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6·25전쟁의 ‘명운’을 건 결전 ‘다부동(多富洞) 전투’
6·25전쟁 전 과정에서 볼 때 전쟁의 판도를 바꾼 분기점이 여럿 있었다. 특히 중요한 분기점이 ‘낙동강방어선 작전’이었고, 그 중 ‘다부동’은 가장 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승전의 현장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경찰을 비롯해 학도의용군, 소년병, 노무자들도 전투의 주역이 되어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수없이 흘린 피의 대가로 다부동과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고 압록강까지의 북진도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도 있게 되었다 (2020년 11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 ‘낙동강방어선’을 피로 지켜냈던 구국의 현장 ‘칠곡’. 그 터에서 평화를 키우고 있다. 난공불락의 방어선이 있던 그곳에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이 우뚝 섰다
낙동강방어선은 이런 곳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연결하는 동・서 80km, 남・북 160km의 방어선이다. 왜관(칠곡군)을 기준으로 남・서쪽 120km 지역은 미군이 맡고(1기병・24・25사단 순), 왜관으로부터 북・동쪽 120km 지역은 국군이 맡았다(1・6・8・수도・3사단 순). 8월 4일까지 최초로 점령한 이 방어선을 ‘X선’이라 한다.
최초의 방어선 ‘X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었다(국군은 가용 전투력에 비해 담당한 방어정면이 넓기도 했고, 낙동강과 같은 천연장애물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여건이었다). 북한군 제12사단이 국군 수도사단을 공격하여 ‘기계(포항시)’를 점령한 데 이어 포항시 일부까지 점령했으며, 북한군 제5사단에 의해 국군 제3사단이 ‘장사(영덕군)’ 일대에서 고립되는 등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국군 부대의 책임지역을 줄이고 동부전선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선을 선정했다. 이 방어선이 ‘Y선’으로 ‘왜관-수암산・유학산(칠곡)-군위-보현산(영천)’을 연결하는 선이다. 국군 전 부대는 8월 12일을 기하여 새로운 방어선 ‘Y선’으로 부대 배치를 조정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다부동 전투는 새로운 방어선 ‘Y선’에서 있었던 전투다.
미 제8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상하면서, 밀양 일대를 중심으로 또 다른 저지선 ‘데이비드 선’(마산 북방-밀양-울산)을 구상했다. 이 선은 방어선으로서의 성격보다는 ‘부산 교두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한 선이었다. 또한, 만약의 경우 한반도에 전개된 미군이 일본이나 미 본토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개념의 저지선이기도 하다. 이 선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경우 대한민국의 존속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낙동강방어선이 더더욱 중요했고, 이곳에서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다부동 전투의 경과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구축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여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과 9월 두 번에 걸쳐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8월 13일부터 28일까지 경북 칠곡군 ‘왜관’과 ‘다부동(가산면)’ 일대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격퇴한 전투를 말한다.
8월 공세 때 북한군은 대구 북방에만 5개 사단을 투입했고, 그 중에서 3개 사단을 다부동 일대에 배치된 국군 제1사단 정면에 집중했다. 북한군 제13・15사단은 다부동을 향해 직접 진격해왔지만, 북한군 제3사단은 왜관을 방어하던 미 제1기병사단과 공방전을 펼치다가 미군의 저항에 밀려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로서 국군 제1사단 예하의 3개 연대는 북한군 1개 사단씩을 맞상대하여 싸워야만 했다.
왜 다부동이 격전장이 되었을까? 북한군이 경부축선 방향에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여 중간 목표인 ‘대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왜관 접근로’든 ‘다부동 접근로’ 중에서 택일해야만 했다. 이 중 ‘왜관 접근로’는 미군의 방어정면 직 전방에 놓여있는 낙동강이란 장애물을 도하해야 하는 불리점이 있고, 도하를 하더라도 낙동강으로 인해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북한군이 이 접근로를 이용하여 공격할 경우,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부터 많은 전투력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비해 북한군 입장에서는 국군이 담당한 ‘다부동 접근로’가 많은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선, 왜관 서쪽 일대의 낙동강보다 수심이 낮은 낙동강 상류지역(선산, 낙동리 등)은 쉽게 도하할 수 있고, 도하한 후의 작전 전개에 필요한 기동공간이 충분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왜관 접근로 보다는 다소 단거리라는 점도 고려되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미군과 비교해 화력이 열세한 한국군 정면을 택할 경우 상대적으로 돌파가 용이하고 피해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부동 일대에는 안동과 상주에서 대구로 진입하는 5번・25번 도로를 효과적으로 감제할 수 있는 유학산(839m)과 가산(902m)이 있다. 이 두 고지는 각각 좌우로 7~10km 정도씩의 험준한 산악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대구를 지켜야 하는 국군・미군의 입장에서도, 대구를 탈취해야 하는 북한군의 입장에서도 최고로 중요한 지형이 아닐 수 없었다. 