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수호신이자 강릉의 진산
제왕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대관령 방면. 급사면을 횡으로 오르느라 수많은 터널과 교량을 이룬 영동고속도로가 백두대간 허리를 가른다. 제왕산 주능선에는 금강속 고목과 고사목이 분포해 시공간의 신비감이 감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대관령(832m) 주변 산들은 기복이 크지 않아 동해안에서 바라보면 봉우리 구분마저 쉽지 않다. 그런데 대관령 바로 옆에 있으면서 헌칠한 산세와 독특한 입지를 보여주는 두 산이 있으니 바로 제왕산(840m)과 능경봉(1123m)이다. 더 높은 농경봉은 ‘봉’이고 낮은 제왕산에 독립적인 ‘산’ 이름이 붙은 데다 ‘제왕(帝王)’이라는 거창한 명칭도 유래가 궁금하게 만든다. 특히 제왕산은 대관령을 오르내릴 때 바로 옆으로 보이고, 거의 평탄한 능선이 대관령에서 강릉 쪽으로 뻗어 내린 모습과 기세가 독특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이 갔다. 강릉 사람들이 주위에 더 높은 산들을 두고 하필 이 제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인식하는 이유도 궁금했다.
대관령 바로 서쪽 아래, 옛영동고속도로 휴게소를 기점으로 하면 두 산을 함께 돌아보기 좋다. 대관령휴게소가 이미 해발 820m나 되어 두 산과의 고도차가 크지 않고 산행거리도 두 산을 더해 8.4km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제왕산은 휴게소와 높이가 거의 같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강릉 북부에서 바라본 능경봉과 제왕산. 능경봉은 완만하게 일렁이는 백두대간 상에서 첨봉으로 돌출해 있고 제왕산은 능경봉에서 동해 쪽으로 뻗어난 능선 위에 오똑 솟아 있다
폭염을 피할 겸 두 산을 오를 겸 다시 대관령을 올랐다. 강릉 평지는 33~4도를 오가는데 대관령 정상은 28도에 바람까지 불어 시원하다. 이를 노려서 휴게소 내는 장기 주차 중인 캠핑카로 가득하다. 한여름 캠핑카에게는 대관령이 최고겠다. 기온이 낮고 주변 산의 등산을 즐길 수 있으며, 경포대를 포함한 동해도 지척이다.
휴게소에서 긴 계단을 올라 ‘영동·동해 고속도로 준공기념비’에 올라선다. 대관령보다 조금 더 높은, 해발 850m 지점에 있는 기념비는 규모가 엄청나서 1975년 당시 난공사를 해낸 사람들의 성취감과 자부심을 말해준다. 총 높이 10m로 국내의 어떤 비석보다 크고, 비석을 바친 거북(귀부)도 압도적으로 거대하다. 보령 웅천 오석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조각했고 귀부와 이수(비석머리)는 익산 황등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준공비 주변은 널찍한 광장으로 꾸며졌으나 수풀로 인해 조망은 잘 트이지 않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옆에 전망 휴게소라도 만든다면 대관령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을 텐데.
캠핑카들이 점령하고 있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하행 방면). 해발 820m 고지대로 폭염을 피할 수 있고 산과 바다가 가까워 캠핑카 피서지로 적격이다
대관령 스케일에 걸맞게 거대한 영동/동해 고속도로 준공기념비. 총높이 10m로 국내 최대 크기다
산길 초입에 있는 등산로 안내도. 능경봉~고루포기산(1238m) 구간을 소개하고 있다
준공비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산길이 시작된다. 일대는 ‘대관령숲길’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등산로와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대관령 동쪽 사면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과 습도, 햇빛 등의 영향으로 숲이 매우 울창하고 기품 있는 금강송도 많이 자란다.
횡계리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는 돌탑과 함께 온갖 이정표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잠시 가면 오른쪽으로 능경봉 가는 길이 갈라지고, 임도로 직행하면 제왕산 방면이다. 먼저 능경봉으로 향한다.
