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곧장 비류직하일천척! 한반도 최고 최장 폭포
1km 떨어진 전망대에서 바라본 토왕성폭포의 웅자. 마치 하늘에서 바로 떨어지는 듯 하얀 물줄기가 초거대 암벽을 수놓는다. 상단 150m, 중단 80m, 하단 90m 총길이 320m로 한반도 최장을 자랑한다. 상단과 중단은 마치 빙식곡 같은 U자 곡을 흐른다
순간 말을 잃었다. 비룡폭포에서부터 거의 사다리 수준으로 곧추선 900계단을 올라온 고역도 잊었다. 지금껏 여러 번 보았고 폭포 바로 아래까지 접근한 적도 있는데 이런 위압감은 처음이다. 백두산 천지나 그랜드캐년을 처음 마주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1km나 떨어진 거리지만 하얀 실타래처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너무나 길고, 주변 암벽과 암봉은 거대하고 또 빼어나다. 지금 나는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높은 설악산 토왕성폭포 앞에 서 있다.
이백은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 ‘날아 흘러 삼천척을 수직으로 쏟아지니(飛流直下三千尺)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疑是銀河落九天)’하고 천하절창을 읊었는데 시의 배경이 된 여산 폭포(수봉폭포)는 높이가 150m에 불과하고 토왕성폭포는 전장 320m이니 더 어울린다. 이백이 150m 폭포를 3천척(약 900m)이라고 6배를 과장한 배포는 오지다. 토왕성폭포는 사실 그대로 1천척이라고 해도 규모감은 크게 축소되지 않는다.
외설악의 모든 계곡수를 모아 흐르는 쌍천은 급류에 시달려 둥글어진 돌과 바위가 지천이다. 케이블카 탑승장 근처에서 비룡교를 건너 토왕골로 향한다. 뒤편으로 울산바위가 하얗다
‘토왕성(土旺城)’이란 특이한 이름은 첫눈에 음양오행설이 떠오른다. 우주는 서로 상반되는 음양(陰陽)의 기본적인 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원소(수, 화, 목, 금, 토)가 서로 상극, 상생하면서 작용한다는 것이 음양오행설이다. ‘토왕’은 ‘토(土) 기운이 왕성하다’는 뜻이니 거대한 암벽과 암봉이 밀집한 지형을 ‘토왕’으로 표현한 것 같다. 오행 상생에서 토는 물을 낳는다(土生水)고 했으니 옛사람들은 폭포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옛기록에는 폭포 옆에 토왕성이란 산성이 있었다고 하며 이웃한 권금성(설악산 케이블카 상부역 부근)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금성과 토왕성 모두 천혜의 자연절벽을 활용해 인공적 축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토왕성은 폭포를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서쪽)에 있는 ‘토왕우골’ 최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사방이 절벽이고 암릉이어서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이루지만 아군 역시 접근이 어려운 것이 단점이다. 권금성과 함께 몽골군 침입 때 쌓았다고 전해진다.
육담폭포 일원의 놀라운 협곡. 좌우로 100m가 넘는 수직절벽이 불과 20m 거리로 밀착해 있고 그 사이로 육담폭포가 급사면을 이룬다. 옛날에는 이 구간 때문에 상류로는 더이상 접근이 어려웠을 것이다. 별천지를 숨긴 관문인 셈이다
토왕성폭포는 설악산소공원 진입로에서도 살짝 올려다 보이지만 워낙 험한 암벽지대에 자리해 오랫동안 빙벽 등반을 하는 산악인들만이 접근하는 특전을 누렸다. 26, 7년 전 나는 이 폭포가 하도 궁금해서 일행 몇 명과 어울려 비룡폭포 상류를 따라 장비 없이 걸어서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간 적이 있다. 하늘을 찌르고 시야와 가슴을 압도하는 수백 미터 암벽의 파노라마에 오금이 저렸던 기억이 난다.