국군과 미군이 이 일대를 잃게 되면 10km 이상 남쪽으로 철수가 불가피하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에 결정적인 요충지다. 그래서 피・아(彼我)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도 확보해야 했던 곳이다. 전투도 치열했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전투가 있기 전, 8월 3일부터 12일까지는 낙동강 연안(왜관-낙정리, 40km)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도하 및 공격을 저지했다. 포항 일대의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육군본부는 8월 12일을 기해 국군 전 부대를 새로운 방어선 ‘Y선’(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으로 철수시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지역에 재배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이 점령하려던 ‘Y선’ 상의 주요 고지(328고지, 수암산, 유학산)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방어선 상의 주요 지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형국이 아니라, 북한군이 먼저 점령한 고지들을 ‘공격’하여 탈취해야만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대구 북방에서 있었던 다부동 전투는 좌전방의 ‘328고지(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중앙의 ‘수암산・유학산’, 우전방의 ‘천평동 계곡’(안동・상주에서 다부동으로 이어지는 5번 국도 변)을 중심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328고지 전투’와 유엔군 융단폭격
왜관 북쪽에 위치한 ‘328고지’는 별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변을 따라 왜관까지 능선으로 연결되는 축선을 통제할 수 있어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지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328고지를 선점한 상태에서, 8월 14일 북한군 제3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해 공격해옴으로써 328고지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8월 16일, 왜관에 배치된 미 제1기병사단을 공격하던 북한군이 화력이 강력한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해 국군 제1사단(15연대) 지역으로 공격해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낙동강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좌측방의 ‘328고지’를 놓고 북한군 제3사단과 15차례 이상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22일 18시에 제15연대가 328고지를 최종 확보했다. 반면 북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피탈과 역습의 과정에서 미군 포병화력 지원이 고지 탈환・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
전투 기간 중 유엔군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8월 16일 대규모 적 부대가 집결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왜관 서측 낙동강 건너 지역(폭 5.6km, 길이 12km)에 대해 ‘융단폭격’을 실시했다(26분간, B-29 폭격기 98대, 900여 톤의 폭탄 투하).그러나 폭격 후 지상정찰대에 의한 폭격효과 확인이 제한되어 정확한 피해현황은 알 수 없었다.
북한군의 전방 전투부대들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와 국군과 교전 중에 있어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낙동강 서쪽에 있던 예비대와 포병, 공병・보급 등의 지원부대는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의 방어정면에 대한 북한군의 포격과 공세의 강도는 현저히 감소한 점을 미루어볼 때, 전방부대를 지원하던 후방 보급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북한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암산・유학산 전투
중앙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8월 20일 이후는 제13사단이 책임지역 인수하여 작전 실시)이 선점하고 있는 ‘수암산’과 ‘유학산’을 연결하는 Y선 상의 방어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공격해야만 했다. 북한군이 배치된 유학산의 남쪽 면은 경사가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정상 부근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이곳을 공격해야만 했던 국군 제12연대는 북한군의 수류탄 공세로 인해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산을 탈취하고 방어하기 위해 피・아간 9차례에 걸친 ‘백병전’까지 실시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손실이 발생했다. 8월 23일이 되어서야 제12연대가 두 고지, 유학산과 수암산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피아간의 위기가 최고점에 도달했던 20일을 전후해 다부동지역 작전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북한군은 다부동 지역에 대한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학산 일대에서 전투 중이던 북한군 제15사단을 8월 18일을 기해 다부동으로부터 차출, 영천지역으로 전환했다. 이로서 다부동 전선은 8월 20일까지 잠시 동안 소강상태에 놓였다.
328고지, 수암산, 유학산은 결코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고지들이 아니었다. 고지의 높이가 700-800m 넘는 곳이 많았고, 대부분이 돌산일 뿐만 아니라 절벽도 많아 몸을 숨길 곳이 많지 않았다. 병사들이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참호(塹壕)도 제대로 팔 수 없어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사단에서는 하루에 700여 명의 손실이 생기기도 했다.
