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도 머무는 700고지 암자
운주암 뜰앞 3층석탑에서 바라본 조망. 첩첩한 산줄기 사이로 뭇 생명과 삶이 면면히 흐른다. 맨 뒤의 산줄기는 창원 정병산~무학산 일대다
밀양(密陽)은 그 이름과 발음에서부터 비밀스런 매혹이 느껴진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그런 이름에 착안했을 것이다.
남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있지만 밀양은 온통 산악지대다. 남부 내륙의 거대한 산악지대인 영남알프스도 밀양 권역이 가장 넓다. 1000m급 고봉이 즐비한 영남알프스를 안고 있긴 해도 밀양의 진산은 다소 무명인 화악산(932m)이다. 밀양시내 북쪽에 웅장한 장벽처럼 솟아 청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저지대에서 900m를 넘는 높이는 상당해서 위용을 발산하고 사방으로 줄기를 퍼뜨리고 있다. 밀양시내 북단의 옥교산(538m)은 화악산 남릉에 해당하고, 옥교산 줄기가 더 흘러내려 시내의 추화산(243m)을 빚었고 밀양시가지는 추화산에 기대 형성되었다. 추화(推火)는 신라 때 밀양의 지명이기도 하다.
운정산에서 바라본 화악산. 구름이 살짝 걸린 곳이 정상이고, 맨왼쪽 철탑 위에 운주암이 있다
화악산 정상 바로 턱밑에는 운주암(雲住庵)이 있다. 해발 690m이니 얼마 전에 올랐던 충남 내륙 최고봉인 광덕산(699m)과 맞먹는다. 너무 높아 구름이 머문다는 이름은 탈속감과 운치를 더해준다.
운주암을 올랐다가 밀양 북부를 돌아오는 여정의 기점은 위양지(位良池, 위양못)다. 위양지는 신라 때 만은 저수지로 못 가운데는 완재정(宛在亭)이 인공섬 위에 앉아 있고, 주위에는 이팝나무 고목이 우거져 그윽한 분위기다. 저수지는 길이 390m, 둘레 950m로 원래는 훨씬 더 컸다고 하며, 휴일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산 사이에 280m 정도의 둑을 쌓아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한 고대인의 안목에 감탄한다. 삼한시대 수리시설인 제천 의림지와 입지와 축조 방식이 흡사하다.
인공섬에 완재정이 있어 더욱 운치 있는 위양지(안내문 사진). 주위는 이팝나무 고목이 에워싸고 있다
위양지 북쪽에서 운주암 가는 산길이 곧장 시작된다. 위양지가 해발 70m이니 운주암까지는 고도차 620m를 극복해야 하는 엄청난 업힐이다. 거리도 7.8km나 되어 화악산의 웅자를 말해준다.
화악(華岳)은 아무래도 중국의 화산(華山)에서 유래한 것 같다. 옛 기록에도 ‘화산’, ‘둔덕(屯德)’ 지명이 보인다. 중국 화산(2200m)은 높이가 훨씬 높고 거대한 암벽이 많은 골산(骨山)이지만 화악산은 돌출바위가 거의 없는 육산이다. 하지만 산록의 경사가 심하고 주능선에 은근하게 드러난 암릉을 보아 산체 아래는 거대한 암괴가 버티고 있을 것 같다.
길이 좁고 험한데 간혹 차량이 다니는 것은 위쪽에 꽤 큰 마을이 있어서다. 화악산의 전위봉에 해당하는 돛대산(449m) 기슭을 오르면 22년 5월 무려 5일 동안 큰 산불이 이어진 옥교산이 마주 보인다. 축구장 1000개 면적에 100만 그루의 나무를 태운 화마의 흔적이 선명하다. 강풍까지 겹쳤다지만 도시 근교 산에서 난 불이 5일 간이나 이어진 것은 이례적이다. 자세히 보니 옥교산 사면이 급하고 숲이 울창해 불이 급속도로 번진 것 같다.
