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숨결 느껴지는 천혜의 해상요새
이순신 장군이 3년8개월 간 머물렀던 삼도수군통제영 터. 왼쪽 제승당 자리에 장군의 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이 있었다. 맞은편 정자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한산도가의 무대였던 수루(戍樓)다
한산도를 이제야 가본다. 뭍에서 가까우니 언제든 쉽게 갈 수 있겠다는 안이한 마음으로 미뤄온 것이 어언 20년이다.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연재하는 ‘메멘토벨로(전쟁을 기억하라) 시즌2 - 불멸의 전승, 이순신 23전 23승의 바다를 가다‘를 읽고 그 흔적을 찾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고, 때마침 개봉한 영화 <한산>도 마음을 흔들었다.
거제도 어구항을 출항하는 뉴을지카페리. 손님은 나 하나, 자전거 한대뿐
한산대첩의 현장은 온통 굴 양식장이다. 멀리 통영시내가 보인다
특히 궁금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어떤 점에서 한산도를 장기간의 거점으로 삼았느냐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문 기간이 3년8개월이니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7년 중 절반에 해당한다. 그만큼 전술, 전략적으로 탁월한 입지라는 뜻이다.
도시 이름으로 남은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동부해안을 전담하는 전라좌수사였으나 전세가 급박해지자 전라, 충청, 경상 3도를 아우르는 수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임명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임시 행영을 설치했던 한산도에 있었고, 현재 통영시내에 남은 통제영은 임란 후인 1603년에 옮겨온 것이다.
한산도 소고포항에 도착한 뉴을지카페리. 어구항에서는 매시 정각, 소고포항에서는 매시 30분 출항한다. 15분 소요
일단 지도만 봐도 한산도의 기막힌 전략적 입지를 알 수 있다. 임란 당시 왜군의 거점이던 부산포 사이에는 거대한 거제도가 막아주고, 부산포에서 전라도로 가려면 거제도 남북으로 돌아야 하는데 어느 해로든 감시가 쉬우니 실로 처혜의 바다 요새다. 반대로 부산포에서 여수 사이 어느 해역이든 출동이 쉽다.
그중에서도 장군의 진영(현 제승당)은 섬의 북쪽, 복잡하고 깊은 만 안에 있었다. 한산도는 이 제승당을 위해 생겨난 것만 같은 지형인데, 좌우로 뻗어 나온 반도가 내만을 옹위하고 여러 갈레로 파고들어 복잡한 해안선은 수군진영으로 최적이다.
한산도 최북단의 관암항 초입. 가파른 내리막과 고목이 반겨준다
관암항에서 통영시내는 지척처럼 잘 보인다. 왼쪽 고봉은 케이블카가 다니는 미륵산(461m)
한산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제도 어구항에서 배에 오른다. 통영이 아니라 이곳을 출발점으로 잡은 것은, 산달도~둔덕기성 일주 코스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여서 손님은 나 혼자뿐이다. 199톤급 카페리는 갓 지은 듯 모든 것이 새것이지만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아 투박하다.
한산도 소고포항까지는 직선거리 3.1km로 15분이 걸린다. 상갑판에 올라 봄기운을 담은 바닷바람을 채 만끽할 틈도 없이 소고포항이 근접해온다.
해안을 따라 먼저 북쪽 끝으로 향한다. 작은 관암항은 오가는 배도, 사람도 없이 계단참에 앉아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 노인 몇 명뿐이다. 바다 저편으로 고층빌딩이 우뚝한 통영시내가 가깝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관암항을 돌아 나와 제승당으로 향한다. 작은 만 안에서 다시 복잡한 해안선은 제승당의 은밀함을 더해준다. 도로든, 마을이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곳에 다 있다. 통영에서 바로 여객선이 오가니 관광객이 꽤 보인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한산도 하면 제승당 하나만 보아도 거진 봤다고 할 수 있다.
