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 메멘토벨로 /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1)

자생투어
202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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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 ‘의정부 축선 전투’, 우리는 처음부터 밀리고 말았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을 맞아 본지 편집위원인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주요 격전지를 찾아 당시 전투의 실상과 의미를 되짚어 보는 특별기획 ‘메멘토벨로(Memento Bello, ‘전쟁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6·25전쟁 70년 -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를 연재한다. 자전거로 현장을 답사하며 풍요와 방만 속에 안일과 오판에 젖어 있는 세태를 일깨우는 경종이자, 자전거여행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테마 투어의 제안이 될 것이다 (2020년 5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 소재)에 있는 대부분의 전시물・조형물들은 6·25전쟁에 관한 것들이다. 그중에 ‘평화의 시계탑’이 눈에 띈다. 전쟁 때 사용되었던 비행기・탱크・포탄 등의 잔해들 위에 시계를 안은 두 소녀를 형상화하고 있다. 한 소녀는 현재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다른 소녀는 전쟁이 발발했던 그때 6월 25일 4시를 가리키는 ‘멈춰선 시계’를 안고 있다. 시계탑 아래에는 ‘평화통일 갈망의 시계’란 이름의 또 다른 시계가 있다. 통일이 되는 순간의 시각을 표시하여 시계탑 위로 올릴 계획이란다. 하루 속히 ‘평화통일 갈망의 시계’가 ‘평화의 시계탑’ 위로 올라가기를 바란다




연재를 시작하며
올해(2020년)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年)이다.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잊어버려도 될 만큼 아주 먼 옛날의 사건도 아니다. 그 전쟁을 겪었던 국민의 수는 이제 10%도 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그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아픔 또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는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니만큼 예년보다 다양한 행사들로 그때를 기릴 것이다. 6·25전쟁은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자 비극’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일회성 행사에서 벗어나서 국민들에게 전쟁의 실상과 안보의 중요성에 관해 제대로 알리고, 전쟁을 막기 위해 국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각시키는 계기로 활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6·25전쟁이 끝나고도 북한은 끊임없는 도발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방해하고 국민의 생명을 위협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이다. 급기야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및 시험 발사도 모자라, 지난 5월 3일에는 2018년에 맺었던 ‘9·19군사합의’를 헌신짝 내팽개치듯 DMZ 내 아군 감시초소에 총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변했다면 더 악랄하게 변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은 북한 집단의 실체를 잘못 보고, 못 본 체하고, 잘 못 전하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70년 전에 발발했던 6·25전쟁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선배들이 생명을 돌보지 않고 피 흘려 싸웠던 격전지를 찾아 이 골짜기 저 능선을 찾기로 한다. 찾는 곳에서 당시의 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노라면 6·25전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소중함, 내가 마시고 있는 이 공기의  소중함도 깨닫게 될 것이다.



암호명 ‘폭풍’의 하달과 함께 시작됐던 6·25전쟁, 어느새 7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노도(怒濤)를 막고, 서울의 북쪽 울타리 의정부를 지키기 위해 후방에서 올라오는 모든 부대들까지 투입했다. 그러고도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마냥 밀렸다. 그러고서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와 비교해서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때를 제대로 알고 각오한다면, 또 있을지도 모를 전쟁을 이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쟁을 이해하려, 그날의 포성을 들으려,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한 여정의 페달을 밟기로 한다. 