전선 상황이 급하다 보니 1사단은 새로 모병한 신병들에게 짧은 시간에 속성으로 소총 사격 방법만 겨우 교육시킨 채 전선에 투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몸소 적과 부딪치면서 전투요령을 숙달하다 보니 신병들의 피해가 특히 많았다. ‘신병이 배치되고 이틀이 지나면 고참병이 되는 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희생이 따랐다. 신원 확인도 못한 채 묻을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 자리에서 또 싸워야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들을 지휘했던 소대장・분대장들이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6·25전쟁 50주년이던 2000년부터 유해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다른 어떤 격전지보다 많은 유해가 이곳 다부동 일대에서 발굴되고 있다. 아직도 이름도 모른 채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다부동 일대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신병들보다 더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사람들이 또 있었다. 북한군과 직접 싸울 수 있는 나이를 넘긴 40~50대의 역군 ‘노무자, 짐꾼’들이었다. 고지 위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 탄약과 식량, 주먹밥을 운반하고는 부상자를 산 아래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총이 없어서 대항할 수조차 없어 그냥 맨몸으로 맞아야만 했다.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군 지휘관들은 전선 상황에 집중하다 보니 얼마나 많은 노무자들이 희생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들(노무자)이 없었다면 다부동을 지킬 수 없었다”고 1사단장 (고)백선엽 장군은 술회한 바 있다.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
다부동 전투 지역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다부동 북쪽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Bowling Alley)’ 일대였다. 북한군 제13사단의 압력으로 국군 제1사단 11연대가 천평동(칠곡군 가산면) 일대로부터 후방으로 밀리면서 다부동 일대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에 의한 다부동의 돌파를 막기 위해 미 제8군에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미8군에서도 국군 제1사단만으로는 다부동 전선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8월 17일을 기해 8군 예비인 미 제25사단 27연대(경산)를 다부동지역에 투입했다. 다부동에 도착한 미 제27연대는 다부동 지역을 지키던 국군 11연대와 함께 연합 공격을 실시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천평동(칠곡군 가산면) 일대의 상실된 지역을 회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부동 지역 전체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이곳 천평동 계곡이 낙동강방어선 유지에 결정적인 곳으로 판단하여 미 제8군과 육군본부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8월 19일을 기하여 미2사단 23연대(낙동강 돌출부에서 작전 중이던 부대)를 국군 제1사단 후방에 투입・배치하고, 국군 제8사단 10연대(영천)를 국군 제1사단에 배속했다. 천평동 계곡에는 수천 발의 대전차 및 대인지뢰를 매설하여 북한군의 진출에 대비했다.
8월 21일 천평동 축선에 인접한 좌측 고지를 방어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면서 미 제27연대의 측방이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 제27연대의 항의를 접수한 국군 제1사단장(백선엽)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전선으로 달려가 정신교육을 실시해 장병들을 안정시킨 다음 직접 공격을 진두지휘하여 피탈된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주간에 천평동 계곡 돌파에 실패한 북한군은 새로 전선에 도착한 신형 T-34 전차를 앞세우고 8월 21일 야간에 다시 공격해왔다. 6·25전쟁의 실질적인 첫 전차전(戰車戰)이 이때 벌어진 것이다. 국군도 새로이 지급된 3.5인치 로켓포를 이용해 북한군 전차 공격에 힘을 보탰다. 다음 날까지 계속된 전투를 통하여 국군 제11연대와 미 제27연대는 ‘볼링앨리’에서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의 총공세를 물리치고 공격을 계속하여 주저항선인 낙동강방어선 ‘Y선’을 지킬 수 있었다(좁은 계곡에 5시간 동안 철갑탄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포탄의 굉음으로 골짜기가 진동해 흡사 볼링장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볼링앨리 전투라고 불렀다).
결국, 마지막 힘을 쏟아 천평동 계곡을 통해 다부동을 돌파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8월 공세’는 한・미연합군이라는 견고한 벽을 넘지 못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군대에서 작전 시, 한 부대와 인접한 부대가 서로 맞닿는 곳, 부대 간의 책임지역이 나눠지는 곳을 ‘전투 지경선’이라 한다. 전투 시 이 곳이 가장 취약하여 뚫리기 쉽다. 지경선에 접한 어느 한쪽 부대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뚫릴 경우 다른 부대는 곧장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북한군의 공세 때 천평동 계곡 좌측방을 방어하던 국군 제11연대가 후방으로 밀리면서, 미 제27연대와의 전투지경선, 견부(어깨 부분)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이곳을 통해 북한군이 뚫고 들어오면 어깨를 맞대고 북한군을 저지하던 미군은 바로 고립되고, 최악의 경우엔 전멸에 이를 수도 있었다. 미 제27연대장은 “이런 상황이면 우리는 철수하겠다”라며 국군 제1사단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백선엽 사단장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단장은 밀려 내려온 장병들을 진정시키며 “이곳을 지키지 못해 대구를 내어주면 우리나라는 끝이다. 우리가 물러나면 미군들도 곧장 철수한다. 내가 앞장 설 테니 나를 따라와라. 그러다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한 뒤 앞장서서 고지를 공격했다. 그렇게 하여 국군 제11연대는 북한군과 싸워 전선을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고, 이로써 천평동계곡의 돌파를 막아낼 수 있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백선엽 장군이 남긴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선 상황이 매우 절박했지만 사단장이 직접 부하들의 돌격을 지휘한 것이 과연 적절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교범과 규범상은 맞지 않는 것이다. 사단장이라는 위치는 전투 전체를 관장하여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직위다. 대전전투 당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의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 전투’는, 미 제27연대가 국군 제1사단 책임지대 내에 투입되어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6·25전쟁 중 한・미연합작전의 효시(嚆矢)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미 제27연대가 국군 제1사단 작전지역 내에 있었지만 국군 제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된 것이 아니라서 국군 제1사단장이 미군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통합된 작전을 실시할 수는 없었다. 미 제27연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으면서 국군 제1사단을 ‘지원(支援)’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는, 대체로 타국 군대의 지휘 하에서 전투하지 않는 미국 군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창설한지 2년에 불과한 국군 지휘관들의 지휘능력에 대한 확신・신뢰 부족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 제8군은 다부동이라는 좁은 공간에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미 제27연대와 제23연대를 중첩 배치해 전투를 수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전투가 그만큼 중요했고, 상황이 위급했음을 입증한 조치였다. 미군은 다부동전투를 통해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지휘능력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서 낙동강방어선 작전 후에 있었던 반격작전 때,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에 편성되어 군단으로부터 많은 전투지원부대들을 ‘배속’ 받아 반격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다부동 전투 결과 및 이후의 상황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칠곡 일대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국군과 북한군은 그만큼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국군 제1사단은 최종적으로 다부동 일대로 집중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낙동강 방어선 ‘Y선’을 굳건히 지켜냈다.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공격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대구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가 다부동 전투인 것이다.
