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 창설 이후 첫 참전 - 죽미령전투와 대전전투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기치 아래 참전한 미군은 7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미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는 대대급 규모임에도 밀려드는 북한군 2개 연대를 맞아 분전했으나 전력의 열세와 준비 부족으로 패퇴하고 만다. 이후 미24사단은 대전까지 후퇴하며 지연작전을 폈지만 대전에서 철수시기를 놓쳐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미24사단의 지연작전으로 후속부대의 전개시간을 벌었고 결과적으로는 낙동강방어선 구축,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2020년 8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죽미령’ 최고봉 117고지에 오르면 수원과 오산, 화성(동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50년 7월 5일 새벽의 죽미령,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칠흑같이 어두웠을 것이다. 단걸음에 달려와 최전선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부대원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연전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북한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함락된 다음 날,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기 전에 전쟁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포탄이 오가는 한강방어선을 직접 찾았다. 이곳에서 “상관의 철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겠다”라는 한 병사의 답변에 크게 감명 받았다. 맥아더장군은 미 지상군 투입에 필요한 3일 동안 한강방어선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수도 서울을 방어하느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국군은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3일이 아니라 6일 간이나 버텼다. 대단한 분전이 아닐 수 없었다.
7월 3일 04시경, 부분 파괴되었던 한강 철교를 수리한 북한군은 T-34 전차 4대를 도하시켜 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열차를 이용해 전차와 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진출시켜 전투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수원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최초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북한군은 미 지상군이 증원되기 전에 전(全) 축선에 걸쳐 신속히 공격하여 부산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남진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
국군은 한강방어선이 붕괴된 7월 3일부터 미 지상군이 투입되기 전까지 ‘시흥-안양-수원’으로 축차적으로 물러나면서 홀로 지연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 지상군이 투입된 이후부터는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책임 전선을 조정하였다. 경부축선이 포함된 서부축선을 미군에게 인계하고, 국군은 평택 일대에서 재편성을 한 후 경부국도의 동쪽지역으로 이동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그 후, 7월 14일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書翰)에 의해서 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하나의 지휘체제 아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한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맥아더 원수의 지휘권이 미칠 수 없었다.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 원수에게 이양한 것이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는 동안 공간을 내어주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며 북한군의 공세를 체계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죽미령에 새로 세운 UN군 초전기념비. 밀려오는 적 전차(T-34)를 향해 조준하고 있다
540개의 돌로 쌓은 ‘UN군 초전 기념비’. 6·25전쟁 때 제일 먼저 달려온 스미스부대는 전부가 540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2년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전사한 전우들 주검 위에 돌탑을 쌓고 그들의 희생을 기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희생을 더욱 빛낸다며 더 큰 기념비도 세우고, 더 좋은 명당(?)으로 이전시켰다(UN군초전기념관. 오산시 외삼미동)
서부지역 지연작전
북한군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지연작전은 전 전선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이 중 ‘서부지역 지연작전’은 최초의 미 지상군 투입부대인 미 제24사단이 경부국도를 포함한 서부지역 축선(오산-천안-대전)에서 북한군 최정예 부대인 제105전차사단과 제3・4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다. 서부지역 지연작전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 의한 죽미령전투를 시작으로 북한군에 밀리면서 ‘평택-안성선 전투’, ‘전의-조치원전투’, ‘금강방어선 전투’ 등을 치루며 ‘대전전투’까지 연결되었다.
미24사단의 서부지역 지연작전과 병행하여, 중・동부지역에서 실시된 국군의 지연작전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서부지역(이천・음성-진천・청주)에서는 국군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지연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하였다.
② 중동부지역(원주-충주・제천-단양)에서는 차령산맥으로부터 소백산맥에 이르는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1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하였다.
③ 동해안지역에서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주축이 되어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으로 상륙한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했다.
죽미령전투 70년을 맞아 ‘죽미령 평화공원’으로 확장했다. 스미스평화관을 건립하고 죽미령전투를 기리는 각종 조형물을 설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다(오산시 외삼미동)
죽미령 전투를 지휘했던 ‘스미스’ 부대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는 박정희 前 대통령(UN군초전기념관)
미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오산 죽미령전투
오산 죽미령전투는 한강방어선이 와해된 이후,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펴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투입된 미 지상군(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 중심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 7월 5일 오산 북방의 죽미령에서 전차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16, 18연대)을 맞아 치른 첫 전투다. 스미스 특임대는 북한군 보병・전차 합동부대를 죽미령에서 막아섰으나, 적 전차를 대적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통신이 두절되어 포병화력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고, 우천으로 인해 항공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 많은 피해(사상자 181명)를 입었다. 6시간15분간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많은 피해를 입은 스미스부대는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7월 6일 도착)으로 철수함으로써 죽미령전투는 끝났다.
죽미령전투는 유엔이 창설된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 주도의 전투란 면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을 경시한 나머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의 실체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미군의 조기 참전 사실에 놀랐지만 미군과의 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군이 추가적으로 증원하기 전에 남한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서두르게 했다.