비룡폭포는 소공원에서 2km 정도로 가장 짧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초보자나 수학여행단이 즐겨 찾았지만 한반도 최고 절경인 토왕성폭포를 목전에서 놓쳐야 했다. 마침내 2015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비룡폭포 서쪽 노적봉 연결능선 해발 450m 지점에 토왕성폭포 전망대를 조성하고 연결로를 만들었다. 토왕성폭포에서 1km나 떨어진 곳이지만 워낙 폭포가 길고 주변 암벽이 거대해 웅자를 실감하기 좋은 위치다.
흔들다리가 걸린 육담폭포. 높이 25m 정도의 와폭으로 수량이 많아 물이 매우 빠르고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다. 상류의 비룡폭포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며칠간 장맛비가 내리다가 잠시 그친 날, 기회가 왔구나 싶어 설악산으로 향했다. 토왕성폭포는 상류 골짜기가 채 1km도 되지 않아 갈수기에는 물이 마르거나 수량이 크게 줄어 겨우 암벽을 적시며 졸졸 흐르기도 한다. 때문에 큰 비가 온 직후에 가야 웅장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소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올려다보니 역시 제대로다. 폭과 수량을 최대한 키운 하얀 물줄기는 하늘 위에서 장대한 수직선을 그리고 있다.
소공원 옆 비룡교에서 토왕성폭포전망대까지는 2.5km. 토왕골로 가자면 먼저 쌍천을 건너야한다. 설악산 최장 천불동계곡을 포함해 일대의 계곡수를 모아서 흐르는 쌍천은 폭이 40m에 달하지만 돌과 바위가 수없이 뒹굴어 거대한 계곡으로 느껴진다. 하얀 장벽을 이룬 울산바위, 마등령 오름길에 우뚝한 세존봉, 둔중한 황철봉과 직선의 저항령, 바로 눈앞에 치솟은 권금성 등등 설악동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봉우리들이 반갑다. 오랜만에 찾아든 나는 나이 들고 병들었으나 산천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저 바위산도 조금은 풍화되고 나무는 더 자라거나 일부는 죽었겠지만 인간의 생애와 감각 기준으로는 변화를 찾을 수 없다. 심신의 위기에 처한 인간이 ‘변치 않는’ 자연에 기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흔들다리 위에서 본 육담폭포. 지근거리에서 폭포를 볼 수 있어 쾌속의 급류와 물소리의 실감이 박력 넘친다. 오른쪽으로 비 온 후 생긴 실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런 우후 급조 폭포는 설악산에 지천이다
비룡교에서 1.3km는 쌍천과 나란히 가는 평탄한 숲길이다. 토왕골을 만나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거대한 암벽이 좌우를 압박하는 사이, 육담폭포 하부가 나타난다. 이름 그대로 6개의 못과 폭포가 연이어 있는 6연폭이다. 폭포별로 규모 차이가 커서 어디가 몇 번째인지 알기 어려운데, 출렁다리가 걸린 와폭이 단연 압권이다. 높이는 25m 정도지만 바로 옆까지 접근할 수 있어 물줄기의 엄청난 속도와 굉음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면 폭포는 자연상태에서 물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곳이다. 와폭인데도 육담폭포는 수량이 많아 물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노라면 공포감이 들 정도의 스피드로 그 얌전하던 물이 광분한다. 위쪽의 비룡폭포보다 이 육담폭포가 임팩트가 더 하다.
이름에 비해 규모가 작아 조금 실망스러운 비룡폭포. 높이 20m에 깊푸른 소가 인상적이다. 저 물은 조금 전 토왕성폭포 1천척을 떨어져 내려 기세가 꺾인 것일까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라면 설악산은 일만이천폭’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폭포가 많다는 뜻인데, 비온 후에는 이 말이 실감난다. 절벽 곳곳에 장대한 폭포가 생겨나 그야말로 온 산이 폭포 천국이다. 하지만 이런 ‘하루살이 폭포’는 며칠 내에 건폭으로 돌아가고 만다.