한산도 북쪽 작은 내만 속의 반도에 자리한 제승당 일원. 가운데 큰 건물이 제승당, 아래는 수루, 맨 안쪽은 충무사. 오른쪽 작은 만을 건너 활 표적이 보인다(현장 안내사진)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이 사용한 우물. 바닷가인데 짠맛이 없다고 한다
입구에서 제승당까지 700m는 해안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내만을 향해 작은 반도가 세 곳 돌출해 있는데 중간의 반도에 제승당이 있다. 과연, 한산도 안에서도 기막힌 입지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제일의 곡창인 호남이 왜군의 세력에 들어가면 전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1593년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본진을 한산도로 옮겨와 바닷길을 막았다. 제승당 가는 길목에 있는 우물은 장군과 군사들이 함께 사용한 것으로, 바다에 가까운데도 짠맛이 없다고 한다.
장군이 머물던 운주당(運籌堂)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칠천량해전 패전으로 불타고(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제승당(制勝堂)이 당당하다. 제승당은 1739년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세웠고, 건물에 비해 큰 현판과 휘갈겨 쓴 조경의 큰 글씨는 웅혼한 기상을 발산한다. 실내에 보관 중인 거대한 현판은 140대 통제사 김영수(金永綏, 1716~1786)의 글씨다. 과연 무인들의 기상은 다르다.
실내에는 장군의 행적을 담은 대형 그림과 화포, 명나라 신종황제가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준 8가지 물품을 그린 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승당 내부에는 화포와 장군의 행적을 그린 그림, 예전의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장군이 순국하는 모습. "지금 전투가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순간이다
제승당 바로 옆에는 바다를 향한 망대인 수루(戍樓)가 있다. 장군의 깊은 사색과 우국충정을 보여주는 ‘한산도가’의 무대다. 수루 앞에 서서 장군의 수심을 짐작해 보며 가만히 읊어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은상 번역)
이순신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이처럼 사색적이고 문학적인 품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루 앞의 고목은 근심어린 장군의 모습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가'를 읊은 수루. 기둥의 주련에는 한산도가가 씌어 있고 현판 아래로 한산대첩기념비가 보인다. 고목은 장군을 지켜보았을까
가장 안쪽에는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인자하면서도 비장미가 감도는 영정은 1978년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으로 표준영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 모두 장군의 영정 앞에 묵념을 올린다.
제승당 뒤편의 한산정은 활터다. 과녁은 좁은 만을 건너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데 거리는 국궁표준인 145m이다. 바다를 건너는 과녁은 서귀포 백록정과 이곳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장군은 활쏘기를 매우 강조했고,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벌여 떡과 막걸리를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왜군은 칼을 이용한 근접전에 강했다면 우리는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활을 선호했다. 왜 수군의 전술은 배를 갖다 붙여 군사가 넘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으나 조선 수군은 화포와 활로 원거리에서 승부를 냈고, 근접 돌격을 위해 개발된 거북선에 지붕을 덮은 것도 왜군의 월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온후함과 비장함이 함께 느껴지는 장군의 영정. 1978년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렸다
활터인 한산정. 바다를 넘어 145m 떨어진 과녁이 보인다. 장군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활쏘기 내기를 하며 떡과 막걸리를 먹었다
제승당을 돌아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남향하다고 고개를 넘어 두억리 협곡으로 내려간다. 산줄기를 따라 끝까지 가면 문어포항이 나오고 그 뒷산에 한산대첩기념비가 있다. 한산대첩이 벌어진 해역을 내려다보는 기념비는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에 좌대는 거북선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웠으니 그의 유작이자 유훈이 되었다.
문어포항에서 기념비까지 250m 정도는 울창한 동백 숲터널이다. 바닷가 언덕에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포구는 예쁘고 정겹다.