스미스부대는 왜 죽미령전투에서 패했는가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마저 무너진 위기의 상황에서 신속하게 투입된 미 지상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런 미 지상군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북방 죽미령고개에서 있었던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천안으로 물러났다. 전투 당사자였던 미군과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한국 국민들도 놀랐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UN군 선발대가 패한 전투에 대해 평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그러나 미 육군을 포함하여 많은 연구에서 죽미령 전투의 패인으로 ‘미군의 전투준비 부실’을 지적하고 있다. 선발대인 스미스대대는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된 바로 그 다음 날인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후, 7월 5일 새벽에 전투현장인 죽미령에 도착했다. 미 제24사단의 나머지 모든 부대도 7월 4일까지 한국에 도착하여 전방으로 투입・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싸워야 할 적(敵)과 전선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고, 싸울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급히 달려오는 데만 급급한 실정이었다.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고 세계 최강의 군대로 등극한 미군도 전쟁이 끝나고 5년이 경과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군대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대대적인 감군으로 인해 많은 부대가 통‧폐합되고 병력 규모도 많이 줄어들어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급히 달려온 스미스부대도 병력과 장비 면에서 온전한 편성의 부대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전후 일본의 치안 유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점령군이었다. 그러니 전쟁에 대비한 기동훈련 등 군사훈련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적해야 할 북한군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도 잘 알지 못한 채 달려왔다. 즉, 북한군의 규모와 훈련정도, 보유 화기 등에서 무지(無知)에 가까울 정도였다. 북한군이 보유한 T-34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은 채 투입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최초 투입 당시 북한군 T-34를 제압할 수 있는 화기는 전무했다. 공격 가능한 무기인 3.5"로켓포는 7월 10일에 사격지도요원들과 함께 미24사단에 배치되어 대전전투에서 처음으로 운용되었다). 인근에 있던 국군부대나 미24사단의 기타 부대로부터도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6 시간15분 동안 홀로 싸워야만 했다. 그러니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군대는 대단한 존재다. 죽미령전투에서의 과오를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교훈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패의 기억은 아프지만, 실패만큼 좋은 교사는 없는 것이다. 미 육군사관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죽미령에서의 패전사례를 어떤 경우라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한다. 그들이 내린 죽미령전투의 결론으로 내세운 ‘전투준비 부실’의 원인은 ‘적을 얕잡아 보고, 과소평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군들의 와신상담의 자세는 배워야 한다. 죽미령전투에서 도출된 교훈이 결코 우리에게 ‘타산지석’이어서는 안 된다. 그 전투도 우리 전쟁의 일부였고,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고 언젠가는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할 상대가 70년 전보다 훨씬 진화된 그들의 후세대이기 때문이다.
미 육군참모총장(콜린스 대장)으로부터 UN旗를 전달받는 맥아더사령관(원수) (전쟁기념관)
죽미령전투 현장을 찾아서
죽미령전투가 있었던 곳은 오산에서 수원으로 가는 고개 위에 있다. 그날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주검 위에 540개의 돌을 쌓아 기념비(초전-初戰 기념비)를 세웠고(이후 새로운 초전 기념비도 세웠다), 2013년에는 전투를 했던 그 자리에 ‘UN군 초전기념관’을 세웠다. 6·25전쟁 당시 최초 투입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UN군의 희생에 감사하는 공간으로 확장시켜 온 것이다. 그러다 죽미령전투 70주년이 되는 올해 7월, 기존의 전적 기념물들을 통합하여 역사교육의 현장 ‘죽미령 평화공원’으로 확장 개장했다.
죽미령 평화공원의 전체적인 흐름은 ‘스미스 평화관’ 신축과 다양한 조형물이 포함된 야외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종전의 보여주기식 위주의 일방적 공간에서 벗어나 참여형 복합 기념공간으로 바뀌었다. 미래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 참전국들에 대한 감사, 평화의 중요성을 책이나 말을 통해 일깨우기보다는 현장과 전시물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조형물 하나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가족과 함께 한번 둘러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죽미령 평화공원’만 찾아도 충분한 보람이 있지만 주변과 연계시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융・건릉’이 있다. 서쪽 3km 지점에는 주변의 수원・화성・오산 일대를 두루 통제하던 군사적 요충지인 ‘독산성’도 있다. 독산성은 백제 때 축성한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했고, 권율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성으로서 도성 방어에 중요한 근거지였다. 본지 2020년 1월호 ‘수원 속속들이, 농・공업으로 국민 먹여 살리는 나라의 곳간’ 편을 참고하면 수원 일대의 자전거 답사가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 ‘독산성’. 수원과 오산은 물론 멀리 용인, 안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간에 펼쳐졌던 심리전 관련 전설이 담긴 ‘세마대’가 같이 있다. 죽미령에서 지척이다(오산시 지곶동)
평택・안성선 ~ 금강방어선에서의 지연작전