육담폭포에서 400m 더 가면 널찍하고 깊푸른 소를 갖춘 비룡폭포가 쏟아진다. 하지만 물줄기가 가늘고 높이가 20m로 낮아서 용이 날아간다는 이름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꽤 올라온 것 같지만 비룡폭포는 해발 280m밖에 되지 않는다. 토왕성폭포 전망대는 450m이니 170m를 더 올라야 하는데 무려 900계단이다. 이정표에는 거리가 400m로 되어 있으나 이는 수평 기준이어서 5분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거의 사다리를 세운 것 같은 급경사 900계단을 올라야 해서 20분 이상 잡아야 한다. 설악산에서 악명 높은 코스인 공룡능선도 4.9km 밖에 되지 않으나 오르내림이 극심해 5시간 이상 걸리는 것과 같다. 설악산에서는 이정표 거리를 3배 정도 확대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다.
해발 450m, 노적봉 능선에 자리한 토왕성폭포 전망대. 상단에서 1km 거리이며, 해발 830m인 토왕성폭포 상단 꼭대기의 절반 정도 높이여서 경관의 입체감, 웅장함이 극대화되는 좋은 위치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힘내세요!”
계단을 내려오던 어린 소녀가 땀과 심호흡으로 죽을상을 짓고 있는 나를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하산과 등산이 엇갈리면서 듣는 이 소리는 수치적 정보가 아니라 정서적 위로로 이해해야 한다. ‘거의 다 왔다’는데 여전히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마침내 고개를 한참 꺾어야 보이는 언덕 저편에 하늘 배경의 전망대가 보인다. 뜻밖에도 전망대는 외국인 여러 명이 점거 중이다. 이외에도 이 코스를 오가면서 외국인을 다수 보았는데 대자연이 빚어낸 위용의 가치를 그들이 더 잘 알아주는 것만 같다. 그랜드캐년과 알프스, 피요르드를 직접 목도했다면 대자연의 스케일이 주는 감동을 더 잘 알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전망대는 비룡폭포에서 노적봉(726m)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해발 450m 지점에 있다. 토왕성폭포까지의 거리는 상단 기준 1km. 토왕성폭포 상단 정상이 해발 830m이니 산악조망에서 가장 좋은 절반 정도 높이다. 산은 비스듬하게 경사져 있어서 산 아래보다는 중간 정도 높이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적인 규모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대자연의 힘과 절정의 미학 앞에 경외감과 자조감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간의 능력도 대단해서, 폭포 오른쪽 위 숲지대가 옛 토왕성 터로 추정된다
토왕성폭포는 위치부터 숨이 턱 막힌다. 마치 상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거대한 절벽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폭포를 에워싼 동그마한 암릉은 빙하가 녹으면서 깎아내린 빙식곡(kar)과 흡사하다. 방하기 때부터 얼음과 물이 암반을 깎아내 지금의 폭포를 만들어낸 것 같다.
폭포 주변의 암벽과 암릉도 굉장하다. 수백미터급 절벽과 날카로운 암릉이 밀집해 바위와 절벽이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발산한다. 자세히 보면 토왕성폭포를 중심으로 노적봉~선녀봉이 지름 800m 정도의 원을 이루며 한쪽이 터진 깔때기 같은 기이한 대협곡을 이룬다. 계곡 바닥에서 300~400m나 치솟은 암벽과 즐비한 암봉의 위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의 규모를 넘어서서 숨 막히는 감동을 준다. 그중 백미는 하얀 실타래처럼 거대 암벽에 드리워진 폭포다. 전망대에서도 상류 계곡이 보이지 않아 여전히 하늘끝 절벽에서 곧장 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 신비감과 경외감을 더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인공폭포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속초시내와 동해
어느새 사람들이 다 내려가고 혼자 남았다. 어둑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후 늦은 시간이라 더 올라오는 사람은 없을 듯. 나도 절벽 위에 올라서서 대자연의 스케일을 혼자서 마주한다. 이 거창한 바위산과 협곡은 시간의 한계를 품고 있다. 지금 배경 그대로 익룡이 하늘을 누비기도 했을 것 같고, 원시인이 길을 잃고 벼랑을 헤매는 모습, 신선경을 찾아든 조선의 한 선비가 탄식하는 모습도 오버랩된다. 그러나 길든 짧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끝은 있기 마련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하산해야 하고 거대한 암벽 저 어디선가는 크고 작은 낙석이 굴러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
하늘에서 곧장 비류직하일천척! 한반도 최고 최장 폭포
1km 떨어진 전망대에서 바라본 토왕성폭포의 웅자. 마치 하늘에서 바로 떨어지는 듯 하얀 물줄기가 초거대 암벽을 수놓는다. 상단 150m, 중단 80m, 하단 90m 총길이 320m로 한반도 최장을 자랑한다. 상단과 중단은 마치 빙식곡 같은 U자 곡을 흐른다
순간 말을 잃었다. 비룡폭포에서부터 거의 사다리 수준으로 곧추선 900계단을 올라온 고역도 잊었다. 지금껏 여러 번 보았고 폭포 바로 아래까지 접근한 적도 있는데 이런 위압감은 처음이다. 백두산 천지나 그랜드캐년을 처음 마주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1km나 떨어진 거리지만 하얀 실타래처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너무나 길고, 주변 암벽과 암봉은 거대하고 또 빼어나다. 지금 나는 한반도를 통틀어 가장 높은 설악산 토왕성폭포 앞에 서 있다.