전쟁을 지켜보았을 38선 표지석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 연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간 곳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북쪽 울타리라 할 수 있는 ‘동두천·포천·의정부’ 지역이다. 이곳을 찾은 날은 주말인데도 ‘코로나19’ 때문인지 국군 장병은 물론 미군 장병들의 모습도 거의 볼 수 없었고 간간이 지나는 군용차량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70년 전 오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북한군 중에서 최고로 강한 전투력을 지닌 부대들이 이 일대의 한탄강과 영평천(한탄강의 지류)을 넘고 동두천・포천을 거쳐 의정부 방향으로 공격해왔다. 이들이 지향하는 최초의 목표는 당연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었다.
당시 남·북한 간의 경계는 ‘38도선’이었다. 거기에 서있는 ‘38선 표지석’이 당시를 말해준다. 전쟁 동안 북한군과 중공군이 저 선을 건너서 넘어왔고, 한국군과 UN군도 저 선을 넘어서 북진해갔다. 그러면서 3년 넘게 싸운 결과 이곳 한탄강으로부터 30여km 북쪽에 새로운 선(線) ‘군사분계선’을 긋고서야 일단은 포성이 멎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한탄강(漢灘江)인가 아니면 한탄(恨嘆)강인가? ‘큰 여울’이란 뜻의 ‘한탄(漢灘)강’이지만 한탄(恨嘆)강이라고도 불린다. 6·25전쟁 당시 다리가 끊겨 후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한탄(恨嘆)강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민족 분단의 비극이 이 강에 서려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탄(恨嘆)강’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정부 축선 전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6·25전쟁을 계획하면서 북한군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주공(主攻 = 주력) 부대를 서울 북방 ‘의정부 축선’과 서측방 ‘문산축선’을 통해 서울을 목표로 공격하게 하고, 조공(助攻 = 조력) 부대로 하여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방향으로, 또 다른 조공부대는 춘천에서 수원 방향으로 공격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38도선 일대에 배치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함은 물론, 후방에서 전방으로 증원해올 예비사단들까지도 수도권으로 유인해 격멸하고자 계획하였다.
‘중서부지역 작전’이라 불리는 ‘의정부 축선 작전’은, 서울의 북쪽 ‘동두천-의정부-서울’ 축선과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침입해온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3・4보병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맞아 국군 제7사단이 치룬 전투를 말한다.
국군 제7사단(파주군 적성-포천시 일동 간 47㎞ 방어정면 담당)은 개전 초기 2개 보병연대만으로(1연대를 동두천 방향에, 9연대를 포천 방향에 배치) 북한군 1군단의 주공부대를 맞았으니 처음부터 전투력이 열세하여 불리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황이라 최초부터 병력면에서는 7배, 화력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북한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사단 예비연대였던 3연대는 수경사로 전환되었으나, 교체 예정이었던 25연대는 투입되지 않았음)
전투력의 열세로 인해 초기전투에서 의정부축선이 일방적으로 밀리자, 육군본부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와 제2사단(대전) 예하의 부대들과 기타 수도권에서 투입 가능한 부대들을 총동원하여 이 축선의 붕괴 상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인하여 개전 2일 만에 의정부가 함락되었고, 이어서 서울 최후저항선인 창동과 미아리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중서부지역에서의 작전은 크게 3단계로 전개되었다.
① 제1단계는 개전 당일의 작전으로, 38도선 상 경계진지로부터 주저항선 사이에서의 전투로 인해 동두천과 포천이 적의 수중에 함락된 시기의 작전이다.
② 제2단계는 개전 2일차인 26일 북한군에 의해 의정부가 함락되기까지의 작전이다. 동두천과 포천을 탈환하기 위해 증원부대를 이용하여 역습을 실시했으나 포천 탈환에 실패하고, 의정부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리고 ‘일동’ 축선 상의 내촌 일대(퇴계원 북쪽16㎞)에 투입되었던 육사 생도대대와 서울 전투경찰대가 적의 공격을 받고 태릉 방향으로 밀려났다.
③ 제3단계는 26일 서울의 관문 의정부가 함락된 이후부터 최후방어선을 형성하기까지의 작전이다. 의정부 축선에 투입된 국군부대들이 북한군에 밀리면서 백선천(의정부 남쪽 1km)에서의 지연전과 수도 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태릉 지역에 급편방어진지를 형성한 때까지의 작전이다.