작은 돌탑이 서있는 임도삼거리. 정면의 등산로는 준공비 방면이다오른쪽 숲길이 능경봉 방면, 정면의 차단기를 지나 임도를 따라 가면 제왕산 가는 길이다
중간 쉼터에서 바라본 강릉시내와 동해. 이곳과 정상 외에는 조망이 전혀 트이지 않는다
능경봉(陵景峰)은 옛 문헌에서 꼽은 횡계팔경(횡계는 대관령고원 일원이며 중심마을 횡계리로 지명이 남아 있다) 중 ‘능정출일(能政出日, 능정에 해 뜨는 풍경)’이 있는데 이 능정이 능경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듯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관령에서 능경봉에 이르는 '능선'을 뜻하지 않나 싶다. 능경봉은 횡계리 정동쪽에 있어서 해는 항상 대관령~능경봉 언저리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능정이 능경으로 바뀐 듯 하며, 예전에 숲이 듬성했을 때는 능선 상에서 보는 조망이 탁월했을 테니 능경(陵景)도 어울린다.
개인적인 생각은, 서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능경봉이 제왕산, 제왕산이 능경봉이라야 상식적이고 이름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능경봉은 강릉에서 볼 때 마치 제왕처럼 우뚝하고 제왕산은 능경봉에 딸린 능선이기 때문이다. 능경봉 능선에 제왕산성이 있으면서 이름이 뒤죽박죽이 된 것 아닌가 싶다. 아니면, 능경봉은 횡계리 방면에서만 부르는 이름일 수도 있다. 지근거리를 두고 어떻게 지명이 다를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이야 고개 하나 사이를 둔 가까운 곳이긴 해도 예전에는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지방이 나뉠 정도로 판이한 지역이었다.
쉼터에서 바라본 제왕산. 능경봉에서 동해 방면으로 길게 뻗어난 능선상에 있다
이미 해발 820m의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하니 1123m나 되는 능경봉을 300m급 야산 오르듯 가볍게 들어선다. 하지만 삼거리에서 정상까지 1.2km가 꼬박 오르막이라 힘겹고, 중간의 작은 쉼터 외에는 조망이 아예 없는 숲길이라 다소 답답하기도 하다. 정상도 마찬가지. 지름 10m 정도의 평탄지를 이루지만 동쪽 강릉시내 방면 일부만 조망이 열려 있고 나머지는 나무로 가로막혀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무색하게 한다. 대관령 지척임에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를 알만하다. 능경봉은 강릉은 물론 동해와 대관령고원, 백두대간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위치여서 매우 아쉽다. 작은 전망대를 만들고 주변 숲을 조금 정리한다면 대단한 조망 명소가 될 것이다.
능경봉 정상은 10분 정도 머물다 하산을 시작했다. 능경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안반데기 고랭지밭을 품고 있는 고루포기산(1238m)까지 갈 수 있으나 다소 기복이 있는 4.8km 거리이고, 고루포기산은 안반데기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데다 정상 조망이 막혀 ‘대간종주’ 외에는 별 매력이 없다.
능경봉 정상은 강릉시내 방면만 일부 조망이 열린다. 원래는 천혜의 조망 위치인데 아쉽다 정상의 이정표
능경봉을 내려와 앞서 임도 삼거리에서 제왕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능경봉보다 훨씬 낮지만 비슷한 높이로 길게 뻗은 주능선에는 돌출바위가 많아 조망은 기가 막힐 것이다.
임도를 조금 가다 능선길로 들어서면 편안한 숲길이 이어지고 숲 사이로 간간이 조망도 트인다. 능선길이 끝나고 잠깐 임도를 거쳐 두 번째 능선길로 들어서면 곳곳에 드러난 돌출바위가 시원한 조망으로 보상해준다. 북쪽으로는 대관령을 오르는 신구 고속도로가 함께 보이고 선자령(1157m)까지 선명하다. 남으로는 능경봉 저편으로 닭목령(700m)을 지나 화란봉(1070m)을 거쳐 아득히 석병산(1055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장중하다.
간만에 보는 거산준령의 맥동에 나의 심박과 호흡도 허덕임에서 벗어나 함께 리듬을 맞춘다. 제왕산 이름에 걸맞은 웅대한 스케일이다. 제왕산이란 이름은 고려말 우왕이 쌓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지만 믿기 어렵다. 다만 우왕은 이성계에게 쫓겨나 강릉에 유배 왔다가 죽었으나 최후의 순간과 무덤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쩌면 우왕이 이곳에 올라 개경을 그리워했든지, 죽음을 예감하고 거소를 탈출해 이곳에 저항의 거점을 마련했을 수도 있겠다. 정상부에 남아 있는 산성 흔적은 범상치 않은 내력을 말해준다.