8월 공세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북한군이 물러나면서 다부동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었다. 8월 말에 미 제2사단 전 병력이 미 본토로부터 증원 완료되고, 영국군 여단도 한반도에 전개함으로써 부대배치를 다시 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이 다부동 지역을 담당하도록 방어선이 조정되고, 국군 제1사단을 팔공산 전방으로 조정하는 등 국군의 방어정면을 축소시켰다. 북한군이 화력이 약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8월 공세에서 실패한 북한군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군은 가용 전력 모두를 투입하여 8월 31일을 기해 부산 점령을 위한 마지막 전면 공세인 ‘9월 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국군과 연합군이 취한 전선 조정 등의 조치가 효력을 발휘해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인 ‘9월 공세’가 실패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한 반격작전의 여건이 조성되었다. 6·25전쟁 최대의 전환점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은 다부동 전투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공부대가 또 있었다. 대한민국 ‘국립경찰’이다. 경찰은 규모 면에서나 임무 면에서 국군에 견주어 조금도 뒤짐이 없었다. 50년 말에는 4만8천여 명의 규모로 성장했으며 보유 무기도 꽤 높은 수준이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 당시 팔공산지구전투사령부(4개 대대 규모)를 편성해 책임지역 방어는 물론 주요시설 외곽 방어, 철도호송임무 등을 수행했다. 미군 부대들은 정면의 북한군과 별도로 피난민을 가장한 적 게릴라에 의한 후방교란 및 주요시설 파괴 등으로 인해 작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경찰 1만5천명 정도가 미군부대의 대대 및 중대에 배속되어 통역 및 5열(五列)의 색출, 탄약 집적소 보호는 물론, 물밀 듯이 밀려오는 피난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군 부대와 함께 북한군을 상대로 한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다부동 전투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
낙동강방어선 작전이 실시되었던 칠곡 일대에 대한 자전거 답사 여행은 ‘낙동강 자전거길’과 연계하면 좋다(낙동강방어선의 많은 부분이 낙동강 자전거 길과 중복된다). 주요 전투현장과 기념・조형물들은 다부동을 기점으로 10km 내외에 위치하고 있어서 답사 지역 간을 이동하는데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다부동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학산’(다부동 북서쪽 2.5km 위치)을, 낙동강 방어선을 이해하려면 ‘작오산’(다부동 남서쪽 10km 위치)에 오르면 대부분의 지역을 볼 수 있어서 당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학산은 산 중턱에 있는 ‘도봉사’까지 자전거로 이동한 다음, 약 800m의 산길은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의 많은 부분이 급경사이고 돌・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맨몸으로 오르는데도 많은 힘이 든다. 유학산을 오르면서 만난 초로(初老)의 등산객들이 말한 “70년 전 8월의 태양 아래 북한군의 사격과 수류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싸웠던 장병들의 노고와 희생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겸손해진다”라는 얘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낙동강(낙동강방어선)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오산(자고산)은 걷거나 산악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작오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에서 ‘왜관읍 석전리’(칠곡군민체육센터 입구. 왜관우방타운 3차 아파트)를 출발점으로 잡으면 작오산 정상까지 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차량 통행도 가능한 1.5km의 임도 업힐이 매혹적이다.
칠곡군에는 6·25전쟁 관련 기념관이 3곳이나 있다. 이 중 왜관지구 전적기념관(78년)과 칠곡 호국 평화기념관(15년)은 낙동강 변(낙동강 자전거길)에 인접해 있다. 미 제1기병사단의 격전지였던 ‘작오산’ 기슭이기도 하다. 다부동전적기념관(81년)은 다부동전투 최대 격전지였던 천평동계곡(볼링 앨리)과 인접한 ‘다부리’(칠곡군 가산면)에 있다.