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에서의 전투
‘연천-동두천’ 축선에서는, 국군 7사단 1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과 1개 전차대대를 맞아 38도선 경계진지와 주방어선(마차선~소요산)에서 전투를 벌였다. 연대는 적의 양익 포위공격을 받고도 동두천을 잘 사수했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인해 25일 22시경 동두천이 함락되어 ‘덕정’지역으로 철수했다. 의정부 축선의 북쪽 정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경사 18연대(-)를 증원시켜 ‘덕정’ 지역으로 철수했던 1연대와 함께 동두천을 탈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2개 연대는 26일 08시에 역습을 실시하여 1연대가 일시적으로 ‘동두천’을 탈환했다.
그러나 25일 포천 정면에 배치된 국군 제9연대의 방어진지가 붕괴되었고 11시에 포천이 함락되었다. 증원부대들을 포천 축선에 투입하여 북한군 3사단의 집중공격에 대항했으나, 의정부 동북방의 최후방어선이 돌파되고 26일 13시 경 서울의 북쪽 관문 의정부가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의정부 북쪽에 투입되었던 제1연대와 제18연대의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제1연대는 창동 지역으로 이동한 후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창동방어선 전투’에 참가했고, 제18연대(-)는 고양을 거쳐서 6월 28일 행주나루를 통해 김포반도로 철수해 한강선방어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운천-포천-의정부 축선에서의 전투
‘운천-포천’ 축선에서는 국군 7사단 9연대가 북한군 1군단 제3보병사단과 제105전차 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를 맞아 싸웠다.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집중 공격으로 인해 25일 11시에 포천을 빼앗기고 이어서 14시경 주저항선(천주산-가랑산)도 무너졌다. 이어 16시에는 북한군 도보부대에 의해 포천이 완전히 점령되고 말았다.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던 9연대는 고전을 거듭한 끝에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전투력이 거의 상실된 상태에서 소부대 단위로 흩어져서 야간을 이용해 광릉으로 철수하면서 포천 축선은 텅텅 비게 되었다.
무방비 상태인 포천 축선에 수도경비사령부(제3연대), 제2사단(-), 육사 생도대대, 서울시 경찰대대 등 재경지역 가용 부대를 투입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증원부대들을 차례로 투입했지만 전차를 앞세운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었다.
증원부대들은 조직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적 전차의 충격력에 밀려 ‘축석령 방어선(의정부 북동쪽 6km)’이 붕괴되고 26일 13시에 의정부가 함락되고 말았다. 단지 2사단에 배속된 포병학교 교도대대(김풍익소령)가 적 전차에 대한 직접조준사격을 가하는 등 북한군을 잠시나마 물러나게 했지만 공세의 큰 흐름에는 변화가 없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소요산역 건너). 참전국 인구 대비로 볼 때 제일 많은 군인을 파견한 셈이다

 

백석천 전투를 통해 철수부대를 엄호하다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로 연결되는 3번 도로가 차단되어 의정부 북방에서 싸우던 부대들의 철수가 위협받게 되었다. 철수 부대들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상태에서 ‘창동’을 목표로 우회 기동하거나 멀리 서쪽의 ‘고양’ 방면으로 우회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온양으로부터 창동으로 증원해온 제25연대를 ‘백석천’에 투입하여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 적의 진출을 저지하게 했다. 저지부대인 25연대는 충분하지 못한 병력과 대전차 무기 부족 등의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적 전차의 진출을 저지하고 일시적이나마 적을 퇴각시켜 백석천 저지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로써 의정부 방면에서 후방으로 철수해오던 국군 부대들이 창동방어선과 이후의 미아리 방어선을 차례로 형성할 수 있었다. 