죽미령 전투 이후에 실시된 미 제24사단의 지연작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① 평택・안성전투, 천안전투 : 미 제24사단 전초부대인 스미스부대가 7월 5일 죽미령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천안으로 후퇴하자, 오산 남쪽의 ‘평택-안성 선’을 방어하던 제34연대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강력한 진격에 제대로 된 공세 한번 취하지 못하고 천안으로 후퇴하였다. 천안으로 철수한 제34연대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경전차’(M-24 Chaffee 전차)를 투입한 가운데 시가지전투를 실시하였다(명목상으로는 6·25전쟁 중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연대장을 비롯하여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60여 명의 포로도 발생하였다. 더 이상 천안을 사수할 수 없게 된 제34연대는 7월 8일, 경부축선 상의 북한군 지연 임무를 제21연대에 인계하고 천안으로부터 공주 방향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전의・조치원전투 : 제34연대가 평택-안성전투와 천안전투에서 연대장이 부임 하루 만에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자, 미 제24사단은 제21연대로 하여금 조치원 북방 ‘전의’에서 북한군을 막게 하였다. 제21연대는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한 제4사단(16, 18연대)을 전의 북방으로 격퇴시켜 북한군의 예봉을 꺾었다(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전차 38대, 차량 117대 등 개전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었음). 북한군 제4사단이 많은 피해를 입자, 제3사단을 주공으로 전환하여 금강방어선으로의 공격을 선도해왔다. ‘전의’ 남방의 ‘개미고개’(세종시 전동면) 일대에서 제21연대와 격전을 벌였다. 통신망이 두절되고 탄약지원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제21연대(3대대)는 667명의 대대 병력 중 대대장을 포함하여 517명이 사상되는 가운데서도 북한군의 금강방어선 진출을 4일 간 저지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에 조치원이 북한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③ 금강방어선전투 : 조치원이 점령되자, 미 제24사단은 금강 이남의 방어선(공주~세종시 대평동)으로 철수하여 제34연대와 제19연대로 하여금 북한군의 남진을 막게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침투 및 우회를 막지 못하여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금강방어선까지 돌파되고 말았다. 따라서 미 제24사단은 7월 16~17일에 걸쳐 대전으로 철수하여 대전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대전지구 전투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되는 정치적・전략적 요지인 대전을 목표로 하는 북한군의 공격은 이러했다. 제3사단으로 하여금 대전 정면에서 압박하게 하는 동안, 제4사단을 대전의 서쪽으로 우회시키고, 제2사단을 대전의 동쪽으로 기동시켜 미 제24사단을 완전 포위・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청주로부터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2사단이 국군 수도사단에 의해 진출이 저지됨에 따라, 북한군은 전차부대로 증강된 제3・4사단만으로 대전을 공격하게 되었다.
<작전경과>
① 금강방어선에서 철수한 미 제24사단은 예하 부대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제34연대만으로 대전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제21연대에는 대전-옥천 방향의 퇴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제19연대는 영동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시켰다. 제24사단은 최초 ‘대전-옥천-영동 축선’을 따라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에 의거 7월 19일 대전에서 철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 1기병사단이 영동지역으로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하도록 계획이 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제19연대(옥천)의 일부 부대(2대대)와 사단 수색중대를 대전방어 책임부대인 제34연대에 배속시켜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했다.
제34연대와 제19연대 2대대는 북한군의 주접근로로 예상되는 대전 서쪽의 ‘갑천’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대전 방향으로의 진출을 저지하게 하였다. 제21연대는 옥천과 대전의 경계지역인 ‘마달터널(증약터널)’ 일대에 배치하여 전방 부대의 퇴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북한군 제2사단에 의한 대전 동측방지역의 퇴로 차단에 대비하게 했다.
② 북한군 제3사단은 105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아 대전 정면을 공격하여 미 제24사단 제34연대를 고착시키고, 일부 부대는 동쪽으로 우회시켜 경부국도를 차단하게 했다. 공주를 거쳐 논산에 도착한 제4사단은 예하의 제5연대를 유성 방향으로, 제16연대는 논산을 거쳐 서대전(가수원)으로 공격하게 했다. 제18연대는 논산에서 금산을 우회하여 대전 후방 ‘세천터널’ 일대로 진출하여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③ 금강을 건넌 북한군은 이틀간의 공격준비를 마친 다음, 7월 19일부터 유성 방향에서 공세(공격준비 사격 실시)를 개시하여 갑천 일대까지 압력을 가해왔다. 북한군은 20일 새벽부터 전차를 앞세우고 유성・논산가도를 따라 대전으로 공격해 왔고, 오후에 들어서면서 북한군에 의해 미군의 방어진지가 돌파되었다. 이에 따라 갑천 일대에 배치되었던 전방부대(34연대 1대대, 19연대 2대대)들은 후방이 완전히 차단된 것으로 오판하여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방어병력이 빠져나가자 북한군은 전차를 선두로 대전 시내에 진입하면서 시내 전체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장과 34연대장은 통신 두절로 인해 전방부대들이 보문산 일대로 철수한 상황과 후방의 퇴로가 차단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병력과 전차에 대한 공격에 집중한 나머지 철수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미 제24사단은 전방부대들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마달령에 제21연대를 배치하였으나, 그 보다 2km 북쪽에 있는 세천터널 일대가 북한군에 의해 완전히 차단됨에 따라 대전에서 철수하는 부대들은 소부대별로 분산하여 산길을 따라서 또는 먼 길을 우회하여 옥천・영동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④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22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제3사단과 105전차사단은 영동-김천 방향으로 남진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과 공방전을 펼쳤고, 제4사단은 금산과 함양-거창을 거쳐 낙동강방어선 서쪽으로 진격해갔다.
