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오대산, 노인봉(1338m)

자생투어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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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거리 오대산 준봉, 구름과 함께 걷는 숲길


노인봉 정상은 돌출바위를 이뤄 사방으로 조망이 잘 트인다.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에 새긴 한자명이 산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뒤에는 한글명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맨뒤 구름을 붙잡은 능선은 오대산 주능선의 두로봉(1422m) 일대

 

그날 강릉 낮 기온은 35도까지 올라갔는데 오대산 동부능선을 넘는 진고개(960m)는 놀랍게도 24도였다. 차에서 내리니 서늘한 기운이 감싸고 바람에는 냉기마저 감돌았다. 무려 11도나 차이 난 것은 높이와 함께 백두대간 상에 잔뜩 걸려 있는 구름과 강풍 때문인 것 같다. 구름은 안개처럼 습기를 머금고 있어 강풍이 불면 증발 과정에서 주변 열을 빼앗아 기온이 떨어진다.

진고개로 온 것은 오대산 봉우리 중 동쪽 끝에 솟은 노인봉(1338m)을 그나마 편하게 오르기 위해다. 일단 고도차가 378m밖에 되지 않고 거리도 4.1km로 멀지 않다. 만약 노인봉을 소금강 쪽에서 오르자면 고도차는 1100m가 넘고 거리는 10km에 달해 5~6시간을 잡아야 한다.

해발 960m의 진고개 정상 휴게소. 구름이 눈높이로 지나고 평지보다 기온이 훨씬 낮아 피서 나온 차들이 적지 않다. 노인봉(1338m)과 동대산(1434m) 같은 고봉을 가볍게 오를 수 있어 등산객도 많이 찾는다   

산 아래 평지는 엄청난 폭염인데 서늘한 느낌마저 주는 진고개휴게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박, 캠핑카, 돗자리 행락 등으로 피서를 즐기고 있다.

오후 2시를 넘은 시간인데도 마음이 급하지 않은 것은 역시 짧고 쉬운 코스이고 여전히 해가 긴 여름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쪽을 동대산(1434m) 능선이 막고 있어 해가 훨씬 빨리 진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단은 가만히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 무더위를 벗어났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보통은 고도 100m 상승할 때마다 0.6도씩 떨어지지만 이는 기압이나 기상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백두대간(태백산맥)을 넘지 못하고 걸려 있는 짙은 구름 떼와 거센 바람이 산맥을 넘으면서 산맥 동쪽 지역의 기온을 높이는 푄현상을 막고 기온을 더 낮춘 것으로 보인다. 먹구름이 백두대간을 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경우는 자주 있는 현상이어서 이를 잘 활용하면 고지대에서 최고의 피서지를 찾을 수 있겠다.

휴게소 옆 언덕 위에 세워진 경찰전적비. 6.25를 전후해 오대산 지역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섬멸한 지역 경찰의 공을 선양하기 위해 1992년에 세웠다

산행을 할 때는 정상부에 걸린 구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구름 때문에 시야가 막히면 곤란하기 때문인데 다행히 거센 바람이 산맥 동쪽으로는 구름을 흩어버리고, 노인봉은 오대산 연봉에서 가장 동쪽에 있어 그보다 서쪽에 있는 두로봉(1421m)~동대산 능선이 구름을 잡는 최전선을 이뤄 노인봉 주능선에는 구름이 없다. 이 현상은 동해안 쪽에서 미리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동대산을 지난 구름은 노인봉을 비껴나 황병산 정상부를 뒤덮고 있다. 구름 높이는 1250~1300m 정도로 추정되며 폭풍에 굉장이 빨리 움직인다.