서울 동북방을 지킨 육사 생도대대와 경찰대대
내촌(포천시 내촌면)지역에 투입된 육사 생도대대나 서울시 경찰대대는 편성뿐만 아니라 보유한 장비, 무기가 적을 저지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촌 일대에 투입된 후 진지공사를 포함하여 전투준비를 갖추고 북한군의 전진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26일 태릉으로 후퇴해 그곳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 내촌전투에 참가했던 육사 생도들의 참전을 두고 많은 의견들이 있었다. 전선 상황이 위급하기 때문에 당장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리 급박하다고 해도 후일을 기하기 위해서 참전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더 많았다. 당시 육사생도 2학년은 임관을 2주 정도 남기고 있었고, 1학년은 입교한 지 3주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이 아무리 급박했다 하더라고 사관생도들을 전선의 일개 병사로 운용했다는 것은 졸렬한 방책이라는 의견이 많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의 방침에 의하면, 전시에는 4학년만 절차에 의거 임관시키고 나머지 학년은 계속해서 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에 정하고 있다. 사관생도의 전선 투입은 세계 전사 상 유례가 없다고 한다. 


서울 동북방을 지킨 육사생도 참전기념비. 임관을 2주 앞두거나 입교한지 한 달도 안 된 사관생도들도 나서 북한군을 막아섰다(포천시 가산면)


결국은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막지 못했다
26일 의정부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의정부 축선에 투입되었다 철수하는 모든 부대들을 통합해서 ‘창동-우이동’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방어진지가 편성되기도 전인 27일 10시경 적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에 의해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국군은 또 다시 미아리 일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창동에서 물러난 국군은 ‘미아리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미아리-회기동’ 선에 서울 방어를 위한 최후방어선을 구축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울 진입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6월 28일 01시, 마침내 적 전차에 의해 서울의 최후방어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미아리 방어선을 통과한 적 전차는 국가지도부와 군 수뇌부가 빠져나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심지를 향해 굉음을 내며 돌진해갔다. 그러고 얼마지 않아 보병부대들도 전차를 뒤따라 서울 시가지로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6·25전쟁 3개월 전에 있었던 분석에 의하면,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적의 주력은 ‘철원-의정부-서울’을 지향할 것이라고 정확히 판단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당하고 말아서 더욱 안타깝다. 

① 전투 시 가장 중요한 예비대도 없이 싸워야만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28시간 전에 ‘비상경계태세’가 해제되기는 했지만, 6월 15일 부로 단행된 부대 교대에 따라 의정부 축선 상 방어계획에 큰 구멍을 만드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예비연대 교대와 관련해서 투입 예정부대(온양, 25연대)에 대한 확실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던 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 축선을 담당하는 7사단은 2개 연대로 북한군 2개 사단과 2개 전차 연대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융통성, 유연성이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만 했다. 

