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주길 '적막강산 베스트 10' (하)
6 섬진강 두곡교~호곡나루터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강물은 무심으로 투명하고 길은 찬란한 무지개빛으로 환하다. 원초적 색감은 그에 감동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이런 길에서는 누구나 동심이 발동한다
섬진강이 맑고 아름답다는 것은 주로 인적 드문 산간을 흐르기 때문이다. 구례~광양 간 ‘하동포구 80리’가 풍경의 절정이라면 중상류의 산간지대는 적막감 절정이다. 곡성 두곡교에서 호곡나루터 사이 십리 구간은 고적함이 극에 달해 사람은 물론 자동차마저 반가울 정도다. 북으로는 깃대봉(691m)이, 남에는 곤방산(715m)이 협공하듯 옥죄어 물줄기는 협량하고 길은 비탈 따라 위태로우니 경관은 빼어나고 길은 구비마다 새롭다. 마을은 강변을 벗어나 골짜기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 민가는 잘 보이지 않고 행인도 없다. 이 길을 발품 팔아 걸어 다닐 주민이나 외지인은 드물 테니 두바퀴 아니면 네바퀴 위에서만 간혹 움직일 뿐. 강 건너에는 17번 국도가 지나고 전라선 철길도 틈틈이 터널을 벗어나지만 자동차와 열차는 찰나의 소음에 그쳐 적막의 바다에 순식간에 매몰되고 만다.
7 영산강 죽산보
광야 중의 외딴 인공미
자전거 체인을 형상화한 죽산보는 외딴 곳에 자리해 언제나 조용하다. 대규모 시설물의 한가는 철시한 시장처럼 인간적 고독마저 묻어나 괜스레 정겹고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전국 16개 보는 물을 가두는 기본 역할 외에 수력발전을 하고 경관의 포인트가 되어 공원 겸 쉼터로 사랑받는다. 하지만 나주평야 한켠에 자리한 죽산보는 언제나 조용하다. 도시에서 동떨어져 있고 큰 마을도 없는 들판 가운데 자리한 입지 때문이다. 보가 생기기 전부터 조용했겠지만 거대한 인공물이 들어서고 주변을 공원으로 가꾼 상태에서도 인적이 드물면 축제가 지나간 뒷골목처럼 더욱 공허한 법이다. 자전거길은 강 양안에 나 있고 보를 통해 건너다닐 수 있다. 다른 보와 달리 자전거와 보행자만 통행 가능하며 보 조형물 역시 자전거 체인을 형상화해서 그 어느 곳보다 자전거 친화적이다. 북안의 넓은 둔치는 드넓은 갈대밭과 습지가 펼쳐져 있어 고적함을 더해준다.
8 영산강 옥정리
태극 물돌이 속 적막 둑길
외로운 고깃배,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텅 빈 길에 아련한 향수와 목가풍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실상은, 추위 속에 힘겹게 그물을 건져 올리는 노부부의 일상과 인적 없이 낡아가는 잊혀진 길일 뿐이다
영산강 자전거길에서 가장 극적인 지형은 물길이 S자로 구비치고 2개의 반도지형이 마주쳐 ‘태극’을 그리는 ‘느러지’ 일대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물길 따라 함께 율동해 산꼭대기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원래의 종주길은 느러지전망대를 내려서서 곧장 몽탄대교를 건너가지만 강안을 따라 옥정리 반도를 일주하는 길도 나 있다. 옥정리 반도길은 초입에 거친 흙길이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으나 별천지로 이어지는 듯한 강변 데크로를 지나면 둑길만 덩그러니 외롭다. 길은 반듯한데 통행이 없으니 노상에 세월을 묻히는 것은 햇살과 바람 그리고 때때로 내리는 빗발뿐이다. 강 건너 언덕의 식영정도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헤어핀으로 급선회하는 물줄기는 자연이 그려주는 침묵의 드라마다.
9 새재길 점촌 영강 하류
느려지는 물길, 잦아드는 인적
영강을 따라 무한히 뻗어날 것만 같은 직선로. 세상에 무한한 직선로는 없고, 이 땅에는 더더욱 없다. 영강이 곧 낙동강을 만나 사라지듯 소실점을 만들어내는 이 길도 얼마 가지 않아 꺾어진다
이화령을 넘으면 국토종주길은 조령천을 거쳐 영강을 따라 낙동강 본류로 이어진다. 문경시내(옛 점촌)를 지나면 백두대간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 풍경의 배경은 낮은 야산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들판은 넓어지지만 인적은 점차 사라진다. 영신숲유원지에서 낙동강 합수점의 ‘낙동강칠백리공원’까지 30리는 전원의 고요와 평화, 안락이 절정을 이룬다. 산줄기 없이 들판 가운데 홀로 오똑한 태봉산(106m)은 이 길의 지표다. 이즈음에서 영강은 흐름을 거의 멈추고 저습지가 되어 철새만이 오락가락 노닐 뿐이다. 이안천의 물을 보태 다시 기력을 차린 영강은 마침내 낙동강 본류와 만나지만 고속도로에 램프가 합류하듯 두 물길이 남향으로 비스듬히 모여들어 합수점 특유의 극적이거나 거창한 풍광은 아니다. 영강이 물을 보태면서 낙동강은 비로소 대하의 흐름을 갖춰 유장해진다. 예전에는 이곳까지가 배가 다닐 수 있는 가항수로였고 하구까지가 700리여서 ‘낙동강 칠백리’ 통칭이 유래했다. 한때는 오가는 사람과 물자로 번성했을 퇴강포구는 기념비와 공원으로만 남았다.