완만한 구릉지를 끼고 있어 환하고 예쁜 문어포항. 멀리 통영시내가 보인다
문어포항에서 한산대첩 기념비 가는 길목의 동백숲 길
높이 20m의 거대한 한산대첩 기념비.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고, 전면의 글씨도 박 대통령이 썼다
추봉도로 가는 한산도 남해안 길. 빨간 추봉교가 보인다
추봉도 봉암해변. 몽돌로 이뤄진 해수욕장이다
추봉도 산기슭에서 남면하고 있는 한산사. 바다 전체가 절마당이다
두억리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한산도 서해안으로, 다른 섬들이 멀찍이 떨어져 대양의 면모가 느껴진다. 바다와 지척으로 붙어가는 해안도로는 텅 비었고 얕은 파도만이 철썩일 뿐이다. 용초도를 마주보며 남해안을 돌아나가면 한산도와 하나의 섬이 된 추봉도와 빨간 추봉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는 추봉도까지 일주하고 싶었지만 배 시간에 여유가 없어 이름과 입지가 매혹적인 한산사(閑山寺)만 보고 가기로 한다. 추봉도 산자락 해발 65m쯤에서 남면하고 있는 한산사는 앞바다 전체를 절마당으로 삼는다. 예상과 달리 고졸하거나 정갈한 맛은 없고 생활 집기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어 민가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노승은 먼데서 온 객이 반가운지 살갑게 맞아주고 차까지 권한다. 소고포까지 아직 7km가 남았고 막배 시간이 촉박하니 더 머물 수가 없다.
만남은 시공 속에 흩어지고 자전거는 노승의 시야 속에서 멀어져 갈 뿐.
tip
한산도 내에서는 면사무소가 있는 진두항에 하나로마트와 식당, 펜션이 있다. 소고포항에도 작은 식당과 매점이 있다.
어구항에서는 07:10~18:00(동절기는 17:00) 1시간 간격으로 배가 운행하고, 한산도 소고포항에서는 들어온 배가 매시 30분 출항한다. 15분 소요. 대인 3500원 자전거 2000원. 문의 055-645-3329 유성해운
통영 한산도 일주 43km
이순신 숨결 느껴지는 천혜의 해상요새
이순신 장군이 3년8개월 간 머물렀던 삼도수군통제영 터. 왼쪽 제승당 자리에 장군의 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이 있었다. 맞은편 정자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한산도가의 무대였던 수루(戍樓)다
한산도를 이제야 가본다. 뭍에서 가까우니 언제든 쉽게 갈 수 있겠다는 안이한 마음으로 미뤄온 것이 어언 20년이다. 이홍희 전 해병대사령관이 연재하는 ‘메멘토벨로(전쟁을 기억하라) 시즌2 - 불멸의 전승, 이순신 23전 23승의 바다를 가다‘를 읽고 그 흔적을 찾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했고, 때마침 개봉한 영화 <한산>도 마음을 흔들었다.
거제도 어구항을 출항하는 뉴을지카페리. 손님은 나 하나, 자전거 한대뿐
한산대첩의 현장은 온통 굴 양식장이다. 멀리 통영시내가 보인다
특히 궁금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어떤 점에서 한산도를 장기간의 거점으로 삼았느냐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문 기간이 3년8개월이니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7년 중 절반에 해당한다. 그만큼 전술, 전략적으로 탁월한 입지라는 뜻이다.
도시 이름으로 남은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생겨났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동부해안을 전담하는 전라좌수사였으나 전세가 급박해지자 전라, 충청, 경상 3도를 아우르는 수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임명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임시 행영을 설치했던 한산도에 있었고, 현재 통영시내에 남은 통제영은 임란 후인 1603년에 옮겨온 것이다.
한산도 소고포항에 도착한 뉴을지카페리. 어구항에서는 매시 정각, 소고포항에서는 매시 30분 출항한다. 15분 소요
일단 지도만 봐도 한산도의 기막힌 전략적 입지를 알 수 있다. 임란 당시 왜군의 거점이던 부산포 사이에는 거대한 거제도가 막아주고, 부산포에서 전라도로 가려면 거제도 남북으로 돌아야 하는데 어느 해로든 감시가 쉬우니 실로 처혜의 바다 요새다. 반대로 부산포에서 여수 사이 어느 해역이든 출동이 쉽다.