② 병력배치와 운용 면에서도 아쉬움이 많았다. 현행 교리(敎理) 상 정상적인 방어 작전의 경우 대대는 3km 내외, 연대는 7km 내외의 책임구역을 맡는다. 그러나 당시 7사단 예하의 연대들은 25km 내외의 정면을 부여받았다. 38도선 전체에서 가장 위험한 접근로로 판단하여 가장 좁은 책임구역을 할당한 게 그렇다(지금과는 차이가 많았다). 연대별로는 1개 대대만이 홀로 전방경계지역을 맡아서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 전방부대에 대한 증원대책은 매우 허술했다. 38도선 상에 배치된 전방경계대대들을 증원해야 할 부대들은(연대의 예비대) 28km나 떨어진 의정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황 발생 시 전방으로 즉각 출동・투입하기 위해서는 기동장비(차량)가 확보되어야 했으나 개전 당시 사단이 보유한 차량의 절반 이상이 후송・정비 중이라 예비대를 제때 투입할 수 없었다. 전방경계대대들은 외롭게 방어해야만 했고, 초기에 많은 희생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연대 예비 대대들 중 1개 대대씩이라도 동두천과 포천으로 추진했었다면 초기 작전에서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적의 진출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③ 북한군 전차를 충분히 멈춰 세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초기전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북한군 전차였다. 국군은 그에 합당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너무나 안일하게 대처했다.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무기로는 적 전차를 제대로 공격할 수 없으므로 다른 대책들을 강구해야만 했는데(국군이 보유한 대전차 무기인 57㎜ 무반동총이나 2.36″ 로켓포는 적 전차를 관통파괴시킬 수 있는 성능을 갖지 못했음)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전차 접근로 상의 애로(좁고 험한 길) 지점에 대전차 방벽이나 대전차호 등의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여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접근로 상에 있는 교량들을 제때 폭파시켰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포천 쪽에는 28개의 교량, 동두천 쪽에는 16개의 교량이 있었다). 이 중에서 몇몇 조치들만 강구했어도 적 전차의 진출을 상당시간 지연시키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된 증원부대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전차 장애물을 이용해 적 전차를 일단 멈춰 세우기만 하면 전차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하나의 고정된 화기에 불과하다. 적 전차에 대응할 수 있는 전차가 없어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로 모든 과오를 덮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④ 증원부대 투입에 보다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38도선 전체가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가장 급한 곳 의정부축선의 ‘불’을 끄기 위한 일련의 조치는 최우선 과제였다. 요는 어떤 방법으로 투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재야원로급 대책회의’에서 축차 투입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한강선에서의 방어를 주장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수도 서울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증원부대들이 전투에서 충격력을 발휘할 정도로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대단위’로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하는 악수를 두었다. 그러다 보니 전투에서 영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병력만 소진되고 말았다(의정부 축선에 투입된 부대 규모는 국군 33개 대대, 북한군 27개 대대로 피아가 엇비슷했다). 서울 함락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북한군에 맞서야 하는 소중한 자산인 ‘병력’을 잃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용병술’과 ‘전쟁의 원칙’에서 ‘병력의 축차 투입’은 금기 중의 금기사항으로 강조하고 있다.
포천 벙커 내부에서 보면 이렇다. 그날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한강에서 중랑천 상류 쪽으로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봉구를 벗어나고 의정부-양주를 지나 전철 1호선 소요산역까지 다다를 수 있다. 한강에서 소요산역까지는 약 60km의 거리다. 여기서 약 8km만 더 가면 한탄강이다. 코스의 큰 흐름은 ‘중랑천’ 자전거길이지만 여기에 양주시 ‘덕계천’과 ‘청담천’, 동두천시 ‘신천’ 자전거길이 연결된다. 지자체들이 만든 자전거도로가 잘 연결되어 있어 소요산역까지 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한탄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소요산역부터는 3번 국도를 타야하지만, 이 정도의 수고만으로 한탄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야지. 자전거도로가 전철 1호선과 나란히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철과 연계시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다.
한탄강 일대의 전곡에서 ‘영평천’을 따라 동진(東進)하다가 ‘포천천’을 만나, 43번 국도를 타고 포천을 거쳐 의정부까지 진출하면 완전한 ‘루프형 코스’가 된다. 시골의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전적지들을 둘러보면서 안보와 평화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여건에 따라 다양한 코스를 만들 수 있다. 자기에게 맞는 코스를 정하는 것 또한 라이딩의 일부분이고 즐거움이다.


