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영남알프스 사자평~간월재

자생투어
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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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눕다, 천상의 억새고원

 

해발 800m 사자평 억새밭에 털썩 드러누웠다. 억새는 만발해 있고 봉우리는 눈높이로 푸근하다


또 다시 이 길을 오른다. 돌아보니 어언 40년을 넘었다. 1981년 처음 이 놀라운 산을 올랐고, 그 뒤로도 수없이 저 봉우리와 이 능선, 저 고원을 지났다. 방식도 다양해서 걸어서 가장 많이 왔지만 20대 젊은 혈기로 오토바이를 타고 고원을 넘은 적이 있고 4륜구동 자동차로도 지났다. 자전거로는 저 아득한 천황산은 물론, 배내고개 저편의 신불산, 영축산 정상까지 오르기도 했다.

기이한 것은 올 때마다 길이 변해있고 풍경도 바뀌어 있는 점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오토바이와 자동차도 그럭저럭 고원을 지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등산로 정도의 싱글트랙만 겨우 이어져 있다. 학생 1~2명 있던 분교와 화전민이 살던 고사리마을도 사라지고 없다.

능동산을 지나 주능선 위를 가는 길. 저 앞에 하얀 건물은 얼음골케이블카 상부승강장이고, 그 뒤로 천황산 정상이 살짝 보인다

해발 685m의 배내고개를 출발해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은 영남알프스의 상징인 천황산(1189m)이다. 가지산(1241m)이 가장 높기는 하나 광활한 억새고원 사자평을 품은 천황산의 카리스마와 위용이 압권이다.

경남북과 울산 3개 광역단체와 5개 시도에 걸쳐 있는 ‘영남알프스’는 7개의 1000m급 고봉이 모여 있는 산악지대로, 빼어난 봉우리와 억새고원이 유럽 알프스를 방불케 한다는 뜻으로 이런 별칭이 붙었다. ‘00알프스’는 한국알프스(함경도 관모봉 일원)‘ 충북알프스(속리산~구병산 일원), 일본알프스(일본 내륙의 3천m급 산악지대)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골산에 금강산을 빗대 ‘00금강’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재약산 동남부, 해발 750~850m 지대에 펼쳐진 사자평 억새밭. 원래는 훨씬 넓었으나 주변에 숲이 확산되면서 크게 줄었다. 왼쪽 뒤로 간월산(1069m)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42년 전, 우연히 신문에 난 사자평고원과 고사리마을 기사를 보고 처음 찾았을 때는 2박3일 여정을 잡았었다. 표충사 계곡에서 1박 후 천황산 정상에 올랐다가 재약산을 거쳐 고사리마을에서 1박하고 하산하는 계획이었다. 예상보다 진행이 빨라 고사리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오후 시간이 많이 남아 그대로 하산, 1박2일로 마무리했지만 이제 자전거로는 반나절 코스다.

사자평에서 멀기는 하나 배내고개(685m)를 기점으로 잡으면 일단 고도차에서 마음이 편하다. 바로 옆 능동산(983m)과는 300m 차이여서 주능선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평을 다녀온 후 간월재 방면으로 가기도 편하다.

임도 초입의 차단기를 지나면 바로 지그재그 급사면 업힐이 시작된다. 대신에 고도는 금방 높아져 어느새 배내골이 저 아래로 푹 잠기고 능동산 정상부의 벌목지로 접어든다. 능동산에서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안부는 해발 900m여서 금방 도착이다. 여기부터 사자평 초입에 자리한 간이매점 ‘샘물상회’(1000m)까지는 기복이 심하지 않은 능선길로 노면도 좋은 편이다.

주능선 위 해발 1010m 고지에 자리한 얼음골케이블카 상부승강장은 숲에 가려 길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꾸며진 연결로가 있어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발밑으로는 주암계곡이 아찔하게 패어 있고 배내골 저편으로는 영남알프스 동부를 갈무리하는 간월산(1069m)~신불산(1159m)~영축산(1081m) 능선이 웅장하다.