대전에서 물러난 미 제24사단은 영동을 거쳐 대구에 도착하여 신임사단장 ‘처치 소장’의 지휘 하에 그간의 상처를 씻고 부대정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대전전투에 참가했던 북한군 제4사단이 금산도로를 따라 안의-진주 쪽으로 향하자, 미 제24사단은 7월 24일 진주방면으로 투입되어 낙동강 서남부전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작전결과>
미 제24사단이 죽미령부터 대전까지 치른 전투 하나 하나를 놓고 평가한다면 결코 성공한 전투라고 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개전 초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단숨에 달려와서 노도같이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줬고, 16일 간의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속부대들의 전개시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대전전투의 결과로, 미24사단은 대전 방어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미 제1기병사단의 영동 일대 투입에 필요한 기간(7월 20일)까지 지연시키는 임무는 달성했다. 그러나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한 나머지 대전전투에서만 1,150여 명의 인명손실(전사 818명)이 있었다. 죽미령전투를 시작으로 대전 전투가 끝났을 때까지 미 제24사단의 피해를 집계하면 사단장이 실종되는 등 병력 7,305명을 잃었고(45% 손실) 장비는 65%를 잃었다고 전사(戰史)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에게 심대한 손실을 입힌 결과 북한군의 공격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고, 작전지속능력도 감소되었다. 이는 결국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었다. 이는 더 나아가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24사단이 6·25전쟁 초기에 기여한 바다.
대전전투에 대한 아쉬움
6·25전쟁 초기작전 중의 하나인 ‘대전전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미 제24사단장인 ‘딘 장군’이다. 당시 북한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하부대들의 전투력 발휘가 위축되고 있을 때, 직접 북한군 전차 공격에 나설 만큼 용감하게 진두지휘했던 지휘관이었다. 안타깝게도 대전으로부터 철수하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한 달이 넘도록 산속을 헤매다가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서야 판문점을 통해서 생환했다. 장군은 포로 생활 중 수많은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불리한 언행을 일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 제24사단은 대전전투를 통해 1,150명이란 인명 손실과 함께 수많은 장비, 화포, 물자까지 손실을 입고 참패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이유는 중(重)전차로 무장한 북한군과 비교할 때 상대적 전투력의 격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대전으로부터의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 후방으로 통하는 금산・옥천 방향의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이후에야 철수 명령이 하달됨에 따라, 예하부대들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도로망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던 나머지 산과 소로를 따라 소부대 단위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단장이 전투 현장 최전방에서 전차 공격을 포함하여 ‘진두지휘’ 하느라 사단 전체에 대해 적절한 지휘조치를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진두지휘하던 사단장은 통신 소통 상태가 원활하지 못해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전투현장을 수행했던 참모들로부터도 충분한 첩보를 제공받지 못한 나머지 시의적절한 지휘조치를 할 수 없었다. 위험한 순간에 최전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켰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전장 전체를 관장해야 할 사단장으로서의 직분 수행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사단지휘소에서 더 많은 참모들로부터 더 다양한 정보를 보고받고 적시적인 지휘조치를 했다면 철수시기 상실로 인한 참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6·25전쟁 초기 국군을 지휘했던 채병덕 총참모장도 서울이 함락되기 전까지 총 7회나 전방부대를 순시했다. 최종 결심해야 할 지휘관이 오랫동안 지휘소를 비움으로써 전쟁 지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딘 장군이 대전 시내에서 진두지휘 할 당시, 대전 시내에는 많은 수의 북한군 저격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앞서의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마틴 대령)이 전차를 공격하다 취임 하루 만에 전사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사단장 실종’보다 더 ‘충격적인 사태(전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닌, 숲 전체를 관장해야 할 위치에 있는 지휘관은 숲을 봐야 한다는 점이 대전전투가 남겨놓은 전훈(戰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지구전투 현장과 주변을 찾아서
대전지구 전투와 관련된 격전의 현장과 명소들(옛 충남도청 및 도지사 공관)은 대부분 대전 시내에 있는 3개의 하천(갑천, 대전천, 유등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다. ‘금강 자전거길’을 통하면 금강방어선 전투 현장(공주 공산성 일대, 세종시 대평동)에, ‘조천 자전거길’을 통하면 ‘개미고개전투 전적지’와도 연결된다. 조금 더 동쪽으로 나아가면 미호천과 연계되는 ‘오천 자전거길’을 거쳐서 ‘남한강 및 문경새재 자전거길’과도 연결되어 끝없이 달릴 수 있다.