돛대산 사면을 오르는 길목. 저 아래로 위양지와 밀양시내가 차례로 보인다산불의 상흔이 남은 옥교산. 5일 간 축구장 100개 면적을 태웠으니 대단한 불이었다
돛대산 주릉을 넘는 고개를 내려서면 평밭마을이 비교적 완만한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숲에 가려 마을의 전모가 드러나진 않지만 해발 350~500m에 걸쳐 있고 30가구쯤 될 것 같다. ‘평밭’이란 이름 역시 산중에 있는 ‘평평한 밭’이란 의미다. 반쯤 숨어사는 사람들의 사연이야 알 길이 없으나 속사(俗事)에 질리면 산중권태가 그립기도 할 것이다.
화악산 허리에 도열해 있는 송전탑은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전기를 대구 방면으로 보내는 송전라인이다. 경관을 다소 해치긴 하지만 땅은 좁고 산이 많은 우리 현실에서 산줄기를 따라 송전선을 설치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도 하다.
평밭마을을 지나 구비를 돌 때마다 작은 골짜기에는 한두 가구가 숨듯이 흩어져 있다. 평밭마을마저 번화하다 느껴 한 단계 더 들어간 도피일까.
형제봉(557m) 능선의 봉천재(420m)는 삼거리를 이룬다. 오른쪽 업힐은 운주암 가는 길, 정면은 청도면 방면 하산길이다. 바로 산 너머에 청도군이 있어 밀양시 청도면과 혼동하기 쉬운데, 밀양 청도면은 옛날 청도군 외서면이 밀양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평밭에서 봉천재까지는 다소 평탄했다면 이제부터 운주암까지는 가파른 업힐의 연속이다. 천천히,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어느새 해발 600m 능선을 돌파한다. 저편으로 운주암이 숲속에 묻혀 있고 주위 산세가 우람하며 아득히 원경이 펼쳐진다.
화악산 중턱, 해발 350~500m에 걸쳐 있는 평밭마을 삼거리를 이룬 봉천재(420m). 왼쪽 길로 와서 운주암을 올랐다가 오른쪽 길로 내려갈 것이다운주암 직전에서 본 조망. 고도가 높아 첩첩한 산들이 발밑으로 보인다
이 까마득한 고지의 비탈에 자리한 운주암은 도로가 난 지금도 접근이 어려운데 그 옛날 어떻게 건물을 세웠는지 지난했을 창건과정이 눈앞에 그려진다. 자세한 연혁은 없으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신중탱(神衆幀, 불교적 신앙대상을 그린 그림)이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졸미는 없다. 그래도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득한 입지와 급사면을 따라 도열한 당우는 고아한 아취를 발한다.
대웅전 앞으로는 작은 정원을 내어 3층 석탑을 세웠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며 천상천하를 잇는 하늘기둥(天柱)의 포석처럼 강건하고 고고하다. 조망은 남쪽으로 다소 좁게 트여서 창원 정병산(567m)~천주산(638m)~무학산(761m) 등이 시야의 한계를 이룬다. 그 사이로 수없이 중첩된낮은 산줄기 사이에는 강물이 비집고 흐르고, 산야의 경계선에는 마을이 기대 있다. 우리의 삶이 대를 이어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터전이 시공 속에 응결된 듯 펼쳐져 있다. 지금도 저 아래에서는 인간사 흥망성쇠와 생사가 다이내믹하게 반복되고 있고, 나 역시 산을 내려가면 그 와중에 동참해야 한다. 구도자의 사원이 공간적으로 격리된 산간에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해발 690m 고지에 자리한 운주암.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사면이라 건물은 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다
운주암을 떠나기 전 긴 다운힐을 준비한다. 옷을 껴입고 안장은 낮춘 상태로 출발이다. 저 아래 요고저수지까지 고도차 600m, 길이 7km의 거창한 내리막이 기다린다. 장시간 힘들여 올랐건만 쾌속으로 질주해 순식간에 내려서는 것도 라이딩의 별격이다. 이런 길에서는 자동차보다 더 빨라서 좀 달렸다 싶은데 어느새 산을 벗어나 청도면의 첫 번째 마을인 횟골로 내려섰다. 뒤돌아보니 마을 뒤편으로 화악산 정상이 계곡을 품고 우뚝하다.