두 바퀴 대신 두 스틱과 느긋하게 걷는 능선길은 심신이 편안하다
제왕산 나무들은 어딘가 독특하다. 수많은 가지로 뻗어난 단풍나무 고목(오른쪽)과 새총을 닮은 대칭적 수형을 보여주는 참나무
화란봉(1070m, 오른쪽끝)에서 아득히 멀리 석병산(1055m)으로 줄달음치는 백두대간
날카로운 주능선은 군데군데 바위가 돌출해 있고 금강송 고목이 곳곳에 자라 어딘가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다. 뾰족한 솟대바위와 처음 보면 섬뜩하게 놀랄 정도로 크기가 우람하고 수형이 독특한 고목들은 마력을 지닌 동화속 존재 같다.
정상비는 가장 높고 고목으로 둘러싸인 암봉과 여기서 90m 떨어진 삼각점 고지 두 곳에 있다. 삼각점 고지가 가장 높은 곳이기는 하나 형태와 분위기에서는 바위 정상이 압도적이다. 바위 정상 바로 옆에는 석축과 성벽이 선명히 남아 성곽이 건재하던 당시에는 지휘소나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길바닥을 잘 살피면 고대의 기와나 토기 조각이 흔하게 보여 이 높고 험한 지형에도 건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허물어진 성돌로 보아 성벽이 꽤 길고 높아서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는 둘레가 3km나 되는 곤신봉 아래 대공산성을 비롯해 강릉 쪽 저지대에도 여러 개의 작은 산성이 분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강릉지역에는 삼한시대에 예국(濊國)이라는 독자적인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 산성은 예국의 보호성 혹은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편입된 이후 축성된 방어성으로 추정된다.제왕산 주릉에서 바라본 능경봉. 제왕산 능선을 따라 난 임도가 선명하고, 오른쪽 위는 대관령 정상
앞 왼쪽 화란봉(1070m)과 서득봉(1053m) 사이로 폭 가라앉은 닭목령(700m) 뒤로 노추산(1322m)이 구름을 잡고 있다
금강송 고사목과 고목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제왕산 정상
정상 주변의 금강송은 뭔가 메시지를 담은 듯 신묘하다오래 전에 만든 듯한 철제 정상비. 고사목 뒤로 능경봉이 우람하다
정상 아래 석축은 옛 성벽의 일부로 보인다
길옆에 허물어진 성돌. 성돌의 분포로 보아 원래는 상당한 규모였음을 추정케 한다
정상에서 500m 가량 더 가면 정상부를 이루는 주능선은 끝나고 갑작스레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된다. 옛 성벽도 이곳에서 갈무리되는데, 능선 남쪽의 급사면을 자연 성벽으로 삼아 능선 따라 길게 축성한 것 같다. 이는 고구려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방식이다.
주능선 동쪽 끝에는 산악기상관측장비인 작은 철탑이 있고, 여기서 오봉산(542m) 방면으로 능선길을 내려가다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한국전력공사에서 설치한 물탱크와 임도가 나온다. 물탱크 인근에는 직원 숙소로 보이는 건물도 있는데 모두 버려진 지 오래이고 용도는 알 수 없다. 산 아래에서도 보이는 통신중계탑은 아직 운용 중인 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다소 멀더라도 편안한 임도를 이용하기로 한다. 숲 사이로 보이는 전망을 보거나 절벽처럼 가파른 주능선을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대신 1km 정도 코스가 길어지고 고도 역시 700m까지 떨어졌다가 880m까지 올라야 해서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다시 준공기념비로 돌아오니 관광객들이 계단 따라 곳곳에 진을 치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다. 하얀 바람개비도 슝슝 돌아가니 과연, 대관령은 여름이 오르기 어렵구나.