그중에서도 장군의 진영(현 제승당)은 섬의 북쪽, 복잡하고 깊은 만 안에 있었다. 한산도는 이 제승당을 위해 생겨난 것만 같은 지형인데, 좌우로 뻗어 나온 반도가 내만을 옹위하고 여러 갈레로 파고들어 복잡한 해안선은 수군진영으로 최적이다.
한산도 최북단의 관암항 초입. 가파른 내리막과 고목이 반겨준다
관암항에서 통영시내는 지척처럼 잘 보인다. 왼쪽 고봉은 케이블카가 다니는 미륵산(461m)
한산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제도 어구항에서 배에 오른다. 통영이 아니라 이곳을 출발점으로 잡은 것은, 산달도~둔덕기성 일주 코스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여서 손님은 나 혼자뿐이다. 199톤급 카페리는 갓 지은 듯 모든 것이 새것이지만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아 투박하다.
한산도 소고포항까지는 직선거리 3.1km로 15분이 걸린다. 상갑판에 올라 봄기운을 담은 바닷바람을 채 만끽할 틈도 없이 소고포항이 근접해온다.
해안을 따라 먼저 북쪽 끝으로 향한다. 작은 관암항은 오가는 배도, 사람도 없이 계단참에 앉아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 노인 몇 명뿐이다. 바다 저편으로 고층빌딩이 우뚝한 통영시내가 가깝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관암항을 돌아 나와 제승당으로 향한다. 작은 만 안에서 다시 복잡한 해안선은 제승당의 은밀함을 더해준다. 도로든, 마을이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곳에 다 있다. 통영에서 바로 여객선이 오가니 관광객이 꽤 보인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한산도 하면 제승당 하나만 보아도 거진 봤다고 할 수 있다.
한산도 북쪽 작은 내만 속의 반도에 자리한 제승당 일원. 가운데 큰 건물이 제승당, 아래는 수루, 맨 안쪽은 충무사. 오른쪽 작은 만을 건너 활 표적이 보인다(현장 안내사진)
이순신 장군과 군사들이 사용한 우물. 바닷가인데 짠맛이 없다고 한다
입구에서 제승당까지 700m는 해안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내만을 향해 작은 반도가 세 곳 돌출해 있는데 중간의 반도에 제승당이 있다. 과연, 한산도 안에서도 기막힌 입지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제일의 곡창인 호남이 왜군의 세력에 들어가면 전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1593년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본진을 한산도로 옮겨와 바닷길을 막았다. 제승당 가는 길목에 있는 우물은 장군과 군사들이 함께 사용한 것으로, 바다에 가까운데도 짠맛이 없다고 한다.
장군이 머물던 운주당(運籌堂)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칠천량해전 패전으로 불타고(당시 이순신 장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제승당(制勝堂)이 당당하다. 제승당은 1739년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세웠고, 건물에 비해 큰 현판과 휘갈겨 쓴 조경의 큰 글씨는 웅혼한 기상을 발산한다. 실내에 보관 중인 거대한 현판은 140대 통제사 김영수(金永綏, 1716~1786)의 글씨다. 과연 무인들의 기상은 다르다.
실내에는 장군의 행적을 담은 대형 그림과 화포, 명나라 신종황제가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준 8가지 물품을 그린 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승당 내부에는 화포와 장군의 행적을 그린 그림, 예전의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장군이 순국하는 모습. "지금 전투가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순간이다
제승당 바로 옆에는 바다를 향한 망대인 수루(戍樓)가 있다. 장군의 깊은 사색과 우국충정을 보여주는 ‘한산도가’의 무대다. 수루 앞에 서서 장군의 수심을 짐작해 보며 가만히 읊어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은상 번역)
이순신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이처럼 사색적이고 문학적인 품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루 앞의 고목은 근심어린 장군의 모습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가'를 읊은 수루. 기둥의 주련에는 한산도가가 씌어 있고 현판 아래로 한산대첩기념비가 보인다. 고목은 장군을 지켜보았을까
가장 안쪽에는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인자하면서도 비장미가 감도는 영정은 1978년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으로 표준영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 모두 장군의 영정 앞에 묵념을 올린다.
