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포구 팔십리 길목에서

자생투어
202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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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성 밖 한산사, 야밤에 들려오는 종소리’의 비밀

 

하동 악양 한산사. 발밑으로는 지리산 줄기에 둘러싸인 악양 들판이 펼쳐져 있다


하동 악양면에 있는 고소성과 한산사는 중국 소주(蘇州, 수저우)에도 똑 같이 있다. 악양(岳陽)도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도시 이름과 같고 중국 동정호(洞庭湖)마저 하동 악양의 작은 저수지에 붙은 이름이다. 이 무슨 일일까. 단순한 모화사상의 결과인가, 아니면 공허한 전설의 소치일까. 소주와 하동을 오가며 당시(唐詩) 한 편의 위력을 곱씹는다 (2016년 12월)

 

한산사에서 내려다본 폭 길이 300m의 동정호(아래)와 섬진강. 이름을 따온 중국 동정호는 길이가 140km나 된다 


또다시 천년 이상을 전해질 그의 시는 비석으로 각인되었고, 시인 자신도 동상이 되어 시의 무대에 영원으로 남았다.

조금은 술에 취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흐트러진 자세로 반쯤 누운 시인의 뒤로 시의 배경이 된 풍교(楓橋)가 걸려 있다. 풍교 아래를 흐르는 운하 맞은편에는 한산사(寒山寺) 제호가 쓰인 노란 벽이 기다랗다.

시는, 당시(唐詩) 최고의 절창 중 하나로 꼽히는 ‘풍교야박(楓橋夜泊)’, 시인은 8세기 중엽 당나라 때의 인물 장계(張繼, ?~?)다.


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달 지고 까마귀 우는 서리 가득한 밤

강풍교 고기잡이 불빛에 잠 못 이루네

고소성 밖에는 한산사

뱃전에 들려오는 한밤의 종소리

(필자 역)


'풍교야박'의 배경인 한산사 담장과 강촌교(江村橋). 현장에 와서야 시의 ‘강풍(江楓)’이 강변 단풍이 아니라 강촌교와 풍교 두 다리를 뜻함을 알았다


장소는 생각과 예술 작품의 최초이자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 된다. 나는 어떤 작품을 보건 항상 그 배경이 된 장소가 궁금했다. 그 ‘장소’는 어떤 곳이길래 작자에게 그런 특별한 영향 혹은 영감을 주었을까. 그것을 조금이나마 상상하고 공감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배경적 장소는 당시(唐詩)다. 1300~1400년 전에 이백과 두보를 비롯한 걸출한 시인들이 시대를 풍미하며 ‘당시’의 형식을 완성하고 보편명사로서의 시(詩)의 궁극적인 단계를 노크했던, 그 문명(文明) 절정의 정신세계가.


소주 한산사 옆에 있는 장계의 동상. 아래에는 '풍교야박' 시가 씌어있다 


‘풍교야박’은 唐詩의 한 절정으로 평가되는 명시다. 풍교는 상해 서쪽에 있는 ‘운하의 도시’ 소주(蘇州) 시내에 있다. 풍교(楓橋)는 한산사 옆을 지나는 운하에 놓인 다리다. 소주는 사방이 거미줄 같은 운하와 호수로 둘러싸인 물의 도시인데, 북경에서 남쪽 절강성에 이르는 2000km 대운하를 끼고 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시인도 어쩌다 대운하를 따라 지나는 길에 이곳에 하룻밤 묵었을 것이다.

명시라지만 사실 내용은 별것 없다. 한밤 중 강변(정확히는 운하)에 정박한 주변 상황을 묘사한 것뿐이다. 시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시름’ 수(愁) 자 단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그윽한 수묵화가 된 이 시는 우수와 격조, 선풍(仙風), 심지어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영감까지 은근하다. 7자 4구로 이뤄진 칠언절구는 한글 발음으로 읽어도 운율이 느껴지지만, 성조가 있는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시와 노래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런데 내용마저 선명한 이미지화로 떠오르는 몽환경이면서 까마귀 울음과 종소리로 청각까지 절묘하게 자극하며 공감각의 효과를 극적으로 비약시킨다.


장계의 명시 ‘풍교야박’ 현장에서 필자. 시를 새긴 비석 뒤편으로 풍교가 걸려 있다


당시(唐詩) 최고의 절창, 그 무대에 선 날

오늘날 우리는 박대하고 있지만 한자는 3000년 이상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문명을 창달하고 기록해온 문자다. 한자는 발명 때부터 사물의 형상을 본 딴 기호나 일종의 그림글자였다(상형문자). 시간이 갈수록 원래의 형상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한자의 본질은 ‘그림’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뜻을 가진 표의문자이기도 하니 발음 그대로를 표현하는 한글이나 알파벳 같은 표음문자보다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표현에 취약한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으로 또 다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시(詩)를 쓰면 어떻게 될까. 그림으로 그린 그림…, 이미지가 중첩되어 더욱 포괄적이고 강렬한 ‘이중 그림’이 될 것이다.