코로나 사태로 임시 휴관・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사전에 협조한 칠곡 호국평화기념관만 관람했다. 이곳은 칠곡군 관내에서 벌어진 낙동강방어선 전투의 의미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추모 분위기 중심의 여타 기념관과 달리 다양한 형태의 체험공간과 전시를 통해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 전몰・생존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조성되어 있다. 지상 4층, 지하 2층에 걸친 2900여 평의 규모다. 최소한, 낙동강 자전거길에서 지척에 있는 칠곡 호국평화기념관만 들러도 6·25전쟁과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6·25전쟁의 ‘명운’을 건 결전 ‘다부동(多富洞) 전투’
6·25전쟁 전 과정에서 볼 때 전쟁의 판도를 바꾼 분기점이 여럿 있었다. 특히 중요한 분기점이 ‘낙동강방어선 작전’이었고, 그 중 ‘다부동’은 가장 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승전의 현장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경찰을 비롯해 학도의용군, 소년병, 노무자들도 전투의 주역이 되어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수없이 흘린 피의 대가로 다부동과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고 압록강까지의 북진도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도 있게 되었다 (2020년 11월)
글/사진 이홍희(전 해병대사령관)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 ‘낙동강방어선’을 피로 지켜냈던 구국의 현장 ‘칠곡’. 그 터에서 평화를 키우고 있다. 난공불락의 방어선이 있던 그곳에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이 우뚝 섰다
낙동강방어선은 이런 곳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연결하는 동・서 80km, 남・북 160km의 방어선이다. 왜관(칠곡군)을 기준으로 남・서쪽 120km 지역은 미군이 맡고(1기병・24・25사단 순), 왜관으로부터 북・동쪽 120km 지역은 국군이 맡았다(1・6・8・수도・3사단 순). 8월 4일까지 최초로 점령한 이 방어선을 ‘X선’이라 한다.
최초의 방어선 ‘X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었다(국군은 가용 전투력에 비해 담당한 방어정면이 넓기도 했고, 낙동강과 같은 천연장애물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여건이었다). 북한군 제12사단이 국군 수도사단을 공격하여 ‘기계(포항시)’를 점령한 데 이어 포항시 일부까지 점령했으며, 북한군 제5사단에 의해 국군 제3사단이 ‘장사(영덕군)’ 일대에서 고립되는 등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국군 부대의 책임지역을 줄이고 동부전선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선을 선정했다. 이 방어선이 ‘Y선’으로 ‘왜관-수암산・유학산(칠곡)-군위-보현산(영천)’을 연결하는 선이다. 국군 전 부대는 8월 12일을 기하여 새로운 방어선 ‘Y선’으로 부대 배치를 조정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다부동 전투는 새로운 방어선 ‘Y선’에서 있었던 전투다.
미 제8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상하면서, 밀양 일대를 중심으로 또 다른 저지선 ‘데이비드 선’(마산 북방-밀양-울산)을 구상했다. 이 선은 방어선으로서의 성격보다는 ‘부산 교두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한 선이었다. 또한, 만약의 경우 한반도에 전개된 미군이 일본이나 미 본토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개념의 저지선이기도 하다. 이 선을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경우 대한민국의 존속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낙동강방어선이 더더욱 중요했고, 이곳에서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다부동 전투의 경과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구축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여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과 9월 두 번에 걸쳐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8월 13일부터 28일까지 경북 칠곡군 ‘왜관’과 ‘다부동(가산면)’ 일대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격퇴한 전투를 말한다.
8월 공세 때 북한군은 대구 북방에만 5개 사단을 투입했고, 그 중에서 3개 사단을 다부동 일대에 배치된 국군 제1사단 정면에 집중했다. 북한군 제13・15사단은 다부동을 향해 직접 진격해왔지만, 북한군 제3사단은 왜관을 방어하던 미 제1기병사단과 공방전을 펼치다가 미군의 저항에 밀려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로서 국군 제1사단 예하의 3개 연대는 북한군 1개 사단씩을 맞상대하여 싸워야만 했다.
왜 다부동이 격전장이 되었을까? 북한군이 경부축선 방향에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여 중간 목표인 ‘대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왜관 접근로’든 ‘다부동 접근로’ 중에서 택일해야만 했다. 이 중 ‘왜관 접근로’는 미군의 방어정면 직 전방에 놓여있는 낙동강이란 장애물을 도하해야 하는 불리점이 있고, 도하를 하더라도 낙동강으로 인해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편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북한군이 이 접근로를 이용하여 공격할 경우,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부터 많은 전투력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비해 북한군 입장에서는 국군이 담당한 ‘다부동 접근로’가 많은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선, 왜관 서쪽 일대의 낙동강보다 수심이 낮은 낙동강 상류지역(선산, 낙동리 등)은 쉽게 도하할 수 있고, 도하한 후의 작전 전개에 필요한 기동공간이 충분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왜관 접근로 보다는 다소 단거리라는 점도 고려되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미군과 비교해 화력이 열세한 한국군 정면을 택할 경우 상대적으로 돌파가 용이하고 피해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부동 일대에는 안동과 상주에서 대구로 진입하는 5번・25번 도로를 효과적으로 감제할 수 있는 유학산(839m)과 가산(902m)이 있다. 이 두 고지는 각각 좌우로 7~10km 정도씩의 험준한 산악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대구를 지켜야 하는 국군・미군의 입장에서도, 대구를 탈취해야 하는 북한군의 입장에서도 최고로 중요한 지형이 아닐 수 없었다. 국군과 미군이 이 일대를 잃게 되면 10km 이상 남쪽으로 철수가 불가피하므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에 결정적인 요충지다. 그래서 피・아(彼我)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도 확보해야 했던 곳이다. 전투도 치열했다.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전투가 있기 전, 8월 3일부터 12일까지는 낙동강 연안(왜관-낙정리, 40km)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도하 및 공격을 저지했다. 포항 일대의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육군본부는 8월 12일을 기해 국군 전 부대를 새로운 방어선 ‘Y선’(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으로 철수시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 지역에 재배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이 점령하려던 ‘Y선’ 상의 주요 고지(328고지, 수암산, 유학산)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방어선 상의 주요 지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밀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형국이 아니라, 북한군이 먼저 점령한 고지들을 ‘공격’하여 탈취해야만 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대구 북방에서 있었던 다부동 전투는 좌전방의 ‘328고지(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중앙의 ‘수암산・유학산’, 우전방의 ‘천평동 계곡’(안동・상주에서 다부동으로 이어지는 5번 국도 변)을 중심으로 전투가 전개되었다.