서민의 애환과 같이 하는 ‘의정부 부대찌개’
계절 따라 다르겠지만 의정부 경전철 ‘의정부 중앙역’에 내리면 알록달록한 옷차림의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곳에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가 있다. 주말이라 부대찌개 거리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기대감과 만족감으로 다들 얼굴이 밝다.
50~60년대 그 어렵던 시절에 많은 물자들이 미군부대의 ‘담’을 넘기도 하고 ‘옆 문(門)’을 통해서도 외부로 나왔다. 먹거리와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간혹 돈 나가는 ‘왕건이(군수물자)’도 있었다. 지역 일대에서 대부분이 처리되었지만, 값나가는 귀한 것들은 고개를 넘어 서울을 거치고 전국으로 흘러갔다. 한때 남대문시장에 가면 ‘사람만 빼고 웬만한 부대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 않은가. 그렇게 흘러나온 물자들은 기초 체력이 약했던 한국 경제의 한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외부로 흘러나온 것 중에는 햄과 소시지 등의 식재료도 있었다. 그것들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김치나 고추장, 야채와 만나서 ‘한・미연합작전(?)’을 통해 변신하니 ‘꿀꿀이죽’이 되고 또 한 번 더 변신을 해서 ‘부대찌개’가 된 것이다. 부대찌개가 있는 곳이 전국에 한두 곳이겠느냐마는 그 중 단연 최고는 ‘의정부 부대찌개’일 것이다. 의정부 부대찌개는 서로 ‘원조’를 내세우며 전국으로 체인점을 넓혀나가고 있으니 지역 명품임에 틀림없다.
의정부는 주변에 명산들이 많고, 군부대들도 많아 등산객과 면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 부대찌개 거리는 여행객이든 장병 면회객이든 의정부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된 지 오래다. 역시 ‘원조’ 가게들로 가득 찬 현지에서 먹으니 더욱 맛있다. 어려운 시기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고 아픔을 달래주던 서민 음식 중의 하나이니 더욱 정감이 간다.  



의정부역 동(東) 광장에 가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전철 1호선 의정부역을 나서면 엄청난 규모의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6·25전쟁 후부터 주둔했던 미군부대 ‘캠프 홀링 워터(Camp Falling Water)’ 부지를 반환받아 이곳에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테마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 광장에는 의정부 지역과 연관된 기념할만한 모든 조형물이 집결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 같다. 미군 주둔 관련 조형물, 평화통일기원 베를린 장벽, 의정부 지명과 관련이 있는 태조 이성계 동상,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안중근 동상, 3·1운동 만세기념비 등 볼거리가 많다.
이 중에 의정부에 주둔했던 미 2사단의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고, 2017년 이곳 의정부를 떠나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세운 ‘한미우호기념탑’이 있다. 미 2사단은 1950년 한국에 발을 디딘 이래(전쟁 후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오늘까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어 주한미군의 역사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6·25전쟁 중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76년에는 JSA 지역에서 있었던 ‘미루나무 사건’ 때 소속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 만행으로 희생되며 전쟁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다다른 적도 있고, 2002년에는 훈련 차 이동하던 장갑차에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인해 반미선동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아픈 과거도 있었다. 미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있었던 많은 기쁨과 아픔을 의정부역 광장에 ‘타임캡슐’로 묻었다. 또 다른 100년을 기다렸다가 몇 세대 후의 후손들이 개방토록 하자고 약속했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다. ‘평화통일 기원 베를린 장벽’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되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염원하여 베를린을 가로지르던 장벽을 기증받아 이곳에 설치한 것이다. 실물을 보면서 30년 전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단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는 좀 색다른 ‘구분의 흔적’도 있다. 일대에 주둔했던 미 2사단 공병부대(캠프 홀링 워터)가 이전하면서 부대를 방호하던 담장이 2012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미군부대 주둔 흔적을 잘 정리하고 그 공간에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테마공원으로 조성한 것은 나름 의미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군부대를 방호하던 ‘담장’의 흔적과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을 같은 공간에 설치하여 대비시켜 무엇을 느끼게 하려는지 혼란스러움을 준다.