해발 1000m 옛 목장 정문 기둥은 속절 없이 녹슬어 간다. 오른쪽 기둥 뒤는 천황산, 왼쪽은 재약산. 광역 개념의 사자평 입구이기도 하다

기나긴 업힐 끝에 갑자기 넓은 억새밭이 펼쳐지고, 길 좌우에는 낡은 쇠기둥이 서 있다. 오래전에는 사자평 일원에 터잡은 대규모 목장의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기둥만이 남았다. 2007년 간월재와 사자평을 잇는 MTB대회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코스의 골인점이기도 했다. 나중에 간월재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영남알프스 전국MTB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진행이 되고 있어 반가웠다(올해는 10월 22일 개최). 긴 세월 풍상에 노출되어 녹은 슬었으나 기울지 않고 우뚝 선 철기둥이 반갑다. 여기가 정확히 해발 1000m이고 뒤로는 천황산~재약산이 무던한 높이로 성큼 다가선다.

철기둥에서 200m 가면 지난 수십 년 간 등산객의 대피소이자 쉼터가 되어온 ‘샘물상회’가 있다. 30년 전과 별 변화가 없는, 누추하고 어설픈 건물이지만 주인장이 친절하고 산중 음식이라 라면과 두부 김치 하나도 식감이 각별하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많은 것은, 얼음골케이블카로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다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높은 사설 매점 아닐까 싶다. 해발 1000m 지점에 자리한 샘물상회는 얼음골케이블카 개통으로 언제나 붐빈다. 뒤로 재약산이 삐죽하다

샘물상회부터는 길이 급변해서 거친 돌에 물골까지 패어 라이딩이 어려운 난관이 시작된다. 자신이 없으면 샘물상회까지만 보고 가거나 장시간 ‘끌바’를 각오해야 한다.

완만한 천황산 사면에는 폐건물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데 옛 목장터다. 90년대만 해도 소를 방목해 참으로 목가적이었으나 지금은 축사마저 수풀에 묻혀 알아보기 어렵다. 목장 인근에 있던 민가 한 채도 비었다. 한때 젊은 부부가 들어와 샘물상회처럼 등산객을 상대로 매점을 운영했는데 결국 떠나버린 모양이다.

목장터에서 길은 등산로로 좁아진다. 예전에 4륜구동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지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목장터에서 천황산과 재약산 사이 안부인 천황재(970m)까지는 1.2km여서 중간중간 끌바를 하더라도 갈 만하다.

천황재에서 쉬고 있던 많은 등산객들은 갑자기 나타난 자전거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04년 천황산 정상에 자전거를 메고 올랐을 때, 그 후 신불산 정상에서 영축산을 향해 다운힐을 시작할 때 등산객들 반응은 정말 대단했다.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생물상회 이후 길 상태는 크게 나빠진다. 물골이 패이거나 큰돌이 드러난 곳이 많다. 전방의 나무 뒤가 옛 목장 터다    

목장 터는 수풀과 억새로 완전히 뒤덮였다. 뒤쪽으로 재약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오목한 분지가 천황재(970m)다  

평탄한 억새밭을 이룬 천황재. 정면으로 내려가면 표충사로 이어진다

이제 이번 여정의 최고 난관인 사자평 가는 길로 접어든다. 2004년 자전거로 통과한 이후 처음이라 길 사정을 모르고 사자평 억새밭이 어떤 상태인지도 몰라 조금은 불안하다. 2004년에도 중간중간 길이 끊어지고 물골이 패여 노면은 최악이었지만 임도 정도의 노폭은 유지하고 있었고 컨트롤을 잘 하면 라이딩이 가능했다.

역시, 천황재 입구 삼거리부터 길은 거친 싱글이라 라이딩이 어려운 구간이 적지 않다. 그나마 노면 보수를 해서 개울에는 작은 목교가 놓여 있고 망가진 노면에는 목재를 박아 놓았다.