‘328고지 전투’와 유엔군 융단폭격
왜관 북쪽에 위치한 ‘328고지’는 별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변을 따라 왜관까지 능선으로 연결되는 축선을 통제할 수 있어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지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328고지를 선점한 상태에서, 8월 14일 북한군 제3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해 공격해옴으로써 328고지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8월 16일, 왜관에 배치된 미 제1기병사단을 공격하던 북한군이 화력이 강력한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해 국군 제1사단(15연대) 지역으로 공격해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낙동강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좌측방의 ‘328고지’를 놓고 북한군 제3사단과 15차례 이상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22일 18시에 제15연대가 328고지를 최종 확보했다. 반면 북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후퇴했다. 피탈과 역습의 과정에서 미군 포병화력 지원이 고지 탈환・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
전투 기간 중 유엔군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8월 16일 대규모 적 부대가 집결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왜관 서측 낙동강 건너 지역(폭 5.6km, 길이 12km)에 대해 ‘융단폭격’을 실시했다(26분간, B-29 폭격기 98대, 900여 톤의 폭탄 투하).그러나 폭격 후 지상정찰대에 의한 폭격효과 확인이 제한되어 정확한 피해현황은 알 수 없었다.
북한군의 전방 전투부대들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와 국군과 교전 중에 있어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낙동강 서쪽에 있던 예비대와 포병, 공병・보급 등의 지원부대는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고 한다.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의 방어정면에 대한 북한군의 포격과 공세의 강도는 현저히 감소한 점을 미루어볼 때, 전방부대를 지원하던 후방 보급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북한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암산・유학산 전투
중앙을 담당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8월 20일 이후는 제13사단이 책임지역 인수하여 작전 실시)이 선점하고 있는 ‘수암산’과 ‘유학산’을 연결하는 Y선 상의 방어진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공격해야만 했다. 북한군이 배치된 유학산의 남쪽 면은 경사가 매우 가파를 뿐만 아니라, 정상 부근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이곳을 공격해야만 했던 국군 제12연대는 북한군의 수류탄 공세로 인해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산을 탈취하고 방어하기 위해 피・아간 9차례에 걸친 ‘백병전’까지 실시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손실이 발생했다. 8월 23일이 되어서야 제12연대가 두 고지, 유학산과 수암산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피아간의 위기가 최고점에 도달했던 20일을 전후해 다부동지역 작전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북한군은 다부동 지역에 대한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학산 일대에서 전투 중이던 북한군 제15사단을 8월 18일을 기해 다부동으로부터 차출, 영천지역으로 전환했다. 이로서 다부동 전선은 8월 20일까지 잠시 동안 소강상태에 놓였다.
328고지, 수암산, 유학산은 결코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고지들이 아니었다. 고지의 높이가 700-800m 넘는 곳이 많았고, 대부분이 돌산일 뿐만 아니라 절벽도 많아 몸을 숨길 곳이 많지 않았다. 병사들이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참호(塹壕)도 제대로 팔 수 없어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사단에서는 하루에 700여 명의 손실이 생기기도 했다.
