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불화한 천재, 김시습(金時習)

자생투어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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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방랑시인, 그는 왜 정착할 수 없었나   


김시습기념관 입구에 있는 전신상 부조. 안으로 들어간 네거티브 부조여서 방향과 그림자에 따라 달라 보이는 모습이 김시습의 복잡한 내면을 말해주는 듯하다

   

전제군주정, 성리학 절대주의, 지독한 당쟁으로 점철된 조선 500년에서도 시대와 특별히 불화한 인물들이 몇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선조 시절, 조야를 뒤흔든 기축옥사(1589)의 시발점이 된 정여립(1546~1589)이다. 타고난 반골기질에 좌고우면 않는 강직한 신념을 지녔던 정여립은 전제군주정 아래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천하는 공동의 소유)’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같은 혁신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런 반골기질이 부담스러웠던 선조의 미움을 사서 재야에 있을 때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직접 혁명적인 사상을 전파하다 결국 반대파에 의해 모반으로 몰리게 된다. 마지막에는 내륙의 섬 같은 진안 죽도에 웅거하다 집압군에 포위되어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또 한 사람은 <홍길동전>으로 알려진 허균(1569~1618)이다. <홍길동전>에서도 드러나듯 관직의 길이 막힌 서자의 등용을 비롯해 신분제 폐지 같은, 당시로는 혁명적인 생각을 가졌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균 역시 반대파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만다.

정여립과 허균 모두 선조(재위 1567~1608) 대의 사람인 것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했고 전세가 불리하자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부터 한, 아둔하고 나약한 왕의 시대여서 이단아가 더 두드러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들보다 앞선 인물로는 김시습(1435~1493)을 들 수 있다. 시대를 앞선 혁명적 사상이나 포부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세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벼슬을 마다한 채 평생을 방랑과 은둔으로 보냈다. 불교에 심취해 승려 생활을 했고 도교에도 심취했으니 당시로서는 거침없는 자유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것도 그다.

강릉 경포호 옆에 김시습기념관이 있다. 외가가 강릉에 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왕래했고 강릉과 양양 일원에서 한 동안 살기도 했다   

김시습에 주목한 것은 강릉에 그의 기념관이 있어서인데, 그의 외가가 강릉이었다. 신라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생몰년 미상) 역시 외가가 있던 강릉으로 와서 칩거하다 강릉과 동해안 일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졌고, 이율곡은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강릉에 외가를 둔 역사인물이 다수인 점이 주목되는데, 그만큼 강릉에 명망 높은 가문이 많았다는 뜻도 되겠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특이한 인연을 느낌 점이 있다. 강릉으로 내려와 살게 된 마을이 하필이면 허균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집터 근처에 허균의 시비가 남아 있다. 허균의 호(號)가 교산(蛟山)인데 마을 앞바다에는 교산의 유래가 된 교문암(蛟門巖)이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외가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허균은 고향 이미지를 되새기려 호에 어릴 때 보았던 고향 바다의 바위 이름을 넣었을 것이다. 김시습이 어린 한 시절을 보낸 외가도 허균 외가와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우연이겠지만 시대를 초월한 자유인이던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내가 일부러 이곳으로 찾아든 것만 같다.