주암계곡과 사자평길이 나뉘는 주암삼거리에는 작은 쉼터를 갖춘 간이매점이 있다. 휴일에만 문을 여는 듯, 인적이 없고 수많은 리본만이 나부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면 사자평은 눈앞이다. 노면은 한층 좋아지고 완만한 내리막이며, 골짜기에는 목교를 놓아 사자평 입구까지 금방이다.

원래 사자평은 천황산과 재약산 중턱 해발 750~1000m 일원 약 100만평에 달하는 억새고원지대를 통칭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황산 일대의 목장과 억새밭이 거의 사라져 재약산 동남쪽에 남은 억새지대로 의미가 축소된 것 같다. 그마저 억새밭 풍광은 예전과는 딴 판이다. 이 높은 산상 억새밭마저 마치 도시 야산처럼 너무나 인공적으로 고이 가꿔져 있어 깜짝 놀랐다.

천황재에서 사자평 가는 길. 자동차가 다녔던 길이 20여년 만에 이렇게 변했다    

간이매점이 있는 주암삼거리. 산악회 리본이 가득 달려 있는 매점 앞으로 해서 왼쪽으로 가야 사자평 방향이다

억새밭 초입에는 표충사 명의로 오토바이와 자전거 출입금지 팻말이 붙었다. 사자평 일원은 표충사 소유여서 옛날에도 환경보호를 이유로 고사리마을을 소개(疏開)시킨 것으로 아는데, 어쨌든 땅 주인의 요청이니 자전거는 내려서 끌고 간다.

밀양시 명의의 안내문에는 ‘재약산 사자평 억새길’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억새밭 곳곳에 전망대와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솔직히 이런 인공적 가미 때문에 원래의 광활하고 자연 그대로였던 사자평 이미지는 많이 퇴색했다. 서울 도심에 있는 하늘공원 억새밭이나 다를 것이 없다. 억새밭 면적도 10만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42년 전 처음 찾았을 때, 별천지 같은 억새고원에는 소가 자유롭게 방목되고 고사리마을에는 아이들 뛰노는 소리와 밥 짓는 연기가 오르던 그런 목가풍은 찾을 길이 없다.

돌아 나오는 도중 천황재 입구에서 70대 초반의 두 라이더를 만났다. 평범한 하드테일로 여기까지 오르다니 대단한 분들이다. 부산에서 왔다는 두 분은 천황재에 자전거를 두고 재약산을 넘어 사자평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 중 한분은 천황산 정상까지 자전거로 오른 적이 있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서킷도 자전거로 다녀왔다고 했다. 안나푸르나 서킷은 최고고도가 해발 5,416m에 달하는, 자전거투어의 끝판왕 코스여서 더 감탄했다.작은 골짜기를 건너는 아치형 목교가 나오면 사자평 억새밭이 멀지 않았다

예전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사자평 억새밭은 대단하다. 다만 이 높고 깊은 산중에서 산책로와 전망대, 쉼터가 곳곳에 조성되어 너무 인공적인 것이 흠이랄까. 맞은편으로 향로산(979m)이 곧추 솟았다 

사자평에서 바라본 간월재. 고갯마루 주변으로 일부러 깎아낸 듯 억새밭이 민듯하고, 중간에 우뚝한 돌탑이 어렴풋하다

샘물상회에서 배내고개까지는 그냥 장쾌하고 신나는, 궁극의 다운힐이다. 이제는 간월재(900m)를 오를 차례다. 사자평에 비해 높이가 낮고 길도 좋은 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는데 내려올 때 크게 고생할 줄이야.

배내골을 따라 3.7km 신나게 다운힐 하면 해발 370m까지 떨어지고 왼쪽으로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방면 임도가 나온다. 예전에는 자동차로 휴양림까지 진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걸어서 진입해야 한다. 자연휴양림 시설은 파래소폭포를 중심으로 상단과 하단 지역으로 구분되며 남단 역시 폭포 하류에 자동차를 두고 걸어가야 하는, 자동차 없는 심심산골 분위기가 특징이다.