전선 상황이 급하다 보니 1사단은 새로 모병한 신병들에게 짧은 시간에 속성으로 소총 사격 방법만 겨우 교육시킨 채 전선에 투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몸소 적과 부딪치면서 전투요령을 숙달하다 보니 신병들의 피해가 특히 많았다. ‘신병이 배치되고 이틀이 지나면 고참병이 되는 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희생이 따랐다. 신원 확인도 못한 채 묻을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 자리에서 또 싸워야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들을 지휘했던 소대장・분대장들이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6·25전쟁 50주년이던 2000년부터 유해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다른 어떤 격전지보다 많은 유해가 이곳 다부동 일대에서 발굴되고 있다. 아직도 이름도 모른 채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다부동 일대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신병들보다 더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던 사람들이 또 있었다. 북한군과 직접 싸울 수 있는 나이를 넘긴 40~50대의 역군 ‘노무자, 짐꾼’들이었다. 고지 위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 탄약과 식량, 주먹밥을 운반하고는 부상자를 산 아래 안전한 곳으로 후송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총이 없어서 대항할 수조차 없어 그냥 맨몸으로 맞아야만 했다.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군 지휘관들은 전선 상황에 집중하다 보니 얼마나 많은 노무자들이 희생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들(노무자)이 없었다면 다부동을 지킬 수 없었다”고 1사단장 (고)백선엽 장군은 술회한 바 있다.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
다부동 전투 지역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다부동 북쪽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Bowling Alley)’ 일대였다. 북한군 제13사단의 압력으로 국군 제1사단 11연대가 천평동(칠곡군 가산면) 일대로부터 후방으로 밀리면서 다부동 일대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에 의한 다부동의 돌파를 막기 위해 미 제8군에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미8군에서도 국군 제1사단만으로는 다부동 전선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8월 17일을 기해 8군 예비인 미 제25사단 27연대(경산)를 다부동지역에 투입했다. 다부동에 도착한 미 제27연대는 다부동 지역을 지키던 국군 11연대와 함께 연합 공격을 실시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천평동(칠곡군 가산면) 일대의 상실된 지역을 회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부동 지역 전체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이곳 천평동 계곡이 낙동강방어선 유지에 결정적인 곳으로 판단하여 미 제8군과 육군본부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8월 19일을 기하여 미2사단 23연대(낙동강 돌출부에서 작전 중이던 부대)를 국군 제1사단 후방에 투입・배치하고, 국군 제8사단 10연대(영천)를 국군 제1사단에 배속했다. 천평동 계곡에는 수천 발의 대전차 및 대인지뢰를 매설하여 북한군의 진출에 대비했다.
8월 21일 천평동 축선에 인접한 좌측 고지를 방어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면서 미 제27연대의 측방이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 제27연대의 항의를 접수한 국군 제1사단장(백선엽)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전선으로 달려가 정신교육을 실시해 장병들을 안정시킨 다음 직접 공격을 진두지휘하여 피탈된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주간에 천평동 계곡 돌파에 실패한 북한군은 새로 전선에 도착한 신형 T-34 전차를 앞세우고 8월 21일 야간에 다시 공격해왔다. 6·25전쟁의 실질적인 첫 전차전(戰車戰)이 이때 벌어진 것이다. 국군도 새로이 지급된 3.5인치 로켓포를 이용해 북한군 전차 공격에 힘을 보탰다. 다음 날까지 계속된 전투를 통하여 국군 제11연대와 미 제27연대는 ‘볼링앨리’에서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의 총공세를 물리치고 공격을 계속하여 주저항선인 낙동강방어선 ‘Y선’을 지킬 수 있었다(좁은 계곡에 5시간 동안 철갑탄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포탄의 굉음으로 골짜기가 진동해 흡사 볼링장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볼링앨리 전투라고 불렀다).
결국, 마지막 힘을 쏟아 천평동 계곡을 통해 다부동을 돌파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8월 공세’는 한・미연합군이라는 견고한 벽을 넘지 못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군대에서 작전 시, 한 부대와 인접한 부대가 서로 맞닿는 곳, 부대 간의 책임지역이 나눠지는 곳을 ‘전투 지경선’이라 한다. 전투 시 이 곳이 가장 취약하여 뚫리기 쉽다. 지경선에 접한 어느 한쪽 부대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뚫릴 경우 다른 부대는 곧장 커다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북한군의 공세 때 천평동 계곡 좌측방을 방어하던 국군 제11연대가 후방으로 밀리면서, 미 제27연대와의 전투지경선, 견부(어깨 부분)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이곳을 통해 북한군이 뚫고 들어오면 어깨를 맞대고 북한군을 저지하던 미군은 바로 고립되고, 최악의 경우엔 전멸에 이를 수도 있었다. 미 제27연대장은 “이런 상황이면 우리는 철수하겠다”라며 국군 제1사단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백선엽 사단장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단장은 밀려 내려온 장병들을 진정시키며 “이곳을 지키지 못해 대구를 내어주면 우리나라는 끝이다. 우리가 물러나면 미군들도 곧장 철수한다. 내가 앞장 설 테니 나를 따라와라. 그러다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한 뒤 앞장서서 고지를 공격했다. 그렇게 하여 국군 제11연대는 북한군과 싸워 전선을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고, 이로써 천평동계곡의 돌파를 막아낼 수 있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백선엽 장군이 남긴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선 상황이 매우 절박했지만 사단장이 직접 부하들의 돌격을 지휘한 것이 과연 적절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교범과 규범상은 맞지 않는 것이다. 사단장이라는 위치는 전투 전체를 관장하여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직위다. 대전전투 당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된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의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천평동 계곡 ‘볼링앨리 전투’는, 미 제27연대가 국군 제1사단 책임지대 내에 투입되어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6·25전쟁 중 한・미연합작전의 효시(嚆矢)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미 제27연대가 국군 제1사단 작전지역 내에 있었지만 국군 제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된 것이 아니라서 국군 제1사단장이 미군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통합된 작전을 실시할 수는 없었다. 미 제27연대는 미 제8군으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으면서 국군 제1사단을 ‘지원(支援)’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는, 대체로 타국 군대의 지휘 하에서 전투하지 않는 미국 군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창설한지 2년에 불과한 국군 지휘관들의 지휘능력에 대한 확신・신뢰 부족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 제8군은 다부동이라는 좁은 공간에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미 제27연대와 제23연대를 중첩 배치해 전투를 수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던 전투가 그만큼 중요했고, 상황이 위급했음을 입증한 조치였다. 미군은 다부동전투를 통해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지휘능력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서 낙동강방어선 작전 후에 있었던 반격작전 때,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에 편성되어 군단으로부터 많은 전투지원부대들을 ‘배속’ 받아 반격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다부동 전투 결과 및 이후의 상황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칠곡 일대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국군과 북한군은 그만큼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국군 제1사단은 최종적으로 다부동 일대로 집중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낙동강 방어선 ‘Y선’을 굳건히 지켜냈다.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공격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대구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가 다부동 전투인 것이다.