10 오천길 조치원~합강정
신기루 도시 직전의 공허
들판 가운데 순식간에 생겨난 세종시는 사막 속에 돌연한 라스베이거스처럼 생뚱맞고 몽환적이다. 인적 없는 외곽의 공원은 이 기이한 도시의 생소함을 그나마 중화해주는 전주곡이다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순식간에 인구 37만의 도시로 우뚝 선 세종시는 미국 서부 사막지대에 홀연히 자리한 라스베이거스를 닮았다. 마치 신기루나 환상처럼 삽시간에 생겨난 도시는 상전벽해를 밥 먹듯이 해내는 현대문명의 괴력이자 비닐하우스내 작물처럼 격리감을 준다. 급조된 도시는 임시장터처럼 한정된 공간에 밀집되어 점이지대 없이 근교와 돌연 단절되어 도시와 전원의 경계선이 첨예하다. 새재길과 금강자전거길을 연결하는 오천길의 남부 절반은 미호천을 따라가는데, 조치원에서 합수점(합강정)까지 8km는 신기루 도시 직전의 공허와 대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전거길은 호화로울 정도로 잘 나 있고 둔치는 공원으로 가꿔져 있지만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세종시내 바로 옆인 조성습지공원의 세련된 시설물은 안쓰러울 정도이고, 미호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합강정 일대 둔치도 텅 비었다. 하지만 이 주변까지 시가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일대의 적막강산은 분명한 시한부다. 그래서 더 귀하고 특별한 공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국토종주길 '적막강산 베스트 10' (하)
6 섬진강 두곡교~호곡나루터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강물은 무심으로 투명하고 길은 찬란한 무지개빛으로 환하다. 원초적 색감은 그에 감동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이런 길에서는 누구나 동심이 발동한다
섬진강이 맑고 아름답다는 것은 주로 인적 드문 산간을 흐르기 때문이다. 구례~광양 간 ‘하동포구 80리’가 풍경의 절정이라면 중상류의 산간지대는 적막감 절정이다. 곡성 두곡교에서 호곡나루터 사이 십리 구간은 고적함이 극에 달해 사람은 물론 자동차마저 반가울 정도다. 북으로는 깃대봉(691m)이, 남에는 곤방산(715m)이 협공하듯 옥죄어 물줄기는 협량하고 길은 비탈 따라 위태로우니 경관은 빼어나고 길은 구비마다 새롭다. 마을은 강변을 벗어나 골짜기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 민가는 잘 보이지 않고 행인도 없다. 이 길을 발품 팔아 걸어 다닐 주민이나 외지인은 드물 테니 두바퀴 아니면 네바퀴 위에서만 간혹 움직일 뿐. 강 건너에는 17번 국도가 지나고 전라선 철길도 틈틈이 터널을 벗어나지만 자동차와 열차는 찰나의 소음에 그쳐 적막의 바다에 순식간에 매몰되고 만다.
7 영산강 죽산보
광야 중의 외딴 인공미
자전거 체인을 형상화한 죽산보는 외딴 곳에 자리해 언제나 조용하다. 대규모 시설물의 한가는 철시한 시장처럼 인간적 고독마저 묻어나 괜스레 정겹고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전국 16개 보는 물을 가두는 기본 역할 외에 수력발전을 하고 경관의 포인트가 되어 공원 겸 쉼터로 사랑받는다. 하지만 나주평야 한켠에 자리한 죽산보는 언제나 조용하다. 도시에서 동떨어져 있고 큰 마을도 없는 들판 가운데 자리한 입지 때문이다. 보가 생기기 전부터 조용했겠지만 거대한 인공물이 들어서고 주변을 공원으로 가꾼 상태에서도 인적이 드물면 축제가 지나간 뒷골목처럼 더욱 공허한 법이다. 자전거길은 강 양안에 나 있고 보를 통해 건너다닐 수 있다. 다른 보와 달리 자전거와 보행자만 통행 가능하며 보 조형물 역시 자전거 체인을 형상화해서 그 어느 곳보다 자전거 친화적이다. 북안의 넓은 둔치는 드넓은 갈대밭과 습지가 펼쳐져 있어 고적함을 더해준다.