'정상'에서 90m 떨어진 곳에 삼각점 정상비가 또 있다. 수치적으로는 이곳이 정상 맞지만 분위기와 상징성에서는 앞쪽 정상이 압도적이다
길가에 흩어져 있는 고대 기와와 토기 편. 이 높은 산줄기에 거주 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능선 끝자락에서 바라본 강릉. 시내에서 볼 경우 제왕산이 가장 가까이 다가선 준봉이라 정서적 진산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주능선 끝단에 있는 한전 물탱크. 여기까지 임도가 나 있다
대관령이 구름을 막고 있는 사이 웅자를 드러낸 능경봉과 제왕산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능경봉~제왕산
대관령 수호신이자 강릉의 진산
제왕산 주능선에서 바라본 대관령 방면. 급사면을 횡으로 오르느라 수많은 터널과 교량을 이룬 영동고속도로가 백두대간 허리를 가른다. 제왕산 주능선에는 금강속 고목과 고사목이 분포해 시공간의 신비감이 감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대관령(832m) 주변 산들은 기복이 크지 않아 동해안에서 바라보면 봉우리 구분마저 쉽지 않다. 그런데 대관령 바로 옆에 있으면서 헌칠한 산세와 독특한 입지를 보여주는 두 산이 있으니 바로 제왕산(840m)과 능경봉(1123m)이다. 더 높은 농경봉은 ‘봉’이고 낮은 제왕산에 독립적인 ‘산’ 이름이 붙은 데다 ‘제왕(帝王)’이라는 거창한 명칭도 유래가 궁금하게 만든다. 특히 제왕산은 대관령을 오르내릴 때 바로 옆으로 보이고, 거의 평탄한 능선이 대관령에서 강릉 쪽으로 뻗어 내린 모습과 기세가 독특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이 갔다. 강릉 사람들이 주위에 더 높은 산들을 두고 하필 이 제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인식하는 이유도 궁금했다.
대관령 바로 서쪽 아래, 옛영동고속도로 휴게소를 기점으로 하면 두 산을 함께 돌아보기 좋다. 대관령휴게소가 이미 해발 820m나 되어 두 산과의 고도차가 크지 않고 산행거리도 두 산을 더해 8.4km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제왕산은 휴게소와 높이가 거의 같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강릉 북부에서 바라본 능경봉과 제왕산. 능경봉은 완만하게 일렁이는 백두대간 상에서 첨봉으로 돌출해 있고 제왕산은 능경봉에서 동해 쪽으로 뻗어난 능선 위에 오똑 솟아 있다
폭염을 피할 겸 두 산을 오를 겸 다시 대관령을 올랐다. 강릉 평지는 33~4도를 오가는데 대관령 정상은 28도에 바람까지 불어 시원하다. 이를 노려서 휴게소 내는 장기 주차 중인 캠핑카로 가득하다. 한여름 캠핑카에게는 대관령이 최고겠다. 기온이 낮고 주변 산의 등산을 즐길 수 있으며, 경포대를 포함한 동해도 지척이다.
휴게소에서 긴 계단을 올라 ‘영동·동해 고속도로 준공기념비’에 올라선다. 대관령보다 조금 더 높은, 해발 850m 지점에 있는 기념비는 규모가 엄청나서 1975년 당시 난공사를 해낸 사람들의 성취감과 자부심을 말해준다. 총 높이 10m로 국내의 어떤 비석보다 크고, 비석을 바친 거북(귀부)도 압도적으로 거대하다. 보령 웅천 오석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조각했고 귀부와 이수(비석머리)는 익산 황등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준공비 주변은 널찍한 광장으로 꾸며졌으나 수풀로 인해 조망은 잘 트이지 않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옆에 전망 휴게소라도 만든다면 대관령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을 텐데.
캠핑카들이 점령하고 있는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하행 방면). 해발 820m 고지대로 폭염을 피할 수 있고 산과 바다가 가까워 캠핑카 피서지로 적격이다
대관령 스케일에 걸맞게 거대한 영동/동해 고속도로 준공기념비. 총높이 10m로 국내 최대 크기다
산길 초입에 있는 등산로 안내도. 능경봉~고루포기산(1238m) 구간을 소개하고 있다
준공비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산길이 시작된다. 일대는 ‘대관령숲길’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등산로와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대관령 동쪽 사면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온과 습도, 햇빛 등의 영향으로 숲이 매우 울창하고 기품 있는 금강송도 많이 자란다.
횡계리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는 삼거리는 돌탑과 함께 온갖 이정표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잠시 가면 오른쪽으로 능경봉 가는 길이 갈라지고, 임도로 직행하면 제왕산 방면이다. 먼저 능경봉으로 향한다.