제승당 뒤편의 한산정은 활터다. 과녁은 좁은 만을 건너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데 거리는 국궁표준인 145m이다. 바다를 건너는 과녁은 서귀포 백록정과 이곳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장군은 활쏘기를 매우 강조했고,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벌여 떡과 막걸리를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왜군은 칼을 이용한 근접전에 강했다면 우리는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활을 선호했다. 왜 수군의 전술은 배를 갖다 붙여 군사가 넘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으나 조선 수군은 화포와 활로 원거리에서 승부를 냈고, 근접 돌격을 위해 개발된 거북선에 지붕을 덮은 것도 왜군의 월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
온후함과 비장함이 함께 느껴지는 장군의 영정. 1978년 사적을 정비할 때 정형모 화백이 그렸다
활터인 한산정. 바다를 넘어 145m 떨어진 과녁이 보인다. 장군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활쏘기 내기를 하며 떡과 막걸리를 먹었다
제승당을 돌아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남향하다고 고개를 넘어 두억리 협곡으로 내려간다. 산줄기를 따라 끝까지 가면 문어포항이 나오고 그 뒷산에 한산대첩기념비가 있다. 한산대첩이 벌어진 해역을 내려다보는 기념비는 높이가 2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에 좌대는 거북선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웠으니 그의 유작이자 유훈이 되었다.
문어포항에서 기념비까지 250m 정도는 울창한 동백 숲터널이다. 바닷가 언덕에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포구는 예쁘고 정겹다.
완만한 구릉지를 끼고 있어 환하고 예쁜 문어포항. 멀리 통영시내가 보인다
문어포항에서 한산대첩 기념비 가는 길목의 동백숲 길
높이 20m의 거대한 한산대첩 기념비.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고, 전면의 글씨도 박 대통령이 썼다
추봉도로 가는 한산도 남해안 길. 빨간 추봉교가 보인다
추봉도 봉암해변. 몽돌로 이뤄진 해수욕장이다
추봉도 산기슭에서 남면하고 있는 한산사. 바다 전체가 절마당이다
두억리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한산도 서해안으로, 다른 섬들이 멀찍이 떨어져 대양의 면모가 느껴진다. 바다와 지척으로 붙어가는 해안도로는 텅 비었고 얕은 파도만이 철썩일 뿐이다. 용초도를 마주보며 남해안을 돌아나가면 한산도와 하나의 섬이 된 추봉도와 빨간 추봉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는 추봉도까지 일주하고 싶었지만 배 시간에 여유가 없어 이름과 입지가 매혹적인 한산사(閑山寺)만 보고 가기로 한다. 추봉도 산자락 해발 65m쯤에서 남면하고 있는 한산사는 앞바다 전체를 절마당으로 삼는다. 예상과 달리 고졸하거나 정갈한 맛은 없고 생활 집기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어 민가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노승은 먼데서 온 객이 반가운지 살갑게 맞아주고 차까지 권한다. 소고포까지 아직 7km가 남았고 막배 시간이 촉박하니 더 머물 수가 없다.
만남은 시공 속에 흩어지고 자전거는 노승의 시야 속에서 멀어져 갈 뿐.
tip
한산도 내에서는 면사무소가 있는 진두항에 하나로마트와 식당, 펜션이 있다. 소고포항에도 작은 식당과 매점이 있다.
어구항에서는 07:10~18:00(동절기는 17:00) 1시간 간격으로 배가 운행하고, 한산도 소고포항에서는 들어온 배가 매시 30분 출항한다. 15분 소요. 대인 3500원 자전거 2000원. 문의 055-645-3329 유성해운
통영 한산도 일주 43km