강릉에서는 김시습을 성황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지금의 명륜동으로 추정)에서 태어났다.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신라 왕족으로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나 명주군왕으로 봉해짐)의 23대 손이다. 아버지는 김일성(金日省), 어머니는 울진 장씨(張氏)였고 태어난 곳은 외가(본가는 강릉이나 서울에도 집이 있었던 듯)였는데,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웃의 유학자 최치운이 <논어> 첫구절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시습(時習)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8개월이면 갓난아기인데 글을 알았다니 믿기 어렵지만 종이에 쓴 글자나 숫자를 옹알이로 구분하는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3세 때는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고 시도 지었다. 유모가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는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고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말 3세 때 이 시를 지었다면 비, 천둥소리, 구름 같은 천문현상을 이미 이해하고 있으면서 시적 은유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니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세 때 <소학(小學)>,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배워 신동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자자했다. 이 소문은 세종에게도 알려졌는데 세종은 승정원을 시켜 김시습을 시험해보고 그 능력을 칭찬하면서 비단을 하사해 이때부터 ‘오세(五歲)’라는 별명이 붙었고 호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왕이 알아주었으니 그의 미래는 창창해 보였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전제왕조, 개인과 가족, 사회의 구성원리와 행동원리를 제약하는 성리학 원리주의… 이런 숨 막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천재는 과연 어떻게 살게 될까. 현실에 순응해 입신영달로 안락한 삶을 누릴까. 정말 천재라면 시류를 뛰어넘는 안목으로 현실에 영합할 수만은 없을 테니 고달프고 파란만장한 일생이 될 지도 모른다. 이제 김시습의 길을 따라가 보자. 방법은 다르지만 현대의 여행자와 어딘가 맥이 닿아 있으니 우리의 대선배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김시습기념관 인근에 있는 창덕사는 김시습을 포함해 강릉김씨 문중을 선양한 9위를 제향한다 

김시습은 15세 때 어머니가 별세해 강릉 외가에서 3년 상을 치르며 지냈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김시습은 이때 강릉에 특별한 인연을 느끼게 되고 기억에도 강하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3년 상을 마치기 전에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봐준 외숙모마저 별세해 큰 충격을 받는다. 그가 3년 상을 끝내고 조계산 송광사로 들어가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어머니와 외숙모를 연이어 떠나보낸 슬픔으로 인생의 무상함과 삶의 한계를 깊이 절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는 다시 상경해 과거공부를 시작했고, 이즈음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했다. 19세 때인 1453년(단종 원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해 삼각산(북한산)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이어간다. 결혼까지 한 몸이어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주변의 기대였고 스스로도 당연한 목표였을 것이다.

이때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어린 단종이 끝내 야심만만한 숙부(수양대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양위하고 만 것이다(계유정난). 이는 왕위찬탈과 다름없는, 유학자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패륜이었다. 공자가 존경하는 성인으로 항상 언급하는 주공(周公)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어린 성왕(成王)을 끝까지 보필해 주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정반대로 수양대군은 조카를 힘으로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았으니 주공과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유학자라면 실로 비분강개할 일이었다. 게다가 단종은 세종이 총애하고 걱정하던 손자이고, 김시습은 어릴 때 세종의 칭찬과 격려를 받아 큰 은혜로 기억하고 있던 터라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시습기념관 안쪽에 자리한 숭절사에는 김시습이 사용했다는 지팡이를 보관하고 있지만 비공개다 

전제왕조 시절, 국토와 백성은 모두 왕의 권한이었다.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몰아냈을 때 은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이자 형제 사이였던 백이와 숙제는 세상의 도가 뒤집혔다고 한탄하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걸로 봐서 실존인물인 듯한데, 누군가 수양산을 찾아가 “고사리도 무왕이 다스리는 땅에서 나는 것인데 왜 먹느냐”고 하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끊어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참으로 지독한 절개다. 강직하고 순수한 성품의 두 사람은 천륜과 예를 저버린 무왕이 다스리는 시대를 차마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시습 역시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런 무도한 왕 밑에서 어떻게 벼슬살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읽던 책을 불사르고 정처 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김시습도 백이 숙제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뒤에 세조를 처단하고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되어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좌장격인 성삼문도 일찍이 백이 숙제를 두고 “초목 또한 주나라 비와 이슬에 젖었으니, 수양산 고사리 따먹은 그대들이 부끄럽네(草木亦霑周雨露 愧君猶食首陽薇)”하고 읊은 적이 있다.