출발 전 휴게소 옆 언덕 위에 세워진 경찰전적비를 참배한다. 6.25를 전후해 오대산 지역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섬멸한 지역 경찰의 공을 선양하기 위해 1992년에 세운 전적비다. 당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험준한 산줄기를 누볐을 경찰관과 희생자들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했다. 이 시간에 혼자 산에 들어도 전혀 걱정이 없는 지금의 평화와 번영은 그분들의 희생 덕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고개 주변에 형성된 고위평탄면. 원래 있던 고랭지채소밭이 없어지고 자연상태로 복원 중이다. 뒤편 능선이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두대간이며 노인봉은 왼쪽 뒤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넓게 조성된 휴게소 주차장 북쪽에서 산행을 시작해 작은 능선을 넘으면 넓은 초원지대가 나온다. 안내문에는 고위평탄면이라고 되어 있으나 골짜기를 이룬 사면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다는 뜻이지 평탄하지는 않다. 다만 예전에는 고랭지채소밭으로 이용되었고 지금은 자연복원을 위해 경작을 않으면서 잡목이 뒤섞인 초지로 남아 주위보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느낌을 주기는 한다. 진고개는 ‘긴 고개’ 혹은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진 고개’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세운 고위평탄면 안내문에는 한자로 진흙 니(泥) 자를 써서 ‘니현(泥峴)’이라는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진고개의 ‘진’을 진흙탕으로 보고 泥자를 쓴 모양인데 20세기 초 지도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진흙탕 고개'가 맞는 모양이다. 지금이야 말끔한 포장도로가 지나서 진흙탕을 볼 수조차 없다. 

초지 건너편으로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육중한 능선이 하늘 높이 물결친다. 해발 960m 고지에서 시작하는데도 주능선과의 고도차가 상당해서 역시 거산임을 실감한다. 초지에서 해발 1250m 주능선까지는 급경사를 이뤄 이번 산행의 최난구간이 될 것이다.

 

고위평탄면이라고는 하나 실제는 경사진 사면이어서 약간의 의문이 든다. 진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니현(泥峴)이 눈에 띈다   

노인봉은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서 오대산에 딸린 한 봉우리로 인식되지만 사실은 오대산 주봉이나 주능선과 다소 거리가 있다. 오대산은 원래 중국의 불교 성지 오대산(五臺山)에서 따온 이름으로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 100과를 가져와 각지에 봉안할 때 적멸보궁이 생겨났다. 오대산은 이름 그대로 다섯 봉우리가 높은 대(臺)를 이루듯 모여 있으며, 동·서·남·북 외에 중대(中臺)가 있고 이는 중국 오대산도 마찬가지다. 동대(東臺)인 동대산(1434m)이 진고개 서쪽에 있어서 좁은 의미의 오대산은 동대산까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금강계곡을 품은 노인봉은 멀리서 보면 오대산 주릉인 동대산~두로봉(1422m)과 나란해서 오대산의 한 봉우리로 느껴진다. 때문에 이율곡이 소금강을 유람할 때 소금강계곡이 오대산 북대에서 발원한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 중기 이후부터 노인봉은 오대산의 일부라는 의식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선으로 연결된 황병산에는 별도의 ‘산’ 명이 붙은 것으로 봐서 노인봉까지만 오대산 영역으로 감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등산로 주변은 온통 참나무 일색이다. 육손이 가지가 특이해서 멈췄는데 이후 이런 나무는 흔했다

<강릉시사>에는 노인봉의 이름 유래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산삼을 캐기 위해 치성을 드리면 노인이 나타나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고, 산정에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마치 백발의 노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인봉이 되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이 그럴 듯한 것이, 정상 바로 북쪽에 솟은 돌출 암봉이 신선 같은 긴 머리 노인의 머리를 닮기는 했다.

고위평탄면을 지나 주능선을 오르기까지 600m 정도 계단 구간이 매우 힘들지만 이곳만 지나면 길은 완만해진다. 숲이 짙어 내내 그늘이 지고 시원한 것은 좋은데 조망이 트이지 않아 답답한 것이 단점이다. 숲은 온통 참나무와 물푸레나무이고 소나무는 극히 드물다. 줄기가 5~6개 갈래를 이룬 기묘한 나무가 흔하고 잎사귀가 넓으니 나무 보는 재미와 짙은 그늘이 여름 산행의 고역을 달래준다.

고위평탄면에서 주능선까지 600m 계단길이 가장 큰 난관이다

계단길을 지나 주능선에 오르면 정상까지는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안한 길이다 

오르고 또 오르고 걷고 또 걷다 보면 결국 정상에 다다르기 마련. 이윽고 해발 1338m 노인봉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부는 돌출바위여서 사방으로 조망이 트이고 고도감도 헌칠하다. 구름은 여전히 동대산에서 황병산으로 흘러 노인봉을 비껴나고 있는데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체로 이런 식이어서 노인봉의 조망을 가리지 않는다. 오대산 연봉은 구름에 머리를 가렸고 노인봉에서 연이어 솟은 소황병산~황병산 정상부는 구름이 빠르게 스쳐 지난다. 구름이 눈높이로 흐르는 이 높은 산꼭대기는 강풍이 몰아쳐 체감온도는 20도를 조금 넘을 듯하니 35도를 웃도는 저 아래 평지와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다.