대전 서쪽에 있는 공주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류로 내려가면 군산까지 다다라 서해를 볼 수 있다. 또한, 금강 자전거길 상류 쪽 출발점인 대청댐을 출발하여 ‘대청호’를 한 바퀴 도는 코스도 환상적이다. 또 다른 매혹적인 코스는 대청호와 연결되는 ‘옥천 향수 100리길’도 추천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은 각자의 기호와 일정 등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어느 곳 하나 빼고 싶지 않다. 시간을 넉넉하게 가지고 여정을 잡는다면 전적지 답사 보다 더 많은 볼거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대전지구 전투 상황도
국제연합(UN) 창설 이후 첫 참전 - 죽미령전투와 대전전투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기치 아래 참전한 미군은 7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미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는 대대급 규모임에도 밀려드는 북한군 2개 연대를 맞아 분전했으나 전력의 열세와 준비 부족으로 패퇴하고 만다. 이후 미24사단은 대전까지 후퇴하며 지연작전을 폈지만 대전에서 철수시기를 놓쳐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미24사단의 지연작전으로 후속부대의 전개시간을 벌었고 결과적으로는 낙동강방어선 구축,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2020년 8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죽미령’ 최고봉 117고지에 오르면 수원과 오산, 화성(동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50년 7월 5일 새벽의 죽미령,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칠흑같이 어두웠을 것이다. 단걸음에 달려와 최전선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부대원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연전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북한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함락된 다음 날,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기 전에 전쟁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포탄이 오가는 한강방어선을 직접 찾았다. 이곳에서 “상관의 철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겠다”라는 한 병사의 답변에 크게 감명 받았다. 맥아더장군은 미 지상군 투입에 필요한 3일 동안 한강방어선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수도 서울을 방어하느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국군은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3일이 아니라 6일 간이나 버텼다. 대단한 분전이 아닐 수 없었다.
7월 3일 04시경, 부분 파괴되었던 한강 철교를 수리한 북한군은 T-34 전차 4대를 도하시켜 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열차를 이용해 전차와 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진출시켜 전투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수원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최초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북한군은 미 지상군이 증원되기 전에 전(全) 축선에 걸쳐 신속히 공격하여 부산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남진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양
국군은 한강방어선이 붕괴된 7월 3일부터 미 지상군이 투입되기 전까지 ‘시흥-안양-수원’으로 축차적으로 물러나면서 홀로 지연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 지상군이 투입된 이후부터는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책임 전선을 조정하였다. 경부축선이 포함된 서부축선을 미군에게 인계하고, 국군은 평택 일대에서 재편성을 한 후 경부국도의 동쪽지역으로 이동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그 후, 7월 14일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書翰)에 의해서 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이양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하나의 지휘체제 아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한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맥아더 원수의 지휘권이 미칠 수 없었다.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 원수에게 이양한 것이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는 동안 공간을 내어주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며 북한군의 공세를 체계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죽미령에 새로 세운 UN군 초전기념비. 밀려오는 적 전차(T-34)를 향해 조준하고 있다
540개의 돌로 쌓은 ‘UN군 초전 기념비’. 6·25전쟁 때 제일 먼저 달려온 스미스부대는 전부가 540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2년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전사한 전우들 주검 위에 돌탑을 쌓고 그들의 희생을 기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희생을 더욱 빛낸다며 더 큰 기념비도 세우고, 더 좋은 명당(?)으로 이전시켰다(UN군초전기념관. 오산시 외삼미동)
서부지역 지연작전
북한군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지연작전은 전 전선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이 중 ‘서부지역 지연작전’은 최초의 미 지상군 투입부대인 미 제24사단이 경부국도를 포함한 서부지역 축선(오산-천안-대전)에서 북한군 최정예 부대인 제105전차사단과 제3・4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다. 서부지역 지연작전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 의한 죽미령전투를 시작으로 북한군에 밀리면서 ‘평택-안성선 전투’, ‘전의-조치원전투’, ‘금강방어선 전투’ 등을 치루며 ‘대전전투’까지 연결되었다.
미24사단의 서부지역 지연작전과 병행하여, 중・동부지역에서 실시된 국군의 지연작전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서부지역(이천・음성-진천・청주)에서는 국군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 제15사단의 남진을 저지・지연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하였다.
② 중동부지역(원주-충주・제천-단양)에서는 차령산맥으로부터 소백산맥에 이르는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1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하였다.
③ 동해안지역에서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주축이 되어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으로 상륙한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공방전을 실시했다.
죽미령전투 70년을 맞아 ‘죽미령 평화공원’으로 확장했다. 스미스평화관을 건립하고 죽미령전투를 기리는 각종 조형물을 설치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했다(오산시 외삼미동)
죽미령 전투를 지휘했던 ‘스미스’ 부대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는 박정희 前 대통령(UN군초전기념관)
미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오산 죽미령전투
오산 죽미령전투는 한강방어선이 와해된 이후,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펴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투입된 미 지상군(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 중심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 7월 5일 오산 북방의 죽미령에서 전차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16, 18연대)을 맞아 치른 첫 전투다. 스미스 특임대는 북한군 보병・전차 합동부대를 죽미령에서 막아섰으나, 적 전차를 대적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통신이 두절되어 포병화력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고, 우천으로 인해 항공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 많은 피해(사상자 181명)를 입었다. 6시간15분간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많은 피해를 입은 스미스부대는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7월 6일 도착)으로 철수함으로써 죽미령전투는 끝났다.
죽미령전투는 유엔이 창설된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 주도의 전투란 면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을 경시한 나머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의 실체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미군의 조기 참전 사실에 놀랐지만 미군과의 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미군이 추가적으로 증원하기 전에 남한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서두르게 했다.