강릉김씨 시조인 김주원의 무덤(명주군왕릉) 아래 김시습을 모시는 청간사가 있다. 청간(淸簡)은 김시습 사후에 내려진 시호다

김시습의 방랑행각은 전국 방방곡곡을 향했고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굴레를 벗어나 승려의 행색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3년째인 1456년, 단종 복위를 공모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명나라 사신의 향응 자리에서 칼을 든 호위무장(雲劍)으로 들어가 세조와 두 왕자를 죽일 계획을 세웠으나 세조의 심복인 한명회 등이 이를 눈치 채고 말았다. 세조는 연회장이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해 거사는 중지되었고, 뒷날 왕이 파종을 참관하는 관가(觀稼) 행사 때 다시 거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거사가 실패할까 겁에 질린 김질의 밀고로 성삼문과 박팽년 외에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명은 참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고(사육신) 연좌로 인해 직방계 가족 등 총 500~800명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다(병자옥).

노량진 형장에는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과 참형을 당한 이들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서슬 퍼런 세조의 분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야밤에 한 승려가 나타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었는데, 이 승려가 바로 김시습으로 알려져 있다.

김시습을 비롯해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은 단종에 대한 지조를 지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살아남은 6명의 신하,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린다.

방랑 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 도중(途中). 말 그대로 '길을 가다가 지은 시'이며, 맥국은 지금의 춘천지방을 뜻한다. 정처 없는 나그네길의 쓸쓸한 소회가 진하게 나타나 있다  


이후 김시습은 승려 차림으로 관서와 관동 지방을 방랑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8세기 당나라 시절 전란을 피하거나 관직을 얻지 못해 전국을 유랑하며 시를 남긴 덕분에 ‘당시(唐詩)’라는 비교 불가의 시세계를 완성한 이백, 두보 같은 ‘방랑시인’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조에서는 19세기의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과 비슷한 행로다.

김시습은 관서(평안도) 지방을 돌아보며 쓴 시들을 모아 ‘유관서록(遊關西錄)’을 냈고, 관동지방을 방랑한 후에는 ‘유관동록(遊關東錄)’ 시집을 엮었는데 이런 걸 보면 무작정 방랑이 아니라 명승을 돌아보는 ‘유람’ 성격이 짙은 것 같다. 정식으로 출가를 하지 않았으면서 승려 행색을 한 것은 원래부터 형이상학적인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데다 전국 어디를 떠돌든지 사찰만 찾아가면 최소한의 숙식은 해결되었기 때문 같다.

호남과 충청 지방을 거치면서 많은 사찰에 들렀는데 마지막에는 경주에 정착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자리 잡은 곳이 경주 남산 깊은 골에 자리한 용장사(茸長寺)였다. 김시습은 경주의 신라 유적을 돌아보며 특별한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22대 선조 김주원은 신라 왕족으로 왕이 될 뻔한 기회를 놓쳤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785년 선덕왕이 후계 없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두고 김주원과 김경신의 경쟁이 벌어졌다. 신료들은 김주원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때마침 큰 홍수가 나서 경주 북쪽에 살던 김주원은 범람한 북천을 건너지 못해 입궁에 실패했고 그 사이 김경신이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다(원성왕). 이에 김주원은 외가 세력이 있던 강릉으로 내려갔고, 원성왕은 그를 달래기 위해 강릉과 동해안 일원을 식읍으로 내리고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했다. 김시습은 김주원도 외가가 강릉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오르면 신비로운 출생신화를 가졌고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그의 선조가 되니 김시습은 김알지 탄강설화가 얽힌 계림을 오랫동안 사색하며 걸었을 것이다.

김시습이 은거한 용장사는 삼층석탑만이 우뚝하다. 맞은편 고위산 정상 아래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집필했다는 은적암이 있었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7년을 머물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도 이곳에서 집필했는데 일설에는 김시습이 용장사 남쪽 고위봉 아래 은적암에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두 곳 모두 터만 남았고, 김시습은 용장사와 은적암을 오가면서 지낸 것 같다. 때로는 술에 취해 경주 거리를 활보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두문불출 남산에만 칩거한 것은 아니고 31세 때(1465년)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당시도 생존했으며 90세까지 장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석해 찬시를 지었고 세조가 내린 도첩(度牒, 승려 공인장)을 받았다. 용서 못할 원수인 세조의 도첩을 받은 것은 승려 신분 유지를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도성을 나설 때 세조가 돌아오라고 명했지만 시를 지어 사양하고 떠났다.