8 영산강 옥정리
태극 물돌이 속 적막 둑길
외로운 고깃배,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텅 빈 길에 아련한 향수와 목가풍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실상은, 추위 속에 힘겹게 그물을 건져 올리는 노부부의 일상과 인적 없이 낡아가는 잊혀진 길일 뿐이다
영산강 자전거길에서 가장 극적인 지형은 물길이 S자로 구비치고 2개의 반도지형이 마주쳐 ‘태극’을 그리는 ‘느러지’ 일대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물길 따라 함께 율동해 산꼭대기에는 전망대가 들어섰다. 원래의 종주길은 느러지전망대를 내려서서 곧장 몽탄대교를 건너가지만 강안을 따라 옥정리 반도를 일주하는 길도 나 있다. 옥정리 반도길은 초입에 거친 흙길이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으나 별천지로 이어지는 듯한 강변 데크로를 지나면 둑길만 덩그러니 외롭다. 길은 반듯한데 통행이 없으니 노상에 세월을 묻히는 것은 햇살과 바람 그리고 때때로 내리는 빗발뿐이다. 강 건너 언덕의 식영정도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헤어핀으로 급선회하는 물줄기는 자연이 그려주는 침묵의 드라마다.
9 새재길 점촌 영강 하류
느려지는 물길, 잦아드는 인적
영강을 따라 무한히 뻗어날 것만 같은 직선로. 세상에 무한한 직선로는 없고, 이 땅에는 더더욱 없다. 영강이 곧 낙동강을 만나 사라지듯 소실점을 만들어내는 이 길도 얼마 가지 않아 꺾어진다
이화령을 넘으면 국토종주길은 조령천을 거쳐 영강을 따라 낙동강 본류로 이어진다. 문경시내(옛 점촌)를 지나면 백두대간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 풍경의 배경은 낮은 야산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들판은 넓어지지만 인적은 점차 사라진다. 영신숲유원지에서 낙동강 합수점의 ‘낙동강칠백리공원’까지 30리는 전원의 고요와 평화, 안락이 절정을 이룬다. 산줄기 없이 들판 가운데 홀로 오똑한 태봉산(106m)은 이 길의 지표다. 이즈음에서 영강은 흐름을 거의 멈추고 저습지가 되어 철새만이 오락가락 노닐 뿐이다. 이안천의 물을 보태 다시 기력을 차린 영강은 마침내 낙동강 본류와 만나지만 고속도로에 램프가 합류하듯 두 물길이 남향으로 비스듬히 모여들어 합수점 특유의 극적이거나 거창한 풍광은 아니다. 영강이 물을 보태면서 낙동강은 비로소 대하의 흐름을 갖춰 유장해진다. 예전에는 이곳까지가 배가 다닐 수 있는 가항수로였고 하구까지가 700리여서 ‘낙동강 칠백리’ 통칭이 유래했다. 한때는 오가는 사람과 물자로 번성했을 퇴강포구는 기념비와 공원으로만 남았다.
10 오천길 조치원~합강정
신기루 도시 직전의 공허
들판 가운데 순식간에 생겨난 세종시는 사막 속에 돌연한 라스베이거스처럼 생뚱맞고 몽환적이다. 인적 없는 외곽의 공원은 이 기이한 도시의 생소함을 그나마 중화해주는 전주곡이다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순식간에 인구 37만의 도시로 우뚝 선 세종시는 미국 서부 사막지대에 홀연히 자리한 라스베이거스를 닮았다. 마치 신기루나 환상처럼 삽시간에 생겨난 도시는 상전벽해를 밥 먹듯이 해내는 현대문명의 괴력이자 비닐하우스내 작물처럼 격리감을 준다. 급조된 도시는 임시장터처럼 한정된 공간에 밀집되어 점이지대 없이 근교와 돌연 단절되어 도시와 전원의 경계선이 첨예하다. 새재길과 금강자전거길을 연결하는 오천길의 남부 절반은 미호천을 따라가는데, 조치원에서 합수점(합강정)까지 8km는 신기루 도시 직전의 공허와 대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전거길은 호화로울 정도로 잘 나 있고 둔치는 공원으로 가꿔져 있지만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세종시내 바로 옆인 조성습지공원의 세련된 시설물은 안쓰러울 정도이고, 미호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합강정 일대 둔치도 텅 비었다. 하지만 이 주변까지 시가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일대의 적막강산은 분명한 시한부다. 그래서 더 귀하고 특별한 공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