서 스며나듯 솟아나 신기하다. 16세기 무렵 인근 성국사의 스님이 처음 발견했다고 하며, 당시 성국사 뒤뜰에서 자라던 오색화(五色花)에서 이름을 따왔다. 약수는 나트륨과 철분이 섞여 있어 맛과 색이 특이하고 여러 질환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찾는데다 위치 상 오염에 취약해 마시기는 힘들다.

오색약수에서 성국사까지 700m는 노면이 평탄한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다만 성국사까지는 주변이 육산 분위기이고 기암절벽이 보이지 않아 과연 설악의 진수를 볼 수 있을지 의아심이 든다. 그러나 성국사를 지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펼쳐지는 장관에 눈은 확 떠지고 입은 저절로 벌어진다. 마치 숨겨진 ‘별유천지비인간’의 무릉도원에 들어선 것 같다고나 할까.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데크로 덕분에 편하게 산책하듯 구경한다 

작은 폭포와 소가 빚어낸 선녀탕. 물이 너무나 맑아 투명의 극치를 보여준다 

흔히 아는 설악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경관이 있었던가’ 새삼 놀라게 된다. 협곡을 따라 유리 같은 맑은 계류가 흐르고 바로 옆으로는 100m를 넘는 수직절벽과 뾰족한 암봉이 도열한 모습은 흔히 떠올리는 선경의 모습 그대로다. 구름 탄 도사가 저기 어디쯤 나타나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다.

점입가경… 갈수록 골은 깊어지고 봉우리는 높아지는데 낙석을 막기 위해 길 위에는 철망을 두른 곳도 있을 정도로 절벽과 바짝 붙어 지난다. 전국 어디를 가나 골짜기 물은 맑기야 하지만 특히 설악의 물이 더 맑은 것은 수목이 울창해 언제나 수량이 풍부한데다 온통 암반이어서 오염에 강하기 때문이다. 계곡수는 깊이 2m라도 바닥이 그대로 보이고 가만히 주시하노라면 투명한 수정이 액체화된 것 같다. 선녀탕은 너무 맑아 선녀가 진짜로 목욕한다면 작은 때조차 숨기기 어려울 것 같다.

인공적인 다리가 있으니 인문적 산수화의 묘미가 더해진다  

성국사는 옛 기록의 오색석사 터로 추정되며 뜰에는 신라시대 양식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천수백년 전 이미 신라인들도 험로를 뚫고 이 비경을 찾아내 절까지 지었으니 실로 놀라운 안목이자 실천력이다.

성국사에서 5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서 작은 계곡이 합류하는데 그 뒤로 어마어마한 암봉이 솟구쳐 있다. 바로 만경대다. 이름 그대로 주전골과 남설악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44번 국도에 접한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에서 진입할 수 있지만 가을 단풍철에만 한시적으로 개방된다.

만경대 합수점에는 제2의 오색약수가 솟아나 주변을 정비중이다. 철분이 많은 듯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고 암반에서 스며나는 것도 비슷하다.

반환점인 용소삼거리에 거의 다 왔다. 맞은편 암릉 너머에 흘림골이 있다  

간혹 오르막과 흙길 등산로가 잠깐 나오지만 길은 대체로 좋고 경사도 심하지 않다. 오색약수에서 출발하면 2.7km 들어간 용소삼거리까지만 갈 수 있으며, 그 이상은 반대편 흘림골을 통해 사전예약제로 오색 방면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주전골이란 이름에는 기이한 유래가 있다. 옛날 강원관찰사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찾아보게 했다. 알고 보니 동굴 속에서 한 무리가 위조엽전을 만들고 있어 관찰사는 무리와 동굴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후 엽전을 주조한 곳이라고 해서 주전(鑄錢)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범죄인 위조화폐를 만들어도 모를 정도로 깊은 산골이란 뜻도 있겠다.

코스 반환점인 용소(폭포)삼거리. 해발 456m이며 오색약수에서 2.7km 거리다  용소삼거리에서 주전골 상류를 거쳐 흘림골 방면으로 가는 길은 통행금지다. 흘림골에서 사전예약을 통해 오색약수 방면으로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비수기에 굳이 이런 제약을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  

초입의 오색약수가 해발 340m이고 종점인 용소삼거리가 456m이니 고도차는 116m에 불과하다. 2.7km 동안 겨우 116m 높아지니 거의 평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약자나 등산 초보자를 동반해도 큰 무리가 없다.

용소삼거리 즈음에 이르면 북쪽 흘림골 사이에 솟은 암릉이 실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주전골로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고(사전예약을 통해 흘림골에서 등선대를 넘어 오색방면 일방통행만 가능) 용소폭포 방면은 길이 폐쇄되어 아쉽지만 여기서 돌아서야 한다.

주전골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자세히 보니 소나무보다 단풍이 지는 활엽수와 단풍나무가 많아 협곡과 단풍이 어우러지는 붉은 절경이 대단할 것 같다. 올가을 어느 평일 날 아침, 조용히 스며들 듯 이 경이로운 골짜기로 다시 와야겠다.

왼쪽 오색약수에서 출발해 용소삼거리를 돌아오는 코스다(왕복 5.4km, 1시간40분 소요). 오색약수 바로 근처에 주차장이 있고 성국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절경이 펼쳐진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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