 

1468년 기세등등하던 세조가 재위 14년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김시습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사가 복잡했을 것이다. 이미 세월이 흘렀고 정변의 당사자인 세조가 죽었지만 왕권은 그의 아들 예종으로 이어졌으니 아직은 완전히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업보일까, 예종은 재위 13개월만에 급사하고 세조의 손자가 등극하니 이가 성종이다.

이즈음부터 김시습의 생각이 조금씩 바뀐 것 같다. 외모와 행각 모두 반승반유(半僧半儒)의 어중간한 입장을 견지해온 김시습은 성종이 즉위한 후 상경해 수락산에 ‘폭천정사’를 짓고 기회가 되면 새 조정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하면서 ‘고급제왕국가흥망론’ ‘정치는 반드시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생물을 사랑하는 이치에 대하여’ 같은 논설을 썼다. 정치, 경제, 윤리, 생물 등등 다방면에서 자신만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모습은 비슷한 시기 서구에서 일었던 르네상스의 다면적 천재를 떠올리게 한다. 공간적, 심리적으로 세상과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지내면서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다 보면 시스템의 허점이 보일 수 있고, 이를 간파한 천재는 세상의 진보(?)라는 명분 앞에 침묵하기 어려운 법이다.꽃이 피고 지든 봄이 무슨 상관이며, 구름이 오고 가든 산은 무심하네. 나는 봄과 산 그 자체가 되리라...   

김시습이 유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문제점과 효용성을 논한 글도 썼고, 새 조정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은 승복을 입었으되 그가 왜 반승반유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그의 태도는 평생 이어진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교를 연구하고 사찰에 기거하면서 그의 내면은 불교에 깊이 빠져든 것 같다. 여러 곳에서 불법을 가르쳤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을 계승한 <십현담오해>를 펴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의상을 주해한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를 써서 불교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불법을 가르치고 불교 서적을 펴내면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결국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은 46세 무렵 갑자기 도교에 경도되어 양생술을 익혔다. 나이가 찰수록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절감한 현실적인 관심 아니었나 싶다. 이듬해에는 환속해서 선대의 제사를 지냈고 안(安) 씨와 재혼했다. 첫 부인 남(南) 씨는 방랑과 출가 등으로 이른 시기에 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 씨와도 1년만에 사별하고 폐비 윤 씨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다시 승려 차림으로 강원도 일원을 방랑했다. 강원도 내륙을 거쳐 51세 때 외가인 강릉으러 내려와 지냈다. 이유를 모르지만 강릉에서 옥에 갇혀 ‘강릉 옥벽에 쓰다(제강릉옥벽)’라는 시를 남겼다. 강릉을 떠나서는 양양의 바닷가 마을에 머물며 마을 청년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이제 쉰을 넘고 유불도 삼교를 섭렵한 김시습은 무애(無碍)한 대자유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무애행을 이해할 리 없는 사람들과 마찰을 빚어 감옥행도 경험했을 것이다.

김시습의 매화도. 매화를 극진히 사랑해 자신의 호도 매월당(梅月堂)으로 지었다. 굵은 가지는 꺾이지 않는 신념을, 곧은 가지는 절개를 나타내는 듯하다  

52세 때는 양양 해변에서 내륙의 산간으로 들어가 지금의 현남면 법수치 부근 검달동에 정착하고 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가보면 알겠지만 법수치 일대는 매우 깊은 산간오지다. 일부러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 이런 오지를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 다만 그를 알아본 양양부사 유자한과는 편지로 교유했다.