산간마을의 도로는 안락 그 자체다. 행인이 드물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으며 노면은 잘 포장되어 두 손을 쉬면서 느긋하게 페달링이다. 페달에는 채 힘을 주지 않아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두 바퀴는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요고저수지를 지나 요고천을 따라가면 이윽고 창녕~밀양 간 24번 국도를 만난다. 길을 건너 그대로 직진해 청도천 둑길을 타고 가다 동산리에서 약수암 방면으로 다시 산을 오른다. 여기 산지는 최고봉이 335m나 되는데 이름이 없어 여기서는 마을 이름을 따 ‘운정산’이라고 하자. 길은 해발 280m까지 올라가고 정상 근처에는 추모공원묘원이 있다. 민가가 드물어 대대적인 벌목을 해 어디 강원도 깊은 산처럼 목재가 쌓여있고 대규모 양묘장도 있다.
봉천재에서 청도면으로 내려가는 길. 골짜기가 깊은데 독립 민가가 있다. 건너편은 호암산(611m)
청도면 첫마을 횟골. 골짜기 뒤쪽 둔중한 능선이 화악산 정상부다
주변 산세가 좋은 요고저수지
벼가 샛노랗게 익은 완만한 내리막길을 편안하게 달린다
운정산의 임도에 쌓여 있는 목재. 도시가 가까운 낮은 산인데 어디 강원도 심산에 온 것 같은 분위기다운정산 임도는 대부분 흙길이라 라이딩 재미가 좋다
운정산 양묘장. 살짝 목장 같은 분위기다
다시 만난 옥교산의 상흔
심산유곡 분위기의 운정산 임도. 왼쪽 멀리 양산 토곡산(855m)이 구름에 걸려 있다
운정산을 내려오면 마덕고개(150m)에서 도로를 만나고 덕곡저수지까지는 경쾌한 다운힐이다. 덕곡저수지에서 북쪽으로 가면 들판 가운데에 청운리가 있고, 마을 중심부에 안씨고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니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조선 후기 상류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안채와 좌우 별채, 사랑채, 중문채 등 다수의 건물이 ‘ㅁ’자 형태를 이루며 지금도 광주(廣州) 안씨(安氏) 후손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3천석을 거둬들였다니 대단한 부자였나 보다. 1석(한 섬)은 80kg 두 가마이므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천 가마 × 20만원 = 12억 원이다. 지금도 연봉 12억 원이면 최상위급이니 가난한 당시는 더 큰 부였을 것이다.
청운리에서 위양지 가는 길목에 연극촌 ‘밀양아리나’가 있다. 허허벌판 중에 극장과 공연장이 모여 있고 또 유지되는 것이 신통하다.
어느덧 해가 졌는데도 위양지에는 산책객이 적지 않다. 연인들의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에 연못의 물고기는 점프로 화답을 한다. 완전한 정적이 감싸려면 밤이 더 깊어야 할 것 같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청운리 안씨고가. 내부가 상당히 넓고 잘 꾸며진 조선후기 상류층의 저택이다연극촌 겸 공연장인 밀양아리나. 외진 곳에 자리했지만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통하다
수초로 뒤덮인 위양지. 황혼이 어리건만 관광객이 여전히 많다
tip
위양지 주변에 편의점과 식당, 카페가 있으나 코스 도중에는 아예 없으므로 유의한다. 휴일에는 위양지 일대가 매우 붐벼 주차난이 빚어지므로 인근의 길가에 주차해야 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밀양 화악산 36km
구름도 머무는 700고지 암자
운주암 뜰앞 3층석탑에서 바라본 조망. 첩첩한 산줄기 사이로 뭇 생명과 삶이 면면히 흐른다. 맨 뒤의 산줄기는 창원 정병산~무학산 일대다
밀양(密陽)은 그 이름과 발음에서부터 비밀스런 매혹이 느껴진다. 같은 제목의 영화도 그런 이름에 착안했을 것이다.
