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날, 동네 한바퀴

자생투어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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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진짜 봄은 바깥에서 오지 않으리

 

이제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만세를 눈사람이 부르고 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만세인지


혹한의 끝자락, 갑작스런 폭설이 쏟아졌다. 단숨에 하얗게 변한 거리로 나서보았다. 활기를 잃은 골목은 스산하지만 백색의 치장에 잠시 절박함을 가렸다. 가게들은 기약 없이 문을 닫았고 즐비한 상가는 1년 이상 ‘임대’ 호소문만 내걸렸다. 텅 빈 공원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눈사람만 홀로 만세를 부른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만세인가 (2021년 1월)


오전까지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기록적인 추위의 끝자락에 쏟아진 눈은 순식간에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버렸다. 높직한 11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일견 아름답다. 눈이 내리는 그 순간만은 청소부도 잠시 탄성을 지를 것이다. 하지만 찰나일 뿐, 나이가 들면서 눈을 바라보는 서정과 감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 온 다음을 예상하는 경험적 지혜 때문에 감탄과 환호는 찰나에 그치고 눈이 세상을 뒤덮는 꼭 그만큼 걱정이 뇌리를 잠식한다.

행인이나 자동차에게 눈길은 극단의 모순으로 내모는 야누스다. 미끄럽고 질척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 마음은 급한데 더 느리게 가야 한다.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는 평정심을 갉아먹고 경박을 부추긴다.

그런 기재를 각오하고도 나는 자전거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잠시라도 세상의 누추를 가려주는 위선적 가상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서다. 준비는 단 한 가지.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접지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타이어 공기압을 조금 빼는 것이다.


불안의 거리

사람들은 불안하다. 손님을 맞는 가게 주인의 웃음 뒤에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불안이 어른거린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는 이미 넘어선지 오래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불안, 그것은 미래다. 일상의 근본을 뒤흔드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이 예측불가능한 일상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저 아래를 헤집고 숙면을 방해한다.

본지 사무실이 있는 동네는 이제 2~3년 된 신개발지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빌딩은 아직도 공실이 넘쳐나고, 1층 상가는 텅 빈 채 ‘임대’ 딱지만 긴 대열을 따라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나마 가게가 들어왔던 곳도 장기휴업 또는 아예 폐업한 곳이 적지 않다. 이건 그냥 가게가 없어져 나의 생활이 불편해지는 그런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에 매달렸던 사람들의 생계와 생존이 절벽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빈 사무실과 상가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들은 엄청난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그동안 아무리 어려워도 최후의 마지노선인 생존까지는 걱정하지 않던 우리였는데 이제 거리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었다.


공원 벤치마저 ‘범죄 현장’ 같은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경고의 빨간색을 눈이 잠시 덮어주고 있다(21년 2월)  


아무도 없다

그래도 행인이 다니고 자동차도 지나간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완전히 고립되고 동떨어진 섬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으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든 타인은 기피의 기준이 되어 가능하면 멀리,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

장기간 소규모 공동체 위주의 농경사회를 경험한 우리에게 이런 소외와 고독은 참으로 낯설다. 하지만 시간을 약 삼아 잘도 적응해 가고 있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는 말로 표현할 것도 없는 진실이듯이 이미 우리는 아주 조금씩 주변을 상실해 가면서도 가랑비에 옷 젖듯 실감하지를 못한다. 부모형제, 절친한 지기도 1년 간 만나지 않으면 원래 그렇게 안 보고 안 만나고 살았던 것처럼 그런 ‘이별 상태’에 적응이 된다. 예전까지 ‘관계’의 피로감에 힘들어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격리’를 반기기도 할 것이다. 핑계도 훌륭하다.

술잔을 부딪치고 찌개를 같이 떠먹던 그런 전근대적 비위생의 밀접이 사라져가는 대신, 생명줄처럼 손에서 놓을 줄 모르는 스마트폰에는 데이터의 왕래가 폭증한다. 하지만 이 실체 없는 비트놀이도 이제 슬슬 재미를 잃어간다. 어떤 쾌락도 지나치거나 오래가면 허탈과 환멸을 거쳐 결국 공허만이 남는다는 것을 겪어본 다음에야 이해한다.

 

이제, 돌아가고 싶다

탓을 하는 것은 부질없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세상, 사회 그런 추상적인 기구의 책임은 더더욱 아니다. 그건 수많은 개인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 절규하는 나 자신마저 포함된 합집합 혹은 교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 탓이니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세상 탓이니 내 책임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에 기대야 하나. 외부에서 해결책과 대안을 찾는 한 우리는 언제나 나를 지원해주고 안아주는 귀의처를 탐색한다. 어떤 경우에도 혹은 영원토록 나를 뒷받침해줄 그런 귀의처가 없는 것은, 나 자신이 타인의 귀의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제 당분간은,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리셋(reset) 스위치가 있는 원래의 자아 그 절대적 시원으로.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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