스미스부대는 왜 죽미령전투에서 패했는가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마저 무너진 위기의 상황에서 신속하게 투입된 미 지상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런 미 지상군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북방 죽미령고개에서 있었던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천안으로 물러났다. 전투 당사자였던 미군과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한국 국민들도 놀랐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UN군 선발대가 패한 전투에 대해 평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그러나 미 육군을 포함하여 많은 연구에서 죽미령 전투의 패인으로 ‘미군의 전투준비 부실’을 지적하고 있다. 선발대인 스미스대대는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된 바로 그 다음 날인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후, 7월 5일 새벽에 전투현장인 죽미령에 도착했다. 미 제24사단의 나머지 모든 부대도 7월 4일까지 한국에 도착하여 전방으로 투입・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싸워야 할 적(敵)과 전선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고, 싸울 준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급히 달려오는 데만 급급한 실정이었다.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고 세계 최강의 군대로 등극한 미군도 전쟁이 끝나고 5년이 경과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군대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대대적인 감군으로 인해 많은 부대가 통‧폐합되고 병력 규모도 많이 줄어들어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급히 달려온 스미스부대도 병력과 장비 면에서 온전한 편성의 부대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전후 일본의 치안 유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점령군이었다. 그러니 전쟁에 대비한 기동훈련 등 군사훈련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적해야 할 북한군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도 잘 알지 못한 채 달려왔다. 즉, 북한군의 규모와 훈련정도, 보유 화기 등에서 무지(無知)에 가까울 정도였다. 북한군이 보유한 T-34전차를 상대할 수 있는 대책을 제대로 강구하지 않은 채 투입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최초 투입 당시 북한군 T-34를 제압할 수 있는 화기는 전무했다. 공격 가능한 무기인 3.5"로켓포는 7월 10일에 사격지도요원들과 함께 미24사단에 배치되어 대전전투에서 처음으로 운용되었다). 인근에 있던 국군부대나 미24사단의 기타 부대로부터도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6 시간15분 동안 홀로 싸워야만 했다. 그러니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군대는 대단한 존재다. 죽미령전투에서의 과오를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교훈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패의 기억은 아프지만, 실패만큼 좋은 교사는 없는 것이다. 미 육군사관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죽미령에서의 패전사례를 어떤 경우라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한다. 그들이 내린 죽미령전투의 결론으로 내세운 ‘전투준비 부실’의 원인은 ‘적을 얕잡아 보고, 과소평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미군들의 와신상담의 자세는 배워야 한다. 죽미령전투에서 도출된 교훈이 결코 우리에게 ‘타산지석’이어서는 안 된다. 그 전투도 우리 전쟁의 일부였고,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고 언젠가는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할 상대가 70년 전보다 훨씬 진화된 그들의 후세대이기 때문이다.
죽미령전투 현장을 찾아서
죽미령전투가 있었던 곳은 오산에서 수원으로 가는 고개 위에 있다. 그날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주검 위에 540개의 돌을 쌓아 기념비(초전-初戰 기념비)를 세웠고(이후 새로운 초전 기념비도 세웠다), 2013년에는 전투를 했던 그 자리에 ‘UN군 초전기념관’을 세웠다. 6·25전쟁 당시 최초 투입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UN군의 희생에 감사하는 공간으로 확장시켜 온 것이다. 그러다 죽미령전투 70주년이 되는 올해 7월, 기존의 전적 기념물들을 통합하여 역사교육의 현장 ‘죽미령 평화공원’으로 확장 개장했다.
죽미령 평화공원의 전체적인 흐름은 ‘스미스 평화관’ 신축과 다양한 조형물이 포함된 야외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종전의 보여주기식 위주의 일방적 공간에서 벗어나 참여형 복합 기념공간으로 바뀌었다. 미래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 참전국들에 대한 감사, 평화의 중요성을 책이나 말을 통해 일깨우기보다는 현장과 전시물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조형물 하나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가족과 함께 한번 둘러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죽미령 평화공원’만 찾아도 충분한 보람이 있지만 주변과 연계시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과 ‘융・건릉’이 있다. 서쪽 3km 지점에는 주변의 수원・화성・오산 일대를 두루 통제하던 군사적 요충지인 ‘독산성’도 있다. 독산성은 백제 때 축성한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했고, 권율장군의 승전과 관련된 성으로서 도성 방어에 중요한 근거지였다. 본지 2020년 1월호 ‘수원 속속들이, 농・공업으로 국민 먹여 살리는 나라의 곳간’ 편을 참고하면 수원 일대의 자전거 답사가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전투가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 ‘독산성’. 수원과 오산은 물론 멀리 용인, 안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간에 펼쳐졌던 심리전 관련 전설이 담긴 ‘세마대’가 같이 있다. 죽미령에서 지척이다(오산시 지곶동)
평택・안성선 ~ 금강방어선에서의 지연작전