남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있지만 밀양은 온통 산악지대다. 남부 내륙의 거대한 산악지대인 영남알프스도 밀양 권역이 가장 넓다. 1000m급 고봉이 즐비한 영남알프스를 안고 있긴 해도 밀양의 진산은 다소 무명인 화악산(932m)이다. 밀양시내 북쪽에 웅장한 장벽처럼 솟아 청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저지대에서 900m를 넘는 높이는 상당해서 위용을 발산하고 사방으로 줄기를 퍼뜨리고 있다. 밀양시내 북단의 옥교산(538m)은 화악산 남릉에 해당하고, 옥교산 줄기가 더 흘러내려 시내의 추화산(243m)을 빚었고 밀양시가지는 추화산에 기대 형성되었다. 추화(推火)는 신라 때 밀양의 지명이기도 하다.
운정산에서 바라본 화악산. 구름이 살짝 걸린 곳이 정상이고, 맨왼쪽 철탑 위에 운주암이 있다
화악산 정상 바로 턱밑에는 운주암(雲住庵)이 있다. 해발 690m이니 얼마 전에 올랐던 충남 내륙 최고봉인 광덕산(699m)과 맞먹는다. 너무 높아 구름이 머문다는 이름은 탈속감과 운치를 더해준다.
운주암을 올랐다가 밀양 북부를 돌아오는 여정의 기점은 위양지(位良池, 위양못)다. 위양지는 신라 때 만은 저수지로 못 가운데는 완재정(宛在亭)이 인공섬 위에 앉아 있고, 주위에는 이팝나무 고목이 우거져 그윽한 분위기다. 저수지는 길이 390m, 둘레 950m로 원래는 훨씬 더 컸다고 하며, 휴일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산 사이에 280m 정도의 둑을 쌓아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한 고대인의 안목에 감탄한다. 삼한시대 수리시설인 제천 의림지와 입지와 축조 방식이 흡사하다.
인공섬에 완재정이 있어 더욱 운치 있는 위양지(안내문 사진). 주위는 이팝나무 고목이 에워싸고 있다
위양지 북쪽에서 운주암 가는 산길이 곧장 시작된다. 위양지가 해발 70m이니 운주암까지는 고도차 620m를 극복해야 하는 엄청난 업힐이다. 거리도 7.8km나 되어 화악산의 웅자를 말해준다.
화악(華岳)은 아무래도 중국의 화산(華山)에서 유래한 것 같다. 옛 기록에도 ‘화산’, ‘둔덕(屯德)’ 지명이 보인다. 중국 화산(2200m)은 높이가 훨씬 높고 거대한 암벽이 많은 골산(骨山)이지만 화악산은 돌출바위가 거의 없는 육산이다. 하지만 산록의 경사가 심하고 주능선에 은근하게 드러난 암릉을 보아 산체 아래는 거대한 암괴가 버티고 있을 것 같다.
길이 좁고 험한데 간혹 차량이 다니는 것은 위쪽에 꽤 큰 마을이 있어서다. 화악산의 전위봉에 해당하는 돛대산(449m) 기슭을 오르면 22년 5월 무려 5일 동안 큰 산불이 이어진 옥교산이 마주 보인다. 축구장 1000개 면적에 100만 그루의 나무를 태운 화마의 흔적이 선명하다. 강풍까지 겹쳤다지만 도시 근교 산에서 난 불이 5일 간이나 이어진 것은 이례적이다. 자세히 보니 옥교산 사면이 급하고 숲이 울창해 불이 급속도로 번진 것 같다.