이백은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 ‘날아 흘러 삼천척을 수직으로 쏟아지니(飛流直下三千尺)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疑是銀河落九天)’하고 천하절창을 읊었는데 시의 배경이 된 여산 폭포(수봉폭포)는 높이가 150m에 불과하고 토왕성폭포는 전장 320m이니 더 어울린다. 이백이 150m 폭포를 3천척(약 900m)이라고 6배를 과장한 배포는 오지다. 토왕성폭포는 사실 그대로 1천척이라고 해도 규모감은 크게 축소되지 않는다.
외설악의 모든 계곡수를 모아 흐르는 쌍천은 급류에 시달려 둥글어진 돌과 바위가 지천이다. 케이블카 탑승장 근처에서 비룡교를 건너 토왕골로 향한다. 뒤편으로 울산바위가 하얗다
‘토왕성(土旺城)’이란 특이한 이름은 첫눈에 음양오행설이 떠오른다. 우주는 서로 상반되는 음양(陰陽)의 기본적인 힘을 바탕으로 다섯 가지 원소(수, 화, 목, 금, 토)가 서로 상극, 상생하면서 작용한다는 것이 음양오행설이다. ‘토왕’은 ‘토(土) 기운이 왕성하다’는 뜻이니 거대한 암벽과 암봉이 밀집한 지형을 ‘토왕’으로 표현한 것 같다. 오행 상생에서 토는 물을 낳는다(土生水)고 했으니 옛사람들은 폭포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옛기록에는 폭포 옆에 토왕성이란 산성이 있었다고 하며 이웃한 권금성(설악산 케이블카 상부역 부근)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금성과 토왕성 모두 천혜의 자연절벽을 활용해 인공적 축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토왕성은 폭포를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서쪽)에 있는 ‘토왕우골’ 최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사방이 절벽이고 암릉이어서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이루지만 아군 역시 접근이 어려운 것이 단점이다. 권금성과 함께 몽골군 침입 때 쌓았다고 전해진다.
육담폭포 일원의 놀라운 협곡. 좌우로 100m가 넘는 수직절벽이 불과 20m 거리로 밀착해 있고 그 사이로 육담폭포가 급사면을 이룬다. 옛날에는 이 구간 때문에 상류로는 더이상 접근이 어려웠을 것이다. 별천지를 숨긴 관문인 셈이다
토왕성폭포는 설악산소공원 진입로에서도 살짝 올려다 보이지만 워낙 험한 암벽지대에 자리해 오랫동안 빙벽 등반을 하는 산악인들만이 접근하는 특전을 누렸다. 26, 7년 전 나는 이 폭포가 하도 궁금해서 일행 몇 명과 어울려 비룡폭포 상류를 따라 장비 없이 걸어서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간 적이 있다. 하늘을 찌르고 시야와 가슴을 압도하는 수백 미터 암벽의 파노라마에 오금이 저렸던 기억이 난다.