동두천 기지촌(基地村)의 한 단면
3번 국도를 따라 연천(전곡)에서 서울 쪽으로 내려오노라면 전철 1호선 ‘소요산역’과 ‘보산역’을 만난다. 이곳 동두천은 주변의 의정부, 포천과 마찬가지로 6·25전쟁 후 미군의 한국 주둔 역사와 함께 해온 부분이 많다. 그만큼 사연도 많았던 곳이다.
그 중 ‘기지촌’이란 단어는 미군의 주둔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기지촌은 이곳뿐만 아니고 6·25전쟁 후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지역 어디에나 있었다. 동두천에 있는 ‘캠프 케이시(Camp Cathy)’ 일대의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를 찾았을 때는 주말인데도 미군의 부대 이전에 따른 요인도 있겠지만, 최근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영향까지 겹쳐서인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한때는 엄청 번화했고 주말이면 활기찼던 곳이었을 텐데 인적이 드물고 시간이 멈춘 듯 적막감까지 느껴진다.
기지촌과 가장 밀접한 단어는 ‘양 색시’일 것이다. 기지촌의 역사 그 이면에는 언제나 싸움과 갈등이 있었다. 포주와 양 색시, 양 색시와 미군, 미군과 민간인, 심지어 흑인과 백인까지…. 이곳 관광특구 거리를 둘러보니, 이제껏 생각해왔던 과거의 그런 기지촌 모습은 사라졌지만 기본 골격은 그렇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변했다면, 기지촌에서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한국 여성에서 필리핀・러시아 여성으로 바뀌고, 주요 고객이 미군 군인 아저씨 중심에서 최근에는 외국인 근로자들까지 합세했다는 것이지 싶다. 혹시나 올지 모르는 마음씨 좋은 손님을 기다리는 필리핀 여성 몇몇의 모습이 열린 문을 통해서 보인다. 클럽 입구엔 ‘한국인 출입금지’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경기 소금강’으로 알려진 소요산 등산로 입구가 주말이라 등산객들로 붐빈다. 그 주차장에서 ‘자유수호박물관’으로 이르는 길 초입에 기지촌과 연관된 또 다른 흔적이 남아 있다. ‘각설이 풍물패’ 공연장 옆에 잡초와 이끼가 가득 낀 폐허 건물 하나가 있다. 동두천 기지촌에 종사하던 여성들 중 성병에 걸린 이들을 수용·치료하던 ‘낙검자 수용소’(落檢者 ; 검사에 떨어진 여성), 일명 ‘몽키 하우스’라던 곳이다. 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이곳에 격리된 채, 치료를 위해 페니실린 주사를 수도 없이 맞으면서 극심한 통증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과민성 쇼크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도 한다(그렇게 이름 없이 죽어간 여성들이 동두천시 무연고 묘지에 묻혀있다고 한다). 그런 내력들을 알고 나니 기분이 묘해진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알 때쯤 있었던 과거의 한 자락이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1992년 이곳 동두천 기지촌에서는 ‘윤금이 살해사건’도 있었다.



의정부 축선의 붕괴가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국군 제7사단과 북한군 제2군단의 주력이 맞붙은 동두천-포천 일대를 연하는 중서부지역 작전은 북한군 제1군단의 막강한 화력과 전차부대의 집중 공격을 받고 개전 2일째인 6월 26일 서울 북쪽 관문 의정부가 함락됨에 따라 국군의 전 전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군 제7사단의 좌측에서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봉일천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가 의정부의 함락으로 인해 동측방이 위협을 받게 되자 화포와 중화기를 포기한 채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제7사단의 동측인 ‘중동부 지역’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춘천・홍천 축선’의 제6사단과 ‘동해안 축선’의 제8사단은 육군본부의 사전 조치로 인해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보유한 채 전술적 후퇴를 하게 된다. 이후 지연작전 시 서부전선의 미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28일 01시 서울의 최후방어선이 돌파되어 북한군이 서울로 진격해오자 02:30와 04시를 기해 한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했다. 11:30경에는 서울 전체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한강교가 폭파되어 국군은 모든 무기와 장비, 보급물품를 폐기하고 소총만을 휴대한 채 나룻배를 이용해 소속도 없이 뒤엉킨 채 한강을 건넜다. 10여만 명이던 국군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 병력으로 한강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 미군의 참전을 보장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한강선을 지켰다.
의정부 전선에서부터 서울 최후방어선 전투까지 치르며 부분적으로 전술적 승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 고수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소중한 병력을 축차적으로 투입・운용함으로써 많은 병력이 소진되고 말았다. 버틸 수 있는 기본, 힘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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