돛대산 사면을 오르는 길목. 저 아래로 위양지와 밀양시내가 차례로 보인다산불의 상흔이 남은 옥교산. 5일 간 축구장 100개 면적을 태웠으니 대단한 불이었다
돛대산 주릉을 넘는 고개를 내려서면 평밭마을이 비교적 완만한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다. 숲에 가려 마을의 전모가 드러나진 않지만 해발 350~500m에 걸쳐 있고 30가구쯤 될 것 같다. ‘평밭’이란 이름 역시 산중에 있는 ‘평평한 밭’이란 의미다. 반쯤 숨어사는 사람들의 사연이야 알 길이 없으나 속사(俗事)에 질리면 산중권태가 그립기도 할 것이다.
화악산 허리에 도열해 있는 송전탑은 고리원자력발전소의 전기를 대구 방면으로 보내는 송전라인이다. 경관을 다소 해치긴 하지만 땅은 좁고 산이 많은 우리 현실에서 산줄기를 따라 송전선을 설치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도 하다.
평밭마을을 지나 구비를 돌 때마다 작은 골짜기에는 한두 가구가 숨듯이 흩어져 있다. 평밭마을마저 번화하다 느껴 한 단계 더 들어간 도피일까.
형제봉(557m) 능선의 봉천재(420m)는 삼거리를 이룬다. 오른쪽 업힐은 운주암 가는 길, 정면은 청도면 방면 하산길이다. 바로 산 너머에 청도군이 있어 밀양시 청도면과 혼동하기 쉬운데, 밀양 청도면은 옛날 청도군 외서면이 밀양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평밭에서 봉천재까지는 다소 평탄했다면 이제부터 운주암까지는 가파른 업힐의 연속이다. 천천히,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어느새 해발 600m 능선을 돌파한다. 저편으로 운주암이 숲속에 묻혀 있고 주위 산세가 우람하며 아득히 원경이 펼쳐진다.
화악산 중턱, 해발 350~500m에 걸쳐 있는 평밭마을 삼거리를 이룬 봉천재(420m). 왼쪽 길로 와서 운주암을 올랐다가 오른쪽 길로 내려갈 것이다운주암 직전에서 본 조망. 고도가 높아 첩첩한 산들이 발밑으로 보인다
이 까마득한 고지의 비탈에 자리한 운주암은 도로가 난 지금도 접근이 어려운데 그 옛날 어떻게 건물을 세웠는지 지난했을 창건과정이 눈앞에 그려진다. 자세한 연혁은 없으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신중탱(神衆幀, 불교적 신앙대상을 그린 그림)이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졸미는 없다. 그래도 세상을 내려다보는 아득한 입지와 급사면을 따라 도열한 당우는 고아한 아취를 발한다.
대웅전 앞으로는 작은 정원을 내어 3층 석탑을 세웠는데 세상을 내려다보며 천상천하를 잇는 하늘기둥(天柱)의 포석처럼 강건하고 고고하다. 조망은 남쪽으로 다소 좁게 트여서 창원 정병산(567m)~천주산(638m)~무학산(761m) 등이 시야의 한계를 이룬다. 그 사이로 수없이 중첩된낮은 산줄기 사이에는 강물이 비집고 흐르고, 산야의 경계선에는 마을이 기대 있다. 우리의 삶이 대를 이어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터전이 시공 속에 응결된 듯 펼쳐져 있다. 지금도 저 아래에서는 인간사 흥망성쇠와 생사가 다이내믹하게 반복되고 있고, 나 역시 산을 내려가면 그 와중에 동참해야 한다. 구도자의 사원이 공간적으로 격리된 산간에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해발 690m 고지에 자리한 운주암. 거의 절벽에 가까운 급사면이라 건물은 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다
운주암을 떠나기 전 긴 다운힐을 준비한다. 옷을 껴입고 안장은 낮춘 상태로 출발이다. 저 아래 요고저수지까지 고도차 600m, 길이 7km의 거창한 내리막이 기다린다. 장시간 힘들여 올랐건만 쾌속으로 질주해 순식간에 내려서는 것도 라이딩의 별격이다. 이런 길에서는 자동차보다 더 빨라서 좀 달렸다 싶은데 어느새 산을 벗어나 청도면의 첫 번째 마을인 횟골로 내려섰다. 뒤돌아보니 마을 뒤편으로 화악산 정상이 계곡을 품고 우뚝하다.