샘물상회에서 배내고개까지는 노면이 좋고 조망도 장쾌한 5.5km 다운힐이다. 오른쪽 근경은 능동산(983m), 맨 뒤는 고헌산(1034m) 

능동산을 돌아나가면 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1241m)이 웅자를 드러낸다   

배내고개 도착 전에 남쪽으로 바라본 배내골. 오른쪽 멀리 양산 토곡산(855m) 인근 배태고개까지 16km에 달하는, 깊고 긴 직선 골짜기다. 정면의 봉우리는 간월산 서릉의 973m봉 

배내고개에서 바라본 북쪽 조망. 아래는 석남사 입구 행정마을이고, 정면 왼쪽으로는 운문령(640m), 가운데는 문복산(1014m) 방면   

휴양림 진입로는 간월재로 가는 최단코스이기도 해서 등산객이 더러 있다. 길은 임도 수준으로 좁은데 보행자가 많은 이유로 차량 통행을 막은 것 같다. 최단코스라고는 해도 초반에 640m나 되는 고개를 올라야 해서 편안한 길은 아니다.

휴양림 상류 계곡 해발 740m 지점에는 기해박해(1839) 이후 천주교 교인들이 숨어 살며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한 죽림굴이 있다. 지금은 임도 바로 옆이지만 옛날에는 계곡에서 한참 올라간 산비탈이어서 외부에서는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굴 입구는 넓지 않으나 안쪽에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어 150명 정도가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굴 아래 조망바위에서 내려다보면 골짜기 끝이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으로 옛날에는 정말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교인들이 숨어살았다는 죽림굴. 해발 740m 비탈에 자리해 찾기 어렵고, 입구 안쪽에는 더 넓은 공간이 있다  

죽림굴 앞에서 내려다본 첩첩산중. 오른쪽 멀리 사자평 억새밭을 품은 재약산이 보인다

간월재 억새밭이 만발했다. 뒤는 신불산 

간월재에서도 사자평이 마주 보인다. 맨뒤에 재약산과 천황산이 나란하고 재약산 왼쪽 아래에 사자평 억새밭 일부가 보인다 

간월재에서 바라본 동쪽 울산 방면 조망. 바로 아래 등억온천단지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거 난감하게 됐는 걸….’ 간월재에 다가서며 탄식을 흘렸다. 평일 오후 늦은 시간인데 간월재는 시장통처럼 인산인해다. 알고 보니 ‘간월재 억새축제’ 기간이라 몰려든 사람들이다. 어디서 출발하든 2시간 정도를 걸어야 하는 먼 길이지만 마치 산책하듯 운동화에 가벼운 차림으로 나온 사람들도 많다. 해발 900m나 되는 간월재는 이미 동네 뒷산이 되었나 보다. 고갯마루 쉼터는 빈자리가 없고, 간월재의 상징인 돌탑은 사진 줄이 장사진이다. 문제는 하산이다. 배내고개에서 가까운 사슴농장 방면 하산로는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가득해 출퇴근 시간 골목길 같다. 간월재에서 사슴농장까지는 6.5km로 10여분이면 충분할 거리가 두 배 이상인 30분이나 걸렸다.

산을 내려섰다고는 해도 사슴농장은 해발 600m나 되고 배내고개까지는 1.5km여서 금방이다. 어느덧 태양은 천황산 능선으로 훌쩍 다가서 있고 햇살에는 기력이 없다. 돌아보는 작별인사에는 아쉬움이 어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또 다시 저 산상고원을 찾을 것을 기약한다.

다시 돌아온 배내고개 주차장. 뒤쪽으로 주암계곡이 험상궂고 그 뒤로 천황산은 고개를 숨겼다. 조만간 저 길을 다시 가리라  


tip

배내고개 정상에도 주차공간이 있으나 공간이 넓지 않아서 배내골 쪽으로 약간 내려간 공영주차장을 추천한다(무료). 코스 일원에는 샘물상회를 제외하면 식당이나 가게가 없고, 석남사 입구 덕현리나 궁근정리까지 가야 한다. 샘물상회~사자평 구간은 산악 베테랑에게만 추천하며, 안전을 위해 도보로 다녀올 것을 권장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영남알프스 사자평~간월재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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