동쪽으로는 아득히 흘러내리는 산줄기 저쪽으로 강릉시내부터 주문진읍내까지 해안선 따라 아득하다. 내륙의 오대산은 푸근하고 부드러운 육산인데 소금강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는 급사면에다 곳곳에 암벽과 암봉이 드러나 굳세고 박력 넘치는 모습이다.

정상의 조망 안내도. 사진 그대로 황병산 방면 조망이 일품이다. 맨 오른쪽 용평리조트 표시는 발왕산(1458m)이다그러나.... 구름에 가린 황병산 일대. 소황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지맥이 우람하다

구름 아래로 동해안이 아득하다. 왼쪽의 해안 마을은 강릉 사천진, 오른쪽은 경포대 주변이다. 가까이 거친 암벽 아래로 깊게 패인 계곡이 소금강  

진고개에서 연곡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송천 방면 산줄기의 기세가 거칠고 박진감 넘친다송천계곡 건너편으로 아득히 보이는 오대산 두로봉(1422m)이 구름을 이고 있다. 두로봉 왼쪽 멀지 않은 곳에 오대산 주릉을 넘는 두로령(1305m)이 있고 해발 1300m 고지에 자리한 북대미륵암이 가깝다. 맑은 날에는 둘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황병산쪽 구름이 흩어지면서 소황병산 정상의 초원과 군부대가 터 잡은 황병산 정상이 드러났다. 소황병산 뒤로는 풍력발전기를 낀 매봉(1173m)을 필두로 대관령삼양목장도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거센 대신 더위를 잊었으니 30여분을 머물며 산정의 풍광을 즐겼다. 노인봉 이름이 유래한 정상 북쪽의 암봉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걷힌 황병산 방면. 맨우측이 황병산(1408m), 가운데 초원이 드러난 봉우리는 삼양목장 내 최고봉인 소황병산(1329m), 맨왼쪽은 매봉(1173m). 백두대간은 노인봉에서 소황병산~매봉으로 이어지고 황병산은 대간에서 비껴나 있다 

언제부턴가 산중 다람쥐는 사람을 두려워않고 오히려 접근하기도 하는데 등산객들이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다람쥐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지만 내가 뭘 먹지 않고 여기저기 오가기만 하자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정상 바로 아래 소금강 가는 길목에는 노인봉대피소가 있다. 무인운영이라 궁금해서 잠시 가보았는데 넓은 유리창의 대피실은 3~4명 정도 수용할 정도로 좁고 번호 열쇠가 잠겨 있다. 옆에는 구급약품을 비치한 벽장이 있고, 공원관리실로 전화하면 열쇠 번호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악천후나 비상상황에서 유용할 것 같다. 하지만 대피소인데도 ‘흡연, 야영, 취사, 음주를 금지하고 위반시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안내문은 좀 답답하다. 대피실 공간이 다 차면 야영이라도 해야 하고 또 취사를 해야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다 금지하면 어떻게 생존하란 말인지.

악천후나 비상시에 유용한 노인봉무인대피소.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왔던 길 그대로 꼬박 내려가는데 동대산 때문에 해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졌다. 숲속이라 어둑어둑 한데 저 앞에서 남자 혼자 올라오고 있다. 어두워지는데 올라가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으니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다.

“해변은 폭염인데 여기는 시원해서 좋네요. 랜턴이 있어 괜찮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둑한 숲길로 사라졌다. 혼자서 어두운 숲이 무섭지 않다는 남자가 신통스러웠는데, 뒤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약간의 안심감이 들었다. 아기만 업어도 밤에 고개를 넘을 수 있다는 옛말처럼 이런 산간에서 사람은 타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또 할 수밖에 없나 보다.

강릉 사천면에서 바라본 노인봉(맨뒤 가운데). 왼쪽 뒤 구름을 인 고봉은 황병산, 맨 우측은 백마봉(1094m)  

글/사진 김병훈 대표 


오대산 진고개 ~ 노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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