산간마을의 도로는 안락 그 자체다. 행인이 드물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으며 노면은 잘 포장되어 두 손을 쉬면서 느긋하게 페달링이다. 페달에는 채 힘을 주지 않아도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두 바퀴는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요고저수지를 지나 요고천을 따라가면 이윽고 창녕~밀양 간 24번 국도를 만난다. 길을 건너 그대로 직진해 청도천 둑길을 타고 가다 동산리에서 약수암 방면으로 다시 산을 오른다. 여기 산지는 최고봉이 335m나 되는데 이름이 없어 여기서는 마을 이름을 따 ‘운정산’이라고 하자. 길은 해발 280m까지 올라가고 정상 근처에는 추모공원묘원이 있다. 민가가 드물어 대대적인 벌목을 해 어디 강원도 깊은 산처럼 목재가 쌓여있고 대규모 양묘장도 있다.
봉천재에서 청도면으로 내려가는 길. 골짜기가 깊은데 독립 민가가 있다. 건너편은 호암산(611m)
청도면 첫마을 횟골. 골짜기 뒤쪽 둔중한 능선이 화악산 정상부다
주변 산세가 좋은 요고저수지
벼가 샛노랗게 익은 완만한 내리막길을 편안하게 달린다
운정산의 임도에 쌓여 있는 목재. 도시가 가까운 낮은 산인데 어디 강원도 심산에 온 것 같은 분위기다운정산 임도는 대부분 흙길이라 라이딩 재미가 좋다
운정산 양묘장. 살짝 목장 같은 분위기다
다시 만난 옥교산의 상흔
심산유곡 분위기의 운정산 임도. 왼쪽 멀리 양산 토곡산(855m)이 구름에 걸려 있다
운정산을 내려오면 마덕고개(150m)에서 도로를 만나고 덕곡저수지까지는 경쾌한 다운힐이다. 덕곡저수지에서 북쪽으로 가면 들판 가운데에 청운리가 있고, 마을 중심부에 안씨고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니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조선 후기 상류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안채와 좌우 별채, 사랑채, 중문채 등 다수의 건물이 ‘ㅁ’자 형태를 이루며 지금도 광주(廣州) 안씨(安氏) 후손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3천석을 거둬들였다니 대단한 부자였나 보다. 1석(한 섬)은 80kg 두 가마이므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천 가마 × 20만원 = 12억 원이다. 지금도 연봉 12억 원이면 최상위급이니 가난한 당시는 더 큰 부였을 것이다.
청운리에서 위양지 가는 길목에 연극촌 ‘밀양아리나’가 있다. 허허벌판 중에 극장과 공연장이 모여 있고 또 유지되는 것이 신통하다.
어느덧 해가 졌는데도 위양지에는 산책객이 적지 않다. 연인들의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에 연못의 물고기는 점프로 화답을 한다. 완전한 정적이 감싸려면 밤이 더 깊어야 할 것 같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청운리 안씨고가. 내부가 상당히 넓고 잘 꾸며진 조선후기 상류층의 저택이다연극촌 겸 공연장인 밀양아리나. 외진 곳에 자리했지만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신통하다
수초로 뒤덮인 위양지. 황혼이 어리건만 관광객이 여전히 많다
tip
위양지 주변에 편의점과 식당, 카페가 있으나 코스 도중에는 아예 없으므로 유의한다. 휴일에는 위양지 일대가 매우 붐벼 주차난이 빚어지므로 인근의 길가에 주차해야 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밀양 화악산 36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