57세에 서울로 올라와 북한산 중흥사에 머물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과 강직한 사림파 김일손(무오사화 때 죽음)과 어울려 백운대와 도봉산을 유람했다. 이것이 마지막 서울행으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자연 속을 거닐며 교감한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양양에서 지내던 김시습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행장을 꾸리고 방랑에 나섰다. 이번에는 충청도 방면으로 가다 홍산 무량사(지금은 부여에 속함)에서 머물렀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810~889)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일국사는 강릉 출신으로 지금도 전국최대의 축제로 알려진 강릉 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으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신라말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던 구산선문을 이끌어 강릉에서는 사굴산문을 열었다. 무량사 옆에는 보령 성주산문이 있는데, 개산조인 무염대사(?~888)와 범일국사는 같은 입당 유학생 출신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인연으로 인근에 무량사를 창건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시습의 무량사행도 범일국사가 강릉출신인 사실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머물 때 최후를 예감한 듯 ‘무량사에서 병으로 눕다(無量寺臥病)’라는 시를 썼다.

 

봄비 추적이는 이삼월

春雨浪浪三二月

급병을 견디며 선방으로 가서

扶持暴病起禪房

문득 (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 물으려 해도

向生欲問西來意

다른 스님이 칭송할까 두렵네

却恐他僧作擧揚

- 필자 역

 

한시 특유의 중의성 때문에 뜻이 애매하긴 하지만, 평생을 초야에 묻혀 방랑했건만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수없는 칭찬을 들은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진 것 같다. 선방에서 고담준론으로 승려들과 담론을 나누는 것도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입에 발린 칭송으로 끝이 나니 무슨 소용이랴... 싶은.

김시습은 생전에 자신을 그린 자화상에 자찬을 붙였는데, 마지막은 자조(自嘲)가 가득하다. 끝내 권력과 화해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며 지낸 회한과 허탈감이 감지된다.

 

이하(李賀, 당나라 시인)를 내려다 볼 만큼

俯視李賀

해동에서는 최고였네

優於海東

높아진 명성, 허황된 명예

勝名謾譽

어떻게 네게 해당할까

於爾執達

 

네 외모는 지극히 답답하고

爾形至藐

네 말투는 어리석기 짝이 없다

爾言大侗

마땅히 너를 그곳에 둬야 하리

宜爾置之

깊은 골짜기 속에

丘壑之中

김시습의 자화상. 위에는 스스로를 평가한 글이 있다. 아래 초상화와 달리 선비의 모습에 머리카락을 그려넣은 것이 다르다 

김시습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부여 무량사. 강릉 출신인 범일국사가 창건했으며 원래는 대찰이었다 

자화상 속 그의 모습은 승려가 아니라 갓을 쓰고 유학자의 복장을 한 선비의 모습이다. 여기서 김시습은 오랫동안 반승반유로 살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학자의 본분을 더 중시했고 한 번도 진심으로 유학을 등진 일이 없음을 웅변한다. 최후의 순간도 고승들이 그러하듯 좌화(坐化, 앉은 채로 입적함)하지 않고 누워서 죽었다고 한다. 유언에서도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대로 가매장을 했다가 3년 뒤 파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아 승려들은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다비를 행했고, 사리 한 점이 나와 부도탑을 세웠다. 김시습의 부도는 무량사 앞에 지금도 남아 있다(사리는 무량사에, 사리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

시대를 잘 못 만난 천재는 결국 그렇게 방황으로 일생을 보내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한 채 떠났다. 그럼에도 후세가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범인(凡人)과 필부(匹夫)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유산과 영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시만 해도 2,200수나 되어 한 개인으로는 사상 최다일 것이다. 2,200수의 시는 그의 발길과 사색이 닿은 장소와 허공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며 맴돌고 있다.

무량사에 소장된 만년의 김시습 초상화. 유학자 차림 같은데 자세히 보면 머리는 삭발한 상태다. 그는 평생 반승반유(半僧半儒)의 내면과 행색을 견지했다 

부여 무량사 입구(무진암 앞)에 있는 김시습 부도 


글/사진 김병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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