비룡폭포는 소공원에서 2km 정도로 가장 짧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초보자나 수학여행단이 즐겨 찾았지만 한반도 최고 절경인 토왕성폭포를 목전에서 놓쳐야 했다. 마침내 2015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비룡폭포 서쪽 노적봉 연결능선 해발 450m 지점에 토왕성폭포 전망대를 조성하고 연결로를 만들었다. 토왕성폭포에서 1km나 떨어진 곳이지만 워낙 폭포가 길고 주변 암벽이 거대해 웅자를 실감하기 좋은 위치다.
흔들다리가 걸린 육담폭포. 높이 25m 정도의 와폭으로 수량이 많아 물이 매우 빠르고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다. 상류의 비룡폭포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며칠간 장맛비가 내리다가 잠시 그친 날, 기회가 왔구나 싶어 설악산으로 향했다. 토왕성폭포는 상류 골짜기가 채 1km도 되지 않아 갈수기에는 물이 마르거나 수량이 크게 줄어 겨우 암벽을 적시며 졸졸 흐르기도 한다. 때문에 큰 비가 온 직후에 가야 웅장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소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올려다보니 역시 제대로다. 폭과 수량을 최대한 키운 하얀 물줄기는 하늘 위에서 장대한 수직선을 그리고 있다.
소공원 옆 비룡교에서 토왕성폭포전망대까지는 2.5km. 토왕골로 가자면 먼저 쌍천을 건너야한다. 설악산 최장 천불동계곡을 포함해 일대의 계곡수를 모아서 흐르는 쌍천은 폭이 40m에 달하지만 돌과 바위가 수없이 뒹굴어 거대한 계곡으로 느껴진다. 하얀 장벽을 이룬 울산바위, 마등령 오름길에 우뚝한 세존봉, 둔중한 황철봉과 직선의 저항령, 바로 눈앞에 치솟은 권금성 등등 설악동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봉우리들이 반갑다. 오랜만에 찾아든 나는 나이 들고 병들었으나 산천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저 바위산도 조금은 풍화되고 나무는 더 자라거나 일부는 죽었겠지만 인간의 생애와 감각 기준으로는 변화를 찾을 수 없다. 심신의 위기에 처한 인간이 ‘변치 않는’ 자연에 기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흔들다리 위에서 본 육담폭포. 지근거리에서 폭포를 볼 수 있어 쾌속의 급류와 물소리의 실감이 박력 넘친다. 오른쪽으로 비 온 후 생긴 실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런 우후 급조 폭포는 설악산에 지천이다
비룡교에서 1.3km는 쌍천과 나란히 가는 평탄한 숲길이다. 토왕골을 만나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거대한 암벽이 좌우를 압박하는 사이, 육담폭포 하부가 나타난다. 이름 그대로 6개의 못과 폭포가 연이어 있는 6연폭이다. 폭포별로 규모 차이가 커서 어디가 몇 번째인지 알기 어려운데, 출렁다리가 걸린 와폭이 단연 압권이다. 높이는 25m 정도지만 바로 옆까지 접근할 수 있어 물줄기의 엄청난 속도와 굉음을 실감한다. 그러고 보면 폭포는 자연상태에서 물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곳이다. 와폭인데도 육담폭포는 수량이 많아 물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노라면 공포감이 들 정도의 스피드로 그 얌전하던 물이 광분한다. 위쪽의 비룡폭포보다 이 육담폭포가 임팩트가 더 하다.
이름에 비해 규모가 작아 조금 실망스러운 비룡폭포. 높이 20m에 깊푸른 소가 인상적이다. 저 물은 조금 전 토왕성폭포 1천척을 떨어져 내려 기세가 꺾인 것일까
‘금강산이 일만이천봉이라면 설악산은 일만이천폭’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폭포가 많다는 뜻인데, 비온 후에는 이 말이 실감난다. 절벽 곳곳에 장대한 폭포가 생겨나 그야말로 온 산이 폭포 천국이다. 하지만 이런 ‘하루살이 폭포’는 며칠 내에 건폭으로 돌아가고 만다.