죽미령 전투 이후에 실시된 미 제24사단의 지연작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① 평택・안성전투, 천안전투 : 미 제24사단 전초부대인 스미스부대가 7월 5일 죽미령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천안으로 후퇴하자, 오산 남쪽의 ‘평택-안성 선’을 방어하던 제34연대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강력한 진격에 제대로 된 공세 한번 취하지 못하고 천안으로 후퇴하였다. 천안으로 철수한 제34연대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경전차’(M-24 Chaffee 전차)를 투입한 가운데 시가지전투를 실시하였다(명목상으로는 6·25전쟁 중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연대장을 비롯하여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60여 명의 포로도 발생하였다. 더 이상 천안을 사수할 수 없게 된 제34연대는 7월 8일, 경부축선 상의 북한군 지연 임무를 제21연대에 인계하고 천안으로부터 공주 방향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전의・조치원전투 : 제34연대가 평택-안성전투와 천안전투에서 연대장이 부임 하루 만에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자, 미 제24사단은 제21연대로 하여금 조치원 북방 ‘전의’에서 북한군을 막게 하였다. 제21연대는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한 제4사단(16, 18연대)을 전의 북방으로 격퇴시켜 북한군의 예봉을 꺾었다(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전차 38대, 차량 117대 등 개전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었음). 북한군 제4사단이 많은 피해를 입자, 제3사단을 주공으로 전환하여 금강방어선으로의 공격을 선도해왔다. ‘전의’ 남방의 ‘개미고개’(세종시 전동면) 일대에서 제21연대와 격전을 벌였다. 통신망이 두절되고 탄약지원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제21연대(3대대)는 667명의 대대 병력 중 대대장을 포함하여 517명이 사상되는 가운데서도 북한군의 금강방어선 진출을 4일 간 저지하였다. 그러나 7월 12일에 조치원이 북한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③ 금강방어선전투 : 조치원이 점령되자, 미 제24사단은 금강 이남의 방어선(공주~세종시 대평동)으로 철수하여 제34연대와 제19연대로 하여금 북한군의 남진을 막게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침투 및 우회를 막지 못하여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금강방어선까지 돌파되고 말았다. 따라서 미 제24사단은 7월 16~17일에 걸쳐 대전으로 철수하여 대전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대전지구 전투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되는 정치적・전략적 요지인 대전을 목표로 하는 북한군의 공격은 이러했다. 제3사단으로 하여금 대전 정면에서 압박하게 하는 동안, 제4사단을 대전의 서쪽으로 우회시키고, 제2사단을 대전의 동쪽으로 기동시켜 미 제24사단을 완전 포위・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청주로부터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2사단이 국군 수도사단에 의해 진출이 저지됨에 따라, 북한군은 전차부대로 증강된 제3・4사단만으로 대전을 공격하게 되었다.
<작전경과>
① 금강방어선에서 철수한 미 제24사단은 예하 부대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나머지 제34연대만으로 대전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제21연대에는 대전-옥천 방향의 퇴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제19연대는 영동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시켰다. 제24사단은 최초 ‘대전-옥천-영동 축선’을 따라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에 의거 7월 19일 대전에서 철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 1기병사단이 영동지역으로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하도록 계획이 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제19연대(옥천)의 일부 부대(2대대)와 사단 수색중대를 대전방어 책임부대인 제34연대에 배속시켜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했다.
제34연대와 제19연대 2대대는 북한군의 주접근로로 예상되는 대전 서쪽의 ‘갑천’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대전 방향으로의 진출을 저지하게 하였다. 제21연대는 옥천과 대전의 경계지역인 ‘마달터널(증약터널)’ 일대에 배치하여 전방 부대의 퇴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북한군 제2사단에 의한 대전 동측방지역의 퇴로 차단에 대비하게 했다.
② 북한군 제3사단은 105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아 대전 정면을 공격하여 미 제24사단 제34연대를 고착시키고, 일부 부대는 동쪽으로 우회시켜 경부국도를 차단하게 했다. 공주를 거쳐 논산에 도착한 제4사단은 예하의 제5연대를 유성 방향으로, 제16연대는 논산을 거쳐 서대전(가수원)으로 공격하게 했다. 제18연대는 논산에서 금산을 우회하여 대전 후방 ‘세천터널’ 일대로 진출하여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③ 금강을 건넌 북한군은 이틀간의 공격준비를 마친 다음, 7월 19일부터 유성 방향에서 공세(공격준비 사격 실시)를 개시하여 갑천 일대까지 압력을 가해왔다. 북한군은 20일 새벽부터 전차를 앞세우고 유성・논산가도를 따라 대전으로 공격해 왔고, 오후에 들어서면서 북한군에 의해 미군의 방어진지가 돌파되었다. 이에 따라 갑천 일대에 배치되었던 전방부대(34연대 1대대, 19연대 2대대)들은 후방이 완전히 차단된 것으로 오판하여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방어병력이 빠져나가자 북한군은 전차를 선두로 대전 시내에 진입하면서 시내 전체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장과 34연대장은 통신 두절로 인해 전방부대들이 보문산 일대로 철수한 상황과 후방의 퇴로가 차단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병력과 전차에 대한 공격에 집중한 나머지 철수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미 제24사단은 전방부대들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마달령에 제21연대를 배치하였으나, 그 보다 2km 북쪽에 있는 세천터널 일대가 북한군에 의해 완전히 차단됨에 따라 대전에서 철수하는 부대들은 소부대별로 분산하여 산길을 따라서 또는 먼 길을 우회하여 옥천・영동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④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22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제3사단과 105전차사단은 영동-김천 방향으로 남진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과 공방전을 펼쳤고, 제4사단은 금산과 함양-거창을 거쳐 낙동강방어선 서쪽으로 진격해갔다.