작은 돌탑이 서있는 임도삼거리. 정면의 등산로는 준공비 방면이다오른쪽 숲길이 능경봉 방면, 정면의 차단기를 지나 임도를 따라 가면 제왕산 가는 길이다
중간 쉼터에서 바라본 강릉시내와 동해. 이곳과 정상 외에는 조망이 전혀 트이지 않는다
능경봉(陵景峰)은 옛 문헌에서 꼽은 횡계팔경(횡계는 대관령고원 일원이며 중심마을 횡계리로 지명이 남아 있다) 중 ‘능정출일(能政出日, 능정에 해 뜨는 풍경)’이 있는데 이 능정이 능경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듯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관령에서 능경봉에 이르는 '능선'을 뜻하지 않나 싶다. 능경봉은 횡계리 정동쪽에 있어서 해는 항상 대관령~능경봉 언저리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능정이 능경으로 바뀐 듯 하며, 예전에 숲이 듬성했을 때는 능선 상에서 보는 조망이 탁월했을 테니 능경(陵景)도 어울린다.
개인적인 생각은, 서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능경봉이 제왕산, 제왕산이 능경봉이라야 상식적이고 이름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능경봉은 강릉에서 볼 때 마치 제왕처럼 우뚝하고 제왕산은 능경봉에 딸린 능선이기 때문이다. 능경봉 능선에 제왕산성이 있으면서 이름이 뒤죽박죽이 된 것 아닌가 싶다. 아니면, 능경봉은 횡계리 방면에서만 부르는 이름일 수도 있다. 지근거리를 두고 어떻게 지명이 다를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이야 고개 하나 사이를 둔 가까운 곳이긴 해도 예전에는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지방이 나뉠 정도로 판이한 지역이었다.
쉼터에서 바라본 제왕산. 능경봉에서 동해 방면으로 길게 뻗어난 능선상에 있다
이미 해발 820m의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하니 1123m나 되는 능경봉을 300m급 야산 오르듯 가볍게 들어선다. 하지만 삼거리에서 정상까지 1.2km가 꼬박 오르막이라 힘겹고, 중간의 작은 쉼터 외에는 조망이 아예 없는 숲길이라 다소 답답하기도 하다. 정상도 마찬가지. 지름 10m 정도의 평탄지를 이루지만 동쪽 강릉시내 방면 일부만 조망이 열려 있고 나머지는 나무로 가로막혀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무색하게 한다. 대관령 지척임에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유를 알만하다. 능경봉은 강릉은 물론 동해와 대관령고원, 백두대간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위치여서 매우 아쉽다. 작은 전망대를 만들고 주변 숲을 조금 정리한다면 대단한 조망 명소가 될 것이다.
능경봉 정상은 10분 정도 머물다 하산을 시작했다. 능경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안반데기 고랭지밭을 품고 있는 고루포기산(1238m)까지 갈 수 있으나 다소 기복이 있는 4.8km 거리이고, 고루포기산은 안반데기에서 쉽게 오를 수 있는데다 정상 조망이 막혀 ‘대간종주’ 외에는 별 매력이 없다.
능경봉 정상은 강릉시내 방면만 일부 조망이 열린다. 원래는 천혜의 조망 위치인데 아쉽다 정상의 이정표
능경봉을 내려와 앞서 임도 삼거리에서 제왕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능경봉보다 훨씬 낮지만 비슷한 높이로 길게 뻗은 주능선에는 돌출바위가 많아 조망은 기가 막힐 것이다.
임도를 조금 가다 능선길로 들어서면 편안한 숲길이 이어지고 숲 사이로 간간이 조망도 트인다. 능선길이 끝나고 잠깐 임도를 거쳐 두 번째 능선길로 들어서면 곳곳에 드러난 돌출바위가 시원한 조망으로 보상해준다. 북쪽으로는 대관령을 오르는 신구 고속도로가 함께 보이고 선자령(1157m)까지 선명하다. 남으로는 능경봉 저편으로 닭목령(700m)을 지나 화란봉(1070m)을 거쳐 아득히 석병산(1055m)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장중하다.
간만에 보는 거산준령의 맥동에 나의 심박과 호흡도 허덕임에서 벗어나 함께 리듬을 맞춘다. 제왕산 이름에 걸맞은 웅대한 스케일이다. 제왕산이란 이름은 고려말 우왕이 쌓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지만 믿기 어렵다. 다만 우왕은 이성계에게 쫓겨나 강릉에 유배 왔다가 죽었으나 최후의 순간과 무덤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쩌면 우왕이 이곳에 올라 개경을 그리워했든지, 죽음을 예감하고 거소를 탈출해 이곳에 저항의 거점을 마련했을 수도 있겠다. 정상부에 남아 있는 산성 흔적은 범상치 않은 내력을 말해준다.