육담폭포에서 400m 더 가면 널찍하고 깊푸른 소를 갖춘 비룡폭포가 쏟아진다. 하지만 물줄기가 가늘고 높이가 20m로 낮아서 용이 날아간다는 이름이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
꽤 올라온 것 같지만 비룡폭포는 해발 280m밖에 되지 않는다. 토왕성폭포 전망대는 450m이니 170m를 더 올라야 하는데 무려 900계단이다. 이정표에는 거리가 400m로 되어 있으나 이는 수평 기준이어서 5분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거의 사다리를 세운 것 같은 급경사 900계단을 올라야 해서 20분 이상 잡아야 한다. 설악산에서 악명 높은 코스인 공룡능선도 4.9km 밖에 되지 않으나 오르내림이 극심해 5시간 이상 걸리는 것과 같다. 설악산에서는 이정표 거리를 3배 정도 확대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다.
해발 450m, 노적봉 능선에 자리한 토왕성폭포 전망대. 상단에서 1km 거리이며, 해발 830m인 토왕성폭포 상단 꼭대기의 절반 정도 높이여서 경관의 입체감, 웅장함이 극대화되는 좋은 위치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힘내세요!”
계단을 내려오던 어린 소녀가 땀과 심호흡으로 죽을상을 짓고 있는 나를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하산과 등산이 엇갈리면서 듣는 이 소리는 수치적 정보가 아니라 정서적 위로로 이해해야 한다. ‘거의 다 왔다’는데 여전히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마침내 고개를 한참 꺾어야 보이는 언덕 저편에 하늘 배경의 전망대가 보인다. 뜻밖에도 전망대는 외국인 여러 명이 점거 중이다. 이외에도 이 코스를 오가면서 외국인을 다수 보았는데 대자연이 빚어낸 위용의 가치를 그들이 더 잘 알아주는 것만 같다. 그랜드캐년과 알프스, 피요르드를 직접 목도했다면 대자연의 스케일이 주는 감동을 더 잘 알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전망대는 비룡폭포에서 노적봉(726m)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해발 450m 지점에 있다. 토왕성폭포까지의 거리는 상단 기준 1km. 토왕성폭포 상단 정상이 해발 830m이니 산악조망에서 가장 좋은 절반 정도 높이다. 산은 비스듬하게 경사져 있어서 산 아래보다는 중간 정도 높이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적인 규모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대자연의 힘과 절정의 미학 앞에 경외감과 자조감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간의 능력도 대단해서, 폭포 오른쪽 위 숲지대가 옛 토왕성 터로 추정된다
토왕성폭포는 위치부터 숨이 턱 막힌다. 마치 상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거대한 절벽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폭포를 에워싼 동그마한 암릉은 빙하가 녹으면서 깎아내린 빙식곡(kar)과 흡사하다. 방하기 때부터 얼음과 물이 암반을 깎아내 지금의 폭포를 만들어낸 것 같다.
폭포 주변의 암벽과 암릉도 굉장하다. 수백미터급 절벽과 날카로운 암릉이 밀집해 바위와 절벽이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발산한다. 자세히 보면 토왕성폭포를 중심으로 노적봉~선녀봉이 지름 800m 정도의 원을 이루며 한쪽이 터진 깔때기 같은 기이한 대협곡을 이룬다. 계곡 바닥에서 300~400m나 치솟은 암벽과 즐비한 암봉의 위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의 규모를 넘어서서 숨 막히는 감동을 준다. 그중 백미는 하얀 실타래처럼 거대 암벽에 드리워진 폭포다. 전망대에서도 상류 계곡이 보이지 않아 여전히 하늘끝 절벽에서 곧장 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 신비감과 경외감을 더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인공폭포가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속초시내와 동해
어느새 사람들이 다 내려가고 혼자 남았다. 어둑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후 늦은 시간이라 더 올라오는 사람은 없을 듯. 나도 절벽 위에 올라서서 대자연의 스케일을 혼자서 마주한다. 이 거창한 바위산과 협곡은 시간의 한계를 품고 있다. 지금 배경 그대로 익룡이 하늘을 누비기도 했을 것 같고, 원시인이 길을 잃고 벼랑을 헤매는 모습, 신선경을 찾아든 조선의 한 선비가 탄식하는 모습도 오버랩된다. 그러나 길든 짧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끝은 있기 마련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하산해야 하고 거대한 암벽 저 어디선가는 크고 작은 낙석이 굴러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 김병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