좋은 한시(漢詩) 대부분은 풍경이나 사물의 묘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또 그래야 멋과 맛이 느껴지고 절창(絶唱)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자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4성(높낮이가 다른 4개의 성조) 때문에 마치 노래 같은 운율과 음조를 갖는다. 이윽고 시는 그림에서 노래가 되어 정취를 더해 사람의 감수성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미지와 음률의 공감각으로 마음 저변을 꿰뚫고 마침내는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풍교야박’은 이런 효과를 극명하게 맛보게 해주는 시다. 예로부터 최고의 절창으로 칭송받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유명해서 당시(唐詩)를 문화의 극단으로 존중하게 만들었고, 공맹(孔孟)의 유학과 더불어 한시(漢詩)는 동아시아 식자라면 익히고 또 지어야 할 기본이 되었다. 조선조 선비들이 모였다 하면 한시를 읊조리던 풍습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한시의 흥행에 일등공신 중 하나인 이 ‘풍교야박’의 무대에 선 나는 감회가 복잡했다. 무엇보다 기뻤고 설렜다. 가만히 혼자 있었다면 감격의 눈물마저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마음은 불편했다.


섬진강변에 우뚝한 고소성. 대가야 때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한산사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하동 악양의 고소성과 한산사

하동 악양면은 지리산 줄기가 섬진강변에 빚어낸 가장 비옥한 들이자 특별한 풍광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형제봉(1117m)을 위시해 웅장한 산줄기가 삼면을 둘러싸고, 남쪽은 섬진강을 접한다. 형제봉 줄기가 섬진강과 만나는 능선 끝에는 고대의 석성이 남아 있다. 이름은 ‘풍교야박’에 나오는 그 고소성과 같다. 성 남쪽의 산중턱에는 또 한산사가 악양들판을 바라본다.

고소성은 대가야가 왜국과의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늦어도 6세기 중반에는 축성되었을테니 원래 이름이 고소성일 리가 없다. 일설에는 나당연합군이 이곳에 와서 경치가 중국과 비슷해 악양과 동정호 같은 이름을 붙였다는데 믿기 어렵다. 소정방의 당군은 여기까지 온 일이 없고, 중국 악양은 호반도시이며 동정호는 작은 저수지가 아니라 길이 140km, 면적은 제주도 정도나 되는 엄청난 호수다.

한산사와 고소성도 중국의 그것을 닮았다는 말이 있지만 소주는 평야 도시이고 한산사는 운하 옆의 평지에 자리해서 산중턱에 앉은 하동의 한산사나 산줄기 위에 요새로 구축된 고소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의 하동 한산사는 조선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왜 하동에 중국 지명인 고소성과 한산사, 악양과 동정호가 있는지 그 이유는 조금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다. 하동 악양은 신라 때는 소다사현(小多沙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악양으로 고쳤다. 예부터 산의 남쪽은 빛이 잘 들어 양(陽)이란 지명을 많이 썼기 때문에 악양은 말 그대로 지리산 남쪽을 뜻했을 것이다. 그러다 조선조에 들면서 중국의 3대 누각이자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등악양루(登岳陽樓, 악양루에 올라)’ 시의 배경이 된 악양루가 있는 호남성 악양과 비견되면서 하동 악양에도 악양루가 만들어지고 동정호까지 생겨나 ‘리틀 중국’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조선조에 중국 지명을 차용한 사례는 많지만 이렇게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조선의 대학자 이율곡(1536~1584)도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1130~1200)를 흠모해서 주희가 무이산(복건성)에 은거하며 노래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따라 황해도 해주 섬담계곡을 배경으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지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문화를 흠모하는 모화(慕華) 사상이 극에 달해서 이왕 악양이 되었으니 명시 ‘풍교야박’에서 고소성과 한산사까지 따왔을 것이다. 실제 소주와 악양이 700km 이상 떨어진 건 문제될 리가 없다. 이를테면, 하동 악양은 당시(唐詩)를 사랑한 조선 선비들의 ‘모화 세트장’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현대의 중국에는 우리가 배우거나 동경할만한 것이 거의 없는 반면, 오히려 중국은 우리의 문화와 제품을 동경하고 모방하고 있으니, 실로 격세지감이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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