8월 공세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북한군이 물러나면서 다부동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었다. 8월 말에 미 제2사단 전 병력이 미 본토로부터 증원 완료되고, 영국군 여단도 한반도에 전개함으로써 부대배치를 다시 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이 다부동 지역을 담당하도록 방어선이 조정되고, 국군 제1사단을 팔공산 전방으로 조정하는 등 국군의 방어정면을 축소시켰다. 북한군이 화력이 약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8월 공세에서 실패한 북한군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군은 가용 전력 모두를 투입하여 8월 31일을 기해 부산 점령을 위한 마지막 전면 공세인 ‘9월 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국군과 연합군이 취한 전선 조정 등의 조치가 효력을 발휘해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인 ‘9월 공세’가 실패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한 반격작전의 여건이 조성되었다. 6·25전쟁 최대의 전환점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은 다부동 전투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공부대가 또 있었다. 대한민국 ‘국립경찰’이다. 경찰은 규모 면에서나 임무 면에서 국군에 견주어 조금도 뒤짐이 없었다. 50년 말에는 4만8천여 명의 규모로 성장했으며 보유 무기도 꽤 높은 수준이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 당시 팔공산지구전투사령부(4개 대대 규모)를 편성해 책임지역 방어는 물론 주요시설 외곽 방어, 철도호송임무 등을 수행했다. 미군 부대들은 정면의 북한군과 별도로 피난민을 가장한 적 게릴라에 의한 후방교란 및 주요시설 파괴 등으로 인해 작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경찰 1만5천명 정도가 미군부대의 대대 및 중대에 배속되어 통역 및 5열(五列)의 색출, 탄약 집적소 보호는 물론, 물밀 듯이 밀려오는 피난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군 부대와 함께 북한군을 상대로 한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다부동 전투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
낙동강방어선 작전이 실시되었던 칠곡 일대에 대한 자전거 답사 여행은 ‘낙동강 자전거길’과 연계하면 좋다(낙동강방어선의 많은 부분이 낙동강 자전거 길과 중복된다). 주요 전투현장과 기념・조형물들은 다부동을 기점으로 10km 내외에 위치하고 있어서 답사 지역 간을 이동하는데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다부동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학산’(다부동 북서쪽 2.5km 위치)을, 낙동강 방어선을 이해하려면 ‘작오산’(다부동 남서쪽 10km 위치)에 오르면 대부분의 지역을 볼 수 있어서 당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학산은 산 중턱에 있는 ‘도봉사’까지 자전거로 이동한 다음, 약 800m의 산길은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의 많은 부분이 급경사이고 돌・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맨몸으로 오르는데도 많은 힘이 든다. 유학산을 오르면서 만난 초로(初老)의 등산객들이 말한 “70년 전 8월의 태양 아래 북한군의 사격과 수류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싸웠던 장병들의 노고와 희생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겸손해진다”라는 얘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낙동강(낙동강방어선)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오산(자고산)은 걷거나 산악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작오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에서 ‘왜관읍 석전리’(칠곡군민체육센터 입구. 왜관우방타운 3차 아파트)를 출발점으로 잡으면 작오산 정상까지 자전거로 오를 수 있다. 차량 통행도 가능한 1.5km의 임도 업힐이 매혹적이다.
칠곡군에는 6·25전쟁 관련 기념관이 3곳이나 있다. 이 중 왜관지구 전적기념관(78년)과 칠곡 호국 평화기념관(15년)은 낙동강 변(낙동강 자전거길)에 인접해 있다. 미 제1기병사단의 격전지였던 ‘작오산’ 기슭이기도 하다. 다부동전적기념관(81년)은 다부동전투 최대 격전지였던 천평동계곡(볼링 앨리)과 인접한 ‘다부리’(칠곡군 가산면)에 있다.
코로나 사태로 임시 휴관・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사전에 협조한 칠곡 호국평화기념관만 관람했다. 이곳은 칠곡군 관내에서 벌어진 낙동강방어선 전투의 의미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추모 분위기 중심의 여타 기념관과 달리 다양한 형태의 체험공간과 전시를 통해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소중함, 전몰・생존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조성되어 있다. 지상 4층, 지하 2층에 걸친 2900여 평의 규모다. 최소한, 낙동강 자전거길에서 지척에 있는 칠곡 호국평화기념관만 들러도 6·25전쟁과 낙동강방어선 전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