대전에서 물러난 미 제24사단은 영동을 거쳐 대구에 도착하여 신임사단장 ‘처치 소장’의 지휘 하에 그간의 상처를 씻고 부대정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대전전투에 참가했던 북한군 제4사단이 금산도로를 따라 안의-진주 쪽으로 향하자, 미 제24사단은 7월 24일 진주방면으로 투입되어 낙동강 서남부전선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작전결과>
미 제24사단이 죽미령부터 대전까지 치른 전투 하나 하나를 놓고 평가한다면 결코 성공한 전투라고 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개전 초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단숨에 달려와서 노도같이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줬고, 16일 간의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속부대들의 전개시간을 보장할 수 있었다.
대전전투의 결과로, 미24사단은 대전 방어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미 제1기병사단의 영동 일대 투입에 필요한 기간(7월 20일)까지 지연시키는 임무는 달성했다. 그러나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한 나머지 대전전투에서만 1,150여 명의 인명손실(전사 818명)이 있었다. 죽미령전투를 시작으로 대전 전투가 끝났을 때까지 미 제24사단의 피해를 집계하면 사단장이 실종되는 등 병력 7,305명을 잃었고(45% 손실) 장비는 65%를 잃었다고 전사(戰史)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에게 심대한 손실을 입힌 결과 북한군의 공격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고, 작전지속능력도 감소되었다. 이는 결국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었다. 이는 더 나아가 인천상륙작전과 총반격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24사단이 6·25전쟁 초기에 기여한 바다.
대전전투에 대한 아쉬움
6·25전쟁 초기작전 중의 하나인 ‘대전전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미 제24사단장인 ‘딘 장군’이다. 당시 북한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하부대들의 전투력 발휘가 위축되고 있을 때, 직접 북한군 전차 공격에 나설 만큼 용감하게 진두지휘했던 지휘관이었다. 안타깝게도 대전으로부터 철수하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어 한 달이 넘도록 산속을 헤매다가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서야 판문점을 통해서 생환했다. 장군은 포로 생활 중 수많은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불리한 언행을 일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 제24사단은 대전전투를 통해 1,150명이란 인명 손실과 함께 수많은 장비, 화포, 물자까지 손실을 입고 참패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이유는 중(重)전차로 무장한 북한군과 비교할 때 상대적 전투력의 격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대전으로부터의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 후방으로 통하는 금산・옥천 방향의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이후에야 철수 명령이 하달됨에 따라, 예하부대들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도로망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던 나머지 산과 소로를 따라 소부대 단위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철수시기를 잘못 판단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단장이 전투 현장 최전방에서 전차 공격을 포함하여 ‘진두지휘’ 하느라 사단 전체에 대해 적절한 지휘조치를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진두지휘하던 사단장은 통신 소통 상태가 원활하지 못해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전투현장을 수행했던 참모들로부터도 충분한 첩보를 제공받지 못한 나머지 시의적절한 지휘조치를 할 수 없었다. 위험한 순간에 최전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켰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전장 전체를 관장해야 할 사단장으로서의 직분 수행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사단지휘소에서 더 많은 참모들로부터 더 다양한 정보를 보고받고 적시적인 지휘조치를 했다면 철수시기 상실로 인한 참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6·25전쟁 초기 국군을 지휘했던 채병덕 총참모장도 서울이 함락되기 전까지 총 7회나 전방부대를 순시했다. 최종 결심해야 할 지휘관이 오랫동안 지휘소를 비움으로써 전쟁 지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딘 장군이 대전 시내에서 진두지휘 할 당시, 대전 시내에는 많은 수의 북한군 저격병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앞서의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마틴 대령)이 전차를 공격하다 취임 하루 만에 전사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사단장 실종’보다 더 ‘충격적인 사태(전사)’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닌, 숲 전체를 관장해야 할 위치에 있는 지휘관은 숲을 봐야 한다는 점이 대전전투가 남겨놓은 전훈(戰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지구전투 현장과 주변을 찾아서
대전지구 전투와 관련된 격전의 현장과 명소들(옛 충남도청 및 도지사 공관)은 대부분 대전 시내에 있는 3개의 하천(갑천, 대전천, 유등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다. ‘금강 자전거길’을 통하면 금강방어선 전투 현장(공주 공산성 일대, 세종시 대평동)에, ‘조천 자전거길’을 통하면 ‘개미고개전투 전적지’와도 연결된다. 조금 더 동쪽으로 나아가면 미호천과 연계되는 ‘오천 자전거길’을 거쳐서 ‘남한강 및 문경새재 자전거길’과도 연결되어 끝없이 달릴 수 있다.
대전 서쪽에 있는 공주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류로 내려가면 군산까지 다다라 서해를 볼 수 있다. 또한, 금강 자전거길 상류 쪽 출발점인 대청댐을 출발하여 ‘대청호’를 한 바퀴 도는 코스도 환상적이다. 또 다른 매혹적인 코스는 대청호와 연결되는 ‘옥천 향수 100리길’도 추천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은 각자의 기호와 일정 등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것이다. 어느 곳 하나 빼고 싶지 않다. 시간을 넉넉하게 가지고 여정을 잡는다면 전적지 답사 보다 더 많은 볼거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대전지구 전투 상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