두 바퀴 대신 두 스틱과 느긋하게 걷는 능선길은 심신이 편안하다
제왕산 나무들은 어딘가 독특하다. 수많은 가지로 뻗어난 단풍나무 고목(오른쪽)과 새총을 닮은 대칭적 수형을 보여주는 참나무
화란봉(1070m, 오른쪽끝)에서 아득히 멀리 석병산(1055m)으로 줄달음치는 백두대간
날카로운 주능선은 군데군데 바위가 돌출해 있고 금강송 고목이 곳곳에 자라 어딘가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다. 뾰족한 솟대바위와 처음 보면 섬뜩하게 놀랄 정도로 크기가 우람하고 수형이 독특한 고목들은 마력을 지닌 동화속 존재 같다.
정상비는 가장 높고 고목으로 둘러싸인 암봉과 여기서 90m 떨어진 삼각점 고지 두 곳에 있다. 삼각점 고지가 가장 높은 곳이기는 하나 형태와 분위기에서는 바위 정상이 압도적이다. 바위 정상 바로 옆에는 석축과 성벽이 선명히 남아 성곽이 건재하던 당시에는 지휘소나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길바닥을 잘 살피면 고대의 기와나 토기 조각이 흔하게 보여 이 높고 험한 지형에도 건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허물어진 성돌로 보아 성벽이 꽤 길고 높아서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는 둘레가 3km나 되는 곤신봉 아래 대공산성을 비롯해 강릉 쪽 저지대에도 여러 개의 작은 산성이 분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강릉지역에는 삼한시대에 예국(濊國)이라는 독자적인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 산성은 예국의 보호성 혹은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편입된 이후 축성된 방어성으로 추정된다.제왕산 주릉에서 바라본 능경봉. 제왕산 능선을 따라 난 임도가 선명하고, 오른쪽 위는 대관령 정상
앞 왼쪽 화란봉(1070m)과 서득봉(1053m) 사이로 폭 가라앉은 닭목령(700m) 뒤로 노추산(1322m)이 구름을 잡고 있다
금강송 고사목과 고목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제왕산 정상
정상 주변의 금강송은 뭔가 메시지를 담은 듯 신묘하다오래 전에 만든 듯한 철제 정상비. 고사목 뒤로 능경봉이 우람하다
정상 아래 석축은 옛 성벽의 일부로 보인다
길옆에 허물어진 성돌. 성돌의 분포로 보아 원래는 상당한 규모였음을 추정케 한다
정상에서 500m 가량 더 가면 정상부를 이루는 주능선은 끝나고 갑작스레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된다. 옛 성벽도 이곳에서 갈무리되는데, 능선 남쪽의 급사면을 자연 성벽으로 삼아 능선 따라 길게 축성한 것 같다. 이는 고구려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방식이다.
주능선 동쪽 끝에는 산악기상관측장비인 작은 철탑이 있고, 여기서 오봉산(542m) 방면으로 능선길을 내려가다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한국전력공사에서 설치한 물탱크와 임도가 나온다. 물탱크 인근에는 직원 숙소로 보이는 건물도 있는데 모두 버려진 지 오래이고 용도는 알 수 없다. 산 아래에서도 보이는 통신중계탑은 아직 운용 중인 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다소 멀더라도 편안한 임도를 이용하기로 한다. 숲 사이로 보이는 전망을 보거나 절벽처럼 가파른 주능선을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대신 1km 정도 코스가 길어지고 고도 역시 700m까지 떨어졌다가 880m까지 올라야 해서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다시 준공기념비로 돌아오니 관광객들이 계단 따라 곳곳에 진을 치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다. 하얀 바람개비도 슝슝 돌아가니 과연, 대관령은 여름이 오르기 어렵구나.
'정상'에서 90m 떨어진 곳에 삼각점 정상비가 또 있다. 수치적으로는 이곳이 정상 맞지만 분위기와 상징성에서는 앞쪽 정상이 압도적이다
길가에 흩어져 있는 고대 기와와 토기 편. 이 높은 산줄기에 거주 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능선 끝자락에서 바라본 강릉. 시내에서 볼 경우 제왕산이 가장 가까이 다가선 준봉이라 정서적 진산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주능선 끝단에 있는 한전 물탱크. 여기까지 임도가 나 있다
대관령이 구름을 막고 있는 사이 웅자를 드러낸 능경봉과 제왕산
글/사진 김병훈 대표
강릉 능경봉~제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